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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冊)

논어(論語)

by Khori(高麗) 2017.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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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을 마치고 김용옥의 논어를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왜 논어란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외영업을 시작하고, 나에게 선한 얼굴을 하고 달콤한 말을 건네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 적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 독서라는 것에 대한 마음을 써 보기로 한 뒤에 다시 김용옥의 논어, 심경호의 논어, 야스토미 아유무의 위험한 논어, 다 마치지 못한 필사까지 해본 경험이 있다. 여러 고전의 소개하는 책 속에서도 논어는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논어가 마음에 쏙 들어온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세밀하고 촘촘한 한비자나 읽다보면 압도적인 무엇인가를 만나게 되는 노자에 더 마음이 간다. 재미로 치면 귀곡자나 장자, 재미있게 풀어 쓴 주역보다도 논어는 사실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논어를 읽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공통점이 있다. 사회초년의 엉성함이 불러온 고난,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한 뒤의 도전과 성과 그리고 말도 안되는 사태로 인한 고난, 알지만 거절하지 못해서 스스로 짊어진 고난의 시간이 함께 했었다. 그런데 다시 논어란 책을 보고 싶어졌다는 것이 혹시 지금이 또 내 삶에 있어서 고난의 시간을 지나가는 것인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고난이란 어찌 보면 다 내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오늘 시원하게 펼쳐진 파란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내 마음에 따라 "날씨 참 좋다!"와 "날씨는 누구 좋으라고 왜 이렇게 좋은거야"라는 말은 모두 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논어를 읽게 되는 이유가 된다. 논어의 큰 주제가 극기복례라면 나는 극기복我를 위해서 읽는다. 나에게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의 분석이라기보다 인간의 생각, 감정, 행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고, 이런 행동이 타인의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알지는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 논어는 그런 사례와 말을 공자를 통해서 쉽게 이루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읽어 던 책들이 문구의 의미와 배경,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저자의 이런 저런 설명이 함께 한다. 이런 내용을 일일이 쫒아가며 읽다보면 좋은 책을 읽은 듯 하나, 기억나는 것이 또 많지가 않다. 이번에 읽고 있는 김원중의 논어에서 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알게 됬다. 아니 잊고 있었던 사실을 자각했다고 생각한다. 

 논어는 일관된 배열이나 원칙을 찾기 어렵다는 책이라는 것이다. 이 구절을 다시 한번 새기고 원문을 읽는 의미인 문자 그대로에 충실하게 보기로 했다. 전에 읽은 것이 한 구절, 한 구절에 얽메였다면, 이번에는 더 마음 편하게 읽게 된다. 그런데 더 많이 스스로 흡수한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자가 아닌 내가 한자를 더 많이 이해해서 문장을 분석하는 것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서 논어라는 글귀를 어쩌면 마음으로 읽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다시 돌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시작의 학이편부터 첫 구절을 끊이지 않고 그대로 읽어보고, 나를 돌아보고, 내 주변의 일들과 비교해보면 더 많이 그 구절이 와닿는 것 같습니다. 한구절 해석을 하고, 다음 구절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전체를 보고, 이해가 안되는 것은 주석을 보고, 전에 알던 것과 조금 다른 듯 하면 찾아 보기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논어의 구절을 닳도록 외울 생각은 없습니다. 다시 봤는데 본 기억이 있는지 정도면 충분하고, 정말 맘에 드는 구절 몇 가지는 다시 비교해 볼 생각입니다. 전에 읽은 책들에 붙어 있는 스티커와 이번에 읽는 것이 또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그것이 내가 갖고 있는 현재의 마음 상태를 대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읽다보면 마음에 따라서 다가오는 글자가 분명 다른 듯 하네요. 전에 보던 것과 지금 보던 것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만큼 조금씩 달라지는 듯 합니다. 과거엔 무엇인가 그것을 통해서 나에게 이익이 되거나 효율적이라는 관점에서 문장을 세겼다면, 지금은 무엇이라고 딱 쓰기는 어렵지만 과거에 보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논어에는 우리가 아는 사자성어가 많이 나옵니다. 후생가외 같은 말이 더 다가올 나이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느끼지 못하니 스스로 무딘 것일지 모르겠네요. 온고이지신은 많이 쓰는데, 뒷문장이 새롭네요. 최근에 이름을 올린 특허기획도 알고 보면 이 문구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로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본질과 새로움이란 기술적 변화를 적용하여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가"는 모든 분야에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항상 전혀 다른, 과거와 단절된 형태로 인식하도록 매체의 호도가 심합니다. 그러나 인간 문명의 변화는 그렇게 빠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의 원리를 보면 없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들을 인간이 욕망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정의하여 구현한 것이니까요. 고전이 지속적으로 유효한 것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인간에게 효과적인 사유체계의 학습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논어를 읽다보면 참으로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합니다. 이 글을 보면서 사사롭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하게 됩니다. 친구를 통해서 사람을 보고,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공자는 확인까지 해야하는 것을 탓하지만 세상은 그렇습니다. 이 글을 읽다보면 내가 만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얼굴을 보지 못하기에 뻔번한 스스로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또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숨길 수가 없으니까요...

 "상대하기 힘든 상대"라는 제목이 더 재미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린 상종못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피하지 못하고 만나게 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대하기 힘든 상대가 되지 않도록 되야겠습니다. 과거의 책 읽기라면 "그렇지 뭐"하고 지나갔을 구절이 이 번에 읽게 되는 논어에서는 참 여러모로 생각하게 합니다. 당연하기에 지나쳤던 말들이 멋있어 보이고, 폼나는 말보다 더 많이 다가 옵니다. 논어를 읽었으니 아마도 반대되는 노자관련 책이나 한비자를 올해안에 봐야겠습니다. 


 스스로 태평성대에는 논어를 난세에는 한비자를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에겐 무엇인가를 새롭게 넘어가는 길이고, 공자님 말씀처럼 고난을 거쳐서 얻는 것이 있길 기대해야지요. 어쩌면 다시 든 논어가 나에겐 변화의 시점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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