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그처럼 명문대를 중퇴하고 스타트업에 뛰어들어 최고의 성공을 거둔 후 ‘일본을 구할 기업가 베스트 10’에 선정된 『내가 미래를 앞서가는 이유저자 사토 가츠아키는 이 책에서 우리가 어떤 사고방식과 지식으로 무장해야 미래를 앞서갈 수 있는지 알려준다. 미래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연속선상에 놓고 분석하여 변화의 패턴을 찾아낸다.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인간이 가진 몸과 지성(뇌)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서, 그 확장이 어떻게 전개돼 왔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논한다.

 

사토 가츠아키는 1986년 후쿠시마 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 법학부를 중퇴하고 대학 재학 중 주식회사 미탭스 metaps를 설립하여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미탭스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애플리케이션 수익화 플랫폼을 사업화하여 일본 스타트업 기업 중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금액인 5,000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다. 미탭스의 성공으로 사토 가츠아키는 〈포브스 재팬〉 선정 ‘2014년 일본 최고의 스타트업 CEO’ ‘2015년 일본을 구할 기업가 베스트 10’에 이름을 올렸다. 사토 가츠아키는 구글, 애플, 아마존과 같은 세계적 기업을 목표로 현재 기계학습과 우주 산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와세다 대학은 명문대인데 왜 대학을 중퇴하고 비즈니스에 뛰어들 생각을 하셨는지요?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저는 졸업할 때까지 수업료를 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학한 순간부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재학 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될 생각이었습니다만, 사법제도 개혁으로 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으면 변호사가 될 수 없도록 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습니다. 학력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자신의 실력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분야를 찾았더니 창업밖에는 없었고, 더욱이 젊은 나이에 승부를 걸 수 있는 곳이 인터넷밖에는 없어서 IT 관련 회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역사적 지식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으신 듯합니다. 이런 것들은 따로 공부를 하시는 것인지요? 공부를 하신다면 어떤 식으로 공부하시는지요?

 

사업을 하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주말에 책을 읽거나 사람들에게 물어서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기초로 비즈니스에 활용하고, 또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면 다시 공부를 합니다. 저의 공부법은 이런 것들의 반복입니다. 세상의 일을 알고 싶어서 사업을 글로벌하게 전개했고, 자본주의에 관한 것을 알고 싶어서 금융 사업을 시작하여 회사를 상장시켰습니다. 제 공부법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얻은 정보를 반드시 일상생활에서 시험해 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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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무엇이 있고, 그 요소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 번째는 불확실한 미래와 잘 사귀는 것입니다. 경제는 복잡한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투성입니다. 기술, 경제, 감정이라고 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역시 집착입니다. 신념이나 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비즈니스는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에 신념이나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금방 의지가 꺾이고 맙니다. 하지만 신념과 집착이 있는 사람은 역경에 부딪혀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끈질기게 사업에 매달릴 수 있기 때문에 성공 확률이 높아집니다.

 

미래에 인공지능 같은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테크놀로지에 관해서는 그 혁신성과 함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에 변화를 본질적으로 싫어합니다. 하지만 증기나 전기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메리트(장점)를 실감하게 되면 불안은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에 한해서 얘기하자면, 앞으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선이 점점 불분명해짐으로써, 그 두 가지를 대립축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에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사실 타이밍을 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타이밍을 알아내는 기준이나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리액션을 보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80퍼센트의 사람들이 고개를 저을 때, 또는 ‘바로 이거야!’라는 것은 없지만, 정보 감도가 높은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주는 상황이 바로 움직여야 할 타이밍입니다. 통계적으로 1%의 인간이 99%의 성공을 독차지하는 것이 경제의 본질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책에서 자본주의가 저물고 가치주의가 도래한다고 하셨는데, 자본주의와 가치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지요?

 

목적으로의 회귀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를 풍요롭게 하기 위한 틀로서 발달해 왔지만, 중간에 자본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수단의 목적화입니다. 다만 자본의 원천인 경제적인 가치를 축적하거나 교환하는 방법이 다양화된 세계에서는, 본래의 목적인 사회나 개인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 사람들의 초점이 맞춰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다양화가 진행되고 있는 선진국의 젊은이들은 돈만으로 커리어를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창업에 관심이 있는 직장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

 

비즈니스를 세계적으로 전개함에 있어서, 한국은 제가 태어난 일본과 가장 닮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처럼 적극적으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진심으로 창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라이벌이 적은 유리한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책이 그런 분들이 창업하는 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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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래를 앞서가는 이유사토 가츠아키 저/양필성 역 | 스몰빅인사이트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그처럼 명문대를 중퇴하고 스타트업에 뛰어들어 최고의 성공을 거둔 후 ‘일본을 구할 기업가 베스트 10’에 선정된 저자 사토 가츠아키는 이 책에서 우리가 어떤 사고방식과 지식으로 무장해야 미래를 앞서갈 수 있는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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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스타트업 천재사업가가 미래를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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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날'입니다. <채널예스>는 ‘책의 날’을 맞아, 특색 있는 책을 만들고 있는 출판사와 잡지사를 만나보고, 양서를 추천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2년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있는 출판사는 총 4만 2천157개다. 2003년 2만 782개를 시작으로 해마다 수천 개씩 출판사가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1년에 책을 1권도 발간하지 못하는 출판사가 94%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면, 출판사의 수만큼 책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들의 모토는 각기 다르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데 열을 올리는가 하면, 스테디셀러에 집중하는 출판사도 있다.

 

1988년 창립해, 올해로 26주년을 맞은 눈빛출판사는 명확히 후자다. 사진집, 사진이론서, 사진기술서 등 전문서적으로 발간하는 출판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눈 밝은 독자들은 언젠가 좋은 책을 발견해준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는 사진기술서가 전부였던 사진출판 분야에 사진사(寫眞史)와 함께 현대사진의 제이론을 소개하고, 역량 있는 새로운 작가를 배출해 다큐멘터리 사진의 부흥을 불러일으켰다. 형식주의 사진 일변도인 한국사진에 동화되지 않고, 작가주의 사진가들의 오랜 권위와도 선을 그으며, 기록과 재현으로서의 사진을 일궈 왔다. 수많은 전문서적 출판사가 새롭게 문을 열고 닫을 때, 눈빛출판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저자를 발굴하고 책을 펴냈다. 이경모, 김기찬, 이형록, 김한용, 구와바라 시세이, 윤주영, 전민조 등 작고 및 원로 사진가들의 사진을 발굴한 것도, 미술평론가 존버거의 저서를 선구적으로 소개한 것도 ‘눈빛출판사’다.

 

눈빛

 

책에서 얻은 수익은 책에 투자한다


‘국내 유일의 사진전문출판사’ 눈빛은 서구화, 산업화로 잃어버린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한 책들을 주력해 출간하고 있다. 저자를 선정할 때, 사진의 완성도가 첫째로 보지만 진실성이 있고 자기세계가 분명한 작품이라면 출간을 염두에 둔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저자와의 계약기간 동안만 책을 관리하는 데에 반해, 눈빛출판사는 장기간 저자와 책을 집중적으로 관리한다.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는 “전문서적이다 보니, 단시간에 팔리는 책들이 많지 않다. 덕분에 오랫동안 관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눈빛출판사에서 책을 펴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모든 사진에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다. 첫 페이지의 사진부터 마지막 사진까지, 흐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치한다. 전문서적인 까닭에 마케팅에는 큰 힘을 쏟지 않는다. 눈빛출판사는 좋은 책은 언젠가 독자가 알아준다는 무한한 믿음이 있다.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는 “책 값을 놓게 책정하지 않는 편이다. 독자들이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으로 500부라도 판매해 저자에게 작은 인세라도 줘야, 다른 책들이 또 다올 수 있다”고 말했다. 아날로그시대의 출판물을 정리하는 ‘눈빛 아카이브’ 시리즈를 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력이 많이 들지만, 시대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책임감으로 꾸준히 출간할 계획이다.

 

눈빛출판사는 “전문성이 곧 대중성”이라는 신념 아래, 전문출판사로서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 직원은 세 명뿐이지만, 기획부터 교정, 편집, 인쇄 감리 등 각자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규상 대표는 사진에 관심이 많지만 작가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이 대표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작가라는 이름보다 편집자, 경영자의 역할이 걸맞다”고 말했다. 눈빛출판사가 26년간 책을 펴낼 수 있었던 이유로는 ‘책에서 나온 수익은 다시 책에 투자하는’ 출판사의 사명을 꼽았다. 또한 오로지 책을 펴내는 일에만 열중했던 것이 눈빛출판사의 저력이다. 눈빛출판사의 주요 독자는 사진전공자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최근에는 사진애호가가 늘면서 일반 독자들도 사진집을 즐겨 찾는다. 최근 2년간 눈빛출판사의 스테디셀러는 임재천의 『한국의 재발견』과 김기찬의 『골목 안 풍경』, 최민식의 『휴먼 선집』 등이다.

 

눈빛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

 

지난해 눈빛출판사는 창립 25주년을 맞아 기념도서전을 열고, 신간 사진집 3종을 선보였다. 임재천의 『한국의 재발견』, 정태원의 『서울발 사진종합』, 이창성, 전민조 등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엮은 『한국의 보도사진』이다. 『한국의 재발견』은 450부가 사전예약으로 마감되고, 출간 열흘 만에 2쇄를 찍을 만큼 큰 반응이 있었다. 오는 4월 말에는 이스라엘계 프랑스인이 집필한 한국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한국의 여성들』이 출간될 예정이다. 이규상 대표는 “지금까지 만든 책 가운데, 에피소드가 가장 많을 정도로 애를 많이 쓴 책이다. 1920년대에 태어난 여성부터 1990년대 젊은 세대 여성들까지 골고루 인터뷰했다. 전통의 굴레 안에서 한국여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깊이 있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눈빛출판사에서는 4월 2일부터 6월 4일까지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사진 토크쇼 ‘사진의 정체성을 찾아서’를 진행한다. 한국사진의 미래에 대해 살펴보는 강연으로 신수진, 신미식, 원덕희, 구본창 작가 등이 참여한다. 사진전공자들을 비롯해 사진애호가들의 반응이 뜨겁다.

 

눈빛

 

눈빛출판사가 선정한 스테디셀러


북녘사람들(1989년)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가 6.25전쟁 이후 북한의 모습을 담은 책. 2008년 저자의 동의를 얻어 개정판으로 재출간해 한국어판이 현재 남아 있는 크리스마커의 유일한 북한관계 사진집이 되었다. 한국어판이지만, 저자의 명성에 힘입어 미국과 유럽에서도 종종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격동기의 현장(1989년)
해방과 분단의 민족사를 기록한 이경모의 사진집으로 출간 당시, 언론의 큰 호평을 받았다. 일본사진가협회 회보와 잡지 <아사히 카메라>에도 소개되었으며, 사진집 사상 초유의 6쇄를 기록했다. 2010년 특대판으로 개정 출판했다.

 

제7의 인간(1992년)
미술비평가이자 소설가, 사진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영국 작가 '존 버거'의 저서로,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을 기록했다. 1970년대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의미는 한국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현실에 해당된다. '제7의 인간'은 그 당시 유럽의 육체노동자 일곱 명 중 한 명이 외국에서 들어온 이민노동자인 데서 붙여진 제목이다.

