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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冊)

끊임없고 역동적인 창조적 삶

by Khori(高麗) 201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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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중용, 인간의 맛

김용옥 저
통나무 | 201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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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리뷰 아닌 리뷰를 쓰는 이유는 현재는 한가지이다. 책의 내용을 기초로 내가 무엇을 이해했는가를 자주 까먹게되니 기록해 놓기 위함이다. RSS로 back-up을 받아두는 이유가 한가지 더 있다. 비록 부족하더라도 그게 내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또 개선점도 찾아볼 수도 있게된다. 좀더 시간이 생기면 일일이 출력해서 책에다가 꽂아둘 생각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누가 보게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나의 기록중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대기만성이 아니라 대기면성이라고도 해석을 한다. 늦게 만들어진다기 보단 크기가 정해져있지 않다는 말에 작은 베팅을 해본다. 그래야 쌩돌머리도 개선이란 희망에 작은 안심이 될것 같다. 물론 소심하게 돌에 새기면 오래갈수있으니 몇개라고 새겨놓으면 위안이 될것갖고, 완전 꼴통이 될까 나를 돌아보면 조금 걱정도 된다.

맹자를 볼땐 교과서적인 가름침, 德이 어떻게 발현되어 誠이 되는지에 대한 생각을 갖게되고 의미를 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말로되었다. 대화와 해석들을 참조하며 그 뜻을 깨우치기에 충분하다. 물론 고인들처럼 외우고 쓰고는 안되시만, 어린백성을 사랑하신 성리학 달인 세종대왕의 치적에 다시한번 감읍할 따름이다.

몇글자 모르지만 중용원문을 초등학생아이랑 같이 한장을 독송해 볼 기회가 있었다. 아이가 “한글인데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한다. 솔직히 원문기준이면 대동소이하고, 한글이면 연식이 있으니 차이가 있다. 창피함보담 세종대왕에게 감사하며, 아이에겐 네가 커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해줬다. 부록의 삶에 접어들면서 말이 이해되는 것을 보면, 아이에겐 격려고 나한텐 위로다. 인생역경과 고생을 해야 알수 있다는 의미였고, 너도 메고다니는 가방놓을때 나보다 빨리 알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데 좀더 빨리 깨닫는것이 꼭 행복한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 때가되면 하는 것이란 말이 공감되고 그 때가 획일적인지 않기 때문일것같다.

중용이란 책을 읽고, 내가 무엇무엇을 이렇게 주장하는 오만한 낙서를 한다면 도올선생의 말처럼 ‘저열한 개구라’ 아니 ‘완전 구라’가 될것 같다. 그럴 수준에 미치지 못함은 스스로도 잘안다. 그저 글을 보고 비록 틀림이 있겠지만 내가 책을 보면서 좋았던 부분, 내가 이해한 부분들을 조금 기록해볼 뿐이다.

책을 보면서 좋은점은 중용이란 뜻에 다가서기 위해서 저자가 얼마나 다차원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놀란다. 미디어등으로 통해서 볼때 이렇게 다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분을 볼 수 있는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 고전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고, 사색당파도 처음엔 해석의 차이가 있은 후에 권력의 굴레가 가세되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비록 자신이 바른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주장하지만, 반드시 논란의 부분에 다른 해석을 비교하여 읽는이가 기울지 않게 배려하고(또는 빈자리를 들어나게하고), 새로운 해석은 반드시 밝히고 추가하는 것이다. 

그 근거에 새롭게 발견된 고전위의 고전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자의 원리(상형, 회의, 형성등등)를 풀어 그 뜻을 고증하고, 다른이의 해석과 다른 언어로 번역된 뜻을 비교한다. 주관적 견해를 배제하고 최대한 범용과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라 생각한다. 스스로가 철학, 역사, 생물, 의학, 불교에도 정통하시니 가능하겠지만 동서양의 철학의 근본적인 비교, 시대배경에 대한 상식적인 가정은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옛날 말을 그대로만 이해하고 고집하는 것 자체가 權道를 지키지 못하는 길이라고 생각할 뿐이고, 다름을 찾아 새로움을 창조할 수 도 있는 자세가 중용에 조금 더 다다르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분이 조선시대로 가면 어느자리 영수를 차지하실거라고도 생각되지만, 분명 사화의 중심에 계실것이란 생각은 하게된다. 무기탄(꺼리낌없음, 신중함없음)을 지적하시지만, 묻 사람들은 깨달음이후의 막힘없음과 무기탄을 잘 구별하지는 않는듯도 하고 또 정의롭기도 하기 때문인것 같아 시대의 사상가라는 설명은 적확한것 같다.

