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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의 끝판왕 베토벤, 교향곡의 완결판 <교향곡 9번>
클래식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베토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저는 베토벤밖에 몰라요.” 하지만 베토벤만 알아도 당신은 최소한 교향곡에서만큼은 최고의 음악을 아는 거나 마찬가지다. 당신이 아는 그의 음악을 직접 들어본다면 말이다.
지난주까지 클래식 장르별 1위 곡을 들었고, 이번 주부터는 장르별 2위로 꼽힌 곡을 듣는다. 교향곡에서는 베토벤이 압도적이다. 10년간 예스24에서 리스너들이 가장 많이 들은 교향곡은 <베토벤 5번 교향곡> 그에 이어 두 번째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하 <교향곡 9번>) 되시겠다.
“지난번에 들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교향곡, 교향곡의 모든 것을 바꿔놓은 교향곡 등등 최고의 수사를 다 가져다 붙이잖아. 하지만 이번 주에 듣는 <교향곡 9번>이야말로 교향곡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지. 그의 모든 것이 이 <교향곡 9번>을 위한 시금석이었다는 말을 들을 만큼 걸작으로 추앙받는 곡이야.”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장면
선배만의 생각이 아니다. “인류 음악사상 길이 남을 걸작” “모든 인간 사상의 합류점” 등등 당대 사람들은 <교향곡 9번>에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인간 세계로부터 기쁨을 거부당한 자가 스스로 기쁨을 창조해 내었다”고 말했고, 베토벤 ‘덕후’로 꼽히는 바그너는 “베토벤 탓에 더 이상 교향곡을 쓸 권리가 없어졌다. 더 이상의 진보는 없다”고까지 말했다. 당대 사람들이 이 곡에 헌정한 극찬을 살펴보면, 블록버스터 영화의 예고편 뺨친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라고 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라도 ‘합창교향곡’이라는 별칭을 들으면, 유명한 합창의 한 대목을 떠올릴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찬송가 13장을 펼쳐보면 된다. ‘기뻐하고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로 시작하는 그 찬송, 작곡자가 베토벤이라고 명시된 그 찬송이 바로, 이 합창에 가사를 붙여 만든 곡이다. 여전히 ‘불리고’ 앞으로도 불릴 이 교향곡이야말로 가장 수명이 긴 음악이 되지 않으려나.
<교향곡 9번>의 합창 부분은 쉽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멜로디라 누구라도 금방 친숙하게 느낄 수 있고, 금세 이 곡이 ‘좋은 곡’이구나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저 ‘좋은 느낌’을 넘어, 이 곡이 역대 ‘인류 사상 걸작’ ‘최고의 진보’라고 손꼽히고 추앙받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인류 사상 걸작’이라고까지 손꼽히는 까닭
베토벤 연주로 손꼽히는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교향곡 9번
그 주의 미션곡이 나오면, 나는 그 음악을 종일 틀어둔다. 씻으면서 듣고, 청소하면서 듣고, 자기 전에도 듣는데, 그럴 때면 음악은 귀에 들린다기보다 파도치는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어떤 인상만 남기고 휘리릭 지나가 버리기 일쑤다. 이 9번 교향곡은 언제나 처음 꽝,하는 소리로 시작하는 도입부와 남성 소프라노가 “오 친구들아! 이런 곡조는 아니야. 더 환희에 차서 불러보자”고 우렁차게 노래할 때만 ‘들렸다’
그러다 몇 개의 음반을 비교해보려고, 오디오에 마주 앉아 음악에만 귀를 기울인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새삼 깨달았다. 클래식은 귀를 기울일 때만 자기가 품은 소리를 온전히 내보인다는 것. 그리고 <교향곡 9번>의 진짜 매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멜로디 그 앞뒤에 놓여있다는 것 말이다.
귀에 쏙 들리는 멜로디 앞뒤로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가 거기 있다. 폭발했다 잠잠해지고, 새 소리처럼 낭랑했다가 파도처럼 쏟아지는 그 악기 소리가, 단조롭다 싶을 수도 있는 합창 멜로디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었다. 서두에서 현으로, 북으로 끊임없이 소리를 밀고 당겼기 때문에 우렁찬 합창이 터져 나올 때, 감동적일 만큼 후련해지는 것이기도 했다.
