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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_경제_IT(冊)

화폐없는 세계는 가능하다

by Khori(高麗) 2013.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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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

애니트라 넬슨,프란스 티머만 공편/유나영 역
서해문집 | 2013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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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성장없는 번영이라는 생태경제학과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꽤 재미있게 읽었는데, '화폐없는 세계는 가능하다'(Life without money : Building Fair and Sustainable Economics)나는 제목과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경제만들기라는 소주제는 책 읽기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 책 제목을 접하고 이웃집에 써 놓은 댓글처럼 "우유한개 주세요, 하트한개 뿅"하고, 누군가 나에게 레고를 달라고하면 "그건 하트 열개를 뿅뿅쏘셔야합니다"라고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내가 철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화폐라는 것이 우리의 모든 활동에 교환의 수단, 권력의 수단, 종교적 지위까지도 침범함으로 그것이 없이 산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고도록 발달된 금융자본시대를 통해서 다양한 화폐의 기술이 발달하고 있기에 자연의 공기만큼 필수적인 인간의 발명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의 서문부터 저자인 애니트라 넬슨(Anitra Nelson)과 프란스 티머만(Frans Timmerman)의 서문은 매우 박력있게 출발한다. 비시장 사회주의 가능성(non-market socialism)이란 조금은 생소한 주제의 가능성 아니 당위성과 함께 비화폐시장의 지향을 유토피아처럼 언급하기 때문이다. 박력을 넘어서 용감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우려는 현실로 재림하고 처음부터 두통의 귀재 칼 맑스님의 자본론 1부, 3부 이런 이야기와 매우 건조한 문체는(분명 서문에 최대한 쉽게 쓴다고 약속을 했음...ㅡㅡ;;;) 읽는 이의 두뇌체계를 뒤짚고, 한장의 글씨를 읽고 넘기면 앞장이 깜깜한 상태가 반복되는 것 같다. 처음 세시간을 읽어서 겨우 63페이지정도를 보고, 그것도 다시 보고 다시보고를 여러번 하게된다. 이해의 수준이란 질문은 정말 언감생심이 되며 내 인식체계의 한심함에 약간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동시에 어째 잘 모르는 놈들이 저도 모르니 어렵게 쓴다는 일설에 분노의 몰표를 던지고 싶은 생각이...드는 것도 사실이다.



케인즈주의 이후 성장중심의 신자유주의의 조류시대에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었다. 아마도 칼 맑스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런 과도한 성장 지상주의의 폐단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칼 맑스가 자본주의자로써 자본주의가 내생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한 것은 아닐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의 논리에 맞는 것과 삶의 논리에 부합하는가가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같다. 과거 산업자본의 시기에 그 동력이 기술의 발달과 노동력에 집중된 시대라면, 현재는 산업화를 넘어선 금융자본의 시대라는 생각을 한다. 그 시대적 배경에서 노동의 가치에서 금융자본시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화폐에 대한 의견을 다시 맑시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매우 괜찮은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붕괴처럼 화폐없는 비시장주의에 대한 결론에 결코 동의하기는 어렵다. 마치 맑스의 의견이 자본주의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수용하지만 그래서 공산산회를 만들어야하는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시대를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으로 구분하였다면 책은 마치 화폐라는 교환가치의 과정에서 발생한 권한을 기준으로 유권계급과 무권계급의 충돌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지속적인 혁명전 전환을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세상에 혁명을 통한 의식의 전환은 가능하지만 세상을 그들의 뜻데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흐름에 반동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폐가 순수한 사용가치를 넘어 교환으로 발생하는 교환가치의 왜곡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화폐로 계량화된 가치가 그 순수한 가치를 갖을 수 있는 냐는 문제는 적절한 지적이다. 하지만 사람의 가치를 연봉으로 계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럼 사람이 아닌 다른 재화의 가치는 가능한 것인가라는 반문도 할 수 있다. 결국 절대적인 가치를 논하게 된다면 나는 인간은 합의가 가능할 뿐이고 신의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화폐를 없애자는 생각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하자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화폐란 인간 문명의 발달과 함께 발전되어온 문명의 한 부분이기도 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경제시스템에서 좀더 효과적이었으며, 그 발달과 함께 더불어 발달되어온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화폐의 폐기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준비, 대체 시스템이란 수준은 매우 이상적이라고 존중할 수도 있지만 유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집 어린이가 모든 사람이 다들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요라는 명제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실현가능성, 사회의 제도의 한계도 고민해야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체게바라의 의식의 전환이 사회변화를 이끈다는 명제를 갖고 지속적인 교육을 백년지대계로 삼아 준비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현재 경제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의 지적에 대해서는 충분한 의견제시를 존중하고, 소극적인 실험의 단계에서는 선택적인 사항임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결코 현재의 대안적인 ideation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화폐의 상실로 발생하는 사회시스템의 붕괴와 정지를 감수해야하는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지 여부를 떠나 인류의 입장에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라 생각하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는 노동가치설과 잉여, 분업등을 통해서 인간 소외의 문제를 지적하고, 책에서는 화폐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이 떨어져가는 문제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생태경제학적 수준 이상의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혁명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맑스가 말한 통제경제의 시행이나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자립경제(자급자족)의 지역단위와 이를 협약과 네트워크로 연결하겠다는 아나키즘적인 사고는 기존의 국가체계를 넘어서야하는데 이론의 논리성이 아니라 현실가능성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인간의 역사에 물리적으로 일정 지역을 아무른 경우는 있어도 전세계를 아루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에 神님이 하셨는지는 알수가 없다. 통합이 혹시라도 실현 가능하다는 상상을 할때, 사회가 매트릭스의 영화처럼 빨대에 꽂아 달아놓은 누에고치 같은 세상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을까한다. 이는 인간이 위대하지만 신과 비교할때 100%와 max 99%처럼 절대 도달하지 못하는 간격이다. 그래서 인간이 미분이란 계량화를 만들어 神님의 위치에 도전해 본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equal이 아니라 얼추100%니까..하지만 얼추는 큰 잠재적 위험이 존재한다.


