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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잡부(天上雜夫)_ 사업관리 시즌 2 (해외영업 시즌 1) )

못된 상사를 갈구는 발칙한 상상 3

by Khori(高麗) 2019.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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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를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을 이룩한 사람들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온다.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오며, 서로 다른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혼재되어 스펙트럼을 만든다. 나도 그렇게 사회에서 활동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 스펙트럼을 구성하는 한 요소다. 다양한 사회생활에서 이성적 판단과 감정적 판단이 교차하여 호응과 반목이 교차한다. 그 사회생활중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직장생활에 문제와 기쁨이 있다. 철학적으로 논하는 '사람은 게으르다', '위대하다'와 같은 다양한 통찰이 곧 현실 셰계다. 그럴리가 없다는 생각과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은 유연하게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문학은 철학, 역사,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은 누가 만들었지?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어 온 묵시적이고, 고상한 합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정보를 입력하고, 정보를 가공해서 어떤 생각이 순식간에 떠오른다. 그 생각에 따라 행동을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결과인데, 그 결과가 나오는 과정은 사람 내부에 있다. 그 과정과 방식이 다양한 환경 영향으로 인해 사람마다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 틀린 것도 있지만 다르다고 보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다른 원인은 환경, 학습의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은 그 원인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기계의 속은 볼 수 있지만,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 나를 알기도 벅차다.


 따라서 말과 행동이란 결과를 보고 의미를 파악하고, 의미의 배경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역지사지도 같은 의미다. 이런 활동에 효과적인 분야가 철학, 역사, 문학이 이지만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 서, 화도 가능하고, 타고난 감각으로 할 수도 있다. 그 중 가장 좋은 방식은 좋은 습관으로 해결할 있는 방법이 있다. 인간이 기록하는 방식도 한 방법이다.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우리는 안목, 통찰력이라는 경험의 축적을 갖는다. 기계에 사용하는 딥러닝도 마찬가지다. 경험축적을 통한 지혜와 안목을 만들면 삶을 보다 잘 살 수 있다. 목표를 위해서 본받을 만한 일을 하는 사람,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 그저그런 사람의 존재를 잘 깨닫게 된다. 우선 알아야 무엇을 할 수있다. 무지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본능에 따른 행동 뿐이다. 


 미생과 같은 만화, 한 컷의 카툰, 해학, 위트 있는 한 마디가 다가오지만 학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인간학이라고 본다면 의미가 있고, 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이 결과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물질문명에도 반영된다면 훨씬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만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배움이 있고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최근 기업들이 인문학을 더 가까이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지속 가능한 사업의 생산성에 관심이 많다. 지식인보다 훨씬 뛰어난 통찰력과 깨달음, 실행력을 갖고 있는 집단이다. 단순히 필요를 해결하는 제품보다 인간의 본성과 감성까지 수용하는 제품이 경쟁력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대의 경제활동을 통해서 기업들이 인간을 이해하는 수준을 파악할 수 있으며, 회사생활을 통해서 다양한 인문학의 단면을 체험하고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안목은 각자의 노력에 따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업이 만든 제품을 사용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산성, 경쟁력을 올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사람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이유다.