“잘 알고 있는 곡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맛을 내는 게 베토벤 교향곡이야. 안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고, 큰 위기를 노력으로 극복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곡이지. 클래식이 진지하고 엄숙하다고만 생각하지만, 잘 들어보면 작곡가에 따라 다양한 느낌, 분위기, 매력이 있어. <베토벤 교향곡 9번> 역시 웅장하다, 장엄하다,라는 수식어만으로는 정리되지 않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지.”
선배 말에 따르면, 베토벤이 이 곡을 무려 30년이나 구상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원체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였다는데, 그런 그가 무려 30년 동안이나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구상했을 과정을 상상해보면, <교향곡 9번>에 담긴 음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모든 것이 그의 음악, 그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치밀하게 기다렸다가 떨어져 내리는 음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합창, 다사다난한 삶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노래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2악장.
눈으로 보면 더 많은 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보통 교향곡은 관현악이 연주하는 소나타 형식의 음악”으로 정의를 내리는데 말야. 이렇게 끝 부분에 성악이 붙어있는 작품은 흔치 않지. 약간 변칙적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과찬을 듣고 있는 거야. 그런 것쯤이야 문제 되지 않는 걸작이라고 말야.”
우린 불과 지난주만 해도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으며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이라는 찬사를 빌려 썼다. 그런데 문득, 베토벤 교향곡에 쏟아지는 거듭되는 찬사를 들으니, 클래식 음악 하는 사람들이 원래 과장이 좀 심한가 싶다. 경쟁적으로 최고의 단어를 던져대는 사람들이 순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신의 축복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모차르트 레퀴엠>을 듣고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었다.
결론은, 이러하다. 음악이 담고 있는 수많은 감상을 한 줄로 표현하기에 우리가 가진 언어의 그릇이 한없이 작다. ‘누군가 이 음악 어때요?’ 라고 물었을 때, 매번 지금의 나처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으니, 그저 최고, 걸작이라는 말을 반복했나보다 싶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은 다른 걸작이다. <모차르트 레퀴엠>에 등장하는 합창은 성가대 특유의 위엄과 엄숙한 분위기가 곡을 압도한다. ‘주여, 우리를 돌보소서’ 그들이 웅장하고도 곱게 선처를 호소할 때, 누구의 삶이든 삶이란 고단한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느끼게 된다. <모차르트 레퀴엠>이 천국과 지옥을 수직적으로 연결하는 노래라면,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수평적으로 팽창하는 음악이다.
조마조마한 현악기 선율로 시작했다가 이내 우렁찬 북소리로 이어지는 1악장은, 우주에서 마치 별이 생성되고, 폭발하는 긴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만 같다. 이어지는 천둥소리 사이사이에 미세하게 자글대는 소리가 들리는데, (푸르트뱅글러의 음반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들리는 이 자글거림은 음질의 문제 때문인지도 모른다.) 듣고 있자면 고요함 속에서 빛과 어둠이 쉴 새 없이 운동하고 있는 우주 한복판의 풍경이 절로 떠오른다.
“문학으로 치면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리어왕>과 같은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은
<교향곡 9번> 베토벤의 자필 악보.
<모차르트 레퀴엠>이 삶의 끝에서 부르는 노래라면, 우렁찬 남성 소프라노에서 시작되는 <교향곡 9번>은 다사나단한 삶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노래다. 굳이 베토벤이 겪은 불행, 우울한 사건들을 되짚어보지 않더라도, 기교 없이 분명하게 한 발짝, 한 음씩 오르내리는 멜로디는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인 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곡이 종교적 목적으로 작곡된 것도 아닌데, 연말마다 교회나 음악당에서 이 합창이 연주되는 까닭은, 이 곡에 담긴 삶의 의지와 환희를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곡을 초연할 당시에는 성악가들이 굉장히 힘들어했대. 노래도 어렵고, 음역도 높고 말야. 그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놓아 봤자 고집 센 예술가였던 베토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겠지. 성악가들이 폭군이라고 그를 욕하기도 하고, ‘어차피 귀도 안 들릴 텐데, 뭐’하고는 연습 때 노래를 부르지 않기도 했다네.