 

행운아(2004년)
존 버거가 집필하고, 장 모르가 사진을 찍은 작품으로, 영국의 작은 시골마을 의사 ‘존 사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존 버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행아’로 만드는 현대사회에서 ‘총체성’을 지닌 ‘행운아’인 한 시골의사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에 부여되는 가치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사진예술개론(2007년)
사진작가 한정식 교수의 『사진예술개론』의 개정판. 미술개론과 같은 성격의 개론서로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의 특성, 카메라, 렌즈, 촬영, 빛, 사진적 시각, 주제와 소재, 엮음사진, 사진과 예술, 사진의 역사적 전개 순으로 소개하며 기초 이론에 실제 작업한 사진을 함께 논했다.

 

골목안 풍경 전집(2011년)
사진가 김기찬의 사진전집. 기존에 나왔던 김기찬의 사진집들이 절판되거나 품절되기 시작해 눈빛아카이브 전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출간이 되지마자, 4쇄를 돌파하는 등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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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사진전문출판사 눈빛, 눈 밝은 독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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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땡스기브 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 


예스 블로거 친구분들께서는 책과 함께 알찬 여름 보내고 계시겠지요?


어느덧 땡스기브가 발행하는 땡스북이 4호까지 나오고 


곧 5호 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좋은 삶은 좋은 책 없이 불가능합니다."



라는 문구를 마음에 새기며 


많은 분들이 좋은 책을 접하실 수 있도록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땡스북을 통해 점점 많은 분들과 만나게 되고


또 그 만남이 더 큰 가치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동시에 품어봅니다. 



지금까지 땡스기브는 많은 분들께 기증 받은 도서를


지역아동센터, 작은도서관, 해외한국사설문화원, 공부방, 군부대, 청소년 시설 등 


꼭 필요한 곳에 전달해 왔습니다. 



중고도서라도 기쁘게 받아주시고 


소중하게 사용하겠다는 인사를 받으면 어쩐지 더 좋은 책을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땡스기브에 도서기증을 문의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증 할 책이 점점 소진되고 있는 상황이라


모든 요청에 응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더해가네요 



혹시 블로거 친구분들의 서재에 


단 한 권이라도, 


책이 필요한 아이들, 청소년들, 문화 소외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책이 있을까요?



저희에게 기증해 주세요!


책을 읽으며 누리신 즐거움과 깨달음을 다른 분들에게도 공유해 주세요!



그 작은 실천을 통해 한 사람이 변화되고 

또 사회가 변화되리라 믿습니다. 



많은 블로거친구분들의 참여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사단법인 땡스기브는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비영리 독서운동단체로 기부금 영수증 발급이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증받을 곳 : 서울 서초 도구로 1길 75(방배동 도브빌 301)











[YES24] 블로거 친구분들께 마음을 담아 드리는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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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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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적의 종류는 상관이없는거죠? 집에 한번 좋은책있나 둘러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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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집단의 별점 테러도 특정 대통령을 찬양하려는 영화라는 선입견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모두 내려놓아도 된다. <변호인>은 좌우의 논리를 설파하는 정치 영화가 아니다. 그저 상식적이기를,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기를, 어떤 공권력도 제 국민을 폭력으로 제압해서는 안 된다는 그 상식을 말하는 영화다.
헌법 제1조 2항 -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양우석 감독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모순을 되짚고, 상식을 실천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변호인>에 가득 담아둔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실화와 픽션의 경계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법 앞에, 권력 앞에 대한민국의 국민이 평등하기를 바라는 진심을 펼친다. 그러니 좌파니 우파니 극우니 극좌니 종북이니 하는 편 가르기 따위는 모두 내려놓자. <변호인>이 품는 사람과 세상은 당신들, 대한민국 국민이라 불리는 우리 모두이다.


상처받은 국민을 품어내는 진심

고졸 출신에 백도 학벌도 없다는 이유로 계속 밀리는 자신의 처지를 돈 버는 수완으로 극복하려는 송우석은 변호사라는 타이틀로 그저 돈을 버는 게 억수로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바위 같은 세상의 질서를 바꾸겠다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철없다고 비난한다. 그런 그가 국가보안법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된다. 그러면서 그 역시도 이 세상의 모순에 눈을 뜨게 된다. 폭력과 비상식을 용납할 수 없게 된 그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 법정에서 다섯 차례의 공판을 벌인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자행되었고, 그 폭력의 가해자들 어느 누구도 벌을 받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변호인>이 소재로 삼은 부림 사건은 1981년 제5공화국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 초기에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다. 1981년 9월 부산 지검 공안 책임자인 최병국 검사의 지휘 하에 부산 지역의 양서협동조합을 통하여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ㆍ교사ㆍ회사원 등을 영장 없이 체포한 뒤,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하며 구타는 물론 살인적 고문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서모임이나 몇몇이 다방에 앉아서 나눈 이야기들이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단체의 '이적 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로 날조되었다. 부림 사건을 모르는 관객이건, 아는 관객이건 반복되는 영화 속 공판을 지켜보면서 관객들은 상식과 준법이 정의의 이름으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동시에 공안정치가 만들어내는 말도 안 되는 조작에 분노하지만, 이미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낯설지 않은 과거에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잘 알려진 대로 <변호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변모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부림 사건을 소재로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변호인>은 노무현 대통령을 추억하거나 영웅시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더 큰 틀에서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다. 특정 인물과 특정 사건을 떠오르게 하기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우리의 현재를 대변하는 영화다. 영화 속 송우석은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법고시를 통과했지만, 고졸이라는 이유로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래서 돈이나 벌어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을 지켜보겠다고 결심한다. 열심히 돈을 벌지만, 본성은 따뜻하고 모질지 못하다. 그런 그에게 자각의 순간이 찾아오는 건 잘 아는 학생이 무고하게 빨갱이 혐의를 받아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부터다. 상식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 그는 상식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몰상식의 세상은 2013년 지금, 현재 우리가 딛고 선 한국의 현실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변호인>은 법이 만인에게 공평해야한다고 믿는 원칙주의자가 모순된 세상과 맞서 싸우는 보통 사람이 이끄는 휴먼 드라마이다. 상식의 논리 속에서 극의 몰입도를 탄탄하게 이어가는 연출력은 물론이고, 한 치도 흔들림이 없는 송강호의 연기는 <변호인>을 단단하고 올곧게 짊어지고 간다. 그리고 앞서 실화에 초점을 맞춘 <남영동 1985><부러진 화살>의 등장인물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강한 정의감에 불타는 선구자의 모습이었다면, <변호인> 속 송우석은 현실에 어쭙잖게 타협해 사는 우리 소시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의 변화를 이끄는 ‘진심’은 더욱 강한 공감으로 남는다. 정치적 관점을 떠나 하나의 법정 드라마로서도 대중 영화로서도 <변호인>은 꽤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날, 철도노조 파업 때문에 민주노총 본부에 공권력이 투입된 사건이 벌어졌다. 1995년 민주노총 설립 이래 초유의 사건이라고 한다. 공권력의 투입을 저지하기 위해 나선 국민들에게 경찰은 최루액을 분사하고 120명을 강제 연행했다. 사람들은 유신정권이 다시 도래했냐고 비난하고 분노하는 중이다. 순간 부림 사건의 검사였던 최병국씨는 안녕하신지 궁금해졌다. 1997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부장검사를 거쳐, 2000년 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후 3선 의원이며 1989년에는 홍조근정훈장까지 수상하였다. 근정훈장이란 “공무원(군인ㆍ군무원 제외)으로서 직무에 정려(精勵)하여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우리가 오늘도 내일도 안녕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의 정권과 법은 역사 속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너무 많은 죄인들에게 면죄부를 허용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반성하는 법이 없었다. 악랄한 역사가 되풀이 되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그들을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고, 아이러니하게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사과한 적도 없다. 국민이 역사 앞에서 사과 받을 일 없는 세상, 그 공정한 세상을 꿈꾸는 우리가 있는 한 <변호인>이 주장하는 평등의 권리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진심이다. 미국의 소설가 이디스 워튼은 “빛을 퍼트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은 촛불이 되거나 혹은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변호인>이 말하는 바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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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개한 사회를 향한 쓴 소리: <노리개>, <공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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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내일도 안녕하지 못할 우리(2) : [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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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주변인 삶을 위한 총, 명, 강..그리고 不誠無物 본질의 가치와 변화의 기술적 혁신을 파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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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친일파,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 미화' 뉴라이트, 힘 싣는 여당…"두렵다"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학살,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학살, 네 번째 마당] "애가 부모에게 수류탄 던졌다"? 무서운 이승만
[학살, 다섯 번째 마당] 일본도로 국민 목 친 학살자가 이순신과 동급?
[학살, 여섯 번째 마당] "좌익이 영광에서 5만6000명 학살? 그건 아니다"


프레시안 : 학살 피해 유족이 오히려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

서중석 : 대학살은 우리 사회를 너무나 끔찍한 사회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숨도 못 쉬는 질식된 사회로 만들었다. (4.3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 작가는 이걸 칠흑 같은 어둠의 사회라고 표현했다.

(학살 후 오랫동안) 시신 처리도 제대로 못하지 않았나. (1960년) 4.19 이후에야 시신 처리를 한 지역이 꽤 많다. 집단적으로 뼈가 나뒹굴고 그랬다. (학살 피해를 겪은) 한 동네가 온통 울음바다가 될 수밖에 없는데도, 제사조차 조용히 지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학살 문제,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신군부의 학살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우리가 일본의 과거사 문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추궁하면 일본인 가운데 나쁜 사람들, 그러니까 극우로 불리는 사람들이 꼭 걸고넘어지는 게 있다. '너희들은 베트남에서 뭐했느냐.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나.' 그 사람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참 열심히 파고드는 거 같다.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는 건 눈곱만큼도 없다. 이런 점도 한국의 극우 반공 세력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하여튼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비난받을 짓을 왜 했는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광주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자행된 그 엄청난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라든가 책임 규명 같은 게 있었다면, 베트남이나 광주에서 그런 일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를) 반성하고 참회하기는커녕, 4월혁명 후 자연스럽게 진상 규명 운동이 일어나자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철저히 탄압하고 (진실을) 숨기지 않았나. 앞에서 말했듯,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 일반인에게 최초로 공개된 게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월간 <말>을 통해서다.

우리 사회가 그런 식으로 대처했기 때문에 그런 일(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과 1980년 광주 학살)이 일어난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도, 너무나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학살 사건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할 수 있는 한까지는 책임 추궁을 해야 하는 거다. 6월항쟁 이후에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베트남과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프레시안 : 학살 피해 유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4월혁명과 5.16쿠데타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렇다. 학살 문제는 4.19 이후에야 부분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다시 사회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주로 경상도와 제주도 지역에서 유족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유골도 발굴하고 위령제도 하고 위령비도 세웠다. 그러면서 진상 규명 운동이 일어났다.

호적 정리를 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호적 정리가 안 된 경우가 있었다. 시신을 처리할 수가 없으니까, 죽은 것이 불분명한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신 처리를 못하는데 어떻게 호적 정리를 할 수 있었겠나. (그래서 학살된) 아버지가 (법적으로는) 살아 있는 걸로 돼 있던 경우가 꽤 있었나 보더라.

