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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듣기 (音)

A Concerto at the white house - Pablo Casals

by Khori(高麗) 201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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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주문한지가 대체 언제인데 몇주만에 도착을 했다. Youtube에서도 전곡을 듣기 어렵고, 재발매하면서 가격이 두배가 되버렸다. 하지만 들어보니 참 좋네요. 환율떨어질때 기다려 배달한것 같지는 않고...1680엔이라는 가격표는 왜 붙여서 보낸것인지..Youtube에서 2곡정도는 들어볼수 있습니다. 3개나 샀는데..^^



아래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7&contents_id=7858

(전문은 link로 보시고, 중요부분만 보시면 아래의 인용을 보시면 됩니다)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카잘스는 알프레드 코르토와 자크 티보와 함께 음악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1937년까지 함께 트리오 작품을 레코딩하여 지금까지도 첫 손에 꼽히는 명반들을 탄생시켰는데, 여기에는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와 더불어 슈베르트, 멘델스죤, 슈만의 작품들을 포함한다. 한편 코르토의 지휘로 티보와 함께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6년부터 39년 사이에는 자신이 발견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녹음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또한 녹음했다. 협주곡으로는 조지 셸이 지휘하는 체코 필하모닉과의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을 남기기도 했다. 이들 레코딩은 모두 같은 곡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으로 오랜 동안 자리를 잡았고, 특히 바흐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그 아성을 쉽게 넘을 수 없는 일종의 첼로 음악의 성경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1936년 스페인 내전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스페인 공화정을 지지했던 그는 1938년 10월 리체우 극장에서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다시 민주주의가 복원될 때까지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과 맞닿아있는 프라드라는 도시에 거주하며 스페인으로부터의 연주 초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도 연주회를 갖지 않으며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치에 협력한 음악가들, 특히 자신의 오랜 친구인 코르토와도 관계를 끊었다(이후 1958년에야 비로소 화해를 했다).


한편, 미국에서의 연주회 또한 거부했는데, 단 그가 평소에 흠모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11월 13일 백악관에서 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와 알렉산더 슈나이더와 실내악 연주회를 가지며 화해의 분위기를 가졌다. 카잘스로서는 60년만의 백악관 연주회였던 이 실황 역시 녹음되어 전설적인 음반으로 남게 되었고, 특히 마지막 앙코르로 카잘스가 연주한 카탈루냐 민요인 [새의 노래]는 그의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아낸 연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3년 미국 정부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에는 병마를 딛고 일어나 베토벤 순례의 길을 떠나겠다고 맹세한 뒤 수 십 년 만에 다시 독일 땅을 밟아 연주회를 가졌고, 당시 호르초프스키와 산도르 베그와 함께 한 베토벤의 [트리오 ‘대공’] 및 베토벤 첼로 소나타 등이 필립스(Philips) 레이블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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