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순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집엔 언제가냐?
뱜 나온다는 태국을 뒤로하고 직원들 안부를 전하며 태국을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일행 모두 처음 가보는 필리핀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 전쟁 당시 태국, 필리핀 모두 아시아에서 부유한 국가였고, 한국을 도운 우방들이다. 모두 고마운 나라고, 한국이 청출어람을 한 것이 또 보답이다. 요즘은 다들 관광,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라는 편견만 가질 일은 아니다.
필리핀 공항에 도착하니, 날씨는 태국이나 필리핀이나 막상막하다. 우기라 날씨가 우중충한 것도 비슷하다. 일본 이름 같은 니오니 아키노 공항에 도착한 첫 소감은 '우째 옛날 멕시코 시티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일단 어수선하다. 어딘지 잘 모르고 저녁에 도착해서 숙박은 공항 근처로 잡았다. 입구에서 900m인데 가는 길을 찾기가 어렵다. 10차선도 넘어 보이는 도로와 차도를 보고 돌아섰다. Google Map이나 GPS에서 높이는 알 수가 없다. 우리 머리 위에 보이는 저 높은 Grand Bridge를 건너가려면 공항으로 다시 가야 한다. 어이쿠. 그 다리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욕이 나올라고 한다. 아니 어떤 스마트한 놈이 다리를 경사지게 만든 거냐고? 발통 달린 캐리어라고 하나 날도 덥고, 힘들고.. 호텔 불빛은 엄청 화려하고 요란한다. 문제는 인도는 한 명이 겨우 걸어갈 정도로 좁다.

시내 곳곳에서 동네 이름을 표시해 뒀다. 마치 리조트 같은 느낌을 준다. 날은 덥지만 호텔 이름에 이 글씨가 들어있으니 모르는 동네도 반갑게 느껴진다. 내일 아침부터 고객들 만나러 가야 하는데, 도착하자마자 나라님이 'xxx은 얼씬도 하지 말고, 위험하니 조심하고,,, 요즘 오토바이 총기 강도들이 나타나고' 이런 잔소리 문자가 계속 온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뉴스와 현실은 다르다. 문자부터 경고 강도가 다르다. 어차피 나야 호텔, 택시, 사무실, 택시, 호텔이니 큰일이 없겠지만 기분 묘하다. 하긴 저격용 총처럼 총신이 긴 소총을 경비원이 들고 거리를 거닐고 있는 것을 보니 신기방기하다.
아침부터 혼자 자는데 밥표를 하루에 두 장씩 준다. 10대도 아니고 내가 밥을 두 끼씩 먹을 일이 없다. 밥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겠다니 그러라고 한다. 커피를 들고 돌아서니 허락해 준 젊은 처자가 밥 표를 한 장 더 달란다. 남는 표라 주기는 했지만 하여튼 젊은 처자들 대단해.
Grab를 불러서 행서지로 향했다. uber, yandex는 꽤 정확하게 필리핀에서 grad는 검색을 하면 동네가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비슷한 이름이 나오면 외부인이 찾기 참 어렵다. 현장에 도착한 과학단지는 출입경계가 철통(?) 같다. 경비원이 여기는 1번이고, 우리는 2번 단지로 가라고 한다. '삼촌 전화기 죽었어요?'라고 해서 무슨 자다 봉창 뜯나 했더니 통신전파가 안 잡힌다. 30년 전 지도 들고 찾아다니는 시스템인데, 지도가 없다. 일명 툭툭이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여기가 거기라도 안 간단다. 우여곡절을 거치고 전화기를 하늘로 향하고 돌아다니며 날 더운데 쇼를 좀 했다. 다시 Grab를 불러서 행선지로 향하는데, 고객도 전화기 먹통이라 사무실에 들어가서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산업단지에는 한국기업들도 있고, 일본 기업도 있고, 중국 기업들도 있다. 다들 제조 기업처럼 보인다. 방문한 기업도 제조 시설을 이제 막 마무리했는데, 옆 집도 협력사들이다. 특정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부품 제조사들이 하나의 공장처럼 줄지어 연결되어 있다. 미팅을 잘 마치고 식당에 가서 굳이 맥주 한 잔 하자고 해서 손님이 튕겨대면 예의가 아니라 동의했다. 어메... 대낮부터 1리터 생맥주가 나온다.
