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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세력은 왜 합동 묘지를 파헤쳐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 학살, 일곱 번째 마당

by Khori(高麗) 2013.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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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친일파,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 미화' 뉴라이트, 힘 싣는 여당…"두렵다"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학살,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학살, 네 번째 마당] "애가 부모에게 수류탄 던졌다"? 무서운 이승만
[학살, 다섯 번째 마당] 일본도로 국민 목 친 학살자가 이순신과 동급?
[학살, 여섯 번째 마당] "좌익이 영광에서 5만6000명 학살? 그건 아니다"


프레시안 : 학살 피해 유족이 오히려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

서중석 : 대학살은 우리 사회를 너무나 끔찍한 사회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숨도 못 쉬는 질식된 사회로 만들었다. (4.3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 작가는 이걸 칠흑 같은 어둠의 사회라고 표현했다.

(학살 후 오랫동안) 시신 처리도 제대로 못하지 않았나. (1960년) 4.19 이후에야 시신 처리를 한 지역이 꽤 많다. 집단적으로 뼈가 나뒹굴고 그랬다. (학살 피해를 겪은) 한 동네가 온통 울음바다가 될 수밖에 없는데도, 제사조차 조용히 지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학살 문제,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신군부의 학살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우리가 일본의 과거사 문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추궁하면 일본인 가운데 나쁜 사람들, 그러니까 극우로 불리는 사람들이 꼭 걸고넘어지는 게 있다. '너희들은 베트남에서 뭐했느냐.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나.' 그 사람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참 열심히 파고드는 거 같다.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는 건 눈곱만큼도 없다. 이런 점도 한국의 극우 반공 세력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하여튼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비난받을 짓을 왜 했는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광주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자행된 그 엄청난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라든가 책임 규명 같은 게 있었다면, 베트남이나 광주에서 그런 일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를) 반성하고 참회하기는커녕, 4월혁명 후 자연스럽게 진상 규명 운동이 일어나자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철저히 탄압하고 (진실을) 숨기지 않았나. 앞에서 말했듯,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 일반인에게 최초로 공개된 게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월간 <말>을 통해서다.

우리 사회가 그런 식으로 대처했기 때문에 그런 일(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과 1980년 광주 학살)이 일어난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도, 너무나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학살 사건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할 수 있는 한까지는 책임 추궁을 해야 하는 거다. 6월항쟁 이후에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베트남과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프레시안 : 학살 피해 유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4월혁명과 5.16쿠데타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렇다. 학살 문제는 4.19 이후에야 부분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다시 사회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주로 경상도와 제주도 지역에서 유족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유골도 발굴하고 위령제도 하고 위령비도 세웠다. 그러면서 진상 규명 운동이 일어났다.

호적 정리를 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호적 정리가 안 된 경우가 있었다. 시신을 처리할 수가 없으니까, 죽은 것이 불분명한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신 처리를 못하는데 어떻게 호적 정리를 할 수 있었겠나. (그래서 학살된) 아버지가 (법적으로는) 살아 있는 걸로 돼 있던 경우가 꽤 있었나 보더라.

5.16쿠데타를 계기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쿠데타 세력은 혁신계 인사,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학살 피해자) 유족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대거 체포했다. 그러고 '혁명 재판'을 하는데 '유족회에서 허위 선전을 했다. 용공 사상을 고취했다. 군경을 학살자로 몰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중형을 선고하고 그런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건가.

거창만 하더라도 (4월혁명 후) 새로 (피학살자 합동) 묘지도 만들고 위령비도 세우고 그랬다. (그런데 5.16쿠데타 후) 그 위령비는 (정으로) 쪼아서 땅속에다 묻고 묘지도 파헤쳤다. 제주도에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란 게 있는데, 그것도 똑같은 변을 당한다. 이렇게 묘를 파헤치고 위령비를 쪼아서 파묻거나 훼손하는 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특히 한국은 이걸 금기시하는 사회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랬다. 이걸 '제2의 학살'이라고들 부른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주도의 보도연맹원 등이 경찰의 예비 검속에 걸려 모슬포 송악산 부근에서 학살됐다. 유족들은 6년이 흐른 후에야 현장을 찾아 유골 중 일부인 132구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뼈들이 뒤엉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유골을 모아 백조일손지묘를 만들었다. 백조일손지묘는 '서로 다른 132명의 조상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은 모두 한 자손'이란 뜻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심복들이 학살을 자행하고도 영전했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5.16쿠데타 세력이 유족들에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5.16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16쿠데타를 한 이유와 관련해) 나중에는 경제 발전이나 근대화를 많이 역설하고 내걸지만, 5.16을 일으켰을 때 '혁명 공약' 첫 번째가 반공 태세를 재정비해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그 굳건한 반공 체제가 어떻게 성립됐나. 학살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극우 반공 세력의 도덕성에 대해,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해 근간부터 회의를 품게 하고 비판하게 하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학살 문제다. 극우 반공 세력을 그렇게 몰아세울 수 있다는 건 (학살 문제가) 극우 반공 체제를 그야말로 뿌리째 흔들 수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제2의 학살로 불리는 일들을 한 것 아니겠나.

