예술이란 범주 안에서 자장면과 단무지, 라면과 김치와 같이,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찰떡궁합 콤비가 있다면 역시 영화와 음악이다.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를 책임지는 음악들. 그 중에서도, 영화의 알맞은 위치에 적절하게, 혹은 절묘하게 삽입되어 천 번의 대사보다 깊은 인상을 준 '영화로 기억되는 노래들'을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 두 편으로 나누어 소개해본다.

 

(영화를 목적으로 창작된 노래가 아닌, 기존에 있던 곡들을 사용한 경우를 기준으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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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속 > / 사라 본(Sarah Vaughan) - A lover's concerto

 

많은 라디오 피디들은 영화 < 접속 >이 라디오 프로듀서를 잘못 묘사한 대표적인 영화라고 얘기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흐른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에 대해서만큼은 완벽한 선곡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감독 장윤현은 1990년대 후반, PC 통신을 통한 신세대의 새로운 사랑 방식을 차분한 대사와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냈다. 푸른 모니터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하던 두 주인공이 엇갈린 기회를 극복하고 마침내 대면할 때 흐르던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는 두 주인공이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찾은 환희와 기쁨을 증폭한다.

 

이 비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비는 부드럽게 들판으로 떨어지네
새들은 저 높이 나무위에 있고 꽃들은 그들의 음색으로 세레나데를 들려주네
저 언덕을 봐
무지개의 밝은 색깔들, 하늘의 마법은 오늘 우리를 사랑에 빠뜨렸어

 

「A lover's concerto」의 가사는 영화 < 접속 >을 함축한다. 이 완벽한 매치를 찾아낸 조영옥의 음악 선곡이 빛을 발한 이 작품은 국내 영화 사운드트랙의 모범이 되었고, 이젠 볼 수 없는 피카다리 극장과 그 앞에 있던 배우들의 핸드프린트는 지난 추억에 대한 현재의 보너스다.

(소승근)

 


< 쉬리 > / 캐롤 키드(Carol Kidd) - When I dream

 

예민한 선곡감각을 가진 라디오 프로듀서 중에는 1979년 당시 컨트리 음악 슈퍼우먼 크리스탈 게일이 발표한 이 곡의 잠재력에 주목했지만 애청 레퍼토리로 승격되진 못했다. 하지만 한참 나중 45년생의 나이든 스코틀랜드 재즈가수 캐럴 키드가 불렀을 때는 그 의미와 대중적 파괴력이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모든 게 1999년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로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타이타닉>을 넘는 흥행 대성공을 창출한 <쉬리> 덕이었다. 지금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의 감동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이 원 펀치로 캐럴 키드는 내한무대를 갖을 만큼 인지도의 폭발적 상승을 수확했다.

 

2년 전 <접속>과 이 영화 이후 영화종사자들은 사운드트랙의 힘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음악 쪽은 홍보의 새 플랫폼으로 우뚝 선 영화를 부지런히 찾아야 했다.

(임진모)

 


< 공동경비구역 JSA > / 김광석 - 이등병의 편지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
< 공동경비구역 JSA > 속 오경필 중사(송강호)는 이렇게 읊조린다. 바로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서. 글을 적는 시점으로부터 며칠 전에 방송된 한 다큐멘터리에서 밝혀졌듯 맨 처음 윤도현을 거쳐 전인권에게 그 마이크가 돌아갔건만, 저 장면 하나로 인해 '이 노래는 김광석의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 단순한 청춘찬가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헤어짐에 대한 의미를 곱씹게 만든 것, 바로 남북 병사들의 이별을 앞두고 흘러나온 이 노래였다.

 

세상을 뜬지도 어느덧 17년이 지났건만 '김광석 열풍'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더 거세지는 느낌이다. 그가 부른 많은 노래들은 어느덧 삶의 나침반으로 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여러 뮤지컬에 삽입되어 갖가지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BGM으로서의 역할 또한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 중 「이등병의 편지」는 '군대'라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을 법한 매개체로 하여금 김광석이란 순수한 음악적 자아가 가장 보편적인 정서로 환원되어 압축된 곡이다. 그리고 < 공동경비구역 JSA >는 이 노래가 가진 공감대의 해방을 도왔다. 서로간의 공생에 의한 재발굴, 앞으로도 이만한 영화와 음악의 파트너십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까.

(황선업)

 


< 친구 > /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 - Bad case of loving you

 

1980년대 디스코텍에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야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이 곡을 연상하겠지만, 이후 세대의 절대다수는 영화 < 친구 >의 '달리는' 장면을 통해 「Bad case of loving you」를 기억한다.

 

사실 명장면이랄 것도 없었다. 배우들은 달렸고, 다만 음악이 삽입되었을 뿐이니까. 가사가 영화 줄거리와 맞지도 않았지만, 질주의 모습과 곡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울렸다는 점이 이 신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만들었다. 음악이 가지는 분위기의 승리였다.

(여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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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키키 브라더스 > / 오지혜 - 사랑밖에 난 몰라(원곡 심수봉)

 

고단한 세션맨들의 삶을 다룬 영화 < 와이키키 브라더스 >는 성우(이얼), 정석(박원상), 인희(오지혜)가 밤무대에서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며 끝이 난다. 영화의 가장 큰 의미는 성우의 과거와 현재가 비교되는 과정에 있다. 열정과 꿈을 가지고 음악을 해오던 성우에게 현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신념 자체를 굴레로 만든다. 그렇게 성우는 과거의 추억을 잊어야 하고 사람을 잃어야 하는 쓸쓸한 단상으로 남는다.

 

성우가 한 때 연정을 품던 인희는 현재의 성우에게 활기를 부여해주는 인물이다. 결국 성우는 인희와 같이 밴드를 이루어 또 다시 음악의 업으로 뛰어든다. 오지혜가 부르는 「사랑밖에 난 몰라」는 그 자체로도 애처로워 등장인물들의 그림자를 한껏 부각하는 동시에 다시 재기하는 성우에게 한 줄기 희망을 불어 넣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성우가 계속 음악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기선)

 


< 오아시스 > / 문소리 - 내가 만일(원곡 안치환)

 

뺑소니로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온 종두(설경구)와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문소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 오아시스 >는 한 마디로 마이너들의 사랑이다. 사회는 이들을 걱정 어리고 한심한 시선으로 볼 뿐만 아니라 이 둘 사이의 진솔한 감정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편견의 반작용이기라도 한 듯 공주는 극중에서 종종 정상인이 된 자신을 상상하고는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장난도 치고 화도 내는 사소한 행동들이 하고픈 공주의 안타까운 바람이 투영된 장면이다. 공주는 뇌성마비에 걸려서 노래방에서 종두가 건네주는 마이크에도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공주는 막차가 끊겨 아무도 없는 역에서 정상인이 되어 종두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 속에서 불러주는 노래가 바로 「내가 만일」이다. 내가 만일이라는 주제 아래에 불러지는 가사들은 종두와 공주가 세상의 시선에 대응하는 작은 바람들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먹먹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이기선)

 


< 광복절 특사 > / 송윤아 - 분홍립스틱 (원곡 강애리자)

 

극중에서 강애리자의 곡 「분홍립스틱」은 꽤나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한경순(송윤아)에게 있어 「분홍립스틱」은 그야말로 '내 인생의 노래'다. 노래방에서 곡을 부르던 도중 사기꾼 유재필(설경구)에게 청혼을 받기도 하고 짭새(유해진)가 삘 가득한 보컬로 곡을 부르는 모습에 반해 결혼을 약속하기도 하며 영화 말미의 야유회 자리에서 최무석(차승원)이 어수룩하게 이 노래를 선곡하자 금세 새로운 사랑에 빠져버린다. 재필이 무석의 탈옥에 동참해 우여곡절을 겪은 연유도 애인 경순의 변심에 있었다.

 

쌈마이(?) 느낌 가득한 노래방 반주에 어설프지만 발랄하게 부르는 송윤아 판 「분홍립스틱」은 곡이 사용된 장면들 중 단연 백미. 활기 가득한 그 모습에 우리나라 남자들, 많이 반했다.

(이수호)

 

 

< 클래식 > / 자전거 탄 풍경 - 너에게 난 나에게 넌

 

< 클래식 >에 삽입되어 단번에 사랑노래의 '클래식'이 되었고, 덤으로 당시 신인이던 포크그룹 자전거 탄 풍경에게 단번에 유명세를 안겨주었다. 초록 덩굴 가득한 연세대학교 교정을 뒤덮는 빗줄기를 시원스레 뛰어가는 조인성과 손예진, 그 풋풋한 사랑스러움에 딱 들어맞는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푸른 날의 햇살, 영원토록 빛나는 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로 담겨있는 삽입곡.

(이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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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의 추억 > 유재하 - 우울한 편지

 

영화의 소재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어난 총 10건의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이다. 무거운 주제의 미스터리 극으로 흐를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적절하게 접목된 코믹요소는 살인 사건이라는 스토리의 심각성을 여과시키며 다수 관객이 느낄 거부감을 걸러냈다. 송강호(박두만), 김상경(서태윤)이라는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는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두 형사의 대립과 갈등은 범인이라 지목되었던 박해일(박현규)을 검거하는데 발목을 잡는데서 영화의 재미가 더해진다.

 

살인을 암시하는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는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누군가는 죽는다. 생각만 해도 소름 돋지 않는가?

(신현태)

 


< 주홍글씨 > / 이은주 - Only when I sleep (원곡 The Corrs)

 

벌써 10년이다. 앞날이 창창하던 여배우는 충격과 안타까움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이제는 유작이 되어버린 영화 < 주홍글씨 > 보다 그의 노래가 선명하게 들린다. 영화의 내용이나 캐릭터 '가희'와는 별개로 이은주의 마지막 '숨'을 담아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몰라도,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Up to the sky where angels fly I'll never die(천사들이 날아다니는 하늘 위에서, 나는 결코 죽지 않으리)"

(김반야)

 


< 어린 신부 > / 문근영 - 난 아직 사랑을 몰라 (원곡 이지연)

 

문근영을 '국민 여동생'으로 등극시켰을 뿐 아니라, 그 수식어를 만든 장면이다. 교복위에 군복을 걸치고, 열심히 율동까지 넣어가며 생목으로 부른다. 노래 가사도 줄거리와 캐릭터에 잘 붙어 웃음 짓게 만든다. 참 어리고 사랑스러웠다. 귀엽기만 하던 그 문근영이 내년에 서른이란다.

(전민석)

 


< 홀리데이 > / 비지스(Bee Gees) - Holiday

 

"유전무죄! 무전유죄!" 영화 < 홀리데이 >의 클라이막스에서 차분하게 멜로디를 내뱉는 깁 형제의 보컬이 등장한다. 1988년 10월에 벌어진 지강헌 탈주사건의 마지막 장인 인질농성 현장에서 해당 노래가 울려퍼지던 모습을 반영한 연출이다. 유리창을 깨가며 울분을 토해내는 이성재의 열연, 피사체의 심리상태를 담아낸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과 잔잔한 「Holiday」의 사운드가 이루는 대조가 작품의 한 순간에 비장미를 선사한다. 이 장면으로 인해 비지스의 「Holiday」는 국내 대중에게 1999년의 영화 < 인정사정 볼것없다 >와 더불어 필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팝송으로 자리하게 됐다.