그런 베토벤의 고집 덕분에 이 작품이 더 완벽해질 수 있었던 거겠지. 1824년에 빈에서 이 공연을 초연했을 때, 연습 부족 탓인지 연주가 썩 훌륭한 편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잖아. 귀가 들리지 않아서 관객의 박수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걸작을 만들었다니, 굉장하지?”
클래식 CD용량의 기준이 된 푸르트뱅글러의 음반
선배가 꼽아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명반은 푸르트뱅글러가 51년에 녹음된 앨범이다. 위대한 작품이니 만큼, 훌륭한 연주, 명반도 수두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곡 만큼은 푸르트뱅글러의 연주가 압도적이라는 평을 듣는단다.
“사실 푸르트뱅글러는 (‘마지못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나치에 협력했다는 껄끄러운 오명을 얻었지만, 베토벤 교향곡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지휘자야. 베토벤 교향곡을 수없이 녹음했고, 특히 이 9번에 관해서는 10여 종의 연주가 음반으로 남아있어. 그중에 가장 명연으로 손꼽히는 게 1951년 바이로이트 실황녹음이야.”
이 음반은 단순히 명반 뿐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처음 CD를 개발한 필립스사에서, CD 용량규격을 결정할 때 ‘최소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한 장에는 들어가야지?’라는 생각에 용량 기준으로 삼은 게 바로 푸르트뱅글러의 음반이야. 총 연주시간 74분이 기준이 된 거지.”
“정작 본인은 이 연주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대. 워낙 옛날에 녹음된 연주라 음질도 그닥 선명하지 않아서 ‘왜 이런 곡이 명반일까?’ 싶을 수도 있는데, 듣다 보면 이 연주는 <베토벤 교향곡 9번> 그 자체인 듯한 느낌이 들어. 클래식 음반을 많이 들어보면, 때론 이 연주자는 이게 아쉽고, 저 연주자는 저게 아쉽고 하는 점들이 생기거든.
정석이라고 평가받는 음반들은 오래 들으면 지루해지기도 하고. 그런데 푸르트뱅글러의 이 연주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담아냈구나 싶달까. 이제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들으면, 푸르트뱅글러에 비해 좀 느리고, 혹은 좀 빠르고 싶은 느낌이 든다 싶을 만큼 기준이 되는 연주라도 할 수 있지.“
10여 종이 넘는 음반 중에 푸르트뱅글러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연주는 1954년에 루체른 실황연주라고 한다. “Tarah라는 레이블에서 발매된 것인데, 구하긴 쉽지 않지만, 종종 국내에 들어와. 이 앨범은 51년 버전보다 호평은 덜하지만, 푸르트뱅글러 명성에 뒤처지지 않는 명반이지. 이게 본인이 가장 좋아했던 연주라고 해. 마지막 9번 연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깨끗한 음질이 장점인 앨범이야.”
예술가의 삶에 빚진 아름다운 곡
영화 <카핑베토벤> 중 한 장면
“실러 지음송가 환희에 부침을 마지막 합창으로 한 대관현악, 4성 독창, 4성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폐하에게 심심한 경의를 가지고 루드비히 반 베토벤에 의하여 봉헌된 교향곡 작품 125”
이게 합창곡 악보 표지에 기재된 정식 명칭이다. 나 역시 이 곡을 듣는 내내 베토벤에게 심심한 경의를 가지고 들었다. 이 곡은 천재적인 악성만으로 빚어낸 게 결코 아니라, 그가 삶을 겪고 통과해내면서 쓸 수 있었던 곡이었을 테니까. 이 곡을 들으며 느끼는 기뻐하고, 감동을 느끼고 있자니, 어쩐지 그의 인생에 조금 빚을 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예술을 하려면, 위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 개인적인 믿음을 베토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여기서 ‘위대하다’라는 건 성취의 의미가 아니라, 태도의 의미다.) 그렇다면 지금,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이 시대를 위대하게 극복해내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위대하게 사는 사람, 혹은 예술가는 누굴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베토벤이 훗날 자신이 음악의 (무려) ‘성인’으로 불리며, 그의 수많은 작품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걸쳐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예술가는 죽어서야 이름을 남긴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하지만, 살아생전 영광보다 비극이 많았던 그에게, 짝사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그에게 그 삶이 절대 비참하지만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고집 많은 진짜 예술가’였던 베토벤이라면 비극일랑 잊은 듯이 금세 우쭐하고 흐뭇해했을 텐데.