갈 때는 여유가 없었다면 돌아오는 길에는 스콜도 그치고 고가를 달리는 차속에서 동네 구경을 하게 된다. 대형 사인보드, 현대적 건물 반대편은 슬럼처럼 젠틀리피케이션이 벌어진듯한 지역이 뒤죽박죽이다. 마치 청계천 고가도로, 상가단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뭔가 새로 나타나듯 그런 현장과 비슷해 보인다. 미국처럼 고가도 많은데 왜 고가도로가 많은지, 일본이 도로 투자들도 많이 했는데 공사비 늘리려고 그랬나?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 일본, 필리핀, 괌을 보면 미국 시스템이 은근 곳곳에 스면 든다. 특히 옛날 방송이나 전력 표준이 그렇다. 우리가 묶고 있는 newport지역은 리조트라는데 행운을 꿈꾸면 가산탕진을 기부금으로 하는 곳이다. 누군가는 잠시 예금(deposit)이라고 하는데 찾는 꼬락서니를 본 적이 드물다. 한식을 먹자고 해서 리조트 내의 한식집에 갔는데 반찬은 정말 맛있는데, 한국음식 레시피를 어떤 놈이 만들었는지 내가 해도 그보다는 나을 듯하다. 어린이 입맛하고 아주 안 맞는다. 그래 밖에 나오면 빵이나 실컷 먹어야지 뭐!
두 번째 미팅이 이번 필리핀 방문의 핵심이다. 사실 베이비들에게 '이번에 안면 트고,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가자'라고 했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온다. 보안절차는 정말 철통 같다. 산업단지 내에 위치한 고객사를 방문하는데, 입구부터 방문 기업확인하고 여권 갖고 가고, 노트북은 보안검사하는 곳에서 serial을 적으라고 한다. 나이가 지극한 아주머니라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안경이 부러져서 난 잘 안 보인다. 본인은 잘 보이시냐?'라고 물어봤더니 막 웃으면서 '대충 적어'라고 한다. 옛날 '조용히 밑으로 깔아'라는 구닥다리 유머가 생각난다.
고객사 건물 앞에서는 security guard가 벌써 나와서 '너네들이 방문자니?'라고 물어본다. 뭔가 계속 확인하는데 하여튼 아주 어설퍼 보인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럴까? 건물로 들어가는데 클린룸도 아니면서 신발에 비닐을 씌워서 신고 들어가란다. '애들 청소를 아예 안 하려고 준비하는 건가?'라고 중얼거렸더니 베이비 녀석 깔깔거리고 웃는다. 청소하는 인원이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고객사에서 나와서 미팅으로 안내해 준다. 자기소개도 안 한다. 분명 담당자스럽긴 한데. 조금 있으니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1-2명 하고 미팅할 줄 알았더니 PM 대장, 연구소장, 관련 개발 팀장들이 다 들어온다. '아! 오늘은 중간은 없겠구나. 족침을 당하던가 대박이던가' 무엇보다 개발 담당자 사진을 보면 젊고 이쁘장한 사내 녀석인 줄 알았는데 여성분이시다. 베이비가 '남자라고 하셨잖아요?'라고 물어본다. 적은 언제나 멀리 있지 않다. 그걸 지금 물어볼 때니!!!! 얘부터 족쳐야 하나? ㅎㅎ
PM이라고 소개한 Christopher를 보자마자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내가 Chris, Christopher, Kistrof, Krzystof 등등 똑같은 발음의 다른 스펠링 이름들이 기억에 있다. 같은 이름 alexander 5명과 미팅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한국 친구 녀석은 아주 시끄러운 대형 스피커인데 이 양반 feel이 비슷하다. PM 답게 여러 분야의 기술과 시장을 꿰고 있다. 게다가 유머감각도 뛰어나다. 논의 중인 프로젝트 외에도 시장 트렌드에 대해서 탄식을 했다. 기술적 요구사항은 이해하지만 기계로 처리하기는 엄청 어렵다. 사실 손쉽게 수건으로 한 번 닦으면 되는 쉬운 프로세스지만 사람처럼 구현하기 위한 온갖 방법은 쉽지가 않다. 그냥 손으로 딱지 참 어렵게 한다고 탄식을 했더니 고객사 연구소장, 품질팀장, PM, 개발자들 큰 소리로 웃는다. 오히려 최근 시장 솔루션이 나와서 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럼 내 것도 하나 부탁해요!'라고 했더니 신기하게 바라보며 또 다들 웃는다. 분위기가 정말 한 팀처럼 좋아졌다. 서로 의견을 교류하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kick-off 됐다. 프로젝트 명도 붙이고, 우리도 재질과 기술 검토를 동시에 해 보기로 했다. 꼭 우리 고객 놈들은 불가능하거나 어렵거나 한 것을 꼭 해보라고 권하고, 본인도 못하면 할 수 있다고 격려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되면 그때부터는 가격을 깎으라고 족친다고 했더니 또 크게 한참을 웃는다. 한국말로 대략 '그게 우리 고객이지. 팔자야 팔자' 이 정도 될까?
