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_인문_사회_정치 (冊)

한여름에 한비자 읽기 (4) : 韓非子 17편~19편

by Khori(高麗) 2023. 8. 27.
728x90
반응형

 이 한여름에  이걸 잡고 씨름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대견했다가 한심했다가 한다. 19편이면 전체 55편 중에 30%를 초과한 셈인데, 읽기가 싫은지 자꾸 페이지를 본다. 대략 270페이지까지 왔는데 940페이지를 바라보니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이란 생각이 든다. 날은 덥고, 마음은 답답하고, 정신은 혼미해진다.  번주엔 읽고 있던 담덕 6, 7편이 새로 나와 구매를 하며, 읽다 보면 나중에 쓸모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안데르센 동화전집을 샀는데 받고 나니 이건  페이지도  된다. 문제는 한꺼번에 온다더니 점입가경이다. 이제  더울   선택을 하지 말아야겠다.

 

 책을 읽고 책대로 해야 하는 책과 과정이 있고, 책을 읽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기와 과정도 있다. 한비자를  여름에 읽고 있는 실수는 세상에 대한 기시감이랄까? 혼돈은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안정은 혼돈의 씨앗을 품는 시간이 된다. 2010년 정도부터 미국과 중국의 분쟁이 예견되고, 2018년 잠재된 힘의 격돌이 일어나고 코로나가 아직도 만만치 않은 힘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확장, 그리고 법치를 강조하던 시대가 탄핵으로 종결되고, 통일과 친중의 분위였던 정권은 부동산에 실패하며 용두사미가 되고 다시 법에 의한 공정의 시대라고 불리고 있다. 

 

 시대를 살아가며 '나한테 왜 이래?'라는 실험실 쥐와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고등학생이 대학제도에 민감하듯, 사회에 존재하는 법과 제도의 해석이 너무  폭으로 변화하는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하물며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나도 그런데, 그런 시대의 교육적 영향과 사회환경을 수동적으로 학습하던 세대가 좋게 말하면 다변화고, 나쁘게 말하면 반목과 대립의 가능성이 너무 커진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다들  살게 된다는 거야?'라는 질문이다. 등소평의 흑묘백묘의 주장, 미국제일주의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땅의 사람들은 어떤 원칙을 갖고 살아가는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한비자란 고전을 읽어보며, 시대를 관조적으로 읽어보려는 노력인데 글쎄 읽을수록 현타만 누적되는  같다. 시대의 철학도  수가 없고,  낮은 수준의 부국강병이란 방향도 각자 알아서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것일까? 그렇다고 노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말과 글로 약속된 것이 행동과 편차가 커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괴감이 많이 든다.  와중에 생존이란 명제 앞에 다들 이리저리 날뛰기 바쁘다. 

 

 한비자는 군주와 신하의 논리로 이야기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리더와 구성원으로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리더는 말과 행동의 일치를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말과 행동은 법술이란 근원에 구속시킨다. 현대 사회로 보면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과 제도란 시스템이란 범위에서 리더는 상황에 맞는 올바른 주장과 행동을 일치시킴으로  좋은 진일보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요약된다. 나머지의 이야기들은 그런 예시와 다양한 사례에 가깝다는 생각은 들지만... 언제  읽나! 아이고. 게다가  편씩 읽고, 나름의 소견을 정리하다 보니 더디다. 어제처럼 읍내에 나갔다가 종이가 떨어지면, 얼씨구 잘됐다 생각하며 얼른 책을 놓고 구경을 하게 된다.

 

17편 비내(備內) 내부를 방비한다

 군주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한비자의 성격을   있는 편이 아닐까? 굳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너무나 솔직한 의견은 사람의 거리를  좁혀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듣고 읽는 사람의 절실함과 필요, 상황적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군주의 죽음으로 이익을 얻는 자에 대한 논의라니 대담하다.

 

 한비자가 논하는 법술은 현대적으로 보면 일종의 시스템이란 생각을 한다.  역할과 책임, 권한의 범위 대한 규정이나 약속에 가깝기 때문이다. 군주의 위험을 가까운 친족, 신하들로 보는 단순하고 확실한 통찰이라고   있다. 믿지 않는 놈과는 죽을  빼면 사실 큰일이 있기 힘들다.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이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한 부분보다 이익의 관계로 규정한 내용을 보면, 아담 스미스보다 훨씬 앞선 사고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부귀해져야 수레를 타고, 사람이 죽어야 관을   있다. 이런 이해관계  이익이 수레를 만드는 사람과 관을 만드는 사람에겐 중요한 명제다.  대상의 부귀와 죽음이 아니라  결과에 집중한다고 하니 조금 야박해 보이나? 하지만 많은 기업들도 결과중심적인 평가와 결론을 내린다. 과정이란 정성적 평가는 사실 평가에 대한 기준이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2천 년이 지나도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음으로    없는 것도 아니다. 이 편을 읽으며 '사람들은 증오하는 자를 방비하지만, 재앙은 사랑하는 자에게 싹튼다'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일이다. 