 다른 예로 대학의 교수는 기업들의 활동을 통해서 이론과 분석을 한다. 혼자서 이론을 만들 수 없다. 지식인이 더 뛰어나다면 경제, 경영과 관련된 교수들이 벌써 성공한 창업자들로 자리잡아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지식이 있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은 지식이 있을 뿐이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면 못된 상사를 갈구는 방법을 넘어서 좋은 상사가 되는 방법, 위대한 상사가 되는 방법의 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자기의 역량만큼 성취할 수 있다는 그럴싸한 말보다 "왜 그런지"라는 질문을 통해서 본질을 접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배움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인간학은 얼마나 다양한 사람을 체험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세상사람을 모두 만나볼 수 없다. 젊어서 여행을 하라는 말이 여행이란 과정을 통해서 사고를 넓히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다양한 독서와 같은 문화생활이다. 나도 이런 활동을 하지만 회사라는 집단에서 인간관계를 통해서 보다 현실적인 연습과 복습을 한다. 회사를 가까이 때론 멀리서 들여다보면 이 곳만큼 재미있는 곳도 없다. 가끔 사무실이 드라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8시간 이상 생방송을 하는 드라마에서 나는 주연, 조연, 방관자로써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상생활에서 안목을 넓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신문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접하기 쉬운 방식이다. 독서는 대부분 하는 사람만 한다. 등장 인물의 다양성, 등장인물을 창조한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내 안에 있는 것과 다른 깨달음이 쌓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딱딱한 방식은 인문학 책을 조금이라도 보는 것이다. 이성적 입력이 늘어나면 감성적 활동과 균형을 이루는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인간은 이 두가지 기준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많은 지식인들이 미치는 이유는 무협지에서 나오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과 같다. 무엇인가 과도하거나 유연성을 잃으면 문제가 생긴다. 반면 무엇인가에 미치지 않으면 성취가 부족하다. 그 균형이 인간에게 중요하다. 어차피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내가 완벽해도 타인이 그렇고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내가 제목에 못된 상사를 갈구는 발칙한 상상이라고 쓰고 스스로도 부족한 나와 인간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들도 이 표본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 속에서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을 끊임없이 셔틀한다. 타인의 입장에서 나도 못된 부하, 못된 상사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준, 지족불욕의 수준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성취하는 것도 어렵지만, 성취하고 적절한 때에 그치지 못하면 어렵게 이룩한 성취도 날아간다. 혁신기업의 딜레마, 근시안적 사고라고 말하는 경영학 이론도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문학이 훨씬 포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과유불급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가장 뛰어난 제품은 무엇을 계속 더해서 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대해진 후 불필요한 것을 제거함으로 얻어진다. 인간의 몸도 일정한 수준의 영양을 섭취하고 운동을 통해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활동이다. 모든 인간 문명은 인간의 사고가 확장된 결과이기에 유사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럼 회사에서 마주하는 상사(上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상사란 나보다 직급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이다. 포털에 나온 사전적 의미를 보고 나서, 농담으로 던지던 '성골, 진골, 육두품'이란 계급이 현대 사회에서는 계층화로 변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층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공동이 목표를 추진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과 우월한 지식과 역량을 갖은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인도해서 성취를 하는 방식이 인간 문명에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표에 따른 필요이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인간 존중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라는 좁은 범위에서 보면 이런 형태의 운영은 직원정신을 갖은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갈고 닦아 출세를 지향하는 이유가 된다. 역량을 갈고 닦으면 경쟁을 한다. 왜? 나에게 이익과 권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반면 실험적인 행동 경제학이나 공유경제와 같은 접근에서는 경쟁보다 협력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둘의 선택에서 갈등하듯, 직원정신을 갖은 사람들은 상사로서 부하로서 경쟁과 협력이란 사이를 쉼없이 오락가락한다. 


 사람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나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이성적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다. 의식주에 사용되는 시간을 제외하고, 업무를 볼 때에도 감성적인 반응이 나타난다.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행동하는 시간은 보통 2시간이 채 안 되는 것 같다. 장시간 회의를 한다고 머리가 입력, 가공, 출력이란 이성적 프로세스로만으로 동작하는 것도 아니다. 회의를 하면 칭찬, 시기, 비난의 생각이 교차한다. '얼씨구, 저기 벌써 정상으로 배 들고 가네', '뭔 말 인지 알겠는데 그걸 누가 한다는 거야? 말은 된다', '어허 또 구라신공이 시전되고 있네', '하하, 저런 짓은 어디서 배워왔어', '자기 흉은 모르고 남의 흉은 입신의 경지구나'와 같은 생각도 머리속에 떠오른다. 회의한다고 설명과 발표자료를 육하원칙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이해, 분석, 검토 용도로만 머리를 쓰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은 감성적인 부분, 습관적인 부분이 훨씬 많고 강하다.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가 그렇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다양한 인간 환경을 이해하면서도, 내가 매일 아침부터 만나야 하는 상사는 꽤 괜찮은 사람이길 기대한다. 그리고 실망한다. 본인의 희망, 타인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 사람을 보이는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상사는 성인군자인가? 악인인가? 굳이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 책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 같은 긍정적인 모습이나 악마와 같은 절대 악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주제를 빨리 전달하기 위해서 너무 많이 단수화되어 있다. 내 생각에 상사도 이도 저도 아닌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다. 단지 내가 했던 과정을 조금 먼저 경험한 사람 또는 내가 하는 과정을 먼저 완료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회사라는 조직에 모인 이유를 잘 이해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상사가 가끔 불편한 때는 언제인가? 내가 약속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할 때, 내가 아직 서투를 때, 내가 잘못했을 때라고 한다면, 나에게 '꼰대네 꼰대'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상사 돈을 떼먹었다면 불편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회사에 모인 이유로만 좁혀보자. 이렇게 불편한 이유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채우는 방향으로 질책하고 나의 행동을 이끌어 낸다면 이런 부분은 감내해야하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 배우면 해결되는 문제다.


