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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冊)

광해군 - 신권의 나라, 조선의 불우한 왕

by Khori(高麗) 201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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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광해군

한명기 저
역사비평사 | 200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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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부인할 수 없는 변하지 않는 과거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에 논쟁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의 다름이 아니라 해석의 다름존재할 뿐이다. 오늘날 사회에 발생하는 매일매일의 사실이 역사이고, 이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은 주어진 입장, 시각, 살아온 환경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 사실또한 수천년전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럼으로 기록된 사실에 기반한 해석이 중요하고, 동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다차원적인 접근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집 아이들의 논쟁에서도 큰녀석의 말과 작은 녀석의 말이 다를때 객관적으로 서로를 들어주는 판단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하물며 작은 일도 이러한데 역사를 읽는데 이와 관련된 다양한 근거, 주변정세의 판도, 내부의 권력, 이권, 배경의 이해를 바탕으로 퍼즐을 맞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왕과 관련된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 이덕일의 조선왕을 말한다보다 명지대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은 일독을 권할만 하다고 말하고 싶다. 광해군편과 관련하여 내가 느낀 생각은 첫째책은 사실의 나열에 기반한 교과서보다 자세한 책, 둘째책은 조금 자극적인 주제의 접근과 특정 사관에 집중된 해석이라면, 마지막책이 보다 다양한 근거, 중국의 입장과 조선의 입장을 좀더 많이 반영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저자가 시대의 해석과 현재의 해석을 교차시키는 점이 어쩌면 위험한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역사의 반복이란 명제속에서 교훈과 계승발전의 측면에서 되짚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광해군과 같이 평하된 군주는 노산군(단종), 연산군 3명이다. 후자의 두 군주중 단종은 불운의 역사를 상징하고, 연산군은 폐륜과 흥청망청이란 말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왜 광해군은 군이 됬을까는 재미있는 사실이다. 어렸을때 만화책에 나오는 연산군의 중종반정, 인조반정이 시대적 흐름인 신군부 쿠테타와 함께 부각된 기억이 세월이 지났는데 기억이 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책에서도 지적하듯 광해군의 재해석이 일제식민시시설 만선사관(만주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가 단위로 성장발전했다는 식민사관의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이나바 이와키치와 다카와 고조에 의해 시작되었고, 1959년 우리나라 역사학의 태두라 일컫는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글(광해군의 대후금정책)에 의한 것이라니 아니러니가 아닐수 없다. 그 연장선산의 일로 혼동스럽긴하지만, 책은 사실을 기반한 재해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광해군시대의 업적이라면 단연 명말청초시기 중립외교, 대동법시행(경기도), 동의보감의 발행 정도이고 폐해라면 삼강오륜을 저버린 인목대비 폐위, 이복형제이자 첩이아닌 정실의 후손인 영창대군의 살해, 궁의 건설이란 과도한 재정지출을 지적한다. 주자가례를 신주단지 모시던 성리학기반의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 충분히 군이란 이름을 붙일만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주제들이 제시되는 과정의 사실을 통한 재해석은 책처럼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광해란 주제가 시대를 넘어 다시 부각되는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은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해석을 하고있다.


선조의 과도한 출산장려책속에 첩의 둘째아들로 임진왜란당시 왕세자에 오른 광해. 그리고 임진왜란속에 분조를 통한 왕권연습을 오랜기간 수행함과 동시에 몰락한 왕권의 처참함을 뼈져리게 느끼고, 아비로써 명에 호시탐탐 망명을 기도하는 선조, 환궁후에도 붕당으로 인한 난관을 왕위계승이란 명목으로 돌파하는 무능한 아비, 왜란당시에는 명으로부터 왕권이양이란 부담감을 받고, 난이 끝나고 명으로부터 왕위계승을 저지받은 불우한 왕이 광해이다. 젊은 시절의 아비의 견제, 참담한 전쟁의 실상과 왕권의 몰락, 명과 후금사이에서의 현실등은 그에겐 상처이자 극복할 심리적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연인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생존의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리한 궁의 증축은 왕권의 회복에 대한 심리적 트라우마, 인목대비의 폐위는 선조가 죽자 언문교지로 그를 왕으로 올린 공이 있는데 인면수심의 권력욕이라 보긴 힘들다고 생각이 든다. 또 그 못지않게 평양성전투빼고 변변한 공도 없는 명이 재조지은을 위시에 온갖 술책으로 은을 통해 재정의 상당부분이 수탈됨에도 명분과 사대를 따지는 사대부의 문제인지 왕의 문제인지 참 가름하기 어렵다.  조세를 내는 백성은 과도한 증세에 힘들고, 권력만 누리고 조세의무에 면천을 권리라 생각한 사림의 폐해, 명분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군권을 갖은 문관중 서북방면으로 가기를 죽기로 싫어한 이률배반적인 사림의 행태는 당연히 비판받아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동법의 시행도 기호지방의 확장도 방해한 사림의 목적이 공물로 통한 기득권의 침탈을 방어하기 위함인지, 백성을 위함인지, 정부를 위한인지 명확하다. 화폐제도도 빈약한 나라가 경제수단을 한가지도 통합하고 백성을 위무하기 위한 선혜지법(대동법)으로 인한 방납폐해의 개선은 당연히 공이라 생각한다. 탈세자들인 사림과 사대부의 이권에 문제가 생긴것이라 봐야하고, 이 근본적인 조세문제는 조선후기에 더욱 심해지는 그 과정에 있을 뿐이다.


