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이라고 생각했는데 낙엽이 빠르게 지고 있다. 가야하는 곳이 있고, 와달라고 하는 곳도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속에서 사람들과 만나 삶을 이야기하고 함께 하는 일을 이야기 한다. 그럼에도 무리가 오는 일을 꺼리는 것은 로켓단의 말처럼 인지상정이다.
멋진 가을 낙엽을 뒤로 하고 오라는 곳과 가야하는 곳을 골라서 길을 나섰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는 김우중의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가 성공했다면 경영학은 완전히 새로 써야 했지만 상식에 기초하지 않는 도전은 길지 못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전시회가 두 곳이나 있어서 세웠던 출장계획이 이번에 새로 거래를 시작하는 거래처의 긴급 요청으로 난리가 났다. 파트장과 나 둘 중 하나는 60시간에 가까운 비행시간을 짜야한다. 목표보다는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는 녀석의 말이 재미있다. 공항가기 몇 일전에야 겨우 일정 조정을 마쳤다. 큰 업체를 만나는 것이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실속이 생길 때까지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갑자기 눈에 불똥이 틔어서 시작된 연애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조금씩 식어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자료들을 취합하고 출장전에 파트너링 회사들을 모아서 내년도 사업에서 서로의 상생코드도 준비했다. 조금씩 준비해서 자신의 강점에 집중하고, 협력을 통해서 서로의 장점을 협력 보완하는 사업 마인드는 모든 분야에 필요하다. 인간에게 절대와 100%는 끊임없이 유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중국 전시회에서 만나 새로운 잠재 거래처도 사업기회를 열기 위해서 봐야하고, 새롭게 떠맏게 된 사업팀의 업무와 진행 사항도 확인하고 지원해야 한다. 모두가 내 맘갖지 않은게 삶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움직여야 하나 사람인지라 가끔 답답하다. 내가 도전하는 것에 미리 획을 그어서 움추릴 필요는 없지만 여럿이 모여서 산으로 등반을 시작할 때의 답답함은 결국 내가 그것을 잘 이해시키고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째던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 되어 공항으로 길을 떠났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조금 쥐어주고, 마나님께 집을 맡기고 떠나는 60시간의 비행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메르카도르도법은 비행시간과 비교해보면 엉망진창이다. 실측 비교를 하는 자료를 찾아보면 극지방의 크기는 왜곡되어 머리에 세뇌된 셈이다.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을 끌어안고 타자마자 3시간쯤 정신없이 잤다. 매달 비행기를 타다보니 볼 영화도 없다. 찌부둥한 몸을 잠시 펴고 오랜만에 브레이브 하트를 보기 시작했다. 전에는 전혀 없던 습관이 생겼다. 한번 본 영화를 두번 보는 것이다. 몇 가지 대사가 머리속에 들어오고, 내가 처한 현재의 상황과 맞춰본다. 비디오를 보면서 오디오의 한 자락이 많이 와닿는다. 그렇게 나만의 insight가 늘어가길 기대한다. 영화를 보면서 예전의 잔상이 다른 영화라는 것, 이런 내용이었는지하는 생각도 있다. 더 집중해서 보는 습관이 늘어가는 것인지, 꼰대화 현상의 장점인지 모르겠다. 책도 2챕터정도를 읽었다.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늘다보면 진도가 안나고 자꾸 정신이 들로 산으로 돌아다닌다. 그렇게 10시간 가량이 훌쩍 지나간다.
모스크바 인근을 보니 구름이 많다. 하강을 시작하는데 창밖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가 들어나자마자 "어머...눈이 왔어!"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사실 칼바람이 부는 한국이 훨씬 춥다. 내리자마자 폭주하는 카톡메세지, 스팸같은 외교부와 통신사의 메세지가 여러번 들어온다. 자정의 한국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입국장을 빠르게 나왔다.
한국과 무비자가 되었을 때엔 "당신 왜 비자가 없어?"라는 질문을 수 차례하더니, 이제는 "사업차 오셨나? 아님 관광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Business"라고 답하는 순간 비자내놓으라는 닥달이 시작한다. 지난번에 갔이 왔던 분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설마 너 관광왔겠지?"라고 해서 눈치빠르게 "그럼그럼"하고 나왔다. 여전히 묵뚝뚝하지만 오래전에 비하면 아주 좋아졌다. 게이트마다 러시안, 외국인, 외교관이 있지만 구분없이 다 받아주는 평등의 입국장이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입국장을 나와서 공항택시 2100루블이라서 우버를 타려고 했다. 공항 출발 우버는 타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데 Yandex Taxi kiosk가 있다. 1300루불이라는 말에 예약을 했다. 역시나 카드는 안받고 현찰박치기다. 고속도로를 타겠다고 500루불을 더 낼꺼냐고 물어본다. 눈이 큼지막하고 몸짓은 산만한 아저씨가 껌벅껌벅 물어본다. 그것도 러시아말로... 역시 영어로는 말이 안통하지만, 금새 네비게이터에 google translator를 올려서 물어본다. 음성인식이 꽤 좋다. 안되는 건 내 발음이 안좋아서 잘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이 아저씨 러시아 말도 이상한가 몇번 다시 한다. 까레이스키라는 말에 한국어로 바꿔서 해봤는데 훨씬 좋다. 고속도로와 길거리의 서구와, 차량의 통신기기들의 발전을 보면 년 초의 모습과 또 다른다.