5.16쿠데타를 계기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쿠데타 세력은 혁신계 인사,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학살 피해자) 유족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대거 체포했다. 그러고 '혁명 재판'을 하는데 '유족회에서 허위 선전을 했다. 용공 사상을 고취했다. 군경을 학살자로 몰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중형을 선고하고 그런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건가.

거창만 하더라도 (4월혁명 후) 새로 (피학살자 합동) 묘지도 만들고 위령비도 세우고 그랬다. (그런데 5.16쿠데타 후) 그 위령비는 (정으로) 쪼아서 땅속에다 묻고 묘지도 파헤쳤다. 제주도에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란 게 있는데, 그것도 똑같은 변을 당한다. 이렇게 묘를 파헤치고 위령비를 쪼아서 파묻거나 훼손하는 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특히 한국은 이걸 금기시하는 사회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랬다. 이걸 '제2의 학살'이라고들 부른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주도의 보도연맹원 등이 경찰의 예비 검속에 걸려 모슬포 송악산 부근에서 학살됐다. 유족들은 6년이 흐른 후에야 현장을 찾아 유골 중 일부인 132구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뼈들이 뒤엉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유골을 모아 백조일손지묘를 만들었다. 백조일손지묘는 '서로 다른 132명의 조상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은 모두 한 자손'이란 뜻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심복들이 학살을 자행하고도 영전했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5.16쿠데타 세력이 유족들에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5.16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16쿠데타를 한 이유와 관련해) 나중에는 경제 발전이나 근대화를 많이 역설하고 내걸지만, 5.16을 일으켰을 때 '혁명 공약' 첫 번째가 반공 태세를 재정비해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그 굳건한 반공 체제가 어떻게 성립됐나. 학살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극우 반공 세력의 도덕성에 대해,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해 근간부터 회의를 품게 하고 비판하게 하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학살 문제다. 극우 반공 세력을 그렇게 몰아세울 수 있다는 건 (학살 문제가) 극우 반공 체제를 그야말로 뿌리째 흔들 수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제2의 학살로 불리는 일들을 한 것 아니겠나.

하나 더 이야기하면, 6월항쟁 이후 사람들이 과거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4.3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 같은 것에 대해 민간 차원에서 조사하고 증언을 채록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증언을 거부했다. '4.19 나고 얼마 후 5.16이 터지면서 그렇게 고초를 겪었는데, 5.16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느냐'며 침묵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사회에 얼마나 심각하게 파고들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참담한 모습이다.

▲ 학살 문제는 극우 반공 세력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들은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제2의 학살'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발굴된 두개골. 대부분의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다. ⓒ연합뉴스


5.16쿠데타 세력이 자행한 '제2의 학살'

프레시안 : 유족을 고통스럽게 한 건 5.16쿠데타 직후의 그런 일들만이 아니었다. 연좌제도 이들을 괴롭혔다.

서중석 : 연좌제는 집단 학살과 관련된 또 하나의 커다란 비극이다. 고약한 연좌제가 현대 사회에서 철저하게 시행됐다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다. 그 사람들이 연좌제 때문에 받은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현대사를 알 수가 없다.

연좌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는지는, 조정래 소설 <한강>을 비롯해 여기저기 많이 나온다. (예컨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학살 피해자인) 자기 아버지나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잘 모르는 거다. 그런데 이걸 언제 알 수 있느냐. 진학이나 취업을 할 때 뜻밖에 아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어떤 특정 학교에 가려는데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불합격 통지가 온다든가, 공무원에 응시하거나 특정한 데 취업하려 할 때 '너는 안 된다'는 딱지가 붙는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어머니에게 묻기도 하고 호적 조회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연좌제에 묶여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일도 꽤 있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좌익과 연관된 게) 아무것도 없던 아버지가 집단 학살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취직이 안 되는 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니, 아버지가 빨갱이로 (분류)돼 있었다. 다시 말해 군인들이 집단 학살을 하고 나서 전과를 올렸다고, '다 빨갱이라서 죽였다'고 보고한 거다. 호적 같은 데에도 그렇게 기록되면서 연좌제에 묶인 거다.

프레시안 : 학살 피해자를 좌익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중석 : 유신 체제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우리가 외국에 (많이) 나가기 시작한 게 1970년대, 그중에서도 1974~1975년경부터 중동 건설 붐을 타면서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중동에 노동자, 사무원으로 나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연좌제에 묶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연좌제에 걸리면) 여권이 안 나왔다.

여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독립 운동가 김순애 여사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고통을 많이 많았다. 그런데 4월혁명이 났는데도 이분의 여권이 상당 기간 안 나왔다. 이분은 독립 운동으로 포상을 받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이 임시정부 부주석이던 김규식 박사다. 일제 때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는 걸 차치하더라도, 김규식은 해방 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꼽혔다. 한국전쟁 때 김규식은 납북됐는데, 그 부인은 좌익에 협력한 걸로 기록돼 있다는 이유로 여권이 안 나온 거다. 세상이 다 아는 김규식 부인 김순애 여사, 독립 운동가 김순애 여사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불이익을 받았겠는가.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파괴한 연좌제…성역은 있었다

프레시안 : 연좌제가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제도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면, 그걸 적용하는 데서도 형평성을 잃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단적으로, 남로당의 고위 프락치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좌제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서중석 : 1960∼1970년대에 나도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연좌제에 제일 묶여야 할 사람들은 자유롭고 열심히 살아보려는 일반 백성들만 피해를 보는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 뭐냐 하면 남로당에 관계한 걸로 볼 때 박정희야말로 연좌제에 묶일 만한 사람이고, 김성곤도 박정희의 형 박상희하고 (1946년) 10월항쟁에 관련된 사람 아니냐는 거였다. (김성곤은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계 실력자였다. 해방 직후엔 경북에서 좌익 활동을 했다. 박상희 외에도, 5.16쿠데타 후 김일성의 밀사로 내려왔다가 처형되는 황태성도 이때 함께 활동했다. 김성곤은 쌍용그룹 창업주이기도 하다. <편집자>)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화당 핵심부엔 혁신계 인사들이 몇 명 있었다. '(고위층은 빠지고 힘없는 사람들만 연좌제로 고통을 당하는) 이건 도대체가 말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그 시기에 돌고 그랬다. 은밀하게 하는 얘기였지만 뼈 있는 얘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연좌제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다, 학살 피해자인 자신의 가족을 원망하는 슬픈 일도 적잖았다.

서중석 : 연좌제 때문에 가치관이 전도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사례를 하나 들면,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형의 묘를 동생이 파헤치려 한 일도 있었다. 형을 불쌍하게 여기던 동생이었는데,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고통을 당한 데다 자기 아들이 경찰대 시험에서 떨어지면서 그렇게 변한 거다. 아들이 경찰대 시험 1차와 2차는 다 됐는데 3차에서 안된 게 (학살된) 형 때문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그것(연좌제)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고 본 거다.

사실 연좌제에 묶인 사람들 중엔 부모를 원망하는 경우가 참 많다. 부모를 저주하는 경우도 많다. '가족을 학살한 군경이나 이승만 정권의 잘못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건 우리 아버지, 형이 잘못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거다). 하도 고통을 당하다 보니까 '죽은 사람 잘못이다' 같은 사고도 생기고 그랬다.

제주도에서는 부모가 4.3 때 죽었다는 이야기를 절대로 안 한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해선 말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자기는 4.3과 무관한 것처럼 (행동하는 거다). 그것에 대해 말을 잘못하면 엄청난 피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4.3으로 죽었다', 이 자체가 어떤 낙인이 찍히는 근거처럼 된 적이 있지 않았나.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건가.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기억과 참회는 한국 사회의 의무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도에서 진보적인 흐름이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모습이 학살을 비롯한 한국전쟁 당시 경험과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서중석 : 어째서 이승만 정권 시기에 진보 세력, 야당 세력이 경상도에서 셌느냐. 1952년 정부통령 선거건 1956년 정부통령 선거건, 조봉암 몰표가 나온 곳이 경상도다. 투·개표 부정, 특히 개표 부정이 이 지역에선 아주 심했다고들 이야기하는데도 그렇다. 1960년 3∼4월 시위도 경상도에서 많이 일어난다. 2월 28일 대구 지역 학생들이 제일 먼저 일어났고,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두 차례에 걸친 의거가 일어나는 곳도 마산이다. 부산에서도 고등학생 시위가 많았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후에도 경상도에서 혁신 세력이 강했다. 교원노조가 강세를 보인 곳도 이 지역이다.

이걸 (잘 모르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18년 동안 경상도를 근거로 삼은 것 아닌가. 특히 유신 독재 때 더 심했다. 그리고 1990년대, (그중에서도) 특히 'IMF 사태' 이후 박정희에 대한 강한 향수와 더불어 복고주의적인 분위기가 이 지역과 연관돼 일어났다. 그런 걸 볼 때 (경상도에서 진보 세력이 강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가 보다. 그러나 사실이다.

어째서 1950년대에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이것에 대해 몇몇 학자가 연구한 게 있다. 우선 이 지역은 해방 직후에도 전라도와 함께 좌익 세력이 대단히 강했던 곳이다. 중부 지방이 오히려 약했다.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다음에 대구와 임시 수도 부산이 한국전쟁 때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때 이승만 정권의 비리, 부정부패, 그리고 부산 정치 파동을 겪었다. 그러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

이런 것도 작용했겠지만,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이 대부분 인민군의 지배를 받지 않은 점이 큰 역할을 한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연구가 많다. 인민군은 경상도 일부를 잠깐 점령했을 뿐이다. 그런 것들이 연결되면서 1950년대에 조봉암을 비롯한 야당 지지 지역, 4월혁명 이후엔 혁신 세력과 교원 노조가 강한 지역이 된 게 아니겠나.

1964년부터 한일회담 문제로 학생 시위가 또 치열해지는데, 그 무렵 '서울대 문리대가 시위의 진원지이자 사령탑'이라는 얘기가 한때 있었다. 그때 주동자급이 대개 경상도 사람이었다. 내가 1967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학생운동을 쥐고 있던 쪽이 경북고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쪽이었다. 그때를 전후해 그쪽 세력이 쇠퇴하는데, 그게 박정희 정권이 강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란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 마당을 닫을 때가 됐다.

서중석 : 홀로코스트에 대해 독일의 역대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유럽인이 참회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있었던 이 참혹한 학살을 영원히 기억하고 참회해야 한다.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그러하다. 그래야 화해도 있을 수 있는 거다.

이 시기에 학살당한 사람들 중 (아직도) 유골 발굴은 물론 시신 처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들이 참 많을 거라고 보고 있다. (예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를 비롯한 여러 과거사 위원회가 만들어져 몇몇 지역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이 규명되고 명예가 회복됐다. 이런 건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화해위 활동 중에는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끝난 게 많다. 무엇보다 유골 발굴, 시신 처리는 제대로 안됐다. 진실화해위에서 다 못한 일을 몇몇 민간단체에서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걸로 아는데, 다시 정부 차원에서 유골 발굴, 시신 처리는 물론 유적지 복원 등의 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나.