책에서 대북파의 충과 효중 충을 먼저 취하여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도한 것을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효가 우선되어야 할일인데 그것의 바뀜은 당연히 정치적인 해석이다. 선조의 유지도 있었고, 광해가  훗날 인목대비의 아비 "김제남의 덕을 오래보았고, 이젠 신기하지도, 듣기에도 피곤하니 그만둘때가 되었다"라고 대북파에 내린 교지로써도 주도적 주체가 광해인지 동인에서 갈라선 대북파의 소행인지 가름해볼만한 일이다.  그리고 성리학의 시대에 대북파의 정치적 지도자 남명조식이 남인들로부터 노장에 가깝다는 치욕적인 언사를 받은 것은 이념중심의 사회에서 아이덴터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반작용이란 측면도 고려해 볼만하다.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이 책속에 잘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숭명정책을 반한것을 인조반정후 폐위명분로 삼았디. 책에서도 말하듯 인조다 숭명배금정책을 썼다기 보단 숭명정책을 강화하고 배금정책의 실질적 시행은 없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점은 광해의 외교정책의 계승으로 보는 점도 그렇다. 다만 내가 역사학자가 아님으로 이 부분은 오고 있는 책에서 찾을 기회를 찾아봐야겠다.


결과적으로 빨간색 글씨가 원인이 되어 인조반정은 시작됬다. 성공한 구테타는 처벌받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역사에 쿠데타는 사실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한다. 그리고 인조반정의 주체인 서인과 심리적 동조자 남인들의 상황과 반정을 통해 그들이 도모한 것이 "국혼(왕의 외척)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을 올려쓰자(勿失國婚, 崇用山林)"라는 것은 그들의 정당성이 얼마나 파렴치한것인지 세겨보아야할 일이다. 소중화 사상의 외사랑을 바탕으로 국가의 존망, 군신의 예가 아닌 신권 아닌 본인들의 기득권에 몰두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 반증은 조선후기의 외척들의 문제와 연장선산에 있다고 생각이 든다. 또 역사는 정말 재방송이 되는것 같지 않은가?


또한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속에서도 그들의 뿌리가 대의가 아닌 소의에 있음을 반증한 일이라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사실은 이괄의 난때 경기방버사 이흥립이란 자가 투항을 하는데, 그가 훈련도감에서 인조반정 1000명의 무리에게 궁의 문을 열어준 자이다. 그리고 인조는 기금기준으로 공안, 공작정치의 내정(기찰의 강화)과 숭명정책을 하다 2번의 호란을 맞이하며 삼전도의 치욕을 맺는다. 권력자는 매번 바뀌나 백성들은 죽어나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피지배자가 원하는 곳에 역사성이 있고, 그것에 부합한 권력에 정당성이 있다고 한다면 선조, 광해, 인조의 삼대에 어디에 역사성과 정당성이 더 있을까 생각해볼만 하다.물론 백성을 사림으로만 보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우린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맥락과 함께 본다면 대외적 자주적 생존의 외교정책과 신권의 나라 조선에서 내치에서 고립된 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면 아쉬운 일이다. 결국 고려의 문화가 남아 있던 조선초기를 제외하고 사대부가 꿈꾸런 신권의 나라는 유지된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라의 백성이 사대부만인지, 수단으로 살아온 많은 백성들의 꿈은 무자비하게 강탈된것인지도 모른다. 


그런점에서 조선왕중 가장많이 궁이 아닌 곳에서 백성을 보아온 광해의 정책중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광해도 16년의 재위와 이후 19년의 유배속에 자식의 죽음, 며느리의 자진등 모진 인생과 함께 그가 지은 시와함께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 자연인으로써 그의 편중된 재능, 그렇게 밖에 발현되지 못한 시대적 배경이 아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없는 역사의 가정은 더욱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된다.


다음에 오고 있는 광해는 논조가 다르다니 기대해 보려한다. 다만 광해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책은 꼭 권해보고 싶다. 달리 10년넘게 스테디셀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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