 

 물과 불의 관계를 통해서 물이 불을 제압하지만 중간에 가마솥은 물이 끓어오르게도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나는 불이 물을 제압하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펜하이머를 보시라)  극단의 사이를  가르면 가능한 말이다.  실랄한 말은 '군주는 마음속에 법률을 품어도 간사함이 제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그리  안다면  간극 속에 지혜, 생존, 현명함, 슬기로움도 더불어 있다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군주도 신이 아니고, 우리 모두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마음을 갈아 어떤 분야에서 빛나게 하지 못하는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무엇을 반짝이게 갈고 있는가는 마음 자세의 문제다.

 

18편 남면(南面) 군주

남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군주이자 리더고, 북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신하이지 구성원이다. 책을 읽다 미친놈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지만, 북망산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생로병사에 나약한 인간의 입장 같기도 하다는 생각에서 멈추면 좋으련만 '남면을 하는 자리, 나 같은 일반인지 바라보는 북쪽은 골로 가는 자리인가?'이런 확신이 든다. 군주와 같은 최고경영자의 자리란 사실 외롭고, 물어볼 대도 없고, 내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골 때린 자리다. 대신 조금 넉넉하게 보상하고, 남들보다 여유롭게 해 주지만 책임이란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직권남용, 배임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이런 말이 흔해진다는 말은 불만이 증가한다는 조짐이고, 행위들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짧은 시기에  빈도가 늘어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거울같이 근심이 생긴다. 

 

 이 편에서 '군주가 처음과 끝을 내다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의도를 드러내면 해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구절을 여러  읽고 생각해 본다. 군주가 포춘텔러, 역술인 또는 무당(19편의 사악함의  째)도 아닌데 어떻게 끝을 내다볼  있을까? 시간을 초월하는 양자역학의 개념처럼 동시간에 여러 곳에 존재할  있는 것처럼 상상과 생각이 현실과 동일하다는 개념이라고 해야 할까? 생가기 현실이 되는 과정은 엄청난 미친 노력에 비례한다. 무엇보다  군주에게 해가 되는가?  문제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인간의 문제다. 원래 시킨 놈이 말하는 기준은 최소한  정도이고, 부림 당하는 자의 기준은 최대한 그만큼이란 생각의 격차가 있다.  알려줘야 뭔지 모르고 생각지도 못한 일을   있으니까. 조금 얍삽하다는 생각이지만 포커페이스를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가  일리가 있다. 그렇게 변화를 이끌어 상황의 변화에 맞춰가야 한다니 쉬운 일이 아니다.

 

19편 식사(飾邪) 사악함을 경계하라

 한비자에서 규정된 사악한 행위란 1) 미신, 2) 외세에 의지(제후에 의지), 3) 상벌의 남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읍내에서  구절을 읽다 보니 '내가 사악한 시대를 사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약하고 어지러운 나라는 망하는 것이 인간 세상의 본질이고, 강하고  다스려지는 나라가 왕노릇을 하는 것은 법칙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나니  마음이 무겁다. 전자의 예는 역사에서 현재까지 무수히 많다. 후자는 드물지만 시대마다 존재한다.  중에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등 2차 세계대전 시대에도 힘으로 강하게 막무가내로 사람을 다루던 시대도 포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반공시대에 동남아시아부터 한국까지 힘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며 통치자가 자기 맘대로 하는 것도  다스려진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은가? 물론 그것이  다스려진다고 생각하던 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글을 읽다 보면 현대 사회에 민주주의 제대로 인류의  진보이자 발전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갑갑하지만. Post Demacrocy의 시대가 올까? 이런 것은 매트릭스의 신과 같은 컴퓨터, 아이언맨의 자비스 같은 시스템일까? 어쨌든 인간은 변하고, 인간이 만든 것은 버그를 벗어날  없다. 그래서 인간들은 항시 바쁘다.

 

 이런 문제 때문일까? 한비자는 '도는 만물의 원칙이요, 법을 근본으로 삼는다'라는 말을 한다. 노자의 도를 보면 끊임없이 변화과 상황에 착착 맞아 들어가는 무엇인가인데 인간은 그것을 항시 아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관적으로 보면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비자의 말처럼 온정이 아니라 법대로만 하자는 것도 문제가 많다. 법이 잘못된 시대 보단 법을 해석해서 적용하는 사람들이 항상 문제를 대량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포청천이란 드라마에 왜 열광하겠는가?

 

 한비자가 지적한 인간세상의 어려움과 문제점도 이해가 되지만, 여전히 인간관계는  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가 말한 3가지 사악함이 지금도 끊이지 않지 않은가?

 

#한비자 #비내 #남면 #식사 #군주의사악함 #독서 #khori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