 

(이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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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열한 거리 > / 조인성 - 땡벌 (원곡 강진)

 

< 비열한 거리 >와 「땡벌」은 알면서도 '비열한 거리'에 「땡벌」이 나오는지 혹은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지 기억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영화에서 「땡벌」은 총 세 번 나온다. 차에서 한번, 산에서 한번, 룸에서 한번. 부르는 노래와 사람은 같지만 제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중 노래와 잘 어우러졌던 장면이 병두(조인성)가 수금한 돈을 가지고 차에서 따라 부르는 장면이다. 영화 초반부터 촉촉한 눈으로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부른다. 살짝 찡그린 인상의 호소력 속에 애환과 코믹이 공존한다. 트로트의 매력을 한껏 살린 노래 그 자체만의 매력 뿐 아니라 영화의 내용과 함께 와 닿는다. 후에 전개되는 주인공의 고달픈 인생을 닮은 가사, 영화 속 투박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같은 멜로디, 흠이 없는 선곡이다. 때문에 똑같이 세 번 나온 「그대 내맘에 들어오면은」보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전민석)

 


< 라디오 스타 > / 조용필 -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나 조용필 만들어 준다면서!” 집 나간 아빠를 찾는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오라며 울먹이는 그에게서 더 이상 스타로서의 허세와 자존심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이 곡을 발화점으로,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정서가 화면 가득 펼쳐진다. 진짜 스타 조용필의 음성으로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라는 가사가 흘러나올 때, 긴 세월을 함께한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마음은 같은 색깔로 빛난다.

(홍은솔)

 


< 밀양 > / 김추자 - 거짓말이야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소절의 노래가 더 강렬하다. 영화 < 밀양 >에서 주인공 역의 전도연이 교회의 야외집회에 훼방을 놓는 장면 역시 그렇다. 아들을 잃고, 신에게조차 큰 상처를 입은 신애는 목사가 설교를 하는 중에 방송 스피커로 노래 한 곡을 크게 틀어놓는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이내 아수라장이 된 기도회를 등 뒤로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오는 신애는 어떤 말도 표정도 없지만, 노래는 생의 부조리 앞에 선 그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대신 폭발시켜 주었다. 다 거짓말이라는 거듭된 외침은 세상의 위선, 허울만 좋은 말들, 그 무용성과 무의미를 향한 일침이자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처절한 저항과 같았다.

 

1971년 신중현이 쓰고 김추자가 부른 「거짓말이야」는 오랜 시간 대중에게 신애의 항변과 같은 음악이 되어 주었다. 쓰라린 삶에 대한 부정과 불신의 에너지가 필요할 때 사람들은 '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을 이어 부르며 제 사연을 삼켰다. 영화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 노래는 언제나 말보다 절묘했다.

(윤은지)


< 국가대표 > / 러브홀릭스 - Butterfly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이 겪은 실화를 모티브로 800만 관객을 웃고 울린 영화 < 국가대표 >의 또 다른 흥행 공신은 영화에 사용된 러브홀릭스의 「Butterfly」다. 열악한 여건에서 올림픽에 나가기까지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스키점프의 짜릿한 비행에 < 미녀는 괴로워 >의 음악 감독 이재학이 제작한 「Butterfly」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감동을 배가시켰다. 드라마틱한 진행과 선율, 희망찬 가사로 사랑받은 노래는 이후 스포츠 대표 팀의 감격스런 순간 등에 빠지지 않는 배경 음악으로 지금까지 애용되고 있다.

(정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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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내의 모든 것 > / 류승룡 - 매일 그대와 (원곡 들국화)

 

< 내 아내의 모든 것 >은 권태기를 겪는 남편(이선균)이 신물난 아내(임수정)를 전설의 카사노바 (류승룡)에게 유혹해달라고 하면서 벌어지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의뢰가 아닌 진짜 임수정을 사랑하게 된 류승룡은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로 대신한다.

 

음악의 힘은 여기에 있다. 열마디의 말, 구구절절한 글로도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떨리는 목소리와 선율로 그대로 전달된다. '매일 그대와 함께 하고 싶다'는 노랫말은 '매일 그대와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을 더욱 안타깝고 간절하게 만든다. 달콤한 원곡을 캐릭터와 상황만으로 역전시켜 버린 건 영화의 파워겠지.

(김반야)

 


< 건축학개론 > / 전람회 - 기억의 습작

 

음악은 쉬이 사랑의 매개가 된다. 극중 서연(수지)이 승민(이제훈)에게 건네준 이어폰에서 “이젠...”이 흘러나오는 순간, 두 마음에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자국이 생겨버렸다. 시간이 지나 결국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오게 되었을 때, 먼지 쌓인 시디플레이어는 먼지 쌓인 나날들로 다가온다. 기억의 시작이었던 그 노래가 끝내 기억으로부터의 출구가 된 엔딩이 참 아프다.

(홍은솔)

 

 

< 범죄와의 전쟁 > / 함중아와 양키스 - 풍문으로 들었소

 

느와르 물임에도 '살아있네'라는 유행어가 알려주듯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 선포시기까지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부산의 한 조직 폭력배 사회를 통해 상징적으로 풀어낸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최민식, 하정우 등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패한 공무원인 최익현(최민식)이 조직폭력배의 리더 최형배(하정우)의 대부님으로서 행차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 지점이다. 평범한 세관 공무원에서 조직의 큰 손으로 변모한 최민식의 걸음과 함께, 70년대를 풍미했던 형제그룹 함중아와 양키스의 노래가 절묘하게 울려 퍼진다. 부정할 수 없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지도 모르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나쁜 놈들 전성시대'였다.

(김도헌)


< 수상한 그녀 > / 심은경 - 하얀 나비 (원곡 김정호)

'하루아침에 노인에서 20대 청춘으로 변한 할머니'라는 소재로 전국 7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 수상한 그녀 >에는 채은옥의 「빗물」, 세샘 트리오의 「나성에 가면」 등 새로 편곡된 추억의 가요가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어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 중 20대로 변한 할머니 오말순이 남편의 파독과 뒤이은 사망, 그로 인해 그와 어린 아들에게 닥쳤던 기구한 젊은 시절을 반추하며 부르는 김정호의 「하얀 나비」는 극 중 인물들은 물론 극장 안 관객들의 눈물을 훔쳤다. 원곡의 진한 감성을 유지하면서 세련을 보탠 편곡과 그에 어울리는 심은경의 담백한 가창이 명곡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정민재)

2015/10 IZM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YES24] 영화로 기억되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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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김건모 13집 - 自敍傳 (자서전) & Best [일반반]

김건모 노래
KT뮤직 | 201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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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나타난 김건모..데뷰곡이 이승철이 불렀던 노래 아니던가요? 젊은 시절을 같이 한 동시대의 가수로써 그의 보이스는 참 독특하다.

조용필과 같은 성실함으로 비춰지지 않지만, 노래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가수라고 생각된다. 가수는 일단 노래를 잘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고, 작곡을 하면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작곡의 더 상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수는 자신의 소리를 갖고 있다면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시 들어도 좋은 Your are my lady..그외에도 좋은 노래들이 많이 들었네요. 


13집을 듣다보면 최고라 할만 하다. 최근의 가수들을 보면 훈련과 트레이닝을 한다. 그런데 방법적으로 비슷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소리가 그놈이 그놈이다. 다 똑같은 걸 해서야 태어날때 물려받은 것이 있는 천재를 이길방법이 있을까? 마치 공장에서 나오는 공산품과 같은 생각이 들때가 많다. 가수는 그저 작곡가가 만들것을 표현하는 기계나 수단이 아닌데 말이다. 


다양한 듯 획일적인 요즘의 가요를 듣다보면 언더그라운드 음악, 페스티벌과 같은 장르가 왜 또 인기가 있는지 납득이 간다. 요즘 노래가 아쉬운건 노래를 못하거나, 음악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르가 아니라 그 가수하면 "아!"하는 뭔가가 없는 가수가 많다는 생각이다.. 그냥 남자들이 본성처럼 말하는 "이쁘냐?"는 일부 아닌가? 


귀전에 흐르는 빨간 우산은 참 흥겹네요. 요즘은 복면가왕, 불후의 명곡, 나가수등 서서히 다시 감성을 울리는 멜로디의 시대가 오는게 아닌가 한다. 혼돈의 시대는 새로의 시대의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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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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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한데 애써 경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것을 ‘허위적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대중가요를 종종 듣곤 했는데 그런 제 모습을 보고 후배가 한마디 툭 던지더군요. “이제 음악적 노선을 바꾸는 겁니까?” 물론 장난삼아 던진 말이겠지요. 한데 그 농담 속에도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 이를테면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에 놓인 견고한 장벽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클래식만을 ‘들을 만한 음악’으로 여기는 순혈주의자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 가깝지 않을까요?

 

정작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개성과 깊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르 불문하고 그 두 가지를 품고 있는 음악은 훌륭합니다. 저는 최근에 싱어 송라이터 한대수의 옛날 노래를 몇 번인가 들었습니다. 18세의 천재가 뉴욕 롱아일랜드의 다락방에서 작곡했던 ‘바람과 나’를 혼자 흥얼거렸습니다. 신중현이 작곡한 ‘나뭇잎 떨어져서’라는 노래도 따라 불러봤습니다. 참 좋은 노래들입니다. 내친 김에 그리스 태생의 팝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회상의 감정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즘 젊은 세대들이 보기엔 ‘완전 아저씨 취향’이겠지요. 그래도 저 같은 50대들에게는 한 시절을 동행했던, 지금 들어도 여전히 좋은 노래들입니다. 이런 노래들을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과 신경이 서서히 이완되고 마음도 착해집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더 어린 시절의 노래 한 곡을 떠올려볼까요? 혹시 이런 노래가 기억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불렀던 동요 가운데 ‘아 유 슬리핑, 아 유 슬리핑, 브라더 존~’ 하면서 시작하는 노래가 있지요. 영어로 써보자면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이 되겠지요. 아마 기억나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여러 명이 함께 부르던 돌림노래 형식의 동요인데, 주로 영어 가사로 많이 불렀습니다. 뒷부분 가사는 이렇습니다. ‘Morning bells are ringing, Morning bells are ringing, Ding-dang-dong, Ding-dang-dong.’ 구글에서 검색하면 귀여운 애니메이션과 함께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잠꾸러기 동생’을 깨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군요. 제목은 ‘Brother John’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불렸습니다. 아마 18세기 초반 무렵이었을 겁니다. 원래의 제목은 ‘플레르 자크’(Freere Jacque)였습니다. 이어서 오스트리아에서도 유행했지요. 제목이 ‘Bruder Martin’으로 바뀝니다. 또 이것이 영어권으로 건너가면서 ‘Brother John’으로 다시 한번 바뀝니다. 한데 이 제목은 ‘동생 마르틴’이나 ‘동생 요한’이 아니라, ‘마르틴 수사’ 혹은 ‘요한 수사’로 번역되는 게 맞습니다. 수사란 가톨릭의 수도자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말하자면 애초에는 게으른 수사들을 빈정대며 부르는 노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남동생’으로 해석해 불러도 별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꾸러기 동생을 깨우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외려 더 친근합니다.