첫 연주가 끝나고, 그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보라’고 그의 고개를 돌려줬다는 성악가 카롤리네 웅어처럼, 나도 그에게 전해주고 싶다. 당신이 쓴 곡이 클래식 입문자에게 권할 만큼 음악사에 주요한 작품이고, 최고의 평론가와 음악가들이 격찬할 만큼 위대한 곡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모두가 당신을 알고 있다고, 당신이 이만큼이나 사랑받고 있다고.
[YES24] 클래식 가운데 가장 많은 격찬으로 둘러싸인 걸작 - [베토벤 교향곡 9번]
클래식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베토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저는 베토벤밖에 몰라요.” 하지만 베토벤만 알아도 당신은 최소한 교향곡에서만큼은 최고의 음악을 아는 거나 마찬가지다. 당신이 아는 그의 음악을 직접 들어본다면 말이다.
지난주까지 클래식 장르별 1위 곡을 들었고, 이번 주부터는 장르별 2위로 꼽힌 곡을 듣는다. 교향곡에서는 베토벤이 압도적이다. 10년간 예스24에서 리스너들이 가장 많이 들은 교향곡은 <베토벤 5번 교향곡> 그에 이어 두 번째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하 <교향곡 9번>) 되시겠다.
“지난번에 들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교향곡, 교향곡의 모든 것을 바꿔놓은 교향곡 등등 최고의 수사를 다 가져다 붙이잖아. 하지만 이번 주에 듣는 <교향곡 9번>이야말로 교향곡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지. 그의 모든 것이 이 <교향곡 9번>을 위한 시금석이었다는 말을 들을 만큼 걸작으로 추앙받는 곡이야.”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장면
선배만의 생각이 아니다. “인류 음악사상 길이 남을 걸작” “모든 인간 사상의 합류점” 등등 당대 사람들은 <교향곡 9번>에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인간 세계로부터 기쁨을 거부당한 자가 스스로 기쁨을 창조해 내었다”고 말했고, 베토벤 ‘덕후’로 꼽히는 바그너는 “베토벤 탓에 더 이상 교향곡을 쓸 권리가 없어졌다. 더 이상의 진보는 없다”고까지 말했다. 당대 사람들이 이 곡에 헌정한 극찬을 살펴보면, 블록버스터 영화의 예고편 뺨친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라고 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라도 ‘합창교향곡’이라는 별칭을 들으면, 유명한 합창의 한 대목을 떠올릴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찬송가 13장을 펼쳐보면 된다. ‘기뻐하고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로 시작하는 그 찬송, 작곡자가 베토벤이라고 명시된 그 찬송이 바로, 이 합창에 가사를 붙여 만든 곡이다. 여전히 ‘불리고’ 앞으로도 불릴 이 교향곡이야말로 가장 수명이 긴 음악이 되지 않으려나.
