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전공과 교양이란 두 가지 목표에 실패했다는 통렬한 성토의 글이 읽었다. 그 글을 읽고 왠지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좋은 인재와 젊은 청춘들이 고민에 다가서는 환경에 관하여 앞선세대는 자유롭지 않다. 우리들의 발자취를 그들이 쫒고 있고, 쫒으며 이것은 아닌듯하다는 생각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보완하면 발전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선세대도 이 길은 아닌 듯 한데,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로 하던 것을 계속하며, 청춘들에게도 제도와 관행으로 대물림을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많은 부분에 그런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많은 시간을 쓰고, 많은 사람이 노력해서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하는 때를 만난 시대와 그 시대를 만들어간 책임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청춘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를 탓하기 보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그러한 변화를 위한 노력을 빅데이터처럼 쌓아가야 한다. 인간의 문명은 언제나 지식에 기반해서 발전되어 왔고, 최근에 와서야 기계에 인간이 지식을 축적하는 방식을 적용하여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Kay의 고민은 인문학의 화두와 처럼 교양교육의 실패, 사회보다 떨어진 전공지식의 학습, 이로 인해서 사회적인 최소한의 위치와 생존을 위협받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긴 과정속에 자리잡은 대학을 질타한다. 그런 생각과 안목을 갖는 다는 것만으로도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대학과 대학원이 끝나갈 무렵 IMF의 후폭풍과 바로 전의 호시절 사이에서 많은 분노와 좌절을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대충 놀다가도 왠만한 대학이면 어느 기업이든 갈 수 있던 시절과 갑자기 단절된 시대에서 급격히 좁아진 문을 통과하는 것을 동시에 체험했기 때문이다.
당장 그들에게 힘내고 도전하라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답은 그들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나처럼 많은 경험을 위해서 중소기업부터 가보라고 말하기엔 사회적 시각과 그들이 공들인 20여년의 시간으로 각 개인들의 불만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언제 될지도 모를 대기업을 계속 응시할 수도 없고, 90%가 망하는 창업을 엔젤투자도 없이 해보라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우리는 실패를 격멸할 뿐 그것에서 배운 경험이 살아있는 지식으로 발전시키는 안목이 부족하다. 과거 고도성장이 간과한 후폭풍을 그 다음세대가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속성암기와 주입식 교육의 폐단이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제한적 상황이 미안하다. 하지만 삶이란 긴 과정의 관점에서는 함께 해야할 부분이 존재한다.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나도 그들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기여를 통해서 행복과 만족을 이끌수 있도록 노력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청춘들을 기존의 제도에서 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공서열이란 제도를 통해서 놀고먹는 아버님들도 각성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이를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나는 독서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사치라고 느낄 수 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천천히 걷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읽는 과정이 대학의 지식을 삶의 지혜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을 사용하고 성과가 다른 것은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가 주입식교육으로 해결하기에는 그 수준이 너무 많이 올라왔다. 과거의 성공에 집착해서 그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경영학에서도 말하는 창초적 파괴를 통해서 시대에 맞게 재정립해야할 뿐이다.
정작 마음이 상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대학이 그들에게 굴욕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내가 대학을 가다니던 시절에도 있었다. 과거 성장기의 대한민국은 기술은 해외에서 사오고, 사양산업을 받아 산업으로 육성하고, 최근에 와서 일부 부분에서 자생적인 부분으로 발전해 왔다. 사회가 물질적으로 발전하고, 이젠 스스로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 과정이 사회적으로 몇 세대가 누적됨으로 인식과 질적 발전이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그 수준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어디를 둘러볼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식을 쌓아서 창의적인 지혜로 사용하기 위해서 아직도 시간이란 자원을 많이 써야하는 입장이다.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기다리지 않는다. 중진국의 늪도 나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선진국이 되고 발전한다는 것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다. 지식을 축적하고 이를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부를 축적한다고 믿는다. 조선후기 이용후생은 지금도 유용한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기업에 가보면 Kay처럼 문제를 바라보고 성찰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내가 공부원은 9급부터 시작한다면 기업의 인력은 18급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언제 나왔는지 모를 유명대학 간판을 달고 매일 코골며 낮잠을 즐기고 밥을 축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분야에 대한 꾸준한 노력으로 무명대학을 나와 특허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있다. 높은 자리까지 노력하고 나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손금이 없어질때까지 윗사람에게 비비는 것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불쏘시개처럼 사람을 사용하는 것을 업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일과 따르는 사람을 살피며 타인이 자리를 추대해도 겸손해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현상이고 형식이다.
다만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가가 사회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대를 대표하는 상식이 어떤 면에서는 기준으로 정하기 힘들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이 판단하는 기준인 상식이 그 시대의 수준이다. 뉴스를 보면 나는 상식의 수준이 높은지 의문스럽다. 아니 그런 시대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굴욕감을 갖게 된다. 기업은 그 사회속의 작은 조직일 뿐이다. 얼마나 많이 다른가?
Kay의 순수한 고민인 전공을 돌아보면 그는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수준을 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함께 한다. 하지만 기업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은 가뭄에 콩나듯 있다. 다들 자리를 지키고 봉급을 받는 것에 힘을 쓰지, 무엇을 더 할까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잘되면 성과에 대한 보상이 있지만, 요즘같은 시절에 무엇을 해서 책임을 문책당할 걱정에 많은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쓴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치고 올라오는 후학들 중 내가 만만하게 통제할 사람들만 남기기도 한다. 옳은 소리는 듣기 싫고, 나에게 립서비스만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렇게 공치사와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보내며, 적군이 성문앞에까지 다달아도 활을 쏠 생각보다는 회의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기성세대가 새롭게 청춘들이 도전할 수 있도록 크게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용하는 소중한 시간을 사치스럽게 사용하느라 청춘들의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모두 나쁘거나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평가받은 만큼을 사용하고, 그 남음을 청춘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어려운 시집살이를 한 세대가 다시 그 기성세대의 아들, 손자를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쉼없이 주고 받으면 상생하는 관계다.
Kay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고, 그 시간을 방향성과 효과성을 갖고 노력해야한다는 말뿐이다. 당장 그가 할 일이란 레오처럼 새롭게 인식된 세상을 바라보고 대응하며 생존하는 것이고, 나는 내 분야에서 노력해서 보다 많은 청춘들을 안을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어진 세대간의 갈등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과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상호의 공감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무력감과 굴욕감이 사회에도 존재하고 그래서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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