 

근대의 음악가들 중에서 음악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로 구스타프 말러(1860~1911)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마지막에 자리하는 이 음악가는 자신의 몸속에 저장된 많은 음악을 교향곡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다시 말해 음악가로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경계의 벽’에 갇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군대의 행진음악, 아버지가 운영하던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 가락, 농부들의 소박한 춤곡, 거리를 떠도는 장돌뱅이들의 음악을 과감하게 자신의 교향곡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졸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말러를 일컬어 ‘혼종의 음악가’ ‘융합의 음악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말러 이전에도 기존의 어떤 선율을 차용하는 작곡가들은 종종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그랬습니다. 낭만시대의 작곡가들에게서도 이런 식의 차용 기법은 종종 발견됩니다. 하지만 말러처럼 세속적 선율을 교향곡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인 작곡가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감수성이 활짝 열린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음악들, 그래서 자신의 몸속에 저장돼 있던 그 익숙한 선율들을 ‘교향악적 재료’로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혼종성, 혹은 성속(聖俗의 구분 없음이야말로 그의 음악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말러는 흔히 낭만주의 교향곡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작곡가로 기억되지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경계를 허물면서 모더니즘의 전망을 보여준 음악가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돼야 할 겁니다. 베토벤이 고전과 낭만을 동시에 품었던 것처럼, 말러의 음악도 낭만과 현대를 함께 끌어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종합되지 못한 채 때때로 분열의 양상으로, 다시 말해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말러가 혹평 받았던 이유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고상함과 퇴폐, 서정과 광기, 공포와 안식, 세속적 갈등과 영원함에 대한 갈망 같은 것들로 뒤범벅된 그의 음악에 많은 이들이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51세에 세상을 떠난 말러는 생전에 모두 9곡(‘대지의 노래’까지 포함하면 10곡)의 교향곡을 완성했지요. 첫 번째 교향곡을 구상한 것은 20대 중반부터라고 합니다. 본격적인 작곡은 1888년 초에 이뤄졌습니다. 앞에서 길게 설명한 ‘Bruder Martin’의 선율은 이 교향곡의 3악장 첫머리에서 들려옵니다. 한데 좀 이상합니다. 선율이 괴기스럽게 비틀려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을 뿐더러, 어린 아이들이 딱 좋아할 만한 유쾌하고 코믹한 돌림노래였지요. 하지만 말러의 교향곡에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팀파니가 둥둥거리는 가운데 콘트라베이스가 연주하는 선율이 음산하고 비감합니다. 말러는 애초에 D장조였던 선율을 d단조로 바꿔 괴기스러운 느낌의 장송(葬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첫 번째 교향곡에서부터 희극을 비극으로 치환하는 독특한 패러디를 선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의 감각으로 듣노라면 그 장송은 아름답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대에는 어땠을까요? 1889년 11월 부다페스트에서 말러의 지휘로 이 곡이 초연됐을 때, 청중이 느꼈을 당혹감이 충분히 짐작됩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어린 시절의 말러는 선술집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베른하르트가 군부대 근처에서 운영했던 술집에서는 매매춘도 일상사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린 말러는 동생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지요. 말하자면 술 취한 남자와 여자들이 드나들던 선술집 문으로 동생들의 시신을 담은 관들이 떠나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특히 바로 아래 동생이었던 에른스트의 죽음은 말러에게 오래도록 상처로 남았던 기억이었다고 합니다. 그 동생은 말러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세상을 뜨지요. 아마 형제는 ‘Bruder Martin’을 함께 불렀을 겁니다. 어쩌면 말러는 류머티스 고열로 시달리던 동생의 머리맡에서 이 노래를 불러줬을 지도 모릅니다.

 

1번 교향곡의 표제인 ‘거인’(Titan)은 작곡가 스스로 붙인 제목입니다. 연주시간 약 50분으로 말러의 교향곡 중에서는 비교적 길이가 짧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말러의 교향곡을 처음 듣는 분들은 이 곡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작곡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말러의 서정성이 짙게 배어 있는 곡입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1876~1962), 말러의 제자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이 곡을 일컬어 “말러의 베르테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1악장은 느릿하게 막을 올립니다. ‘Langsam, Schleppend’(느리고 완만하게), ‘Wie ein Naturlaut-Im Anfang sehr gemachlich’(자연의 소리처럼, 매우 여유롭게)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지요. 현악기들이 A의 지속음을 길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서서히 먼동이 터오는 새벽의 느낌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팡파르, 또 꾀꼬리 같기도 하고 뻐꾸기 같기도 한 새소리들도 들려올 겁니다. 이어서 첼로가 말러의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 두번째 곡인 ‘아침 들판을 거닐 때’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매우 인상적인 주제입니다. 마지막에는 팀파니가 강렬하게 작열하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2악장에서는 빨라집니다. ‘Kraftig bewegt, doch nicht zu schnell’(힘차게 움직여서,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입니다. 현악기들이 표정 있고 활기찬 화성을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아주 리드미컬한 랜틀러 춤곡 풍의 선율이 펼쳐집니다. 이어서 음악이 잠시 멈추는 듯싶다가 목관과 바이올린이 주도하는 왈츠풍 선율로 넘어갑니다. 앞의 춤에 비해 좀더 세련된 도회풍의 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악장은 ‘Feierlich und gemessen, ohne zu schleppen’(엄숙하고 장중하게, 그러나 느긋하지 않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콘트라베이스가 ‘Bruder Martin’을 선율을 장중하고 서글프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하프의 피치카토가 잠시 들려오다가 길거리 악사들이 연주하는 듯한 스타일의 음악이 펼쳐집니다. 약간 휘청거리는 듯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잔한 분위기의 선율입니다. 인생의 희비극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요. 이어서 바이올린이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에서 네번째 곡인 ‘그녀의 푸른 눈동자’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젊은 말러의 서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4악장은 3악장에서 쉬지 않고 연결됩니다. ‘Sturmisch bewegt’(태풍처럼 움직여서). 거의 잦아드는 것처럼 3악장이 끝나자마자 폭풍 같은 총주가 터져 나옵니다. 말러가 왜 이 교향곡의 표제를 ‘거인’으로 지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연주시간 약 20분으로 교향곡 1번에서도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악장입니다.


아바도.jpg▶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9년/DG


지난해 1월 타계한 지휘자 아바도는 자타 공인의 ‘말러 스페셜리스트’였다. 1989년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실황이다. 균형 잡힌 연주, 정직한 해석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혹자는 깔끔하게 정돈된 사운드에 박한 점수를 주기도 한다. ‘절충주의’라는 평가도 있다. 아바도의 음반 중에서 좀더 드라마틱하고 힘이 넘치는 말러 1번을 원한다면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1981년 녹음(DG)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1989년 실황이 보편적 호평을 받는 명연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말러 1번이기도 하다.

 

 

 

얀손스.jpg▶마리스 얀손스,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2006년/RCO Live


최근의 녹음 중에서는 단연 추천작이다. 이 역시 실황 녹음이다. 얀손스와 로열 콘세르트헤보우가 2006년부터 진행해온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은 어느 곡이 됐든 후회하지 않을 만한 선택이다. 얀손스의 지휘봉은 구조와 디테일을 모두 장악하고 있을 뿐더러, 로열 콘세르트헤보우의 세밀한 연주력은 ‘역시!’라는 찬탄이 아깝지 않다. 말러의 교향곡들을 연주한 여러 지휘자들과 녹음들이 있지만, 정교한 디테일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이 음반이 단연 적절하다. 말러 교향곡의 세기말적 뉘앙스 표현이 좀 미흡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놓치기 아까운 연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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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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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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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6 Gnossiennes)

 

지난 회에 에릭 사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사티가 젊은 시절에 떠돌았던 몽마르트르 언덕과 캬바레 ‘검은 고양이’, 또 사티의 어린 시절과 그의 음악에 담긴 ‘중세적 명상’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함께 들었던 곡은 사티의 초기작이었던 <3개의 짐노페디>였지요. 사실, 사티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 한 편의 글로 마무리할까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거론해야 할 음악가, 또 들어야 할 음악이 많아서였습니다. 한데 뭔가 영 아쉽고 찜찜했습니다. 사티는 생존했던 시절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에 그 존재가 더욱 빛나기 시작했고,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중이 좋아하는 곡은 사티의 음악 중에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칼럼의 목적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보편적인 곡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염두를 굴리던 차에 어젯밤 TV에서 사티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였겠습니다만, 어느 CF에선가 아주 귀에 익은 사티의 선율, <6개의 그노시엔느>(6 Gnossiennes) 중에서 첫곡인 ‘Lent’(느리게)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애청곡들을 한 곡씩 짚어나가겠다는 이 지면에서 <6개의 그노시엔느>를 빼놓고 가긴 어렵습니다. 이 곡은 앞서 들었던 <3개의 짐노페디> 직후에 작곡됐습니다. 처음 출판했을 때는 <3개의 그노시엔느>였지만 사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전기 작가였던 로베르 카비(Robert Caby, 1905~1992)가 3곡을 더 출판해 지금은 <6개의 그노시엔느>로 전해집니다. 작곡 시기는 1889년부터 1897년까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곡도 앞서 들었던 <3개의 짐노페디>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이고 중세적인 명상, 어찌 보자면 뉴 에이지 풍의 분위기가 짙은 음악입니다.

 

오늘은 지난 회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사티의 음악적 개성에 대해 좀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일단 <6개의 그노시엔느>의 각 곡 머리에 사티가 붙여 놓은 지시어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3?4곡에는 ‘Lent’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느리게’라는 뜻이지요. 한데 2곡에는 ‘Avec etonnement’(놀라움을 가지고)라는 독특한 지시어가 놓여 있습니다. 5곡의 ‘Modere’(절제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6곡의 머리에 놓여 있는 ‘Avec conviction et avec une tristesse rigoureuse’(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는 또 한번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곡 중간의 지시어들은 더 특이합니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같은, 어찌 보자면 해괴망측한 언어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렇듯이 사티는 당시까지만 해도 악보에서 주로 사용하던 이탈리아어를 완전히 배제한 채 엉뚱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프랑스어를 사용합니다. 그런 경향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강해집니다.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군’ 같은 언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아예 곡 자체의 제목도 점점 도발적으로 짓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에 들어서면 ‘뻔뻔함’ ‘유쾌한 절망’ ‘바싹 마른 태아’ ‘개를 위한 엉성한 전주곡’ 같은 제목의 곡들이 태어납니다. 그밖에도 사티의 특이한 언어 사용법은 좁은 지면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물론 사티가 공연히 장난을 친 것은 아니겠지요. 악보에 등장하는 그의 엉뚱하고 파격적인 언어들은 ‘의미있는 장난’이라고 해석할 만합니다. 당시의 음악적 주류, 혹은 기존의 고정관념에 대한 냉소와 풍자라고 해야 할 겁니다. 요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도발적인 현대성을 느끼게 할 정도입니다. 

