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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연 (劇)

헝거게임

by Khori(高麗) 2012.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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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집에 들어와서 생각해봐도, 어떨땐 영화의 줄거리를 찾아보고, 주연배우를 생각하는 것보다 우연히 고른 영화속에서 큰 감흥을 받을때가 좋은것 같다.  우연히 생긴 예매권을 갖고, 오늘은 혼자 나를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 선택했는데 욕심을 마음껏 부린셈이 되버렸다.


장르가 환타지, 액션, 드라마로 되어있지만, 영화의 줄거리를 자세히보면 매트릭스와 같이 아주 중의적인 흐름을 갖고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단지 환타지 소설같은 느낌의 수단을 아주 조금 사용한 아주 사회적인 영화라고 생각된다. 환타지적인 면이 있었나? 몇가지 장면은 이미지가 있으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앞서지만, 나 자신이 느낀대로의 해석을 해보고 싶다.


영화의 시작은 아주 불안정한 앵글을 갖고 있는듯하다. 카메라가 걸어가며 관찰하는 느낌이지만, 비문명과 문명이 섞인 낙후된 12구역의 모습을 흔들리는 앵글에 담아줌으로 불안, 공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느끼게한다. 통제구역을 알리는 철조망을 넘어서며 안정된 화면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주 대조적이다.


그리고 13구역의 반란을 평정한 판엠이 이후 12구역을 대표하는 젊은 남녀 중 단한명이 생존하는 happy hunger game의 시작을 보며, 왜 13구역은 반란을 일으켰는지, 그리고 12구역만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상상을 해본다. 물론 74회라는 의미가 또 무슨의미일까 라고 생각해보니, 75년을 빼보면 대략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를 말하는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 내용은 생존게임인데, 마치 경제, 사회의 역사를 말하는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많이든다.


여주인공 캣리스(발음이 아주 불편하다)는 어린동생을 대신하여 지원을하고, 기대와달리 남자친구 게일이 아니라 피타(피터도 아니네?)가 함께 캐피톨(이거도 capital이 아니다)로 향한다. 뭔가 부조화를 이끌고 있다. 이젠 그들의 삶은 제한된 시간속에 버려진것이고, 시계소리와 같은 실로폰소리가 매우 귀에 거슬린다. 화려한 도시를 굽이쳐 320km로 달리는 모노레일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게 아닐까? 그 모노레일안에서 과거 헝거게임의 생존자이자 우승자의 모습은 마치 정신분열증환자가 멘토라 말하는 것과 같은 암울함을, 그리고 가여운 두 남녀는 목숨의 댓가로 만찬을 즐겨야하는 아이러니속에 있다.


광란의 도시 캐피톨은 아주 스타일리쉬한 사람의 환영으로 이들을 맞이한다. 이를 통해서 캐피톨과 12구역의 단절, 왜 그곳이 모노레일의 한가닥만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캣리스에게 12구역과 연결된 끈은 선물로 받은 작은 브러치와 돌아갈수 있을지 회의스러운 한가닥 모노레일뿐이다. 


경기가 시작하기 30초전, 그 장면이 가장 강렬하게 남는다. 클로즈업된 캣리스가 공포에 떠는 순간의 scene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 피지배자가 원치않는 무대로 끌려가는 공포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초라는 메세지...그녀간 캡슐에 올라서는 순간의 정적이 공포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대통령 snow는 계속 검정계통의 옷을 입는다. 그리고 경기를 운영하는 seneca의 수염은 마치 사람이 아닌 똑똑한 원숭이를 보는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속엔 무서운 지배의 룰이 있다. 그들에게 공포를 주기위해서 왜 24명을 뽑아서 몰살시키지 않는지를 물으며 희망을 말하는 스노우를 통해서 왜 그가 눈처럼 하얀옷을 입지 않는지를 쉽게 알수 있다. 이 말을 통해서 경기의 룰은 약육강식의 세상에 나약한 24명의 청춘을 떠밀어, 서로를 약탈하고 죽이는 비참한 틀속에서 나홀로 생존할 수 있는 희망을 준다니 얼마나 잔인한가?  나에게 예술과 사상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생각과 로빈훗과 같이 세번째화살로 사과를 날려버린 캣리스의 용기도 기억난다. 하지만 조용하고 나약한것 같은 피타가 스스로의 자각과 자기삶의 주인을 인식하는 모습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캣리스와의 대화가 큰 복선인것 같다. 


경기의 과정은 참혹하다. 생존을 위해서 무리짓고, 1구역남자녀석처럼 그 속에서 작은 권력을 또 차지하려는 모습, 공공의 적이 되어 쫒기고, 나약한자는 생존을 위해서 쫒긴다. 특히 가려린 루의 죽음은 너무나 마음아프다. 또 아주 이쁘게 생기기도 했다. 지배자가 설정한 경기의 규칙에 루는 약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만들고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장의 지배자에게 희생된 루..그래서일까 그녀의 죽음에만 캣리스의 절규, 울음 속에도 아름답게 꽃으로 장식된 같다. 중간에 피타의 모습은 좀 비굴하다. 하지만 주어진 시계바늘을 좀더 더디게 움직이게 하려는 애착의 입장, 작은 권력앞에서도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도 결국 상처받고 버림받아 목숨을 구걸해야하는 처지에 다시 캣리스와 조우한다. 그 쫒기는 무리는 또 다시 연대한다. 생존에 대한 경계가 아닌 진정한 연대를 자기희생을 통해서 완성해 가고 있다. 


이로인해 경기의 주체자는 자신들의 규칙이 깨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마 캣리스가 보이스카웃 경례를 붙이는 모습이 12개 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각하게 하자, 지배자는 규칙을 바꾼다. 아마 이 모습이 우리가 어떻게 사회를 점진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게 아닐까? 마지막 생존의 장에서 다시 지배자는 규칙을 원위치시킨다. 아마 이 모습이 권력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본능적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캣리스와 피타는 경기의 규칙을 깨고 저항함으로 드디어 권력자는 그들을 인정할 뿐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의 마음에 피어오른 자각은 들불처럼 번질수 있고, 걷잡을 수 없는 또 다른 13구역의 반란이 될지로 모르기 때문일것이다.


경기의 규칙이 바뀌어 끝남으로 경기를 통제하는 하수인 세네카는 조용히 책임과 권력의 희생이 됨을 암시한다. 하지만 스노우는 다시 검정색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며 막이 내린다. 실패했다기보단 잠시 권력이 온순해졌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감으로 권력의 존재를 다시 각인시키는듯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캣리스가 살아가는 과정에 정신줄을 놓은것 같던  헤이미치란 멘토도, 그녀를 이해하고 안쓰러워하는 코디네이터 시나도, 궁지에 몰린 생을 구해준 루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생하려는 피타까지 낮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 애정을 갖고 지지하고, 희생하고, 연대함으로 권력에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캣릿스가 살아가는 한때 눈여겨보지 않았던 바로 그 이웃들이 아닐까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별거아니라고 생각한 것들이 세상이 뒤짚히지 않게 잡아주는 중심추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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