<교향곡 9번>의 합창 부분은 쉽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멜로디라 누구라도 금방 친숙하게 느낄 수 있고, 금세 이 곡이 ‘좋은 곡’이구나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저 ‘좋은 느낌’을 넘어, 이 곡이 역대 ‘인류 사상 걸작’ ‘최고의 진보’라고 손꼽히고 추앙받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인류 사상 걸작’이라고까지 손꼽히는 까닭
베토벤 연주로 손꼽히는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교향곡 9번
그 주의 미션곡이 나오면, 나는 그 음악을 종일 틀어둔다. 씻으면서 듣고, 청소하면서 듣고, 자기 전에도 듣는데, 그럴 때면 음악은 귀에 들린다기보다 파도치는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어떤 인상만 남기고 휘리릭 지나가 버리기 일쑤다. 이 9번 교향곡은 언제나 처음 꽝,하는 소리로 시작하는 도입부와 남성 소프라노가 “오 친구들아! 이런 곡조는 아니야. 더 환희에 차서 불러보자”고 우렁차게 노래할 때만 ‘들렸다’
그러다 몇 개의 음반을 비교해보려고, 오디오에 마주 앉아 음악에만 귀를 기울인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새삼 깨달았다. 클래식은 귀를 기울일 때만 자기가 품은 소리를 온전히 내보인다는 것. 그리고 <교향곡 9번>의 진짜 매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멜로디 그 앞뒤에 놓여있다는 것 말이다.
귀에 쏙 들리는 멜로디 앞뒤로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가 거기 있다. 폭발했다 잠잠해지고, 새 소리처럼 낭랑했다가 파도처럼 쏟아지는 그 악기 소리가, 단조롭다 싶을 수도 있는 합창 멜로디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었다. 서두에서 현으로, 북으로 끊임없이 소리를 밀고 당겼기 때문에 우렁찬 합창이 터져 나올 때, 감동적일 만큼 후련해지는 것이기도 했다.
“잘 알고 있는 곡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맛을 내는 게 베토벤 교향곡이야. 안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고, 큰 위기를 노력으로 극복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곡이지. 클래식이 진지하고 엄숙하다고만 생각하지만, 잘 들어보면 작곡가에 따라 다양한 느낌, 분위기, 매력이 있어. <베토벤 교향곡 9번> 역시 웅장하다, 장엄하다,라는 수식어만으로는 정리되지 않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지.”
선배 말에 따르면, 베토벤이 이 곡을 무려 30년이나 구상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원체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였다는데, 그런 그가 무려 30년 동안이나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구상했을 과정을 상상해보면, <교향곡 9번>에 담긴 음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모든 것이 그의 음악, 그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치밀하게 기다렸다가 떨어져 내리는 음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합창, 다사다난한 삶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노래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2악장.
눈으로 보면 더 많은 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보통 교향곡은 관현악이 연주하는 소나타 형식의 음악”으로 정의를 내리는데 말야. 이렇게 끝 부분에 성악이 붙어있는 작품은 흔치 않지. 약간 변칙적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과찬을 듣고 있는 거야. 그런 것쯤이야 문제 되지 않는 걸작이라고 말야.”
우린 불과 지난주만 해도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으며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이라는 찬사를 빌려 썼다. 그런데 문득, 베토벤 교향곡에 쏟아지는 거듭되는 찬사를 들으니, 클래식 음악 하는 사람들이 원래 과장이 좀 심한가 싶다. 경쟁적으로 최고의 단어를 던져대는 사람들이 순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신의 축복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모차르트 레퀴엠>을 듣고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었다.
결론은, 이러하다. 음악이 담고 있는 수많은 감상을 한 줄로 표현하기에 우리가 가진 언어의 그릇이 한없이 작다. ‘누군가 이 음악 어때요?’ 라고 물었을 때, 매번 지금의 나처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으니, 그저 최고, 걸작이라는 말을 반복했나보다 싶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은 다른 걸작이다. <모차르트 레퀴엠>에 등장하는 합창은 성가대 특유의 위엄과 엄숙한 분위기가 곡을 압도한다. ‘주여, 우리를 돌보소서’ 그들이 웅장하고도 곱게 선처를 호소할 때, 누구의 삶이든 삶이란 고단한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느끼게 된다. <모차르트 레퀴엠>이 천국과 지옥을 수직적으로 연결하는 노래라면,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수평적으로 팽창하는 음악이다.