 

화제에서 좀 벗어나는 얘기입니다만 사티는 개(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서른 두 살의 사티는 파리 근교의 빈민굴 아르퀘이유로 이사해 5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칩거하는데, 일부러 집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사티를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는 방문객도 일체 없었다고 합니다. 유일한 가족(?)이 강아지들이었다고 하지요. 사티는 길거리의 유기견들을 집으로 데려와 주린 배를 채워주고 함께 놀았습니다. 친구인 시인 장 콕토에겐 이렇게 말했지요. “난 개들을 위한 음악을 쓸 거라네.”

 

자, 사티의 음악적 개성을 좀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1893년에 작곡한 <벡사시옹>(Vexations, 짜증)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보는 딱 한 페이지에 불과한데, ‘이 모티브를 진지하고 부담스러운 자세로 840번 반복하시오’라는 지시가 맨 윗자리에 적혀 있습니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해괴한 음악’이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악보의 지시대로 완주하지 못했지요. 대략 18시간이 걸리는 연주를 감내할 피아니스트도 없었거니와, 그 긴 시간 동안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율에 귀를 기울일 청중도 없었던 까닭입니다. 처음으로 그 곡이 연주된 해는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인 1963년이었지요. 누가 했을까요? 이 곡을 감히 무대에서 연주하려는 생각을 품었던 이는 역시 존 케이지(1912~1992)였습니다.

 

물론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18시간을 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몇 명인지 확인하긴 어려우나 그날 연주회장에서는 꽤 여러 명의 피아니스트들이 ‘릴레이 연주’로 840회의 반복을 이어갔고, 나름대로 사티의 작곡 의도가 그럴싸하게 재현됐다고 합니다. 예컨대 어떤 피아니스트는 느리게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빠르게 연주했고, 부드럽게 연주하면서 나름의 선율을 구사하려고 애쓰는 피아니스트가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사티가 적어 놓은 음표들을 아주 기계적으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물론 ‘삑사리’라고 불리는 실수들도 간간이 튀어나왔겠지요. 다시 말해 악보는 똑같았어도 피아니스트마다 각양각색의 연주가 펼쳐졌다고 전해집니다. 5달러를 내고 연주회장에 들어선 청중의 태도도 가지각색이었겠지요. 먹고 싶은 사람은 먹고, 자고 싶은 사람은 잤습니다. 책을 읽거나 친구와 잡담을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연주회 중간에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지요. ‘우연성’과 ‘일상성’의 옹호자인 존 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히 짜릿한 연주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려보지요. 1920년 3월 8일, 파리의 바르바장즈 갤러리(Barbazanges Gallery)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막스 자콥(1876∼1944)의 연극을 공연하던 중간에 사티가 작곡한 <가구음악>(Musique d’ameublement)이 초연됐습니다. 이 곡도 <벡사시옹>처럼 짧은 프레이즈를 계속 반복하는 음악인데, 말하자면 연극의 중간휴식을 위한 ‘배경음악’이었습니다. 한데 그날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관객들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연주에 절대 신경 쓰지 말 것. 걸어 다니고 이야기하고 음료수를 마실 것.’

 

하지만 사티의 의도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연주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관객에게도 그 ‘지시’는 이상하고 낯설었겠지요. 연주자들은 단순한 프레이즈를 계속 반복하는 행위를 어색해했고 청중은 제자리에 꼿꼿이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사티는 화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연주회장(갤러리의 전시공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주자들에게 “계속 연주해”라고 소리쳤고, 관객에게는 “음악을 듣지 마시오!”라고 외쳤다고 하지요.

 

그것은 일종의 ‘반(反)예술 선언’이었습니다. <벡사시옹>도 그렇고 <가구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티에게 예술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여야 했습니다. 예술가들의 과잉된 자의식, 혹은 청중이나 관객이 예술을 경배하는 태도, 그 모든 것을 사티는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20세기로 접어든 그 시대에, 사티와 유사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동료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또 있었지요. 예컨대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와 시인 장 콕토, 화가 파블로 피카소, 사진작가 만 레이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시인 장 콕토는 발언은 그들의 예술관을 짐작케 합니다. 콕토는 이렇게 말하지요. “구름, 파도, 물의 요정, 밤의 향기를 이제 집어치우자. 우리는 지상에 뿌리내린 일상의 음악을 필요로 한다.” 화가 피카소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남겼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피카소는 사티가 1917년 작곡했던 발레음악 <퍼레이드>의 무대미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내 그림에 끌어들인 대상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물건이다. 물주전자, 맥주컵, 담배 파이프, 쌈지담배 한 꾸러미, 그릇, 갈대로 엮은 방석이 놓여 있는 부엌 의자, 늘 대하는 식탁 등. 나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거나 변형시킬 수는 더더욱 없는 희귀한 대상을 얻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중략) 예를 들면 나는 루이 15세의 안락의자를 절대로 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대상이지 ‘누구나’를 위한 대상은 아니다.”

 

사티가 추구했던 ‘예술의 일상성’은 기존의 음악적 구조와 장식을 내팽개친 ‘앙상한 음악’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기존의 음악적 주류들, 예컨대 바그너풍의 ‘중후장대함’이나 드뷔시풍의 ‘모호함’에 대한 반발이자 풍자였지요. 그렇게 사티는 당대의 주류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갔던 음악가였습니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사티는 극음악과 성악곡들, 피아노 독주 외의 기악곡들도 여럿 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주로 애청되는 곡들은 비교적 초기의 피아노곡들입니다. <4개의 오지브> <3개의 사랑방드> <3개의 짐노페디> <6개의 그노시엔느> 등입니다. 중세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상시키는, 신비하면서도 단순한 선율이 반복적으로 펼쳐지지요. 명상적이기도 하고, 어찌 보자면 약간 몽환적이기도 한 음악들입니다.

 

<6개의 그노시엔느>에 등장하는 ‘그노시엔느’는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타, 혹은 ‘크레타 사람의 춤’을 뜻합니다. 아마 듣기에 어려운 곡은 없을 겁니다. 1곡 ‘Lent’는 TV CF에서까지 사용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2곡 ‘놀라움을 가지고’도 사실 놀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앞 곡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나머지 곡들도 그렇습니다. 4곡에서 왼손으로 짚어나가는 저음이 살짝 무거워지는 듯하다가 5곡에서는 좀더 환한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사티는 6곡에서 ‘절대적 슬픔’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밑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슬픔은 아닙니다. <6개의 그노시엔느>는 침묵과 음악의 중간쯤에서,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치콜리니.jpg▶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1966년/Warner Classics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도 치콜리니(1925~)는 1960년대와 1980년대, 두차례에 걸쳐 사티의 피아노곡을 레코딩했다. 첫번째는 아날로그, 두번째는 디지털 녹음이다. 연주 스타일은 밝고 청명한 편이다. 사티 음악의 명상성보다는 풍자성에 좀 더 방점을 찍는 연주로 들린다. 아울러 무뚝뚝할 수도 있는 사티의 음악에 생동감 있는 표정을 부여한 연주라고도 할 수 있다. 디지털 녹음은 5장의 CD 전집으로, 아날로그 녹음은 CD 2장짜리 음반으로 나와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대중적인 곡들을 주로 수록한 후자를 권한다. <6개의 그노시엔느>는 7~12번 트랙이다.   

 

 

 

 

 

로제.jpg▶파스칼 로제(Pascal Roge)/1983년/Decca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음반이다. 파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로제(1951~)는 드뷔시와 라벨을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녹음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사티의 음악을 연주한 음반도 호평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치콜리니와 달리 약간 드라이한, 좀 더 절제돼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메마른 연주는 아니다. 섬세한 뉘앙스가 살아 있는 시정 넘치는 연주라고 평할 만하다. 음반 표지에 후안 미로의 그림 ‘어릿광대의 사육제’가 인쇄돼 있다. <3개의 짐노페디>를 첫 곡으로 사티의 주요 곡들을 선곡했다. 사티의 음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샹송풍의 ‘Je te veux’는 두번째 곡으로 담겼다. <6개의 그노시엔느>는 10~15번 트랙이다. 사티의 음반을 처음 구입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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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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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 (6 Gnossie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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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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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핀란드의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1865~1957)의 탄생 150주년입니다.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3월13일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지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내한 연주회에 애호가들의 기대가 쏠려 있습니다. 거장 마렉 야노프스키(76)가 지휘봉을 듭니다. 이 지휘자에 대해서는 제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2012년, 돌베개)라는 책에서도 길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몇 차례 내한공연을 통해 한국에도 꽤 많은 팬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지면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사실은 이날 연주회에서 협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프랑크 페터 침머만(50)이라는 점입니다.

 

2001?2008년에도 한국에 다녀간 적이 있는 침머만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안네 조피 무터 등과 더불어 현재 독일의 간판급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봐도 괜찮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한국계인 까닭에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2008년 저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돌솥비빔밥 마니아”라고 소개하기도 하더군요. 음악적으로는 범(凡)유럽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러시아 음악가들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유럽에서 자랐고 유럽의 모든 자양분을 흡수했다. 또 러시아 선생님들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러시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는 내게 신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서두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침머만 이야기를 길게 꺼내는 까닭은 그가 내한 무대에서 연주할 곡이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이기 때문입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곡입니다.