40분만에 호텔까지 주파해서 빠르게 왔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기는 키르키스탄에서 돈벌로 왔단다. 카자흐스탄에 가 본적이 있다고 하니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중간중간 가족들과 what's app을 한다. 오디오 메세지를 보면서 무전기 생각이 난다. 어째던 호텔에 도착해서 2천루블을 주니 영수증 없고, 잔돈도 없단다. 이건 아직 변할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호텔에 짐을 부리고 저녁에 해야할 자료정리들을 머리속으로 정리했다. 잠시 호텔앞에 나가서 도시락 라면도 하나 사고, 집에 사갖고 갈 보드카도 하나 사고 환전도 했다. 여전히 공항은 날강도 환율을 적용한다. 길거리 슈퍼의 환율이 훨씬 좋다. 영국 파운드도 환전이 되는지 물어보니 손짓이 우리가 가라고 하는 모습으로 흔들어 댄다. 한국도 러시아도 GBP는 과거의 명성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호텔에서 준 별도 바우처도 귀찮고, 일은 커녕 샤워하고 맥주 한잔 마시고 얼른 누워서 잤다. 메일 한두개를 읽어서 정리하고, 3일간 500개의 메일 러쉬도 어이가 없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난다고 새벽부터 딸랑딸랑 울려대는 메세지 알람에 깼다. "새벽부터 혼날래?"라는 답신을 날리면 급한 내용을 확인했다. 시간을 잘 못 알았다고 말하는 파트장의 응석을 바로 뒤집기 시작했다. 말한 자료를 빨리빨리 내놓으라고 닥달했다. 이런게 나이가 들어가면 생기는 심통이다. ㅎㅎ 아침부터 한러 컨퍼런스로 고객 대응을 정리하니 일찍 일어나도 너무 일찍 일어났다.
컴퓨터를 켜고, 어제 하지 못한 자료정리를 정리해서 오늘 출발하는 녀석과 사업팀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시간이 남아서 메일 정리도 하고, 회신도 하다보니 배가 고프다. 새벽에 현지에 사는 외사촌 문자가 와서 잠시 만나서 밥먹을 시간을 맞춰보기로 했다. 오늘 만나야 하는 친구이자 고객도 다음주 전시회라 정신이 없다고 사무실에서 보자는 회답이 왔다. 40시간 비행을 할려면 다음주에 왔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번에는 년말 장사와 내년 장사에 대한 틀을 잡아야 한다. 새로운 고객도 만나야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남반구로 움직여야 한다. 이것 때문에 짐이 겨울과 여름옷으로 복잡하다. 오늘 해야할 일을 다시 생각해 보고, 내일 해야할 계획을 정리하고, 다른 지역시장을 위해서 해야할 일도 좀 이것저것 하게 된다.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눌러준 지인들을 보면 그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으면 도움만 받고 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도 조금 아쉽다. 내가 아는 지인들이 모두 잘 될 수는 없지만, 다들 큰 일없이 그럭저럭 잘 살아갔으면 한다. 그 속에서 내가 먼저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면 전생에 단군 할아버지나 웅녀에게 테러를 가한 업이 있는게 아닐까 상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번생이 이렇게 빡셀일이 없다고..그런데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듯 하다.
새벽의 화려한 불빛이 보인다. 아침먹고 담배도 한 대 태우면 길거리를 보면 재미있다. 이 모습에서 앵글이 조금만 돌아가도 적막강산처럼 불빛이 적다.
방에 들어와서 마실나갈 차비를 한다. 패치카에 널어놓은 양말이 아주 빠짝 말랐다. 긴 출장에서 간단한 것은 샤워하면서 빨래를 하게 된다. 궁상맞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가방에 옷만 들고다닐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샤워를 하다가 물을 많이 쓰는지 갑자기 찬물을 맞기는 했지만 정신이 번쩍들어서 좋은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빠짝 마른 양말처럼 오늘 마실나간 일이 잘 되길 바래본다.
이란에는 그제 지진이 나고, 한국에 지진이 나고 여전히 카톡은 울려대고 바쁘다. 그래도 많은 부탁을 했던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때와 장소가 맞아야 무엇인가가 되지만 그 속에서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서로의 장점을 갖고 함께 할 사람이 온다는 것, 그가 또 우리 조직에 많은 새로움을 부어줄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가 잘 자리잡고 본인의 성장과 발전도 함께 하기 위한 책임감을 갖아야 겠다. 아무리봐도 단군할아버지나 웅녀를 대충 몇 대 쥐어박은 것은 아닌듯 하다. 기억도 안나는 전생의 상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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