하나 더 이야기하면, 6월항쟁 이후 사람들이 과거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4.3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 같은 것에 대해 민간 차원에서 조사하고 증언을 채록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증언을 거부했다. '4.19 나고 얼마 후 5.16이 터지면서 그렇게 고초를 겪었는데, 5.16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느냐'며 침묵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사회에 얼마나 심각하게 파고들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참담한 모습이다.

▲ 학살 문제는 극우 반공 세력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들은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제2의 학살'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발굴된 두개골. 대부분의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다. ⓒ연합뉴스


5.16쿠데타 세력이 자행한 '제2의 학살'

프레시안 : 유족을 고통스럽게 한 건 5.16쿠데타 직후의 그런 일들만이 아니었다. 연좌제도 이들을 괴롭혔다.

서중석 : 연좌제는 집단 학살과 관련된 또 하나의 커다란 비극이다. 고약한 연좌제가 현대 사회에서 철저하게 시행됐다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다. 그 사람들이 연좌제 때문에 받은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현대사를 알 수가 없다.

연좌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는지는, 조정래 소설 <한강>을 비롯해 여기저기 많이 나온다. (예컨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학살 피해자인) 자기 아버지나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잘 모르는 거다. 그런데 이걸 언제 알 수 있느냐. 진학이나 취업을 할 때 뜻밖에 아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어떤 특정 학교에 가려는데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불합격 통지가 온다든가, 공무원에 응시하거나 특정한 데 취업하려 할 때 '너는 안 된다'는 딱지가 붙는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어머니에게 묻기도 하고 호적 조회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연좌제에 묶여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일도 꽤 있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좌익과 연관된 게) 아무것도 없던 아버지가 집단 학살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취직이 안 되는 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니, 아버지가 빨갱이로 (분류)돼 있었다. 다시 말해 군인들이 집단 학살을 하고 나서 전과를 올렸다고, '다 빨갱이라서 죽였다'고 보고한 거다. 호적 같은 데에도 그렇게 기록되면서 연좌제에 묶인 거다.

프레시안 : 학살 피해자를 좌익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중석 : 유신 체제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우리가 외국에 (많이) 나가기 시작한 게 1970년대, 그중에서도 1974~1975년경부터 중동 건설 붐을 타면서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중동에 노동자, 사무원으로 나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연좌제에 묶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연좌제에 걸리면) 여권이 안 나왔다.

여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독립 운동가 김순애 여사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고통을 많이 많았다. 그런데 4월혁명이 났는데도 이분의 여권이 상당 기간 안 나왔다. 이분은 독립 운동으로 포상을 받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이 임시정부 부주석이던 김규식 박사다. 일제 때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는 걸 차치하더라도, 김규식은 해방 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꼽혔다. 한국전쟁 때 김규식은 납북됐는데, 그 부인은 좌익에 협력한 걸로 기록돼 있다는 이유로 여권이 안 나온 거다. 세상이 다 아는 김규식 부인 김순애 여사, 독립 운동가 김순애 여사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불이익을 받았겠는가.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파괴한 연좌제…성역은 있었다

프레시안 : 연좌제가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제도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면, 그걸 적용하는 데서도 형평성을 잃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단적으로, 남로당의 고위 프락치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좌제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서중석 : 1960∼1970년대에 나도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연좌제에 제일 묶여야 할 사람들은 자유롭고 열심히 살아보려는 일반 백성들만 피해를 보는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 뭐냐 하면 남로당에 관계한 걸로 볼 때 박정희야말로 연좌제에 묶일 만한 사람이고, 김성곤도 박정희의 형 박상희하고 (1946년) 10월항쟁에 관련된 사람 아니냐는 거였다. (김성곤은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계 실력자였다. 해방 직후엔 경북에서 좌익 활동을 했다. 박상희 외에도, 5.16쿠데타 후 김일성의 밀사로 내려왔다가 처형되는 황태성도 이때 함께 활동했다. 김성곤은 쌍용그룹 창업주이기도 하다. <편집자>)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화당 핵심부엔 혁신계 인사들이 몇 명 있었다. '(고위층은 빠지고 힘없는 사람들만 연좌제로 고통을 당하는) 이건 도대체가 말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그 시기에 돌고 그랬다. 은밀하게 하는 얘기였지만 뼈 있는 얘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연좌제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다, 학살 피해자인 자신의 가족을 원망하는 슬픈 일도 적잖았다.

서중석 : 연좌제 때문에 가치관이 전도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사례를 하나 들면,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형의 묘를 동생이 파헤치려 한 일도 있었다. 형을 불쌍하게 여기던 동생이었는데,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고통을 당한 데다 자기 아들이 경찰대 시험에서 떨어지면서 그렇게 변한 거다. 아들이 경찰대 시험 1차와 2차는 다 됐는데 3차에서 안된 게 (학살된) 형 때문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그것(연좌제)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고 본 거다.