세계적으로도 1990년대 이후 과거사 문제, 특히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에 대해 일본을 끊임없이 추궁하고 있는데,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고 참회해야 일본에 대해서도 훨씬 당당한 모습으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인권이 숨 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역사에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인간에게는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지 않나.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거다. 인간성, 인권, 민주주의, 자유에 가장 역행하고 그것을 말살하는 행위가 바로 학살이다. 학살은 인류가 저지른 잘못 중 최악이다. 최악 중의 죄악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남아 있는 우리가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추궁하고 희생자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기억하고 참회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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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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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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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학살,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학살, 네 번째 마당] "애가 부모에게 수류탄 던졌다"? 무서운 이승만
[학살, 다섯 번째 마당] 일본도로 국민 목 친 학살자가 이순신과 동급?


프레시안 : 민간인을 학살한 건 군경과 우익만이 아니다.

서중석 : 한국전쟁 시기, 좌익에 의한 학살도 상당히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조사와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 학살과 같은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선 어느 누가 저질렀건 그 책임을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그렇게 해야 한다.

어릴 때도 좌익에 의한 학살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특히 많이 들은 건 1970년대 들어서였다. (전에) 좌익이 얼마나 학살을 많이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료들을 찾아봤었다. 극우 반공 세력이 '상기하자 6.25' 할 때 제일 큰 게 좌익의 학살 만행 아니겠나. 그러니 좌익이 저지른 학살 만행에 대해 극우 반공 세력이 상당히 조사해놨을 거다, (자료로) 쓸 것이 참 많을 거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가 않더라.

프레시안 : 실제로 어떠한가.

서중석 : 자료가 나오더라도 아주 간단하게만 돼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데이터를 냈는지를 알 수 없게 해놨다. (그 당시) 국사책엔 많이 안 나오더라. (그래서) 1960∼1970년대에 반공 교육이 강화됐다고 많이들 이야기하니 '당시 반공 관련 책에는 (좌익의 학살 만행을) 많이 써놨을 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걸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예컨대) <반공도의 교본>이라는 책이 있다. '북괴'의 만행을 강하게 지적한 책이다. 구체적인 것이 있는가 하고 봤지만, 정작 그런 건 별로 없었다. 써놓은 것도 뭐라고 써놨는고 하니, "6.25사변이 일어난 이후 처음으로 양민이 학살된 것은 강화도 지구에서 군인·경찰 가족 약 500명이 희생된 것이다", 그렇게 돼 있다. 그 뒤엔 이렇게 돼 있다. "광주와 전주 지구에 있는 각계 저명인사와 경찰 가족 약 2000명이 학살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는 무죄한 시민과 군경 유가족 약 1000명이 학살(…) 인천에서도 1500여 명의 우리 형제들이 (…) 죽어갔다." 이렇게만 돼 있다.

이걸 그대로 인용할 수 있겠나. 어떤 식으로 학살됐는지를 밝혀놔야 그걸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데, 이건 분석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그리고 숫자도 500, 2000, 1000, 1500 이렇게 돼 있다. 추정치라고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참 인용하기가 힘들다. 구체성이 약하다. 놀랐다.

또 대검찰청 수사국에서 낸 <좌익 사건 실록>에 좌익이 저지른 수많은 사건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한국전쟁기 학살을 많이 다뤘을 거라 봤는데 (그렇지 않았다). 몇 건 있긴 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더라. '반공 세력이 이 부분(좌익에 의한 학살)만은 잘해놨을 거다. 우익이 좌익을 죽인 것 또는 군경이 집단 학살을 한 건 안 써놨을지 몰라도 이건 써놓지 않았겠나' 했는데 잘 안 나온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좌익에 의한 학살을 이승만 때보다 유신 시대에 더 강조한 이유

프레시안 : 예상 밖이다.

서중석 : 그런데 더 놀라운 걸 발견했다. 6.25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이 6.25 담화를 꼭 하지 않았겠나. '여기엔 학살 얘기가 나올 거다.' 그래서 찾아봤는데, 담화가 길고 반공 얘기가 무척 많이 나오는 건 틀림없다. 그런데 학살 만행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렇게 돼 있을까.

우리가 반공 교육 받을 때 6.25 하면 '괴집' 또는 '북괴'에 의한 학살 만행이었다. '괴집'은 1950년대에 많이 쓴 단어다. 북한 괴뢰 집단(의 준말이다). '북괴'란 말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많이 썼던 단어다. 그 단어 하면 바로 집단 학살, 이런 식으로 연상되는 교육을 많이들 받지 않았나. 그러니 틀림없이 이승만 담화에 그게 얼마나 많이 강조됐겠는가 했는데, 그렇지 않더라.

놀랍게도 이게 많이 언급되는 것은 유신 시대다. 사실 1968년에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틀 후엔 푸에블로호 사건도 벌어졌고, 가을엔 울진·삼척 게릴라 침투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나. 그러니까 (강조되려면 그렇게 전쟁 위기가 고조된 1968년) 그때 강조됐어야 하는데, 그때보다도 오히려 유신 시대에 많이 강조되더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는 어린애 동상이 도처에 세워지는 것도 유신 시대다. 가만히 보니 1975년 이후에 많이 세워지는 것 같다. 1975년은 인도차이나 사태(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공산화. <편집자>)로 보수층에 상당히 위기감이 감돌면서 반공 구국 대회가 많이 열린 때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거였다. 그 시기에 '북괴' 만행이 아주 강조되면서 초·중·고 교재 같은 데에서 이 부분을 특별히 많이 교육시키도록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내가 여러 자료를 읽어봤는데, 구체성은 없다. 다만 '무지무지 나쁘다. 아주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것이 누차에 걸쳐 강조돼 있다.

학살 책임 문제에 성역은 없다

프레시안 :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중석 : 한국전쟁 때 (각 지방의) 좌익, 북한의 정치보위국 등과 관련된 학살이 여러 군데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50년) 9.28 수복을 전후해 대전형무소나 광주형무소 같은 데서도 학살이 일어났고, 전라도 지방에서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 예컨대 (전북) 임실이나 순창 등에서 수백 명이 좌익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6월항쟁 이후 전라북도 도의회에서 조사해 만든 보고서에 나와 있다.

<좌익 사건 실록>에 제일 큰 사건으로 나오는 것은 (전북) 옥구군(지금의 군산시 옥구읍) 미면에서 발생한 학살이다. 현지 좌익이 이틀에 걸쳐 600명에 가까운 주민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적혀 있다. 고창군에 있는 여러 면에서는 빨치산이 400여 명을 학살했다. 이런 지역은 9.28 수복을 전후해 정말 '낮에는 경찰, 밤에는 인민군' 식이거나 상당히 오랫동안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런 속에서 여러 학살이 일어나더라.

좌익에 의한 학살이 제일 크게 일어난 곳은 (전남) 영광이 아닌가 싶다. 한 지역만 놓고 얘기하라고 하라면 그렇다. 변진갑 의원이 국회에서 1951년 2월에 얘기한 것을 보면, 5만6000여 명이 학살당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1951년 4월 국회 속기록(의 변진갑 의원 발언)을 보면 3만8000여 명으로 줄었다. (변 의원이 말한 희생자 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엄청난 학살이다. 그래서 난 항상 이 부분이 궁금하고 관심이 많이 갔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정말 이 숫자가 맞을까, 궁금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좌익에 의한 학살만 담당하는 부서를 따로 두고 연구했다. 당연히 영광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쪽 연구 관계자 말로는, 1만 명 이상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좌익이 이 지역에서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 그건 사실이다.

프레시안 : 좌익과 우익 모두 학살 만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많은 민간인에게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든다.

서중석 : 그렇다. 아까도 강조했지만 어떤 학살이건 진상을 조사하고 연구해야 함과 동시에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고 잘못에 대해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비율 얘기를 안 할 수는 없다. 비율이 문제다.

이것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자료는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에서 낸 진상 조사 보고서다. 고건 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이 위원회에서 2003년에 통과시킨 공식 문서다. 거기에서 1만3564명이 희생자로 규정됐다. 실제 죽은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다.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더) 많은데, 신고가 이뤄진 사람 중에서 소수를 제외하고 위원회에서 군경까지 포함해 희생자로 결정했다. 이 가운데 토벌대에 의해 1만1450명이 죽었다. 84.4퍼센트다. 무장대, (그러니까) '산사람'에 의해서는 12.3퍼센트에 해당하는 1673명이 죽었다. 나머지는 불명 등이다. 바로 이 84.4퍼센트와 12.3퍼센트, 이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겠느냐.

또 하나의 예로 내가 많이 드는 건 경기도 고양군(지금의 고양시) 금정굴에서 이뤄진 학살이다. (1950년 9월) '곧 유엔군하고 국군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태극단동지회라는 우익 청년 단체에서 내무서를 공격하려다 발각돼 38명이 학살당했다. (유엔군과 국군이 들어온 후) 그것에 대한 보복이 일어났다. 그 보복으로 학살된 사람들의 뼈와 유해가 (1995년) 금정굴에서 대량 발견됐다. 그 인원이 400~500명이라는 설이 있고 1000명 정도 된다는 설이 있다. 38명과 금정굴에 있던 유해 숫자, 이것이 또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느냐.

거듭 강조하지만, 어떤 경우의 학살이건 조사와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한다.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하며, 다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역사의 오점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학살이 새긴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사진은 2011년 12월 8일, 서울시 교통문화교육원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전국 합동 추모제'에서 한 유족이 추모사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연합뉴스


반공 투쟁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 궤변 난무하는 한국

프레시안 : 군경 등의 학살을 지적하면 일각에서는 '북한의 전쟁 책임을 희석하는 것 아니냐', '진보 성향 학자들이 좌익의 학살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격동기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북한은 전쟁을 일으켜 한국인들에게 너무나도 큰 피해를 줬다. 그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 주민 집단 학살과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아주 성격이 다른 범주에 속하는 거다. 이런 걸 뒤섞어놓으면 안 된다. 양자 다 책임을 물어야 하고, 양자는 다른 범죄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는 건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가 굉장히 힘들다. 전근대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이 이런 정도의 학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난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는 (으레) 이런 학살이 일어났나? 그렇지 않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문명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또 하나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때처럼 한국전쟁 전에도 학살이 일어났다는 거다. 4.3 때 너무나도 엄청난 학살이 벌어지지 않았나. (앞에서 이야기한) 진상 조사 보고서에 (당시) 2만5000명에서 3만 명이 희생된 걸로 추정된다고 돼 있다. (제주도) 전 주민의 10퍼센트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학살을 당한 거다. 또 여순 지구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살됐나. 이것들은 다 전쟁 전에 일어난 것이지 않나. 제주 4.3 학살은 보도연맹원 학살과 함께 양대 학살로 꼽히고 둘 다 군경에 의한 거다. 그렇기에 이런 엄청난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 연구, 책임 추궁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뉴라이트나 극우들이 얘기하는 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극우 반공 세력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 아닌가. 뉴라이트는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상당히 있지 않나.

극우 반공 세력은 부정부패가 심했다. 특히 선거 부정이 아주 심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만이 아니다. 그리고 유신 헌법과 전두환 신군부 헌법 같은 건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자유민주주의를 뿌리째 뽑는 행위 아닌가. (이런 게) 자유민주주의의 최대의 적 중 하나다. 그야말로 유럽 역사에서 얘기하는 파시즘 현상과 연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반공 독재의 추종자들 또는 하수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거론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학문을 어떻게 보고 양식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무덤 위에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프레시안 : 학살은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다.