 

물론 대중적인 인기로 따지자면 1899년 작곡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먼저 언급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곡은 매우 ‘정치적인 음악’이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핀란드는 13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809년부터 1917년까지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공국(公國)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식민지적 지배는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차르(러시아 황제)에 즉위한 이후 한층 노골화합니다. 당연히 핀란드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부채질했겠지요. 그런 운동의 일환으로 1899년 11월에 핀란드의 언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고, 그 행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것이 연극 <역사적 정경>의 상연이었습니다. <핀란디아>는 바로 이 연극을 위해 작곡한 음악의 일부였습니다. 말하자면 핀란드 사람들의 애국적 열정을 고취시키기 위한 음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음악은 때때로 선동적입니다. 어느 순간 가슴으로 확 밀려들어와서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온통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악용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럽의 현대사에서 이미 그 장면을 목도했거니와, 바로 히틀러와 나치가 바그너의 음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한 것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면이지요. 유태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가는 그 순간에, 수용소의 스피커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순례자의 노래’가 울려 퍼졌으니 말입니다. 물론 세밀히 들여다보자면 꼭 바그너의 음악만은 아니었지요. 히틀러와 나치는 이른바 독일풍의 웅혼한 낭만음악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춘 ‘독일정신의 정화’로 포장해 악용했습니다. 베토벤과 브람스의 음악도 이 정치적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나치 이후의 독일 음악은 ‘감정의 배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감성적 음악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겪은, 아울러 그 시대의 과오를 철저히 반성했던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전통을 부정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이른바 음렬주의, 조성에서의 탈피 등 쇤베르크(1874~1951)에서 발원하는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또 샛길로 빠져 말이 길어졌습니다. 다시 시벨리우스로 돌아오겠습니다. 자, 시벨리우스의 음악 중에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음악을 또 한 곡 꼽아본다면 뭐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극음악 <쿠올레마>에 삽입된 ‘슬픈 왈츠’라는 곡입니다. 연주시간 5분이 조금 넘는, 아주 짧은 곡이지요. 채널예스 편집자가 이 음악을 링크해 줬으면 좋겠군요. ‘슬픈 왈츠’에 대해 설명하려면 시벨리우스의 아내인 아이노 예르네펠트(1871~1969)를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26세 때(1892년) 아름다운 외모의 아이노와 결혼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핀란드의 유명한 장군이고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습니다. 한데 그 세 오빠들이 하나같이 핀란드의 유명한 예술가들입니다. 첫째 아르비드는 극작가, 둘째 에로는 화가, 셋째 아르미스는 작곡가였지요. <쿠올레마>는 ‘죽음’이라는 뜻인데 바로 아르비드가 극본을 섰던 연극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시벨리우스는 처남이 쓴 연극의 음악을 맡았던 것이지요. ‘슬픈 왈츠’는 그렇게 만들어진 짧고 아름다운 곡입니다. 왈츠는 왈츠인데, 왠지 스산한 북유럽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한국에도 몇 차례 내한했던 빡빡머리 지휘자 파보 예르비(1962~)가 이 짧은 곡을 앵콜로 자주 연주하는 편입니다. 아마 인터넷 동영상으로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는 별도로, 시벨리우스의 음악적 생애를 대표하는 곡들은 7개의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중에서도 2번이 가장 많이 연주됩니다. 그리고 시벨리우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걸작이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입니다. 이 곡은 청중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음악입니다. 제가 몇 해 전 만났던 사라장도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이 곡을 손꼽았습니다. 또 최근에(사실은 며칠 전에) 만났던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신현수)도 자신이 애호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작곡가로 “브람스와 시벨리우스, 프로코피예프”를 꼽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시벨리우스 협주곡에 많은 애착을 보이는 걸까요? 신지아의 말 속에 그 단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를 들어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2악장은 선율이 굉장히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걸로 그냥 끝이죠. 반면에 시벨리우스의 2악장에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가슴이 아릿한 정서 같은 것이 있어요. 말로 설명하긴 좀 어렵지만요.”

 

신경숙의 소설 제목을 잠시 빌려온다면 그것을 ‘깊은 슬픔’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3악장이지요. 바이올린의 기교가 매우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이른바 비르투오소 풍의 악장입니다. 연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짜릿한 쾌감을 느낄 만한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기량을 마음껏 펼쳐내면서 알레그로 템포로 달려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그것은 청중이 이 곡을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핀란드의 국민음악가’로 규정되는 시벨리우스는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약했지만 음악적으로는 전통적 어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온음계적 선율과 조성적 화성을 즐겨 사용했지요. 비슷한 시기의 유럽 작곡가들이 혁신적인 음악 어법을 찾느라 골몰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그를 종종 보수적인 작곡가로 설명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독일?오스트리아, 혹은 프랑스의 음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핀란드의 하늘과 바람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는 듯한 개성, 또 내용적으로 보자면 그 땅의 설화에서 건져 올린 듯한 회화성과 신화성 같은 요소들을 느끼게 합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슬픈 왈츠’와 같은 해에 작곡됐지요. 38세였던 1903년이었습니다. 이듬해 2월에 작곡가 본인의 지휘로 헬싱키에서 초연하지요. 하지만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시벨리우스 본인도 뭔가 미진했던지 퇴고를 거듭해 1905년에 개정판을 내놓지요. 일설에는 1905년 베를린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창작의 자극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주로 연주되는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바로 1905년의 개정판입니다.
 
음악적으로 가장 빼어나다는 평을 듣는 것은 1악장이지요.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듯한, 북유럽의 신화적 분위기를 풍기는 악구들로 문을 여는데 시작부터 바이올린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이어서 독주 바이올린이 애상적인 선율의 첫번째 주제를, 또 파곳이 두번째 주제를 연주합니다. 협주곡의 일반적 작곡 방식과 달리, 악장의 중간에 카덴차(cadenza, 독주악기가 무반주로 기교적 연주를 펼쳐내는 부분)가 있는 것도 1악장의 특징입니다.

 

아다지오 템포로 느릿하게 막을 여는 2악장에는 북유럽 특유의 서정이 확연하지요. 독주 바이올린이 어떤 표정을 띤 채 노래하는 느낌의 악구들을 연주하다가 관현악이 합세하면서 음악이 규모가 점점 확장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바이올린이 애조 띤 노래를, 앞에서보다 조금 빠른 템포로 부릅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원래의 템포로 느려지지요.

 

3악장은 팀파니와 저음 현악기들이 둥둥거리는 느낌으로 시작해서 곧바로 독주 바이올린이 첫번째 주제를 연주합니다. 그 주제 선율 밑에서 독특한 리듬패턴이 계속해 반복됩니다. ‘빰바밤빰 밤밤밤’하면서 반복되는 그 패턴을 몸으로 기억하면서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3악장의 바이올린 테크닉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짜릿합니다.

 

 

 

 

 


 

하이페츠.jpg야사 하이페츠, 월터 헨들?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59년/SonyMusic


하이페츠가 연주한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필청반이다. 토머스 비첨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도 있으나 1930년대의 녹음이어서 음질이 난감하다.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미국 지휘자 월터 헨들(1917~2007)이 이끄는 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이 연주력과 음질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 하이페츠 특유의, 차갑고 날카로운 마력을 느끼게 하는 연주다. 특히 비르투오소 풍의 악구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3악장이 눈부시다. 국내에서 두 가지 음반 중에서 구할 수 있다. <Jascha Heifetz plays Great Violin Concerto>는 6장의 CD에 하이페츠의 중요한 협주곡 연주들을 모두 담았다. 낱장 음반으로도 구입이 가능하다. 시벨리우스 외에 글라주노프와 프로코피에프의 협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정경화.jpg정경화, 앙드레 프레빈?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70년/Decca

22세 정경화의 신선한 에너지가 오롯이 담긴, 데카(Decca)에서의 데뷔 음반이다. 1970년 영국 런던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유럽 데뷔 무대를 치른 정경화는 곧바로 음반사 데카에 발탁됐다.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별명은 그 연주회와 이 음반에서 비롯했다. 시벨리우스와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함께 담았다.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애틋한 분위기가 살아 있는 연주다. 특히 노래의 느낌을 머금은 2악장이 좋다.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호흡도 나무랄 데 없다. 이 음반을 듣다 보면 정경화에게는 유럽인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감성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국내에서 두 가지 음반을 구할 수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오리지널 음반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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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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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중 비행기에서 듣게됬는데 Da Endorphine이란 가수 괜찮네요. 글씨는 저분 n자에 낙서를 한듯해서 알수가 없지만요.. ㅎㅎ 한번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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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은 지금도 예술가들의 거리로 유명합니다. 이 고갯길에 예술가들이 몰려든 것은 19세기 말부터였지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손꼽혔던 오스트리아 빈의 영광이 마침내 저물면서 프랑스 파리가 새로운 예술가들의 도시로 떠오릅니다. 19세기 말의 프랑스는 식민지를 급속히 늘리면서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고 파리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에너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던 말라르메와 드뷔시 같은 이들이 당시 파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예술가들이었고, 화가로는 고흐와 르누아르, 로트렉 등이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아직 10대였던 피카소가 부푼 꿈을 안고 찾아와 머물렀던 곳도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이었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과거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지요. 또 관습적인 예술 표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들끓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자유로웠고 낭만적인 연애에 열정을 쏟아 붓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무렵 몽마르트르 언덕에 ‘검은 고양이’(Le Chat Noir)라는 카바레가 있었지요. 에드거 앨런 포의 공포스러운 소설 ‘검은 고양이’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개 ‘카페’라는 용어로 ‘검은 고양이’를 소개하는 글들이 많은데 정확히 표기하자면 ‘카바레’입니다. ‘검은 고양이’를 홍보하는 당시의 포스터를 찾아봤더니 ‘Cabaret du Chat Noir’라고 적혀 있습니다. 요즘에는 ‘카바레’를 중년 이상 남녀들의 사교장으로,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의 무도회장으로 대개 생각하지요. 하지만 당시의 카바레는 요즘과 좀 달랐습니다. 물론 술을 파는 곳이다 보니 진한 농담을 나누거나 맘에 드는 이성을 유혹하기도 했겠습니다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그곳은 무엇보다 젊은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아지트였습니다. 시를 낭송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샹송을 노래했습니다. 때로는 정치적 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연극이나 풍자적 만담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검은 고양이’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공연은 인형과 불빛을 이용한 ‘그림자 연극’이었다고 하지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카바레 얘기 조금 더 하겠습니다. 이렇듯이 프랑스 파리에서 19세기 말에 꽃피었던 카바레 문화는 20세기 초반에 접어들어 독일에서 한층 성행합니다. 독일어로는 카바레트(Kabarett)라고 불렀는데, 간판으로 내걸렸던 이름들도 아주 특이합니다. 1900년대 초반에 베를린에는 ‘위버브레틀’(궁극의 캬바레)이 있었고 뮌헨에는 ‘디 엘프 샤르프리히터’(11인의 처형인)라는 카바레트가 있었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건설되면서 독일에서는 카바레트가 크게 융성하지요. 정치적 검열이 완화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표현의 자유가 분출했던 까닭입니다. 기존의 체제에 불만을 품은 많은 예술가들이 카바레트 무대에 자신들의 작품을 올리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까지 유명한 두 명의 인물이 바로 극작가 겸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공연했던 연극으로 <서푼짜리 오페라>가 유명하지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자본주의를 야유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트 바일과 더불어 이른바 ‘좌파 음악가’로 불리는 한스 아이슬러도 브레히트와의 공동 작업으로 카바레트에서 공연을 올렸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융성했던 카바레트는 1933년에 철퇴를 맞지요. 주지하다시피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이곳은 불법적 공간이 됩니다. 나치는 카바레트에서 인기를 끌었던 음악들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해 연주와 청취를 아예 금지해 버리지요.
 