조마조마한 현악기 선율로 시작했다가 이내 우렁찬 북소리로 이어지는 1악장은, 우주에서 마치 별이 생성되고, 폭발하는 긴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만 같다. 이어지는 천둥소리 사이사이에 미세하게 자글대는 소리가 들리는데, (푸르트뱅글러의 음반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들리는 이 자글거림은 음질의 문제 때문인지도 모른다.) 듣고 있자면 고요함 속에서 빛과 어둠이 쉴 새 없이 운동하고 있는 우주 한복판의 풍경이 절로 떠오른다.
“문학으로 치면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리어왕>과 같은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은
<교향곡 9번> 베토벤의 자필 악보.
<모차르트 레퀴엠>이 삶의 끝에서 부르는 노래라면, 우렁찬 남성 소프라노에서 시작되는 <교향곡 9번>은 다사나단한 삶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노래다. 굳이 베토벤이 겪은 불행, 우울한 사건들을 되짚어보지 않더라도, 기교 없이 분명하게 한 발짝, 한 음씩 오르내리는 멜로디는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인 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곡이 종교적 목적으로 작곡된 것도 아닌데, 연말마다 교회나 음악당에서 이 합창이 연주되는 까닭은, 이 곡에 담긴 삶의 의지와 환희를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곡을 초연할 당시에는 성악가들이 굉장히 힘들어했대. 노래도 어렵고, 음역도 높고 말야. 그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놓아 봤자 고집 센 예술가였던 베토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겠지. 성악가들이 폭군이라고 그를 욕하기도 하고, ‘어차피 귀도 안 들릴 텐데, 뭐’하고는 연습 때 노래를 부르지 않기도 했다네.
그런 베토벤의 고집 덕분에 이 작품이 더 완벽해질 수 있었던 거겠지. 1824년에 빈에서 이 공연을 초연했을 때, 연습 부족 탓인지 연주가 썩 훌륭한 편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잖아. 귀가 들리지 않아서 관객의 박수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걸작을 만들었다니, 굉장하지?”
클래식 CD용량의 기준이 된 푸르트뱅글러의 음반
선배가 꼽아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명반은 푸르트뱅글러가 51년에 녹음된 앨범이다. 위대한 작품이니 만큼, 훌륭한 연주, 명반도 수두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곡 만큼은 푸르트뱅글러의 연주가 압도적이라는 평을 듣는단다.
“사실 푸르트뱅글러는 (‘마지못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나치에 협력했다는 껄끄러운 오명을 얻었지만, 베토벤 교향곡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지휘자야. 베토벤 교향곡을 수없이 녹음했고, 특히 이 9번에 관해서는 10여 종의 연주가 음반으로 남아있어. 그중에 가장 명연으로 손꼽히는 게 1951년 바이로이트 실황녹음이야.”
이 음반은 단순히 명반 뿐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처음 CD를 개발한 필립스사에서, CD 용량규격을 결정할 때 ‘최소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한 장에는 들어가야지?’라는 생각에 용량 기준으로 삼은 게 바로 푸르트뱅글러의 음반이야. 총 연주시간 74분이 기준이 된 거지.”
“정작 본인은 이 연주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대. 워낙 옛날에 녹음된 연주라 음질도 그닥 선명하지 않아서 ‘왜 이런 곡이 명반일까?’ 싶을 수도 있는데, 듣다 보면 이 연주는 <베토벤 교향곡 9번> 그 자체인 듯한 느낌이 들어. 클래식 음반을 많이 들어보면, 때론 이 연주자는 이게 아쉽고, 저 연주자는 저게 아쉽고 하는 점들이 생기거든.
정석이라고 평가받는 음반들은 오래 들으면 지루해지기도 하고. 그런데 푸르트뱅글러의 이 연주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담아냈구나 싶달까. 이제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들으면, 푸르트뱅글러에 비해 좀 느리고, 혹은 좀 빠르고 싶은 느낌이 든다 싶을 만큼 기준이 되는 연주라도 할 수 있지.“
10여 종이 넘는 음반 중에 푸르트뱅글러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연주는 1954년에 루체른 실황연주라고 한다. “Tarah라는 레이블에서 발매된 것인데, 구하긴 쉽지 않지만, 종종 국내에 들어와. 이 앨범은 51년 버전보다 호평은 덜하지만, 푸르트뱅글러 명성에 뒤처지지 않는 명반이지. 이게 본인이 가장 좋아했던 연주라고 해. 마지막 9번 연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깨끗한 음질이 장점인 앨범이야.”