미팅 마무리에 사장님이 나타나셨다. 링크드인으로 일촌을 받아주셔서 인사를 했는데 친절하게 답장을 주셨었다. 외국 사람들이지만 좋은 사람들에겐 더욱 진심을 담아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내가 상관 복은 없고, 상관들은 메일 날 볶아먹거나 뜯어먹기 바쁜 사람들이 많았다면, 세상 돌아다니면 참 좋은 고객들은 자주 본 것 같다. 그런데 우연일까? 유럽 고객 중에서도 등기임원에게 무심코 막무가내로 요청을 드리고 그게 인연이 되어 일이 조금씩 시작된 고객이 있다. 그런데 방문한 고객사도 해당 업체와 일하고 있고, 지난달 유럽밤문중에 만난 핵심고객과는 아주 큰 비중으로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참 좁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좋은 사람, 필요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시간의 축적과 함께 쌓이면 결정적인 순간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걸 바라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 구실을 잘하며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다시 묻는다. "그 프로젝트 정보 A사에서 받았어요?"라고 묻는다. "A도 하나 보네요? 우린 B사인데?" 그러고 서로 마주 보고 또 웃게 된다. 시장을 대하다 보면 괜찮은데 아주 어려운 건, 개나 소나 다 끌려가서 취조를 당하기 나름이다. 결국 다 아는데 안 되는 상황이고, 이럴 때 솔루션을 만들면 큰 기회가 되기도 한다.

즐겁게 미팅을 마치고 돌아왔다. 비가 많이 와서 먹을 게 없는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베이비 녀석을 미리 귀환시켰다. 부럽다. 방으로 돌아와서 저 필요할 때만 나타나서 쉬지 않고 뭘 해달라고 조잘대는 고객님 대응을 마무리했다. 오늘 만난 고객도 본인들이 해야 할 부분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자료를 만들어 전달해 줬다. 고객일을 내일처럼 하면 안 된다. 고객일이 내 일이다. 범위와 역할은 내가 맡은 분야로 좁혀지겠지만, 내일이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더 가치 있는 일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올라간다. 모두들 파트너라고 말하지만 행동이 이를 입증한다. 주둥이 파트너는 술 마실 때나 필요하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어차피 요즘 술 마시는 것도 멀리한 지 오래됐다.
오늘은 출장 나오면 나를 달달 볶아대는 고객님들 수발을 싹 다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휴일이다. 이거 출장 올 때마다 뻘건날이 겹친다니까? 사무실도 조금씩 국내 분위기가 좋아지면 준비할 것들이 많아지나 보다. 이것들이 계속 뭘 물어봐? 에혀.. 30대 때 팀장한테 끌려가서 쌍욕 먹었어도, 그때 생각이 지금 돌아봐도 맞다. 봉급만 올려주고, 평사원 하는 게 제일 낫지. 안 그래? ㅋㅋ 그렇다고 승진 사인하고 욕을 두 시간이나 해대냐..
일 마무리하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이 호텔이나 근처 호텔이나 화려한데 카지노들이 있어서인지 소란스럽다. 그래도 필리핀 사람들은 노래하나는 참 잘한다. 며칠 전 밥 먹으러 가다 노랫소리에 쳐다보니 카지노 입구 가까운 곳에서 공연을 한다. 노래나 좀 들어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부르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택시 타고 코리아 타운에 가서 한식을 먹어보겠다고 출발했다. 밥도 잘 먹고, 저녁 도시락도 사 갖고 왔다. 덤으로 발마사지도 받아보고.
비도 오고, 날은 덥고, 습하고 내일을 또 뭐 먹지? 뭘 해야 하나? 하나 신박한 것은 호텔에 셔틀이 있다고 해서 물어봤더니 아주 친절하게 답변이 나온다. "No Shuttle, Sir" 그래 빵셔틀 같은 건 나쁜 일이지. 택시 불러 자발적으로 알아서 가야지 아무렴. 주문한 책이 예약판매가 아무것도 안 들고 왔더니 내일은 잠이나 자야겠다. 일요일엔 상해에 가야 하나.. 대체 집에 가는 날짜가 아직도 안 정해지고 이런 식으로 동남아 순회를 하게 하다니. 게다가 다음 출장 언제 갈 거냐고? 안 갈 거다. 여름엔 비뚤어질 테다!! 뭐든 엔간이 해야지.
#좋은사람 #천상잡부 #출장 #해외영업 #필리핀 #kh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