자, 다시 19세기 말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돌아오겠습니다. 1887년이 거의 저물어가던 무렵, 어느 날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 새로운 피아니스트가 한 명 등장합니다. 바로 군대에서 막 제대한 오늘의 주인공, 에릭 사티였습니다. 1866년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의 바닷가 옹플뢰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기에 어머니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지요.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진한 고독감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비롯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외로운 10대 시절을 보낸 사티는 1878년에 아버지가 있는 파리로 이주하지만 새어머니와 불화와 갈등의 나날을 보내지요. 얼마 뒤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지만 ‘게으르고 집중력 없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중도 탈락하고 맙니다. 1886년에 군에 입대해서도 여전히 ‘부적격자’였던 모양입니다. 기관지염, 정서 불안 등을 이유로 조기 제대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티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내향적인 젊은이였습니다. 그렇게 군대에서마저 방출된 사티가 찾아간 곳이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이었고, 마침내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는 이 카바레에서 주로 ‘그림자 연극’의 피아노 반주를 맡습니다. 그렇게 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사티는 역시 몽마르트르에 있었던 ‘못의 주막’(Auberge du Clou)으로 자리를 옮길 때(1891년)까지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오늘날 많이 이들이 사랑하는 사티의 초기 피아노 작품들이 바로 몽마르트르 시절에 작곡됩니다. 예컨대 <3개의 사라방드>(1887), <3개의 짐노페디>(1888), <3개의 그노시엔느>(1890, 사티 사망 후 3곡이 추가돼 지금은 6곡) 같은 곡들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3개의 짐노페디>는 작곡가로서의 사티를 세상에 알린 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훗날(1911년) 드뷔시가 세 곡 중의 두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해 자신의 지휘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3개의 짐노페디>가 보여주는 특징을 요약하자면 정서적 고독감, 단순한 선율, 종교적 신비로움 같은 표현들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것은 다른 두 곡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특징들이 제각기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울려서 사티 음악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티의 고향은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옹플뢰르입니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은 사티가 특히 좋아했던 곳이 성당이었다고 하지요. 어린 사티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10살 무렵에 옹플뢰르의 성 네오나르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던 비노(Vinot)에게서 음악을 배웁니다. 말하자면 사티에게 첫번째 음악선생이었던 것이지요. 사티는 그 선생님한테 피아노를 배웠고 그레고리안 성가 등 중세 음악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됩니다. 그의 초기 피아노곡들에서 나타나는 흐릿한 존재감,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듯한 리듬,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상시키는 신비한 선율 등은 바로 그런 경험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사티의 초기 음악들은 ‘중세적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고리타분한 종교주의가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날마다 대중적 음악을 연주했던 그는 명상적이면서도 듣는 이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곡들을 선호했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주된 흐름이었던 후기 낭만주의, 또 프랑스의 드뷔시가 개척한 인상주의 음악과도 사뭇 달랐습니다. 사티는 감정의 과잉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상주의 음악가들이 애호했던 관념적 소재, 모호한 표현법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티의 음악은 차갑고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듣는 이에게는 감각적으로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는 제목처럼 모두 3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짐노페디(Gymnopedies)는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소년들’이라는 뜻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축제에서 소년들이 벌거벗고 추는 춤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제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벌거벗었다’라는 표현은 사티의 음악에 매우 적절한 제목이기도 하지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린, 말하자면 불필요한 장식이나 감정의 과다 노출이 없는 단순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티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는 이 곡을 듣고 “벌거벗은 음악”이라고 평하기도 했지요. 사티의 음악이 대개 그렇듯이 연주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가령 이 곡을 가장 느리게 연주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 라인베르트 데 레우(1938~)은 15분 52초에 걸쳐 연주합니다. 하지만 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10분 안팎으로 연주하지요. 1곡에는 ‘느리고 고통스럽게’(Lent et Douloureux), 2곡에는 ‘느리고 슬프게’(Lent et Triste), 3곡에는 ‘느리고 엄숙하게’(Lent et Grave)라는 지시가 달려 있습니다.

 

 

 

 


치콜리니.jpg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1966년/Warner Classics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도 치콜리니(1925~)는 1960년대와 1980년대, 두차례에 걸쳐 사티의 피아노곡을 레코딩했다. 첫번째는 아날로그, 두번째는 디지털 녹음이다. 연주 스타일은 밝고 청명한 편이다. 사티 음악의 명상성보다는 풍자성에 좀 더 방점을 찍는 연주로 들린다. 아울러 무뚝뚝할 수도 있는 사티의 음악에 생동감 있는 표정을 부여한 연주라고도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한 라인베르트 드 레우의 연주로 이 곡에 익숙한 이들이 들으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드 레우의 연주가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녹음은 5장의 CD 전집으로, 아날로그 녹음은 CD 2장짜리 음반으로 나와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대중적인 곡들을 주로 수록한 후자를 권한다.

 

 

 

 

 

로제.jpg파스칼 로제(Pascal Roge)/1983년/Decca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음반이다. 파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로제(1951~)는 드뷔시와 라벨을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녹음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사티의 ‘짐노페디’를 연주한 음반도 호평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치콜리니와 달리 약간 드라이한, 좀 더 절제돼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메마른 연주는 아니다. 섬세한 뉘앙스가 살아 있는 시정 넘치는 연주라고 평할 만하다. 음반 표지에 후안 미로의 그림 ‘어릿광대의 사육제’가 인쇄돼 있다. <3개의 짐노페디>를 첫 곡으로 사티의 주요 곡들을 선곡했다. 사티의 음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샹송풍의 ‘Je te veux’는 두번째 곡으로 담겼다. 사티의 음반을 처음 구입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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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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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드뷔시의 음악 중에 이 지면에서 이미 언급한 것으로는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가운데 ‘달빛’, 또 지난 달 게재했던 <바다 -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가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드뷔시의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골랐습니다. 연대기적으로 보자면 1890년 작곡했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과 1903년부터 3년간에 걸쳐 썼던 <바다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의 중간쯤에 위치합니다.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1892년부터 3년 동안 작곡했습니다. 인상주의 음악의 문을 마침내 열어젖힌 걸작,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과는 확연히 맛이 다른 프랑스 근대음악의 첫걸음으로 기억되는 관현악곡입니다.

 

음악으로 들어서기 전에 드뷔시의 성장 과정을 잠시 복기해 보겠습니다. 그는 1862년 8월 22일, 생 제르맹 앙레(Saint-Germain-en-Laye)라는 곳에서 태어났지요. 파리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20km쯤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드뷔시는 다섯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고 부모는 그릇가게를 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풍족한 집안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장사도 잘 안됐던 모양입니다. 드뷔시가 태어나고 2년 뒤에 가게를 정리하고 파리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드뷔시의 아버지는 1871년에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봉기로 세워졌던 혁명정부 ‘파리 코뮌’(3월 18일~5월 28일)에 참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파리 코뮌은 2개월 만에 정규군에게 진압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드뷔시의 아버지도 이때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뷔시가 다섯 살로 추정되는 시절에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누구나 귀엽지만 드뷔시도 역시 그렇습니다.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꼬마가 세발자전거에 앉아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지요. 눈매를 약간 찡그리고 있는 꼬마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입니다. 1862년부터 1918년까지 살았던 드뷔시는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겨놓고 있는데, 이 다섯 살 무렵의 사진이 가장 어린 시절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아홉 살 무렵부터였지요. 한데 이 대목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드뷔시의 음악선생이었던 모테 드 플뢰르비유(Maute de Fleureville) 부인이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의 장모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베를렌의 아내였던 마틸드 모테의 어머니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모테 부인이 드뷔시를 가르치기 시작하던 그 무렵에 베를렌은 17세의 천재시인 랭보를 향한 동성애적 사랑에 광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된 아내 마틸드와 장모인 모테 부인이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모테 부인은 그렇게 속을 끓이면서도 어린 제자를 손주처럼 아끼며 정성껏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마 교습료도 거의 못 받았을 겁니다. 드뷔시의 아버지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경제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모테 부인은 참으로 탁월한 선생이었습니다. 어린 드뷔시를 가르친 지 1년 만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시킵니다. 그러니까 드뷔시는 고작 열 살 때 이 유명한 음악원의 입학을 허가받습니다. 할머니뻘인 모태 부인 덕택이었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때부터 드뷔시는 12년 동안 이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동시대 작곡가들인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처럼 드뷔시도 한때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됐지요. 하지만 어린 시절의 고집스러운 눈매에서도 느껴지듯이 드뷔시에게는 반골 기질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파리 국립음악원 시절에도 정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교수들과 충돌이 잦았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혁명기의 프랑스를 몸으로 겪으면서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어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에 대해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 접한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풍부하고 새로운 화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이 분명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예술가적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드뷔시의 음악을 통해 독일?오스트리아와는 다른 ‘프랑스적 분위기’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드뷔시 개인의 기질과 취향에서 비롯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드뷔시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예술에서 나타났던 흐름들을 도외시하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달빛’을 설명하는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드뷔시의 음악은 당시 프랑스 예술의 새로운 조류였던 시에서의 상징주의, 또 회화에서의 인상주의와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파리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드뷔시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와 ‘화요회’ 멤버로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했습니다. 시인 말라르메가 자신의 집에서 매주 화요일 밤마다 열었던 이 모임에는 상징주의 시인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참여하고 있었지요, 참, 조금 전에 등장했던 시인 베를렌도 이 모임의 멤버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술독에 빠져 살았던 이 천재시인은 랭보와 말다툼 끝에 권총을 발사했다가 감옥에 다녀왔고 아내인 마틸드와는 이혼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여전히 시들지 않았지요.
   
시에서의 상징주의가 언어의 지시적 측면을 벗어났던 것처럼 회화에서의 인상주의는 사물의 고유한 색에서 탈피합니다. 언어가 나의 심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재생되는 것처럼, 사물의 색감이란 빛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 당시 인상주의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고유한 색’이란 일종의 고정관념일 수 있지요. 인상주의자들에게 ‘사과는 빨간색, 바나나는 노란색’이라는 관념은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사물의 정해진 모양, 그 항구적인 형태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대상과 배경을 구분해주는 경계, 이른바 윤곽선이 흐릿해지면서 아련한 느낌의 몽환적 화풍을 낳았던 것이지요. 
 
물론 드뷔시 본인은 ‘인상주의’라는 표현을 자신의 음악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을 불편해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음악이 보여주는 인상주의적 특징마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 지면에 썼던 글에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귀로 듣는 회화’라고 표현했었는데요, 말하자면 그 음악은 피아노 한 대로 그려낸 인상주의적 회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세 번째 곡인 ‘달빛’은 몽롱하면서도 달콤한 달밤의 정경을 인상적 색채감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이번에 듣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관현악으로 그려낸 인상주의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곡은 ‘화요회’의 리더였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지요. 사실 말라르메가 <목신의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처음 썼던 시기는 1865년이었습니다. 드뷔시가 고작 세 살 때였지요. 11년 뒤에 말라르메는 이 시를 개작해 <목신의 오후>라는 시집으로 다시 간행했고 당시 그 시집에 삽화를 그린 인물이 인상주의 화가 마네였습니다. 그도 역시 ‘화요회’의 멤버였지요.