서중석 : 민간인 대량 학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이 무섭고 철저한 극우 반공 독재가 가능했겠나. 공포에 의한 극우 반공 독재가 아니었나. 예컨대 보도연맹 사건을 생각하면, 어느 지역에서건 학살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죽은 거다. 이랬을 때 (정부가 부당한 일을 해도) 정부를 비판한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나. 바람이 불면 길가의 풀이 눕는 것처럼 국가 권력에 순응하고 묵종하는 인간을 만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정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것 아닌가.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도 이런 걸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 이전에도 이승만 정권은 굉장히 강한 반공 정책을 시행했다. 4.3사건, 여순사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1949년 당시 감옥에 갇힌 사람의 80퍼센트가 사상범이었다. (권승렬) 법무부 장관도 (1950년 2월) 죄수의 8할 정도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라고 증언했다. 당시 <조선일보>도 사설에 '약방의 감초 격으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고 썼다. 반대파나 개인감정이 있는 사람을 너나없이 상대방을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있다고 사설에 쓴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였는데도 1950년 이전까지는 극우 반공 체제가 굳건히 세워졌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반공주의가 그야말로 내면화돼서 공포에 질식된 사회라고 여러 사람이 강조하는 건 이 전쟁을 겪으면서부터다. 전쟁에서 제일 무서운 경험이 무엇이겠나. 학살과 북한에 협조했다는 것, 제일 큰 게 이 두 가지다. 그게 민주주의를 세우는 걸 굉장히 힘들게 했다. 우리 사회를 정상적으로 이끌어가는 걸 참 어렵게 만들었다. 노동 운동을 하건 농민 운동을 하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참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으로 이런 걸 한 거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저들은 국가 건설 과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쨌건) 그건 도무지 말이 아닌 거다. 내가 거듭 강조하지만 대한민국을 정말 훌륭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1948년) 5.10선거 때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와 달리 부정부패로 혼탁하게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히 훼손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걸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본다.

프레시안 :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반공 투쟁을 강조하는 이들에겐 자신들이 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정말 단정 세력, 극우 반공 세력이 새 나라를 세웠는가. 난 이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새 나라로 세우려고 한 사람들은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도 제정하고, 좋은 헌법과 좋은 농지개혁법도 만들었다. 또 제2대 국회에서는 사형(私刑)금지법을 만드는 등 민간인을 지키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이런 것들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와 달리) 극우 반공 세력의 큰 부분은 친일파다. 이자들은 새 나라를 세우려 한 게 아니라 일제 유산을 답습한 거다. 일제 것을 이어받아 구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참 못된 자들이었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다.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가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3.15 부정 선거도 이자들이 저지르는 것 아닌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그런 주장을 보면 정말 놀랍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력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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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주변인 삶을 위한 총, 명, 강..그리고 不誠無物 본질의 가치와 변화의 기술적 혁신을 파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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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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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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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학살,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학살, 네 번째 마당] "애가 부모에게 수류탄 던졌다"? 무서운 이승만


프레시안 : 학살이 벌어진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취한 태도도 논란이다.

서중석 : (1951년 2월) 거창사건이 일어났다.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세 군데에서 (민간인) 700여 명을 죽이지 않았나. (이때 719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된다. 희생자의 다수는 어린이, 여성, 노인이었다. 10세 이하 희생자가 전체의 40퍼센트가 넘는 313명인 데서도 이 점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편집자>) 거창은 부산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다.

몇 가지 이유로 이게 국회에 알려졌다. 국회에서 크게 문제 삼고 그랬다. 국민방위군 사건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면서 국회가 아주 시끌시끌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인명 경시를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 이건 안 된다고 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만 17∼40세 남성들을 국민방위군으로 모아 경상도로 보냈다. 혹한기인데도 제대로 입히지도, 먹이지도 않고 끌고 간 탓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은 사람이 속출했다. 60여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내려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5만 명이 넘는다는 증언도 있다. 이 때문에 국민방위군은 '해골의 대열'로 불렸다. 이에 더해, 장정들의 식비 등으로 뒤늦게 편성된 예산마저 간부들이 빼돌려 유흥에 탕진하고 일부는 정치권에 상납한 사실도 드러나 논란이 더 커졌다. <편집자>)

그때도 이 대통령은 '이게 외국인에게 나쁜 인상을 준다, 왜 이런 걸 가지고 문제를 삼느냐'(는 태도를 보인다). 그 당시 내무부 장관(조병옥), 법무부 장관(김준연)도 '거창사건은 잘못된 겁니다', 이런 얘기를 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총애하던)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때 "거창사건으로 인하여 내무·법무·국방 3장관이 서로 협력하지 않은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국제적으로 손상됐다"고 말했다. 내무·법무부 장관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뒤이어 공보처장을 통해 "거창사건의 희생자는 대부분이 통비자(通匪者)"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학살 책임 문제를 피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이 시기 학살 책임 문제에서 정권 고위층이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서중석 :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나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일정한 시간을 두고 계기적으로 일어난다. 둘 다 규모가 큰 집단 학살 사건인데, 일사불란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고 '이건 상당한 고위층에서 한 지시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 1950년 7월 첫 주에 사흘에 걸쳐 일어났다고 미국 문서에 쓰여 있다. 그때 주한 미국 대사관 육군 무관이던 에드워드 중령이 작성한 글에 '총살 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렸다'고 돼 있다. 법무부 장관 지시가 내려왔고 '국방부, 내무부와 협력해서 하라'고 돼 있는 문서를 봤다고 증언한 형무소 관련자도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정부 수립 이후, 그리고 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주민 집단 학살과 관련해 방대한 보고서를 내지 않았나. 군 고급 지휘관을 포함해 아주 많은 관계자들이 '이러한 학살이 일어난 것은 이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고, 보도연맹원 학살과 관련해서 '군경이 전국 각지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이 대통령의 승인이나 지시 없이 가능했겠느냐'는 증언들이 수록돼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의 전개 과정이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서 보면, 최소한 내무부 장관이나 국방부 장관, 법무부 장관의 선에서 결정이 있었던 것 같고 이러한 결정은 대통령의 의중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집단 학살의 경우를 봐도 이 대통령의 극단적이고 가혹한 엄벌주의가 없었다면 과연 이러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자료를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많이 들더라.

그런 엄벌주의는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와 결합된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연결돼 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양 100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그 양이 잘못되지 않도록 찾아다닌다'는 말을 많이 듣지 않나. 마찬가지다. 잘못되는 사람이 없도록 그렇게 찾아서 구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같은 걸 보면, 불순분자가 한 명이라도 있을 가능성이 있으면 나머지까지 다 죽여도 좋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불법적으로 죽여도 좋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학살자들은 '북한군이 내려오면 보도연맹원들이 거기에 호응할 것이기에 죽였다'는 식으로 변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어땠나.

서중석 : 정희택 검사란 사람이 있다. 오제도, 선우종원과 함께 사상 검사로서 보도연맹 창설과 운용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다. 9.28 수복 후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으로서 부역자를 심사했다. 이런 사람이 '전쟁 후 보도연맹원들이 보인 태도를 볼 때, 이들이 사달을 일으킬 거라는 건 지나친 우려가 아니었느냐'는 기록을 남겼다. 전쟁 발발 직후 1만6800명에 이르는 서울의 보도연맹원들은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북한군 점령기에)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좌익범' 중 부역을 한 사람이 적었다고 증언했다. (전쟁이 터진 직후) 이승만 정권의 책임자들은 피신하느라고 ('좌익범'들을) 서대문형무소에 그대로 놔두고 가지 않았나. 그런데도 그랬다는 거다.

▲ 1950년 7월 공주 학살 현장. <픽처포스트>라는 영국 매체에 실린 사진으로 박선주 충북대 교수가 공개했다. 당시 공주에서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수백 명이 학살됐다. ⓒ연합뉴스


일사불란한 학살…최고위층 관련성 가리키는 자료와 증언 다수

프레시안 : 상황이 그러했는데도 엄벌주의로 일관한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런데 학살 책임자들에 대한 조처 부분을 보면, 엄벌주의 못지않게 이것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단적으로 거창 학살 사건, 그것만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진실을 은폐하려 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크게 두둔하며 '국가 체면을 손상하는 짓을 해선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럼에도)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관련자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신성모의 후임인) 이기붕 국방부 장관의 명에 의해 회부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이 총애한 또 다른 인물인) 김종원이 문제를 일으켰다. 거창사건을 조사하러 가던 국회의원들 앞에 공산 게릴라가 나타난 탓에 국회의원들이 (학살 현장에) 못 가고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매복해 있다가 총격을 가한 이 게릴라가 당시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김종원 쪽에서 조작한 가짜 게릴라라는 게 나중에 드러났다. 그래서 김종원은 (제11사단) 9연대장 오익경 대령, 그리고 거창사건에 직접 책임이 있는 9연대 3대대장 한동석 소령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됐다.

(1951년 12월) 김종원에게 징역 3년형이 선고됐다. 그런데 이런 김종원에 대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국방부 장관한테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이기붕 장관은 결국 사표를 내는 걸로 대답했다.

군 문제니까 국방부 장관과 함께 육군참모총장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때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이었다. 이종찬은 정치와 거리를 두고 군인의 직무에만 충실하려 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60년 4월혁명 후) 허정 과도 정권 때 국방부 장관도 한 사람이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1952년 5월, 재집권을 위해 헌법을 뜯어고치려던 이승만 대통령의 병력 출동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심복인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며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후, 이종찬을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했다. <편집자>)

이종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종원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지시가 내려온다. 이 대통령이 김종원 석방에 즈음해 발표하려 직접 쓴 성명문 초안을 대통령 비서가 보여줬는데, 거기에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이라며 이순신 장군에 비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증언이다. 이종찬은 '이건 예사로운 사태가 아니다'라고 생각해 김종원을 석방했다고 한다. (김종원은 판결 석 달 후인 1952년 3월, 대통령 특별 명령으로 풀려났다. <편집자>) 많은 글에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석방했다고 돼 있는데, 이종찬의 증언에 의하면 어쨌든 형식은 이종찬이 참모총장으로서 석방한 것이다.

프레시안 : 한마디로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심복이라는 이유로 풀어주게 만든 것이다. 이런 분을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딱한 일이다.

서중석 : 그렇다. 김종원은 바로 그다음부터 네 개의 중요한 도경국장을 한다. 전북경찰국장, 경남경찰국장, 경북경찰국장, 전남경찰국장을 맡는다. 그리고 남원에 있던 '공비' 토벌 부대(서남지구전투경찰대. <편집자>)의 사령관도 하고 그런다. 그야말로 굉장한 승진을 하고 중요한 책임을 맡은 거다.

이 사람은 도경국장 시절에 부정 선거로 또 문제가 됐다. 악명 높은 사람답게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직후 김종원을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에 임명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정말 혼쭐이 나지 않았나. 투·개표 부정이 워낙 심해서 조봉암 후보가 216만 표밖에 못 얻은 걸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월등히 많을 것이라는 주장도 일각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그 직후에 (일본군 지원병 출신인) 김종원을 치안국장으로 발탁한 거다. 또 일제 때 박천경찰서장을 한 이익흥을 내무부 장관에 앉힌다. 그전에도 친일파가 등용되긴 했지만, 일제 때 경찰서장까지 한 사람을 내무부 장관에 앉히는 일은 없었다. 이익흥은 신성모와 함께 아첨의 대명사가 된다.