사실 연좌제에 묶인 사람들 중엔 부모를 원망하는 경우가 참 많다. 부모를 저주하는 경우도 많다. '가족을 학살한 군경이나 이승만 정권의 잘못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건 우리 아버지, 형이 잘못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거다). 하도 고통을 당하다 보니까 '죽은 사람 잘못이다' 같은 사고도 생기고 그랬다.

제주도에서는 부모가 4.3 때 죽었다는 이야기를 절대로 안 한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해선 말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자기는 4.3과 무관한 것처럼 (행동하는 거다). 그것에 대해 말을 잘못하면 엄청난 피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4.3으로 죽었다', 이 자체가 어떤 낙인이 찍히는 근거처럼 된 적이 있지 않았나.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건가.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기억과 참회는 한국 사회의 의무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도에서 진보적인 흐름이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모습이 학살을 비롯한 한국전쟁 당시 경험과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서중석 : 어째서 이승만 정권 시기에 진보 세력, 야당 세력이 경상도에서 셌느냐. 1952년 정부통령 선거건 1956년 정부통령 선거건, 조봉암 몰표가 나온 곳이 경상도다. 투·개표 부정, 특히 개표 부정이 이 지역에선 아주 심했다고들 이야기하는데도 그렇다. 1960년 3∼4월 시위도 경상도에서 많이 일어난다. 2월 28일 대구 지역 학생들이 제일 먼저 일어났고,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두 차례에 걸친 의거가 일어나는 곳도 마산이다. 부산에서도 고등학생 시위가 많았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후에도 경상도에서 혁신 세력이 강했다. 교원노조가 강세를 보인 곳도 이 지역이다.

이걸 (잘 모르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18년 동안 경상도를 근거로 삼은 것 아닌가. 특히 유신 독재 때 더 심했다. 그리고 1990년대, (그중에서도) 특히 'IMF 사태' 이후 박정희에 대한 강한 향수와 더불어 복고주의적인 분위기가 이 지역과 연관돼 일어났다. 그런 걸 볼 때 (경상도에서 진보 세력이 강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가 보다. 그러나 사실이다.

어째서 1950년대에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이것에 대해 몇몇 학자가 연구한 게 있다. 우선 이 지역은 해방 직후에도 전라도와 함께 좌익 세력이 대단히 강했던 곳이다. 중부 지방이 오히려 약했다.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다음에 대구와 임시 수도 부산이 한국전쟁 때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때 이승만 정권의 비리, 부정부패, 그리고 부산 정치 파동을 겪었다. 그러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

이런 것도 작용했겠지만,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이 대부분 인민군의 지배를 받지 않은 점이 큰 역할을 한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연구가 많다. 인민군은 경상도 일부를 잠깐 점령했을 뿐이다. 그런 것들이 연결되면서 1950년대에 조봉암을 비롯한 야당 지지 지역, 4월혁명 이후엔 혁신 세력과 교원 노조가 강한 지역이 된 게 아니겠나.

1964년부터 한일회담 문제로 학생 시위가 또 치열해지는데, 그 무렵 '서울대 문리대가 시위의 진원지이자 사령탑'이라는 얘기가 한때 있었다. 그때 주동자급이 대개 경상도 사람이었다. 내가 1967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학생운동을 쥐고 있던 쪽이 경북고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쪽이었다. 그때를 전후해 그쪽 세력이 쇠퇴하는데, 그게 박정희 정권이 강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란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 마당을 닫을 때가 됐다.

서중석 : 홀로코스트에 대해 독일의 역대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유럽인이 참회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있었던 이 참혹한 학살을 영원히 기억하고 참회해야 한다.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그러하다. 그래야 화해도 있을 수 있는 거다.

이 시기에 학살당한 사람들 중 (아직도) 유골 발굴은 물론 시신 처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들이 참 많을 거라고 보고 있다. (예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를 비롯한 여러 과거사 위원회가 만들어져 몇몇 지역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이 규명되고 명예가 회복됐다. 이런 건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화해위 활동 중에는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끝난 게 많다. 무엇보다 유골 발굴, 시신 처리는 제대로 안됐다. 진실화해위에서 다 못한 일을 몇몇 민간단체에서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걸로 아는데, 다시 정부 차원에서 유골 발굴, 시신 처리는 물론 유적지 복원 등의 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나.

세계적으로도 1990년대 이후 과거사 문제, 특히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에 대해 일본을 끊임없이 추궁하고 있는데,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고 참회해야 일본에 대해서도 훨씬 당당한 모습으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인권이 숨 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역사에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인간에게는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지 않나.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거다. 인간성, 인권, 민주주의, 자유에 가장 역행하고 그것을 말살하는 행위가 바로 학살이다. 학살은 인류가 저지른 잘못 중 최악이다. 최악 중의 죄악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남아 있는 우리가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추궁하고 희생자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기억하고 참회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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