 

시에 등장하는 ‘목신’(牧神)은 그리스 신화에서 판(Pan)으로, 로마 신화에서는 파우누스(Paunus)로 불립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염소(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시칠리아의 초원을 배경으로, 물의 요정 님프와 나이아드에게 완전히 반한 목신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잊은 채 그 요정들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몽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드뷔시는 이 상징주의 시를 모티브로 삼아 관능성마저 느껴지는 인상주의 풍의 음화(音畵)를 그려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요. “이 곡은 말라르메의 시를 극히 자유롭게 회화로 표현한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목신의 갖가지 욕망과 꿈이 열기 속을 헤맨다. 님프와 나이아드는 겁을 먹고 달아나고, 목신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꿈에 취한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악장 구분 없이 약 10분간 연주되는 곡입니다. 가장 먼저 플루트가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흔들리는 주제를 연주합니다. 아라베스크 풍의 선율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하지만 아직은 정신이 몽롱한 목신이 갈대피리를 부는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이어서 오보에와 클라리넷, 하프가 가세합니다. 이 주제를 여러 번 변주하면서 목신의 욕망과 몽상을 관능적으로 그려냅니다. 빠른 선율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겁을 먹고 달아나는 요정들의 모습을 상상하길 바랍니다. 이어서 환상에 빠진 목신이 관능에 빠져드는 장면이 점점 고조됩니다. 후반부로 접어들면 약간 우스꽝스러운 느낌의 목관 선율이 잠시 울려 퍼지다가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되돌아옵니다. 처음의 아라베스크 주제선율이 다시 연주되고, 아스라한 여운을 남기면서 다시 잠에 빠져드는 목신을 묘사합니다.

 

 

 


앙세르메.jpg▶앙세르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1957년/Decca


드뷔시의 <바다 - 3개의 교향적 소묘>를 언급했을 때도 추천했던 음반이다. 드뷔시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색채감,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가는 몽롱함을 잘 표현해낸 연주다. 앙세르메의 지휘를 구식일 것이라고 예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실제로 그의 지휘는 요즘 들어도 여전히 생기 넘치는 감흥을 전해준다. 드뷔시의 다른 관현악 걸작들, <바다>와 <야상곡> <봄>이 함께 담겨 있다.

 

 

 

 

 

 

마르티농.jpg

▶장 마르티농, 프랑스 국립방송교향악단/1973년/Warner Classics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즐겨 듣는 음반이다. 프랑스 태생의 지휘자인 마르티농이 프랑스 악단을 이끌고 들려주는, 깔끔하고 세련된 연주다. 과도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 음악의 표정을 충실하게 살려내고 있다. 드뷔시의 음악에 관한 한, 교과서처럼 가까이에 둘 필요가 있는 음반이다. 1910년 태어난 마르티농은 1970년부터 프랑스 국립방송교향악단을 이끌다가 1976년 세상을 떴으니 이 녹음은 그의 말년작이라고 해야겠다. 8장의 CD에 드뷔시와 라벨의 관현악곡들을 수록한 전집을 구매하는 것이 낱장 구매보다 가격적으로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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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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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64년에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위의 구스타프 말러와 더불어 후기낭만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리매김돼 있지요. 한데 이 시기, 그러니까 슈트라우스와 말러 같은 이들이 활약했던 이른바 세기말과 20세기 초반은 문화사적으로도 큰 변동이 있었던 ‘전환의 시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확산을 꼽을 수 있겠지요. 영화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1895년 12월 23일, 뤼미에르 형제의 필름을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유료로 상영한 날을 기점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대중적으로 복제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또 하나의 테크놀로지, 즉 음반의 탄생은 언제 일까요? 널리 알려져 있는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은 1877년에 이뤄졌고 12년 뒤에 일반에게도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납작한 형태의 음반은 미국의 독일계 이민자인 에밀 베를리너가 1887년에 개발했지요. 점차 기술이 발전해 1920년대 중반에는 베토벤의 모든 교향곡을 음반으로 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물론 당시의 음반은 한 장에 녹음할 수 있는 분량이 많질 않았으니 베토벤 교향곡을 전부 다 들으려면 아마도 수십장의, 거의 100장쯤의 음반이 필요했을 겁니다.

 

슈트라우스는 20세기 중반인 1949년까지 살았습니다. 향년 85세였지요. 하지만 말러는 1911년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두 명의 음악가는 작곡가인 동시에 당대의 지휘자이기도 했지요. 한데 말러가 지휘한 음악은 음반으로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슈트라우스는 음반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세기말부터 활약한 음악가 중에서는 아마도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와 지휘를 음반으로 남겨놓고 있긴 하지만 그는 슈트라우스보다 거의 열살 아래입니다.

 


오늘은 이 무뚝뚝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두뇌회전이 빨랐던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악단의 호른 주자였지요. 그러고 보니 유명한 음악가 중에는 아버지가 호른 연주자였던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가 그렇고요, 또 브람스의 아버지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연주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로시니나 브람스의 아버지가 거의 무명의 연주자였던 것과 달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바이마르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연주자였고 음악원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또 어머니 요제피네는 뮌헨에서 유명한 양조업자의 딸이었지요. 그 시절부터 이미 뮌헨은 독일 맥주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바이마르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에서도 보수적인 곳으로 손꼽힙니다. 몇 해 전에 뮌헨에 간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 매우 배타적인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면에 일일히 옮기기는 좀 그렇지만, 뮌헨 사람들은 독일의 다른 도시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도도했고 아시아인에 대해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다녀온 베를린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도시는 젊고 개방적이고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화려한 상업도시의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어느 칼럼에선가 베를린을 일컬어 “성찰의 도시”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저 역시 베를린을 며칠간 돌아다닌 끝에 그 말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뮌헨의 유복한 집안에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음악적으로는 정통주의자인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당연히 아버지에게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겠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직장인 뮌헨 궁정악단의 리허설에 가서 연주를 듣는다거나, 아버지의 동료들에게 피아노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궁정악단 악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마이어는 이 신동에게 작곡이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정규 음악원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20세기를 바라보는 시기였음에도, 정규 음악대학이 아니라 뮌헨의 음악계가 그를 키워낸 셈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아버지 프란츠의 영향력이 있었겠지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살이 되던 1882년에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해 뮌헨대학에 들어가는 하지만 그가 공부한 것은 철학과 미학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다 마치지 않았지요. 이미 바이마르에서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슈트라우스는 열아홉 살 때 당대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1830~1894)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훗날 뷜로와의 만남에 대해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술회합니다. 그 만남은 두 가지 맥락에서 슈트라우스에게 큰 의미를 갖게 되지요. 하나는 지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바그너와 리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독일악파’의 음악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슈트라우스의 재능을 높이 샀던 뷜로는 1885년에 자신이 지휘를 맡고 있던 마이닝겐 궁정악단에 부지휘자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물론 슈트라우스가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그보다 한 해 전 뮌헨에서였지요. 하지만 마이닝겐에서 뷜로의 부지휘자가 됐다는 것은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상상하기 어려웠던 영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악단의 악장이었던 알렉산더 리터(1833~1896)는 열렬한 바그너 지지자였습니다. 슈트라우스는 훗날 서른 살 많은 리터와 나눴던 우정, 그로부터 받았던 음악적 영향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지요. 음악적 정통주의자였던 슈트라우스의 아버지 프란츠는 아들이 ‘신독일악파’에 경도되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지만 대세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독일의 후기낭만 음악에서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슈트라우스도 결코 피해갈 수 없었지요.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대규모의 관현악 편성, 반음계적이고 불협화음적인 화성 등은 바그너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또한 그는 리스트와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과 음악 외적인 것의 결합을 계승하고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음악에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의 결합을 꾀하면서,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 등이 주도한 이른바 ‘음악의 순수성’과 대척점에 섰던 것이지요. 오페라와 더불어 슈트라우스의 대표적인 음악적 업적으로 손꼽히는 ‘교향시’가 바로 그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슈트라우스는 음악 인생의 전반부에는 교향시에, 후반부에는 주로 오페라에 집중했지요. 

 

슈트라우스의 음악 인생에서 표제를 지닌 교향시에 집중했던 이른바 ‘교향적 시대’는 <돈 후앙>(‘돈 주앙’으로도 표기)을 완성했던 1888년부터 약 10년간입니다. 그는 이 10년 동안에 그의 교향시들을 대부분 작곡했지요. <돈 후안> 이후에 <죽음과 변용>(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189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 <돈 키호테>(1897), <영웅의 생애>(1898) 등으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듣겠습니다. 아마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겁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1968년에 만든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유명해졌지요. 물론 이 영화에서는 리게티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도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인상에 더욱 강하게 남는 게 사실입니다. 음향 자체의 강력함 때문일 수도 있겠고 영화 속 장면이 인상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영화의 막이 오르고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또 유인원들이 정체불명의 돌기둥 앞에서 죽은 짐승의 뼈다귀를 들고 뼈더미를 내려치며 포효하는 장면에서도 이 곡이 등장합니다. 또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암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역시 이 곡이 들려옵니다. 오르간의 지속음에 팀파니와 금관이 어울려 장쾌한 포효를 터뜨리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이 교향시는 니체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작곡의 영감을 받은 곡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니체는 이 저작을 1883년부터 1885년에 걸쳐 썼는데, 한때 뮌헨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슈트라우스도 물론 이 책을 읽었겠지요. 하지만 그가 니체의 자유의지와 초인 사상에 얼마나 절실하게 공감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니체적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요. 니체는 안락한 삶을 거부하라고, 가혹한 운명 속으로 뛰어들어 투쟁하라고 말했던 철학자입니다. 그 투쟁 속에서 인간은 보다 강하고 심원하며 아름다운 존재로 고양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초인이 등장하는 겁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 사람, 그 고난 속에서 자아를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어쨌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체의 책 제목을 음악의 표제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니체의 서문을 악보의 머리에 게재하기도 했지요. 말하자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곡은 음악에 철학의 결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물론 슈트라우스는 “나는 철학적 음악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니체의 위대한 저작을 음악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음악으로 인류의 기원과 발전의 여러 양상을, 니체의 초인이라는 관념에 이르기까지를 전하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모두 4부로 구성했던 것처럼 이 곡도 4부로 이뤄져 있는데 책의 순서를 똑같이 따르진 않았습니다. 곡의 진행에 따라 8개의 에피소드적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일출’(Sunrise)로 흔히 부르는 서주가 끝나면 1 ‘세상 저 편의 사람들에 대하여’(Of the people of the unseen world), 2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Of the great longing), 3 ‘기쁨과 열정에 대하여’(Of joys and passions), 4 ‘만가’(Dirge), 5 ‘학문에 대하여’(Of Science and Learning), 6 ‘치유 받고 있는 사람’(The convalescent), 7 춤의 노래(Dance Song), 8 ‘밤 나그네의 노래’(Night Wanderer‘s Song) 등이 이어집니다.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사용돼 유명해진 부분은 바로 이 곡의 서주입니다. 전곡 연주시간은 30분이 조금 넘습니다.