 반면 상사가 자꾸 지시 사항을 기분따라 바꾸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불법적인 상황에 나를 노출하고, 직원들의 권한을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침해하는 경우도 불편해진다. 나는 못된 상사라고 정의할 때 옳고 그름의 논쟁이 가능한 경우로 국한하려고 한다. 타인의 문제가 나에게 전가되거나 나의 문제가 타인에게 전가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기분이 나쁘다고 다 못된 상사라고 한다면 세상에 착한 상사는 하나도 없는 셈이다. 상사도 아는 것과 무지한 것, 옳은 것과 나쁜 것, 기분 좋은 것과 기분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그의 행동이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행동과 일치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피해가 타인에게 발생하는 경우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하는 문제다. 예전 부당한 지시를 들을 때 나는 "댁에 자식한테도 그러시오?"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내 자식이라도 이런 지시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나이가 되고 있다.


 연애를 이성적으로 하는가? 대부분 감성적으로 딱 감이 오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 후 이성적으로 온갖 좋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이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성적으로 지적질도 점진적으로 늘어가다 적정한 선에서 절충을 한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얼굴, 눈, 코, 입이 이렇게 저렇게 생겨서 나의 기호 A, B, C에 부합함으로 저 사람을 80%쯤 좋아하기로 결정하고 실행하기 시작한다'와 같은 방식으로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다. 상사를 대하는 감성적 방식도 유사하다. 조금 딱딱하지만 이성적인 분석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업무를 통한 목표를 위해서 모였기 때문이다. 회사는 사교클럽이 아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더 효과적으로 못된 상사도 갈구고,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상사와 이성적인 대화는 대부분 업무에 관한 것이 많다. 당연한 업무를 점검하고 약속된 못한 이행을 점검하고 질책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다. 못된 상사란 부당한 질책과 부정한 행위에 대한 부분으로 좁혀서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기분이 나빠지거나 좋아지거나 하는 것으로 판단하면 죄다 다 나쁜 놈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접근으로 상식, 사회 통념상의 예의에 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의가 없으면 부족한 사람이라고 보통 말한다. 못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감정적 비판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업무를 기준으로 예의는 좀 부족하지만 업무를 약속된 시간에 제대로 완수하는 사람과 예의는 있지만 약속된 시간에 업무를 하지 않는 사람 중 누가 질책을 받는가? 당신은 누굴 선택할 것인가? 인격적 판단과 호불호는 다를 수 있고 극단적인 예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목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선택하면 전자가 옳다고 해야한다.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회사에 왜 왔는지 생각해 보자.