나중에 김종원이 치안국장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주 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다. 장면 부통령이 '취임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자기 기록에 남겼는데,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조금 지난 (1956년) 9월에 바로 저격 사건이 일어난다. 총알이 손을 스치고 지나가 손만 다쳤지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큰 사건이었다. 김종원은 그 사건에 연루돼 쫓겨났다. 그러고 나서 (1960년) 4.19 이후 (이익흥 등과 함께) 다시 체포되는데, 김종원과 이익흥에게는 중형이 선고된다. (김종원, 이익흥 등 장면 저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6명은 5.16쿠데타 후 모두 석방됐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국민 학살하고 영전한 이승만의 심복들

프레시안 : 김종원은 민간인 학살도 자행한 인물이다. 여순사건 때는 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치다가 지치면 총으로 처형했고, 그 후 경북 영덕, 경남 거제, 경남 산청 등 곳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중석 : 그렇다. 참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백두산 호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여순 지방에는 김종원 하면 치를 떠는 사람이 많더라.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김종원이 여순사건, 거창사건 때 한 짓은 일반 사람들에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고 그러니 의당 재판을 받은 건데, (이승만 대통령이) 그런 김종원을 풀어주고 요직에 앉혔다는 거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직후 김종원을 치안국장에 앉힌 건 1960년 선거를 대비한 것 아니겠나. 이런 인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다른 학살자들에게도 관대했다.

서중석 : 거창사건 후 9연대장 오익경은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받았는데 바로 풀려나서 군에 복귀한다. 징역 10년형을 받은 3대대장 한동석도 곧 풀려나서 복귀한다. 난 거창사건은 물론 11사단이 저지른 여러 주민 집단 학살과 관련해 최덕신 11사단장이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최고 지휘관 아닌가. 국회에서도 이 사람을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영전한다. 예컨대 정전회담에 국군 대표로 나간다든가, 이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할 때 수행한다든가 하는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들 문제뿐만 아니라) 원용덕이라든가 특무대장 김창룡 같은 사람이 그렇게 출세하는 걸 보더라도, 이 대통령의 인사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특히 학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이 대통령은 (신성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다 국회뿐만 아니라 내무부 장관도, 법무부 장관도 워낙 문제를 삼으니까, 할 수 없이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하긴 한다. 그런데 이때 내무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도 동시에 해임한다. 그러면서 신성모를 (요직인) 주일 대사에 임명했다. 이러니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학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해임된 건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얘기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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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주변인 삶을 위한 총, 명, 강..그리고 不誠無物 본질의 가치와 변화의 기술적 혁신을 파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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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친일파,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 미화' 뉴라이트, 힘 싣는 여당…"두렵다"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학살,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프레시안 : 미국뿐만 아니라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 시기 학살 책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중석 : 4.3 학살을 비롯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주민 집단 학살을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난 이승만 대통령한테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학살이 일어나는 데 이승만 정권이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군경에 의한 학살이 많지 않았나. 그렇게 큰 규모의 학살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이 대통령의 태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어떤 태도를 말하는 건가.

서중석 : 초대 주한 미국 대사 무초는 이 대통령에 대해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을 신뢰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철저하고 완고한 독재자'란 평을 했다. 이 대통령에겐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가 있었다. 그의 감정적인 반공주의는 바로 이러한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통령은 정적에게 대단히 가혹한 면을 보였다. 특히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사람에 대해선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 김구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이미 여순사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김구 암살과 관련해 이 대통령의 담화나 여러 자료, 증언을 보면 석연치 않은 것이 참 많다.

조봉암은 대선에서 두 번(1952년, 1956년)이나 차점자가 된 사람인데,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다. 조봉암 재판 관련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발언할 수 있나 싶은 부분들이 있다. (그렇게 이뤄진) 조봉암 처형은 불법이었다고 나중에 대법원에서 전원 일치로 무죄 판결을 하지 않나. (조봉암은 1959년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2011년 대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편집자>)

장면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국무총리에서 해임되는데, 그때부터 이승만의 정적으로 부상한다. 장면은 1956년 8월 15일 부통령에 취임하는데, 취임식도 제대로 못 치렀다. (이승만 정권은 장 부통령에게) 취임사를 할 기회도 안 줬다. 그리고 부통령 관저는 항상 감시 대상이었다고 쓰여 있다. 월남(남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왔을 때도 그랬다. 미국을 제외하면 이승만 정권의 제일 우방이라고 볼 수 있던 것이 베트남하고 대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한 영국 등과 (관계가) 별로 안 좋았고 일본하고도 사이가 안 좋던 때다. 그런 상황에서 우방인 월남 대통령이 와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장면 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응오딘지엠은 천주교 신자였다. 장면 쪽도 어떻게든 보고 싶어 했는데, (이승만 측의 방해로) 끝내 못 봤다. 이승만이 장면에게 보인 태도를 보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추종자 아니면 적…"대규모 학살, 이승만에게 큰 책임 있다"

프레시안 : 투철한 반공 세력조차 이념 공세를 당하는 일이 생긴 것도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최고 권력자의 사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에겐 비판 세력, 반대 세력을 빨갱이와 연관시키는 면이 상당히 있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 대해 색깔로 표현하기도 했다. '공산당의 보호자'라는 식이었다. 민주당이 자신 못지않게 극우 반공적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자신에 대해 강하게 비판적으로 나오면 이 대통령이 '저거 색깔이 이상한 자들 아니냐', 이런 식으로 반문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요즘 극우 세력이나 권력 쪽에 있는 사람들이 비판 세력을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것과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 시기엔 빨갱이로 몰릴까봐 (다들) 전전긍긍했다. 김창룡이니 원용덕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

프레시안 : '빨갱이 만들기'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서중석 : 1960년 마산의거가 일어났을 때, 친일파는 이걸 빨갱이가 사주한 사건으로 조작하려고 심지어 죽은 학생의 호주머니에 이상한 쪽지를 집어넣어 사건화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난다. 이게 결정적으로 4.19를 유발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4월 13일에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 이렇게 이야기한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말이다. "지금 조사 중"도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니다. 한국전쟁 때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무대와 검찰, 경찰로 구성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었는데,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을 때도 바로 특무대장, 검찰 책임자, 치안국장이 참여한 비상 기구를 만들었다. 배후를 조사하라는 거였다. 배후가 뭐가 있겠나. 이건 빨갱이 만들어내라는 얘기하고 비슷한 거였다. 여기에서 뭘 하려고 했는지, 나중에 그 진실이 보도되지 않나. (이런 걸 고려할 때) "지금 조사 중", 이것도 마산 사람들에겐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4월 15일에 나온 특별 담화는 표현이 더 강했다. 거기엔 공산당이란 단어가 9번인가 나온다. 이분이 아주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상당히 긴 담화문을 냈다. '이 대통령은 3.15 부정 선거와 학생들의 시위 같은 걸 몰랐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이 두 개의 담화문이다. 제2차 마산의거에 대해 그렇게 강한 표현을 써가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 건 그게 전국적으로 번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 아니겠나). 이승만 대통령은 굉장한 정치 감각을 가진 분이었다. 정치 10단이라고 항상 말하지 않나.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엄청난 위협이랄까, 강한 조치를 한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 불순분자 제거"…이승만의 무서운 담화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의 그러한 태도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의 이런 엄벌주의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엄벌주의를 보여준다. 이분은 (테러로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에 가서 독려하는 연설도 했고, 제주 4.3사건 군법회의와 관련해서도 사형을 선고한 사람을 하나하나 살펴봤다는 증언도 나온다. 특히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대통령이 낸 담화문(1948년 11월 5일)을 보면 참 무섭다는 생각이 항상 든다.

프레시안 : 어떤 내용이었나.

서중석 : 그 담화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앞잡이가 되어 총과 다른 군기를 가지고 살인, 충화(衝火)하는 데 여학생들이 심악(甚惡)하"다고 하면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이렇게 담화를 발표한다.

여순사건이 왜 일어났나.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친일 경찰에 대한 증오, 그리고 분단이 된 것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에 대한 강한 불만 같은 것이 한 요인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노인 대통령으로서 전 국민을 어루만져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느냐, 난 그렇게 본다. 이 점은 국회의 동향에서도 드러난다.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회는 내각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노인네는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고 얘기했다.

어린아이가 앞잡이가 돼서 총 같은 걸로 살인과 방화를 했다? 난 이게 어디다 근거를 두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학생들이 총을 들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어린아이가 총을 들었다는 자료는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의 지나친 엄벌주의다.

프레시안 : 참 무시무시한 담화다.

서중석 : 이와 비슷한 표현이 놀랍게도 85세 생일을 넘긴 노대통령이 1960년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나자 발표한 두 번째 담화문에 또 나온다. "과거 전남 여수에서 공산당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많이 죽였을 때 조그만 아이들이 일어나서 수류탄을 가지고 저의 부모들에게까지 던지는 이런 불상사는 공산당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그러니 난동을 일으켜서 결국 공산당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마산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위협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세상에 여순사건에서 조그만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난 아직까지 어디서도 그런 걸 못 읽었다.

왜 노대통령이 이런 담화문을 발표한 건지, 그 저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한국전쟁 시기에, 또 4.3과 여순사건 때 일어난 엄청난 주민 집단 학살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 보도연맹원 유해 발굴 모습(2013년 10월).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됐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거짓말 방송으로 양산한 부역자에게 오히려 철퇴…사과는 없었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때 '부역자'를 양산하고 그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과 관련해서도 이 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서중석 : 부역자 처벌에 활용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뭐냐 하면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비상 조치령)이란 거다. 1950년 6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서 국무회의를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주재하고 이것을 결정했다. 참 불길한 일이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결정이었다고 본다. 놀라운 건 이 비상 조치령이 6월 25일자로 돼 있다는 거다. 사흘을 소급한 거다. 이게 가능한 건가. 그렇게 소급하는 게 맞는 건가. (소급 외에도) 이 시기 이승만 대통령이 보인 모습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많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6월 25일 전쟁이 나자 이 대통령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날 저녁 주한 미국 대사에게 '(난)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뜻부터 밝혔다. 27일 새벽에 열린 심야 비상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심야 국회와 심야 비상국무회의가 열린 때와 비슷한 시각에 이 대통령은 미리 대기시킨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홀로 내려갔다. 국무위원에게도, 군 지휘관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전으로 가서 (육성을) 녹음해 서울에 방송을 틀게 했다. 전쟁 발발 후 대통령의 첫 방송이었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이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방송 요지는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모든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 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말 것이며 대통령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킬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자기 혼자 대전으로 피신했으면서 그런 (거짓말) 방송을 내보낸 거다. 서울 사람들이 (대통령 말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다음 날 새벽 두 시 반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그러면서 수많은 시민이 피신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부역자 아닌 부역자가 된 것 아닌가.