 


라이너.jpg▶프리츠 라이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54년/RCA
오래도록 애청돼온 명연이다. 50년대의 녹음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음질도 좋다. 최근 SACD로도 나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프리츠 라이너(1888~1962)는 1953년부터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맡아 타계할 때까지 이끌었다. 여러 녹음 중에서도 특히 바르토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서 명연들을 내놨다. 지금 들어도 지휘자의 카리스마와 단원들의 집중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휘자의 명쾌한 해석에 단원들이 기민하게 호응하는 연주다. 곡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현악기와 목관,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금관이 곡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카라얀.jpg▶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3년/DG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1973년에 녹음한 음반도 수작으로 손꼽힌다. 그 이전에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1950년대의 음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카라얀의 대표적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 1973년의 레코딩에 비해 1983년 녹음은 보다 섬세한 해석을 보여준다. 앞의 레코딩에서 힘이 느껴지는 반면에 후자는 디테일에서의 표현력이 돋보인다. 특히 현악기의 음색이 부드럽다. 관악기들도 거칠게 뻗어나가는 부분 없이 정제된 소리를 들려준다. 이 곡이 지닌 묘사적 특성을 잘 살려내면서 음악의 세부가 생생히 살아 있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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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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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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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 6. 26.-2014. 1. 20.) [출처: 위키피디아]

지난 20일에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가 타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지휘자 중의 한 명입니다. 저는 직업이 기자인지라 아바도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부고 기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타계를 애석해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아바도가 향년 81세로 타계했다는 기사를 20분 만에 썼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개인적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사실 저는 쉰 살이 훌쩍 넘었는지라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른바 ‘나이든 한국 남자’ 축에 속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류의 세대적 특성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저는 감정의 샘이 상당히 고갈된 나이에 어느새 도달한 셈이지요. 한데 아바도 선생의 타계 소식을 접한 이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애도의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돌이켜보자니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비틀즈의 존 레논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느꼈던 것과 흡사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흘러 다녔습니다.

오늘은 이 글을 읽을 여러분과 지휘자 아바도를 함께 추모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아바도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제가 며칠 전에 썼던 글의 일부를 잠시 옮겨봅니다. “지휘자로서 아바도의 본격 행보는 라 스칼라 필하모닉의 음악감독(1968~1986)으로 시작됐다. 당시 아바도는 이른바 ‘진보적 지휘자’의 아이콘이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주류 레퍼토리였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현대 오페라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은 물론, 저렴한 입장료로 젊은 층을 극장으로 불러들였고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찾아가는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기도 했다. 정장 차림의 지휘자에 익숙했던 음악팬들이 셔츠 바람으로 지휘하는 그를 음반 커버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던 것도 신선한 경험으로 꼽힌다. 아바도는 그렇게, 앞 시대의 엄격함과 획일화에서 벗어나 청중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새로운 지휘자상의 등장을 선언했다. (중략) 지휘자 경력의 정점을 찍은 것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였다. 1989년 세상을 떠난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으로 취임한 그는 ‘나는 보스가 아니다. 우리는 같이 일하는 것이다’는 말로 자신의 지휘 철학을 피력하기도 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 6. 26.-2014. 1. 20.) [출처: 위키피디아]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군림하지 않았던 지휘자로 기억되는 아바도는 앞서 인용한 발언 외에도 의미 있는 말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게다가 그는 멋진 멘트를 날리는 것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말을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신문의 짧은 지면에서 다 전달하지 못했던 그의 ‘말’들을 몇 개만 간추려 보겠습니다. 그가 유럽 언론과의 여러 인터뷰에서 평생토록 강조했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지휘자라는 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위대한 것은 작곡가일 뿐입니다.” 2009년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지요.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50년 넘게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아바도가 내놓은 빼어난 음반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발언도 역시 영국 <가디언>의 웹페이지에 기록돼 있습니다. “내 음반들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빈 필하모닉과 1980년대에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은 그 당시로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나중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녹음한 버전이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실황으로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이 있는데 즉흥적인 맛은 있지만 여전히 연주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들이 있습니다. (중략) 예전에 시카고 심포니와 말러 교향곡 1번을 녹음한 것을 들었는데 좋지 않아요. 베를린 버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버전을 들었는데 ‘몇 가지는 더 낫다, 전부는 아니지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런 것이 인생의 비밀(secret)이 아닐까요. 늘 더 나은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영감과 열정을 발견하는 것 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할 수는 없고 언제나 새롭게 발견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오페라에서 교향곡,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아바도가 남긴 명연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바도의 음악적 생애를 대표할 만한 레퍼토리는 역시 말러의 교향곡일 겁니다. 특히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해 녹음했던 말러의 교향곡들은 그의 대표작 리스트에서 빠질 수 없는 명연으로 남아 있지요. 아바도는 2번 ‘부활’을 제외한 말러의 교향곡 거의 전부를 베를린 필하모닉과 녹음했는데, 그중에서도 6번과 7번이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연주보다는 아바도가 스스로 조직했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더 좋아합니다. 2000년 위암 발병 이후, 2002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포디엄에서 내려온 아바도는 이듬해부터 자신이 직접 만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말러의 교향곡들을 다시 연주합니다. 그야말로 음악에 평생을 바친 거장의 절절함이 담긴 명연들이지요. 위 절제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던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이 안쓰러울 정도로 퀭하게 말라 있지만, 두 눈에는 음악에 대한 갈구가 오히려 더 가득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말러의 <교향곡 6번 a단조>를 함께 듣겠습니다. 말러의 염세적 세계관이 집약된 곡입니다. 그래서 말러 본인도 ‘비극적’(Tragische)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음악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7년 전에 썼던 글 한 편을 올려놓겠습니다. 당시의 아바도는 74세였습니다. 그리고 7년이 더 흘러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드디어 연주가 끝났습니다. 지휘자 아바도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쉽니다. 구스타프 말러가 스스로 ‘비극적’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던 교향곡 6번. 자그마치 89분에 달하는 긴 항해였습니다. 무대와 객석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포디엄에 선 아바도는 솟구치는 격동을 어쩌지 못하는 눈빛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바라봅니다. 울음을 겨우 참는 것 같은 표정입니다. 그렇게 10초가량의 정적이 흐르고, 객석의 누군가가 큰 소리로 “브라보!”를 외칩니다. 이어서 터지는 박수소리.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짜릿해집니다.

지난해(2006년) 8월, 스위스의 작은 도시 루체른에서 열렸던 연주회.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74)가 2003년 자신이 창단했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말러의 교향곡 6번을 연주했습니다. 저는 며칠 전 국내에 출시된 DVD를 통해서야 당시의 감동을 맛봤지요. 비록 현장에서 확인한 실연(實演)은 아니었지만, DVD를 통해서도 벅찬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아바도의 승리였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아바도는 2000년 위암 수술을 받았지요. 1989년에 세상을 뜬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던 그는 건강 때문에 포디엄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이후에도 아바도의 병세를 둘러싼 소문은 흉흉했습니다. 외신을 통해 가끔 접할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몰골’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깡마른 데다 두 눈이 퀭했지요. 하지만 그는 2001년 5월 프랑스 ‘르 휘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악만이 나를 구해줄 거라고 확신합니다.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하는 즐거움 때문에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처럼 아바도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말러’로 돌아왔지요. 아바도는 자타가 공인하는 ‘말러 스페셜리스트’입니다. 32살이었던 1965년 독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데뷔 무대에서 빈필하모닉을 지휘하면서 선보였던 곡이 바로 말러의 2번 ‘부활’이었지요. 1989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내정된 후 첫 콘서트에서 연주했던 곡은 말러의 1번 ‘거인’이었습니다. 이후에도 해마다 빼놓지 않고 말러를 연주했지요. 건강 탓에 베를린필의 음악감독을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게 됐을 때 고별 콘서트에서도 말러의 ‘7번’을 연주했습니다. 아바도는 그렇게 음악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말러와 함께 했습니다.

번호가 붙지 않은 ‘대지의 노래’까지 포함하면 말러가 완성한 교향곡은 모두 10곡입니다. 11번째 곡인 ‘10번’은 미완성입니다. 그중에서도 ‘6번’은 말러 애호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걸작이지요. 관악기와 타악기의 배치가 유난히 두드러진 이 음악은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비극’입니다. 행진곡풍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1악장 첫번째 주제에서 이미 ‘비극적 좌절’을 예견하지요.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2주제에서 돌연 환한 햇살이 비쳐들지만 결국엔 이 햇살마저도 고독한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이 거대한 교향곡의 정점은 4악장이지요. 해머가 세 차례 커다랗게 작렬하는 순간, 삶은 순식간에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쾅! 하면서 지축을 울리는 듯이 터져 나오는 해머의 격렬한 음향은 인생의 어느 길목에선가 느닷없이 만나는 운명의 타격을 닮았습니다.

하지만 고령(高齡)의 아바도는 ‘암’이라는 운명의 강펀치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창 투병 중이던 2003년부터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매년 말러의 교향곡을 한 곡씩 연주했지요. 2번, 5번, 7번이 이미 DVD로 국내에 나와 있습니다.

이번에 만난 6번이 더욱 특별한 것은 아바도의 환한 표정 때문입니다. 속단은 어렵겠지만 그는 병마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제 ‘비극’을 지휘하면서도 당당합니다. 암을 이기고 포디엄에 다시 선 74세의 마에스트로. 그에게서 전해오는 정신의 강인함 때문에 음악의 감동이 한층 크게 울려옵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ㆍ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Lucerne Festival Orchestra)/2006년/EuroArts

본문에서 언급한 녹음이다. 말러의 교향곡을 향한 노장의 순정함이 오롯이 담긴 명연이다. 블루레이와 일반 DVD로 출시돼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ㆍ베를린 필하모닉(Berliner Philharmoniker)/2004년/DG

아바도는 자신이 과거에 이끌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을 2004년 6월에 다시 지휘해 말러의 교향곡 6번을 녹음했다. 당시의 아바도는 “12년 동안 이끌어온 악단으로 돌아가는, 실로 감동적인 귀향”이라고 말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같은 곡을 연주했던 1980년의 녹음도 호평을 받지만, 이 녹음은 그것을 뛰어넘는 명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라모폰은 “신들린 듯한 연주”라고 평했다. 아바도는 2악장 스케르초와 3악장 안단테의 연주 순서를 바꾸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말러의 모든 교향곡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나는 아내 알마에 대한 말러의 사랑이 변치 않고 주제로 녹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또 한 가지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안단테 악장이 두 번째에 위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1악장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이며 조성적인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교향곡을 말러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연주했던 것과 같은 순서로 연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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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말러의 염세적 세계관이 집약된 곡 [교향곡 6번 a단조 ‘비극적’(Tragi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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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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