 사원이 바라보는 대리, 팀원이 바라보는 팀장이라고 할 때 우리는 직책이나 직급을 생각한다. 계급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재빠르다. 협상을 할 때 상대방의 의사결정자를 찾는 것이 단적인 예다. 최근 직무성과제를 적용하면 당연하지만, 아직 한국 문화에서는 장유유서가 안 지켜지면 파격이란 말을 쓴다. 명분이 실리를 앞서는 사회다. 구호는 실리가 앞선다고 말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제목과 내용의 부조화가 있는 사회다. 나는 명분과 실리가 균형있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상사(上司)란 내가 하고 있는 과정을 먼저 마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계층과 계급이 아니라 리더로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될 자격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사의 성적이 뛰어난지는 따로 파악해야 할 문제다. 뛰어난 영어 실력이 있는 고등학교 3학년은 중졸이지만, 형편없는 영어실력을 갖고 있는 대학생은 고졸이다. 영어와 관련된 실용적인 측면에서 고등학생이 우월하지만 사회적 제도와 인식에서는 대학생이 이점을 얻는다. 상사와 상사보다 낮은 직책의 사람은 분야에 따라 각자의 장점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장점으로 살아야하지만, 또 대부분 망하는 사람은 그 장점만 쓰다가 망한다.


 자신의 장점으로만 겨루기를 하면 풍파가 생긴다. 조직의 목적과 목표는 하나지만, 조직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량이 필요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은 것이다. 협력의 조직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해야 한다. 분업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졌는데, 이 협력의 결과로 경쟁만 한다면 좀 바보스럽다. 신자유주의도 이런 과도한 경쟁의 획일성이 인간과 맞지 않고 조정이 필요하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됬다고 생각한다. 수업료를 조금 많이 낸 후유증이 큰 것을 보면 사람은 참 게으르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다름의 인정을 통해서 상호보완적 구조를 갖는다. 회사에서 역할과 책임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R&R(role & responsibility)을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듣고, 나도 업무상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인은 주인정신을 갖고, 직원은 직원정신을 갖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회사에 모여서 일하는 목표와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자신의 업무영역이 결정되는 이유이며, 이에 상응하는 급여를 받는 이유다. 자주 잊혀지지만 L&L(lesseons learned)은 더 중요하다. 실수를 하고 실수에서 배우지 않으면 항상 그 수준이다. 이렇게 배우지 않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면서, 타인이 '너는 평생 그 일만 해라'라고 이야기하면 대단히 화를 내는 이유를 가끔 이해하기 어렵다. 


 상사는 더 많은 책임이 주어지고, 그에 따른 보상도 보편적으로 더 많다. 책임은 '책임지고 사퇴한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게임과 같이 상사는 실제 HP는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평가된 레벨은 나보다 높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잠재력은 또 다른 이야기다. 사회가 경력을 인정한다는 말은 시간과 노력을 더해 상사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 인간은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효과적으로 노력과 몰입을 통해서 시간을 단축할 능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부하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가능성이다. 동시에 회사를 60세까지 다닌다고 가정하면 한 살이라도 어린 부하직원이 더 오래 회사를 다닌다. 당연히 나이가 적다는 것은 더 많은 미래의 역할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상사를 조금이라고 갈궈보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상사에게 분노를 배출하거나, 상사를 방해하거나, 상사를 망신을 주는 방식으로는 이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그런 방식도 일시적인 통쾌함 또는 성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본인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쿠데타가 종종 성공하지만 실패한 쿠데타는 훨씬 많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아주 희박한 확율을 통과한 결과다. 1명의 영웅이 나오기 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을까? 조금 고급지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파고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을 먼저 체험하고 딥러닝(deep learning) 수준이 나보다 높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웅과 같은 사건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만한 실력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다.


 못된 놈은 더 부지런하다. 못된 상사는 특히 이렇게 치고들어오는 부하를 갈구거나 망하게 하는 것에 아주 높은 전문성을 갖고 있다. 본인이 제갈량(이 사람이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공부가 된 사람으로 나온다)과 같은 재능이 없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다. 인생에 공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 값을 회수해 간다. 대머리가 돼도 공짜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참 드물다. 못된 상사를 갈구기 위한 과정에서 얻는 것이라면 이런 노력을 통해서 본인의 다양한 능력과 안목, 성찰도 더불어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덤도 생기면 해 볼만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못된 상사들의 다양한 예를 들수 있다. 내 생각에 대부분 자신의 탐욕이 업무보다 앞서는 사람들이다. 재물이나 권력을 위한 탐욕이 전체 목표보다 앞서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생각지도 못한, 아니 머리속에만 있던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성실하게 일하다 어느정도 권력을 휘두를 위치에서 본색을 들어낸다. 부하직원이 이러면 벌써 사회적 정화시스템으로 견제를 받는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희망을 갖고 있지만 못된 놈들은 그 견제를 벗어날 실력은 있다. 실력만으로는 평균이상이기에 만만하게 볼 수 없다. 더 부지런해야 하고 더 부지런한 만큼 실력도 배양된다. 예를 들어 못된 상사에게 불평, 불만만 해보면 앞에서는 별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로의 말, 사과의 말도 한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예상과 반대다. 이런 반전이 신기방기하기도 하고, 더 큰 분노를 느끼는 원인이 된다.