성장, 팽창, 교역의 확대로 자연과 인간의 균형이 깨지고 있는 점은 현실적으로 절제와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에 대해서 화폐를 벗어나 문명사로보면 원시시대의 자급자족과 같은 경제로 회귀하자는 것은 현재 수준에서 고착화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 특정 사회 및 국가의 발전단계가와 지리적 상황도 다르고 욕망과도 배치한다고 생각한다. 사하라사막에 거주하는 사람은 뭘 먹고 살아야한단 말인가? 비록 작고 자립적인 사회를 구축하고 연결하는 것이 시도할 가치있는 활동이라 동의하지만 확장은 그들이 우려하는 팽창적 경제활동만큼 문제도 키운다. 아직도 인간은 모든 개인의 의견을 수렴해서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과 의사결정 시스템을 갖고 있지 못하다. 더불어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책속에 말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인간이 할 수 있을까에도 의문을 갖는다. 물론 신의 존재는 가능하지만 인간이 절대적으로 객과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자급자족 경제단위에서 화폐를 없앤다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과 상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배추를 경작하고, 옆마을에서 무우를 경작하여 교환하는 물물교환(barter trade)라 하더라도 화폐가 현물화 되었을뿐이다. 예전에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썼다는 말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수순한 가치에 접근할지 모르겠지만 제3의 마을에 무우를 지원하기 위해서 교환비율을 변경하는 것은 결국 교역조건(Trade terms)를 변경하는 것이고 확장되면 환율과 같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더 많은 마을을 돕기 위해서 효율을 그들이 말하는 자연과 균형을 이루는 최소점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다시금 증산이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이런 증산은 분업의 과정으로 회귀하지 않을까도 생각하게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정하듯 지구가 부양할 인구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넘어선 만큼 인구를 강제로 줄여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효율성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다른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같아질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책에서 언급된 네트워크란 말은 충분히 동의하면서도, 협약이란 말은 조금은 말장난이란 생각을 한다. 화폐에 따라 계약과 협약이 나누어진다고 설명하지만 계약과 협약이 원문으로 contract와 agreement일 것이라 추정컨데 동일한 의미다. (사전을 찾아보시면...) 그리고 계약과 협약은 2명 또는 그 이상의 당사자들이 서로의 의무과 권리에 대한 합의문서이면 법적 효력을 갖게 하는 약속이다. 화폐란 물품을 팔고 사는 물품매매계약, 서비스계약등에서 한가지 조건일 뿐이지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배추밭 100평을 너의 무우밭 400평과 교환하는 것은 협약이고, 배추밭을 평당 만원에 100평을 판매하고, 너의 무우밭을 평당 2천5백원에 판매대금 전액을 지불하여 구매한다고 하면 계약이라고 봐야하는가?  이는 협약을 노동조합과 사용자의 관점에서 많이 사용하는 점등에 기인한 것인지 그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내가 싫어하는 양비론적인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계비용을 줄이는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한계효용을 늘리는데에도 인간의 능력상 동일한 한계가 존재한다. 한쪽은 절제이고 한쪽은 도전과 가능성이라면 둘을 같이 보아야할 일이지 새의 남어지 날개를 꺽어 한쪽으로만 날겠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사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복은 절제와 도전이란 야망사이에 좀더 윤리적이고 도덕적 충족을 공유함으로 존재할지 모르겠다. 인간의 삶을 피폐시키는 성장의 과욕을 지역단위의 자립경제의 모습이 절제의 교훈으로 작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인군자가 되거나, 모든 사람이 수도승과 같이 살자는 말은 결국 그들이 비판하는 사회 지도층과 정치인의 선전선동과 동일하다. 일반인들이 왜 일주일에 회사를 5일을 가고, 종교단체에는 1일을 가는지 그것이 혹시 균형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저는 5일 일하고 2일을 노니 말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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