이렇게 대통령의 거짓말 방송 때문에 '잔류파'라 불린 부역자가 대량으로 산출됐는데, 정작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부역자를 엄벌하라는 초강경 조치를 내렸다. 너무나도 가혹한 일 아닌가. 그래놓고 이 대통령은 7월 1일, 이번엔 호남선을 타고 남해안을 돌고 돌아 부산으로 또 내려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프레시안 : 비상 조치령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서중석 : 놀라운 대목이 많이 있다. '증거를 생략할 수 있다'는 대목도 있다. 증거를 대지 않고도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다 대부분 중형을 선고하게 돼 있었다. 특히 방화, 강간 등 몇 가지에 대해선 일률적으로 사형을 선고하게 돼 있었다.

한 재판관이 쓴 글을 보면 '(징역) 3년이나 5년을 선고할 만한 사건인데도 (비상 조치령 때문에) 사형, 무기 징역, 징역 15년 같은 중형을 선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며 '참 힘든 재판'이라고 토로하는 내용이 나온다. 판결하기 더 힘들게 한 건 단심이라는 점이다. 재판관이 한 번 잘못하면 돌이킬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단심이니 굉장히 빨리 재판하게 돼 있는 건데,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판결이 많았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건데, 그 당시 무죄를 선고하면 어떻게 됐겠나. 그렇게 살벌한 세상에서 (부역 혐의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비상 조치령은 부역자 처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참 무서운 일이다.

프레시안 : 국회는 이 전 대통령과 다른 태도를 취했다.

서중석 : 당시 국회는 민간인들이 그런 식으로 희생되는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국회는 비상 조치령이 남용되는 것을 막고자 1950년 9월 '부역 행위 특별 처리법'을 만들었다. 부역자를 함부로 처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과 함께 사형(私刑)금지법도 통과시켰다. 9.28 수복을 전후해 여러 우익 청년 단체 등에서 법에 근거하지 않고 (부역자로 규정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테러도 자행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취지에서 만든 법이었다.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두 법에 대해 모두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는 1950년 11월 두 법을 다시 통과시켜 법률로 확정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법들을 시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비상 조치령 때문에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자, 국회는 '비상 조치령 중 개정 법률안'을 다시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국회가 원안대로 다시 이 법을 통과시키는 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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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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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친일파,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 미화' 뉴라이트, 힘 싣는 여당…"두렵다"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프레시안 : 학살 책임과 관련해 미국을 지목하는 의견이 적잖다. 미국에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미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서중석 : 학살을 지시하는 위치에 있었던 군경 책임자 문제에 대해 앞에서 부분적으로 얘기했는데, 그런 참혹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데는 더 커다란 배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한다. (여러 사람이) 그런 지적을 많이 하고 있고 거기서 미국이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얘기도 빠지지 않고 한다.

프레시안 : 미군에 의한 학살은 주로 한국전쟁 초기에 이뤄졌다. 노근리(충북 영동), 왜관교(경북 칠곡)에서 벌어진 학살 사실이 드러난 것은 물론 전북 익산, 충북 단양, 경북 예천·구미, 경남 의령·함안·마산·사천·창녕 등에서 미군의 폭격 등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서중석 : 미군에 의한 학살 중 규모가 큰 건 피란민을 상대로 발생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민들이 뿌리내리고 사는 한 마을에서가 아니라 피란 도중 폭격으로 학살이 일어난 경우에는 그 피해를 증언하기가 더 어렵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침묵을 강요당한 '노근리들'

프레시안 : 미군에 의한 그러한 참극 중 대표적인 것이 노근리 학살이다. 노근리 학살은 1999년 <AP통신>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서중석 : 그 보도는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99년 하반기에 <AP통신> 보도로 노근리 학살이 널리 알려지고 곧이어 이도영 씨가 골령골 학살(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자료를 찾아냈다.

그걸 계기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AP통신>이 노근리 학살을 보도하자, 그간 학살 진상을 은폐하는 데 일조해온 보수 언론조차 '진실은 만천하에 밝혀져야 한다'는 식으로 쓸 정도였다. '이것도 일종의 사대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그러면서 이듬해 1월, 4.3특별법이 만들어진 거다. (노근리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유족들은 1960년 4월혁명 후 미군 측에 소청을 제기하지만 기각된다. 잊혀가던 이 사건은 1994년 다시 세상에 알려진다. 노근리 학살을 증언한 책이 출간되고 <말>과 <한겨레>에서 유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기까지는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99년 <AP통신> 보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자, 대다수 한국 언론도 이 사건을 크게 다뤘다. 한국 언론이 피해자 증언을 무시하다가 외국의 유력 언론이 다룬 후에야 따라간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았다. <편집자>)

노근리 사건에 대한 <AP통신> 보도 중 눈길을 끈 게 있었다. 노근리 사건에서 총을 쏜 병사들 중 일부가 그 참혹한 행위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일을 내가 어떻게 저지를 수 있었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나' 하는 것을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보고 상당히 감격했다.

프레시안 : 무엇 때문인가.

서중석 : 왜냐하면 보도연맹원 학살이나 4.3사건 학살에 관여한 한국의 군경 가운데에는 그렇게 '학살 때문에 양심에 크게 가책을 느껴 정신 질환을 심각하게 앓았다. 지금도 정신이 평안치 않다'고 얘기한 사람을 거의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주 드물게 있긴 하다. (그런데 미군 중에서) 노근리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중엔 그런 사람이 여러 명 나오더라.

이 내용이 보도됐을 때 마침 충남대에서 학살을 중심으로 현대사에 대한 강연을 할 일이 있었다. 그때 '그래도 미군 병사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 사이의 근대의 문화라고 할까 하는 것들이 영향을 끼친 것 아니겠느냐. (학살에 가담한) 일본 혹은 한국 사람 중에서 과연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고 정신 질환을 앓은 경우가 얼마나 될까. 참 걱정이다'라고 했다. (청중은 이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했지만, 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일부) 미군 병사는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정신 질환을 앓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결국 <AP통신>을 타고 진실 보도로 나타날 수 있었다고 본다.

프레시안 : 명령을 내린 장교 중에도 그런 사례가 있나.

서중석 : 그렇지 않다. 다른 대부분의 병사, 그리고 그 지휘관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교들도 그랬느냐 할 때,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노근리 사건과 직접 관련돼 있는 미군 제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의 명령서에는 '전투 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고 돼 있다. 발포를 지시한 거다. 이게 병사들로 하여금 있을 수 없는 행위를 하게 한 것이고, 그래서 그런 정신 질환을 앓게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군 장교들 가운데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정신 질환을 앓았다든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든가 하는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AP통신> 보도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들은 여전히 변명하는 위치에 서 있더라.

▲ 노근리 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의 한 장면. ⓒ노근리 프로덕션


작전권, 고문관, 친일파 비호와 미국의 학살 책임

프레시안 : 미군이 직접 죽인 사례 외에도 학살 책임과 관련해 짚을 대목이 더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작전권이 미군한테 있었다. 우리 정부가 수립됐는데도, 미군이 작전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사실 주한 미군 손에 작전권이 없었던 건 1949년 6월 (한국에서) 철수해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작전권을 다시 인수해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역할을 할 때까지, 그 사이뿐이다. 1년하고 한 달만 미군에 작전권이 없었던 거고, 4.3사건 학살 대부분이 일어난 시기인 1948년 11월에서 1949년 3월엔 미국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고문관이 배치돼 있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맨 처음 여순으로 한국군 장교를 이끌고 온 사람이 하우스만 대위다. 한국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사람이다. 하우스만 대화록을 보면, 자신들이 주도해 (진압) 작전을 펼쳤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프레시안 : 미군은 한국 군경 등에 의한 학살에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미군이 그런 학살을 막으려고 했다', 이런 게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를 않는다. 사실 4.3사건 때 한 지역에서 끔찍한 대규모 주민 집단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던 제일 큰 이유는 제주가 고립무원의 섬이라는 것이다. 외부에서 (제주도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와 달리)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땐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세계 뉴스를 탔다. 제일 크게 세계 뉴스를 탄 건, 국군이 초기에 진입하다가 패배하면서 '한국 정부 위태롭다'는 식으로 보도된 것이었다. 여긴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외신 기자들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내 언론 보도뿐만 아니라 세계 뉴스로도 나갔다.

그런데 제주도 쪽은 (제대로 된) 보도를 초기에 차단했다.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외부에서 알 수 없게 한 거다. 학살에 관한 보도를 막은 거다. 1948년 10월, 11월에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 난 이것에 의도가 있다고 본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고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이 숨죽이고 살아야 했는데도 바깥엔 거의 안 알려졌다. 육지 사람들은 (4.3사건의 실상을) 오랫동안 잘 몰랐다. 바로 그 4.3 때 해상을 딱 차단한 게 어느 나라 군대냐. 그런 걸 볼 때 미군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거창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11사단은 거창뿐만 아니라 함평, 산청, 남원 등 여러 지역에서 큰 규모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연대별로 미군 고문이 파견돼 있었다. 이 사람들이 학살을 몰랐겠나. 이건 방조한 것 아니냐, 한국군이 (학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한 것 아닌가, 이렇게도 얘기할 수가 있는 거다.

프레시안 :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친일 경찰 등을 비호하고 우익 단체를 지원한 것도 생각해볼 대목이다. 친일 경찰, 우익 단체 등이 학살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다. 다른 문제를 더 짚어봤으면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영국군이 한국 측의 이른바 '부역자' 총살형을 문제 삼은 사례도 있다.

서중석 : 9.28 수복 후에 '부역자' 총살을 많이 한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사진으로 봐선 수색 정도의 서울 북부로 보인다. 영국 군대가 그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저런 식으로 하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며 (처형을) 제지하고 미국 쪽에 항의 비슷하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면 미국은 다른 데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어야 하는데, 그런 뚜렷한 자료가 나오지를 않는다. 납득이 잘 안 되는 일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고맙기만 한 미국? 외면해선 안 되는 학살의 진실

프레시안 : 사진 이야기를 하니,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이 떠오른다. 그 학살 사진은 미국 측에서 찍은 것이었다.

서중석 : 전쟁이 난 직후인 (1950년) 7월 초순, 1800명에 이르는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골령골(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집단 학살했다. 그 장면을 담은 사진과 기록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다 발견됐다. 미국 극동군 사령부 소속이던 에버트 소령이 주한 미국 대사관 육군 무관으로 있던 에드워드 중령의 라이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여기서도 그것(한국 측의 학살)이 잘못된 것처럼 기록이 남아 있는데, 미군이 제지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훗날) 베트남에서 (미군에 의한) 미라이 학살 같은 게 일어나는데, 여러 자료를 볼 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주한 미군이 져야 할 책임이 많으며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그 책임을 어느 선까지 물을 수 있나. 주한 미군까지인가, 아니면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 혹은 미국 정계의 최고위층까지인가.