 이런 부류의 상사를 만난다면 조심해야 하지만 그들의 약점은 자신의 탐욕을 제지당하고, 당연히 해야하는 하기 싫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일반인에게는 대부분 당연한 일이다. 못된 상사는 착하고 똘똘한 부하, 착하고 실력있는 상사가 가장 괴로운 법이다. 노래처럼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시간을 단축할 능력이 인간에겐 존재한다는 것이 희망이다.


 '못된 상사를 갈구는'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조직의 목표에 부합하는 전략과 실행 계획, 상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예의바르고 똑부러지게 상기시켜주는 다양한 방법이 필요하다. 못된 상사도 자리를 유지해야하고, 체면치레에는 민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성과가 나면 상사도 이익을 얻고, 업무를 수행한 부하도 성과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받아 성장한다. 자연스러운 상생의 길이다. 그러나 탐욕이 작용하는 사람은 내 것은 나의 것이고, 타인의 것도 왠만하면 내것으로 하고 싶은 욕심을 보인다. 상사는 부하의 공을 가로채고, 부하는 상사보다 먼저 광을 판다면, 시간의 문제지 대립과 반목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바른 길을 가는 신념은 형세를 잘 판단하고 때를 파악해서 접근하는 안목, 용기, 바른 명분을 갖은 전략이 실행을 이끄는 원천이다.


 나는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속담 인용일 뿐 나는 종교가 없다. 중이 사사롭게 이익과 권력에 미치면, 절이 미쳐 돌아간다. 절의 제도가 부당하거나 불법적이면 중이 미쳐 돌아간다.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할 때 떠나거나 어느 한쪽이 너덜너덜 해져 떨어져나갈때까지 중은 절을 떠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선량한 사람들은 피해를 감수하고 복구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입사할 때 꼼꼼히 따져보고, 규칙을 정해서 못된 놈을 속아내려는 노력을 하지만 잘 안된다.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시시때때로 변하고, 외부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 대응을 강요한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 길이 사람에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 부처, 성인군자가 아니다. 나도 그렇지 않다.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달린 양심이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나침반 역할을 한다. 나도 그 못된 상사가 되는 길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잘 가꿔야한다.


 상생의 길로 들어서면 상사는 함께 하는 동료지 나를 못살게 구는 부정의 아이콘이 아니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사람은 뛰어난 역량을 갖은 인재다.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일이다. 대신 당신에게는 존경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이 따르는 리더의 자리가 주어질 수 있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


 사회는 기술과 물질의 발달로 빨리 변화하는 것 같지만 인간을 규제하는 법률이 변화하는 시간과 노력을 보면 인간이 태생적으로 얼마나 이중적인지 알 수 있다. 물질에서는 보다 진보적이지만 인간의 제도와 관련하여 대단히 조심스럽고 보수적이다. 그래야 세상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그 세상 안에서 존재하는 기업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잘 이해하고 준비해서 괜찮은 상사가 되어보자. 그게 가장 큰 성취이자 복수다. 


 못된 상사는 대다수가 아니다. 대부분 상사가 못됬다고 생각하면 당신도 곧 그 대상이거나 그 대상이 될 사람이다. 나도 자유롭지 않다. 이런 다양한 생각, 행동의 사람들속에 아주 소수의 못된 놈이 존재한다. 그들을 주시하는 이유는 못된 놈이 여러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못된_직장상사를_갈구는_발칙한_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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