중용란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저 석학도 책한권이 부족하신데, 내가 감히 왈가왈부할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어렴풋이 이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고, 한가지 책읽으면 즐거웠던것은 이해를 위해서 스스로 상상하던 비교가 몇페이지넘어가면서 똑같이 나와 스스로 아주 쌩돌머리는 아니구나라는 작은 즐거움이었던것 같다. 논어 학이편을 조금 절감했다.

아이디어란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면 발생한는 창의적인 의견이라고 한다. 맹자의 권도와 같이 상황속에서 끊임없이 중심을 잡기 위해서 추를 움직이는 저울과 같이, 창조적인 방향을 지향하는 쉼없는 역동적인 혁신활동이라는 생각이다. 기학적으로 움직이는 진자라고 하더라도, 양쪽의 무게, 방향의 변화가 생기면 중심을 움직여 새로운 중심을 잡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꼼수에 출연하시어 집기양단이란 말씀을 하셔서 많은 이들도 알겠지만 이 말이 하늘과 땅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게 필요 이유가 인간에 내재된 오욕칠정이란 기의 흐름이 제각각 다르고, 각각 다른 인간들이 관계를 통해서 서로에서 보다 창조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통섭을 통한 중용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천지인속에 인간은 주체적인 객체라 말하는 것이 곧 인본주의의 표상이라고도 생각이된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중간(middle)과 중앙(center)은 분명이 다른데 분별없이 사용되는것 같다. 호주의 수도는 정말 자로 그어 중간에 세운것이고, 중앙정부종합청사이지 중간정부종합청사가 되지 않는지는 쉽게 이해하는데 일상에서는 잊고 사는것같다. 그래서 道란 매일 밟고 지나가면 유지되고, 잊으면 사라진다는 말과 사람을 떠나면 도가 아니란 말은 참으로 옳은듯 하다. 또 낭만적이고 멋진 비유라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이성우위의 교육시스템속에서 이성 우위의 시대가 완숙한 시절을 살고 있다. 최근의 감성부분의 계발을 논하지만, 그럼에도 이성우위이 전제가 깔려있다는 지적은 정확한것 같다. 감성이 감정이란 부정적인 의미도 아니고, 이성이란 수리적 판단이 항상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그렇다. 평등하게 놓고 발전된 길을 찾는 시절이 되어가는것은 아닐까한다. 최근 샌들이 말하는 도덕이 회자되고,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성으로 계산하는 효용이란 이름하에 너무 오랫동안 애써 무시해온 것들의 반란이라 생각이 든다. 최근의 문명발전에 전기와 같은 기술적 출현이라면 21세기는 인간의 본연에 대한 각성이 새로운 변화 아니 끊임없는 변화의 초석이 될것같다. 새로운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인간의 역사를 써왔고 잠시 지금 지체할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공자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되고, 사기의 언급처럼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없는 좋은 이상의 세상에 조금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더불어 살면서, 이성과 감성의 합일을 찾아간다고 생각하면 내가 막연히 생각하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의 합치가 조금 비슷한가 생각해본다. 책을 읽다보니 황희정승이 왜 “네말도 옳다”, “네말도 옳다”했는지를 조금 알수 있고, 왜 요즘 시절이  말라비틀어진 스폰지마냥 푸석푸석한지, 왜 사람사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지 되짚어본다. 분명 말랑말랑 뽀송뽀송한 인간의 삶은 존재한다 다만 미약하고 지금은 좀더 배양할 뿐이라 생각한다. 돌아보면 천지인으로 세상을 보는 고인들의 식견이 참 탁월하다. 또한 저자가 천명지위성의 설명에 책의 25%이상을 할애한 깊은 뜻도 조금 이해가 간다.  아마도 1장을 읽으면 절반이상을 읽은 것이고, 이것을 깨달으면 다 읽은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실천을 통한 발현의 문제만 남아있을뿐인데 공자님도 1달이상 안된다니 낙심말고 잊지나 않으면 좋겠다. 돌에 새기면 좋겠는데 갈아대느라고 어질어질한데 조금 반들반들해졌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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