서중석 : 그건 잘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자료의 한계이기도 한데, 그런 부분을 (명확히) 밝히고 분석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래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참 힘들지만,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한 미국 대사관이나 극동군 사령부, 유엔군 사령부에서 몰랐겠나. 알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면 그 침묵이 뭘 의미하는 것이겠나. 방조 말고 다른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미국의 학살 책임 문제가 거론되면, '한국전쟁 때 북한을 막아내고 우리를 구해준 고마운 미국에 대한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라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중석 : 인간의 양심과 양식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그렇게 큰 학살을 미국이 방조했다는 건 미국 스스로 내세우는 민주주의, 자유, 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 미라이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자,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분노하지 않았나. 그런 미라이 학살의 수백 배 규모의 학살이 한국에서 벌어졌고 미국이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것에 분노하고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거다. 이건 한국전쟁 때 미국이 북한을 막은 것과는 구분해서 봐야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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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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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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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프레시안 : 학살이 워낙 많아 이를 유형화하기도 쉽지 않다. 여러 세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서중석 : 해방 후 학살을 몇 가지로 뭉뚱그려서 유형화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지금까지 조사 및 연구된 것만 가지고 유형화하는 것도 좀 무리한 경우가 있다.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우선 학살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가 하는 걸로 따질 때 대부분의 규모가 큰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이뤄졌다. 그래서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고 부른다. 우익 단체에 의한 학살도 꽤 있었다. 제주 4.3의 경우 서청이라 불린 서북청년회가 대표적이다. 대동청년단도 학살에 협력하긴 했지만 서청이 특히 악명 높았다. (1950년) 9.28 수복을 전후해 우익 청년 단체들이 각지에서,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도 학살에 상당히 관여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는데), 특히 전쟁 초기에 많이 일어난다. 노근리 학살을 포함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다. 공습, 공중 폭격에 의한 학살(인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이 당했다는 지역 주민들과 그걸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 것하고는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어려움은 있다.

프레시안 : 군경과 우익, 미군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북한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있었다.

서중석 : 그렇다. 북한과 (인민군 점령 지역)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있다. 무엇보다 인민군이 남한 각 지역에 들어오게 될 때, (그에 앞서 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 학살 등으로 부모를 비롯해 가까운 사람이 학살당했을 경우 그것에 대한 보복 학살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료상으로 많이 나오진 않더라. 오히려 북한 측에서 (보복 학살을) 상당히 제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초기에 보복 학살은 제한적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학살 규모가 커지는 때는 9.28 수복 전후 시기다. 9.15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인데 이 경우 인민군에 의한 학살인지, 정치보위국이나 그 산하 기구에 의한 학살인지, (지역) 좌익에 의한 학살인지, 빨치산에 의한 학살인지를 참 구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금까지 자료상으로는 거의 구별이 안 된다.

프레시안 : 마을 단위에서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중석 : (예컨대)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을 습격해서 죽이고,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습격당한) 그 마을 쪽 사람들이 자기들을 학살한 마을에 가서 학살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 내에서 두 패로 갈라져 학살한 경우도 있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있었다.

이건 대개 역사와 관련이 된다. 그 지역 사람들 가운데 리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 때 어떤 활동을 했느냐, 해방 직후 어떤 단체에서 활동했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전쟁 이전, 가까운 시기의 역사에서 마을의 좌익 혹은 우익 지도자가 급진적이라고 할까, 그런 경우에 학살이 일어나더라. 마을과 마을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싸운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이 시기에 학살이 워낙 많이 일어나는데 대개는 사건 이름에 따라 부른다. 그러면서 유형별로 구분할 수 있는 건 구분하는 식이다. 제주 4.3 학살, 여순사건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형무소 재소자 학살, 노근리 학살, (국군) 11사단에 의한 민간인 학살, 공중 폭격에 의한 학살, 빨치산이나 좌익에 의한 학살 같은 식으로 큰 사건들을 호칭하는 속에서 유형별로 다시 정리하는 방식이 필요해 보인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학살이 난무하던 시대…죽이는 방식도 끔찍했다

프레시안 : 조사 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떠올리기도 무서운 일이 많았다. 예컨대 11사단은 남원의 한 마을에서 주민들을 줄 세운 후 쏘아 죽이고, 여성들을 따로 끌어내 대검으로 목, 유방, 복부, 심지어 음부를 난자해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런 식으로 한나절도 안 돼 100명 가까운 민간인이 죽었다. 더 끔찍한 건 이런 일이 어느 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선 주민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기관총을 난사한 후 수류탄으로 확인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참 무서운 일이 많이 일어났다.

서중석 : 유형별 학살 중 대살(代殺)이란 게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선 레지스탕스(의 활약이)나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를 다룬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나오는 거다. 레지스탕스 활동이 있었던 지역에서 그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잡히지 않으면 그 사람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쏴 죽여 버리는 거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그런 경우도 있었다. 그걸 통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약화시키려는 건데, 나치가 이런 일을 많이 했다. 일본군도 중국 땅에서 참 많이 저질렀다. 어느 학살이든 잔혹하지 않은 게 없지만, 우리 경우도 이 대살이 상당히 많았던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1사단이 거창 등에서 벌인 주민 집단 학살을 보면, 상당수가 대살 비슷한 성격을 보인다. 거창 지역에 들어가는 (11사단) 9연대 병력이 산청 지방의 여덟 마을에서 학살을 하는데, 정작 청년들은 사전에 귀띔을 받거나 '이거 위험하겠다' 하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대개 피신했다. 산청이건 거창이건 다른 지방에서건 11사단이 한 주민 학살에서는 (그랬다). 그러니까 거창 양민 학살 때 잡혀온 이들 중 대다수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였다. (이 점 때문에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어쨌건 이건 일종의 대살이다. 젊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한 거였는데, 젊은 사람들이 없어졌으니 그 대신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를) 붙잡아다 죽인 거였다. (국군 제11사단은 19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전북 남원·임실·순창·고창·정읍, 전남 함평, 경남 산청·거창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대살은 한국전쟁 이전에 벌어진 학살에서도 나타났다.

서중석 : 4.3 학살이나 여순사건 학살처럼 전쟁 전에 일어났던 규모가 큰 학살에서도 이런 대살이 많이 나타난다. 제주도의 경우 대살에 관한 수많은 증언이 있다. 부모가 자식한테 '너 여기 있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단 산에 피신해 있어라. 설마하니 우리야 죽이겠느냐', 이러면서 산에 보낸다. 그런데 (토벌대가) 동네 사람을 모아놓고 집단으로 죽이는 거다. 산에 갔다고 추정되면 제일 먼저 죽는 게 산에 간 그 사람의 부모나 처자였다.

한 남자의 사연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뭐냐 하면 한 남자가 산속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그 사이 군경이 동네를 습격해 그 부인을 죽였다. 그러자 이 남자는 '아내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서 평생 홀아비 생활을 했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런 일이 정말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대살이 많이 일어났다.

▲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 ⓒ<지슬> 공식 페이스북


법적 근거? 학살 자체가 불법이다

프레시안 :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민간인을 죽였다는 지적도 있다. 보도연맹 사례처럼, 정부 말을 믿고 가입했다가 학살된 경우도 있다.

서중석 : 보도연맹(保導聯盟)의 '보'는 보호한다, '도'는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보호해서 이끌어주겠다, 국가가 당신들을 보호해줄 테니 국가의 품 안으로 들어와라, 뜻 자체가 그렇다. 일제 때도 비슷한 게 있었다. (보도연맹은 1938년 일제가 이른바 '전향자'들을 모아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본떠 만들어졌다. <편집자>) 그랬는데 그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대규모로 집단 학살을 당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이런 지적을 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학살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다. 합법적인 학살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나. 제노사이드는 다 불법이다. 정당한 절차 없이 그러니까 유죄, 무죄를 따지는 것도 없이 자의적 판단에 의해 죽이는 거다. (그 때문에 벌어진) 주민 집단 학살로 50명 이상 학살당한 마을도 제주도에는 많다.

보도연맹원은 방방곡곡에서 죽었다. 경찰서장이 정말 큰 결심을 한 두세 지역을 제외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참 많이 죽었다. 그런데 (대부분) 죽인 명단을 알 수가 없다. 군경은 공무원이지 않나. 법적 절차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군경이 죽였으면 (최소한) 언제, 어디서 죽였다는 게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그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게 몇 건 안 된다. 보도연맹원 학살이건 제주 4.3 학살이건 다른 지역의 주민 집단 학살이건 (다 그렇다). 죽인 사람들, 그러니까 군경 간부 자체가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자행했단 걸 인정했던 거다.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방식으로 죽인 거다. 주민 집단 학살은 거의 다 그런 식이다.

제주도 학살이나 여순사건 학살 같은 경우에 군법회의란 게 있었다. 그런데 이 군법회의도 과연 법적 절차를 제대로 밟았느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에서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냈다. 군법회의가 1948년 12월과 그다음 해에 걸쳐 있었는데, 판결문도 없고 법적 절차를 밟고 군법회의를 했다고 볼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법을 벗어난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법회의에서 재판받은 사람들도 지금 다 희생자로 인정하고 있다.

(정리하면) 주민 집단 학살은 다 불법으로 이루어진 거다. 어느 하나 일종의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일어난 게 없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프레시안 : 학살 사례를 보면, 일본군이 중국에서 보인 모습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건 국군이나 경찰 지휘부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거나 친일 경찰이었던 것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어째서 이런 대규모의 주민 집단 학살이 해방 직후에 일어났느냐. 이건 학살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본군 경험이 있었다는 점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전에 어떤 군인과 함께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군인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 "원용덕, 김창룡, 김종원, 이 세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정확하고 명쾌하게 지적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셋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악명을 떨쳤다. 헌병총사령관, 군 특무부대장,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을 지낸 사람들로 정말 많은 악행을 저지른 걸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이 세 사람만 책임이 있는 거냐. 그렇지 않다. 4.3사건을 보더라도, 학살에 관련된 군 지휘관들이 (과거에) 일본군에 있었던 경우가 많다. 여순사건도 마찬가지고, 다른 (학살) 사례에서도 그런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일본군 중에서도 특히 만주군 출신들이 학살과 더 관련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주에 있던 여러 일본군 부대는 이른바 '토벌' 작전이라는 것을 펴면서 여러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그런 경험이 (해방 후 한국에서 벌어진) 주민 집단 학살과 관련이 있다. 그런 예로 많이 드는 것이 11사단 작전 명령이다. '작전 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식량은 안전 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이 펼친 삼광(三光) 작전과 너무나 흡사하다. 삼광 작전은 삼진(三盡) 작전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쏘아 죽이고 다 태워 죽이고 다 굶겨 죽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연구 논문에서 '이걸 봐라. 양자가 너무 비슷한 거 아니냐'란 지적을 하고 있는 거다. 도쿄 전범 재판이나 중국에서 있었던 전쟁 관련 여러 재판에서는 삼광 작전을 비인간적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단죄했다.

프레시안 : 해방 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이 학살 문제를 더 키운 셈이다.

서중석 : 특히 경찰 같은 경우 일제 때부터 고문이 상습화된 것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4.3도 그렇고 다른 경우에도 경찰이 (학살에) 많이 관여돼 있다. 인명 경시와 고문을 심하게 한다는 건 거의 동의어다. 그런 고문 상습범들이 해방 후 학살에 가담한 걸로 볼 수 있다.

아까 민간 우익 단체도 (학살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해방 직후 좌우 싸움에서 테러가 관행이었다. 당시는 테러가 굉장히 심했다. 경찰의 지원과 협조를 받으면서 칼을 쓰고 총을 쏘고 하는 테러였는데, 특히 서청 테러가 악명 높았다. 이런 테러 관행이 결국 공권력의 테러화 현상을 가져온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일제 때 전쟁 경험, 고문 경험 같은 것들이 해방 후 좌우 싸움에서 잦았던 테러 경험과 결합하면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인명 경시 사상을 갖게 된 것이 결국 참혹한 사태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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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Khori(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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