예술가의 삶에 빚진 아름다운 곡
영화 <카핑베토벤> 중 한 장면
“실러 지음송가 환희에 부침을 마지막 합창으로 한 대관현악, 4성 독창, 4성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폐하에게 심심한 경의를 가지고 루드비히 반 베토벤에 의하여 봉헌된 교향곡 작품 125”
이게 합창곡 악보 표지에 기재된 정식 명칭이다. 나 역시 이 곡을 듣는 내내 베토벤에게 심심한 경의를 가지고 들었다. 이 곡은 천재적인 악성만으로 빚어낸 게 결코 아니라, 그가 삶을 겪고 통과해내면서 쓸 수 있었던 곡이었을 테니까. 이 곡을 들으며 느끼는 기뻐하고, 감동을 느끼고 있자니, 어쩐지 그의 인생에 조금 빚을 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예술을 하려면, 위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 개인적인 믿음을 베토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여기서 ‘위대하다’라는 건 성취의 의미가 아니라, 태도의 의미다.) 그렇다면 지금,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이 시대를 위대하게 극복해내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위대하게 사는 사람, 혹은 예술가는 누굴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베토벤이 훗날 자신이 음악의 (무려) ‘성인’으로 불리며, 그의 수많은 작품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걸쳐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예술가는 죽어서야 이름을 남긴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하지만, 살아생전 영광보다 비극이 많았던 그에게, 짝사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그에게 그 삶이 절대 비참하지만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고집 많은 진짜 예술가’였던 베토벤이라면 비극일랑 잊은 듯이 금세 우쭐하고 흐뭇해했을 텐데.
첫 연주가 끝나고, 그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보라’고 그의 고개를 돌려줬다는 성악가 카롤리네 웅어처럼, 나도 그에게 전해주고 싶다. 당신이 쓴 곡이 클래식 입문자에게 권할 만큼 음악사에 주요한 작품이고, 최고의 평론가와 음악가들이 격찬할 만큼 위대한 곡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모두가 당신을 알고 있다고, 당신이 이만큼이나 사랑받고 있다고.
환희여, 신들의 찬란한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곳으로 성소로 들어가자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 도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교향곡 9번> 합창 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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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선택된 음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1951년 바이로이트 실황
미안하지만, 2번째로 선택된 것도 푸르트뱅글러, 3번째, 4번째도…… 마찬가지다. 베토벤 9번은 푸르트뱅글러의 연주가 절대반지라도 되는 것 같다. “복각판”이라고 저작권 기간이 끝난 유명한 연주들을 여러 레이블에서 자체적으로 리마스터링해서 발매한 영향도 있지만, 그런 음반들 하나하나가 다른 지휘자들의 음반을 모조리 이겨버리다니… 여러 지휘자님들 힘 좀 내세요~ 본문에 소개된 EMI GROC반은 아쉽게도 현재 절판상태이다. 시중에 남아있는 재고만 조금 돌아다니고 있다. 이런 명연을 언젠가 재발매 안할리는 없지만, 당분간은 이 음반으로 대신하자. NAXOS의 복각기술로 재탄생한 51년도 연주이다. 복각기술에 따른 느낌의 차이는 확실히 있다는 걸 염두에 두자.
본문에 소개된 푸르트뱅글러 본인도 흡족해했다는 54년도 연주, 사람에 따라 이 연주를 최고로 치는 사람도 있다. 음질면에서도 51년보다 또렷하고 선명하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제일 많이 손이가는 음반이기도 하다. 원 발매본인 Tarah 반을 추천하고 싶지만, 최근에는 구하기가 많이 힘들어졌고, 가끔 박스셋으로만 들어오고 있다. 당분간 이 음반으로 만족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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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클래식 가운데 가장 많은 격찬으로 둘러싸인 걸작 - [베토벤 교향곡 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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