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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by Khori(高麗) 201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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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프레시안 : 1950년대 하면 암울한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서중석 : 고은 시인이 책 <1950년대>에서 묘사한 것처럼 1950년대는 답답한 시기였다. 연줄, '빽'이 없으면 어디 가서 뭐 하나 제대로 챙겨먹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먹이 앞서는 불법·탈법·무법의 시대였다. 깡패들의 주먹의 시대, 권력 남용의 시대로 많이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시기에 엄청난 변화가 이뤄졌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쌓였다고 할까, 그런 걸로도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커다란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농촌과 산골까지 변화하고 평준화 현상이 확산하며 교육 열풍이 분다. 이와 함께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국전쟁이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그런 변화가 한국에서도 전쟁을 통해 많이 일어났다. 전쟁이 잘됐다 혹은 그렇지 않다, 그런 걸 떠나서 (전쟁이 가져온)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전쟁이 낳은 커다란 변화

프레시안 :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서중석 : 한국전쟁 때는 물론이고 1950년대엔 군대를 서로 안 가려고 했다. 그래서 손가락을 자르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일례로 1953년 경남 3개 군의 징집 면제자 중 불구자가 80명이었는데, 이 중 오른손 손가락을 작두로 자른 이가 50명에 달했다. <편집자>) 그렇게 자해 행위를 해서 안 가려고도 했고, 징집을 기피해 도망 다니는 젊은이도 많았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많이 했던 게 군인이 징집 기피자를 잡으러 다니는 거였다.

그렇게 군에 안 가려고 했던 건 군이 무서워서였다.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고, 이른바 '빠따' 치고 막 기합을 주지 않았나. 거기다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다 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쌓여 있었던 거다.

이랬던 건데, 당시 촌사람들이 군에 많이 갔다. 이 사람들은 '빽'도 없으니, '군대에 와라' 하면 (자해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서울 지역 대학생의 입대 비율은 1950년대 중반 10퍼센트 수준이었다고 한다. <편집자>) 그런데 소위 무지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산꼭대기로 조그만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산골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계기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 거다. 물론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이 활동하면서, 산골 주민들 중에는 빨치산과 군경의 싸움 때문에도 변화를 접한 경우도 많다.

하여튼 (시골) 청년들이 군대 갔다 온 것을 계기로 인생이나 세상을 많이 안 것처럼 됐다. 그러면서 이제 시골에선 더 살기 싫다며 도시로 막 빠져나갔다. 또 젊은 여성 중에서 (집안에서) 밥 한 끼라도 줄이려는 생각으로 도시로 나가는 이들이 늘었다. (그 결과) 그야말로 산업화 없는 도시화가 이뤄졌다. 도시는 점점 인구 과잉이 됐다. 그러면서 판자촌이니 달동네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대단한 활력소였다. 이 문제는 평준화 현상의 확산과도 관련돼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나.

서중석 : 일제 때 한국인들은 권력을 일본인들에게 다 뺏겼다. 제국주의자들이 현지 주민들의 전통적인 여러 면을 놓아두면서 주로 간접 통치를 한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과는 다른 점이다. 일본은 면 단위까지 (직접) 장악해 통치하고, 권력과 주요 재산을 빼앗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만큼 하등으로 몰리면서 하향 평준화가 됐다.

일제를 거치면서 지주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양반은 거의 다 망했다. 거기다 해방 후 혁명적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지주들도 많이 몰락했다. 한때는 (많은) 지방 유지도 힘을 잃었다. 유지 중에 노골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해방 후 동네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혁명적 분위기가 더 강해진 거다. 그러고는 농지 개혁이 시작되고 곧이어 전쟁이 이어지면서 농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공산주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굉장히 평등화가 됐다.

한국처럼 양반, 상놈, 노비 따지는 나라를 찾기 어려웠는데, 일제를 겪고 해방 직후(의 혁명적 분위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게 싹 없어지다시피 했다. '노력만 하면 된다. 배우면 된다. 다 출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가득하게 된 거다. 잘 배우면 된다는 건 이른바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걸 의미했다. 한국은 '빽' 사회, 연줄 사회니 일류 학교에 가면 연줄도 많이 생기고 그런 면에서도 잘될 거라고 본 것이다.

프레시안 : 1950년대 교육열,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그전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사회이긴 했지만, 전쟁 후 평준화 현상과 겹치면서 엄청난 교육 팽창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대학만 일류, 이류, 삼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등학교, 중학교, 나아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마저 그렇게 나뉘었다.

1950~1960년대엔 한 학급에 100명이 넘는 곳이 많았다. 130명인 곳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부제, 삼부제 수업을 받는 데가 무척 많았다. 1일 3교대로 가르치는 게 삼부제다. 그런 데가 많았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냐 하면, 한국 사회에 대량으로 한글세대가 탄생했다는 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취직할 데는 별로 없었다. 산업예비군으로 축적됐다. 쌓이고 쌓인 이 산업예비군은 어디서 무슨 일만 준다면 열심히,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할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1960~1980년대 30년간 산업화의 그야말로 역군이 된 것이다.

▲ 2월 1일, 서울지방병무청에서 진행된 올해 첫 징병 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은 검사 대상자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과 달리, 195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징집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 부담 때문에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연합뉴스


한국전쟁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경제 발전의 밑거름 마련

프레시안 :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의도한 건 전혀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평준화가 더 확산되고 그게 교육 열풍 등과 맞물리면서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하게 됐다는 말로 들린다.

서중석 : 그렇다. 경제 발전을 위한 여러 요소가 1950년대 말경부터 쌓여갔다. 특히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어느 공장에서건 한글로 쓰인 기본적인 수칙을 다 지킬 수 있는 근면한 한글세대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규모로 쌓였다(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사회에) 역동적인 활기를 불어넣었고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큰 힘으로 작용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일협정 자금, 베트남 특수, 각종 차관 등의 형태로 외국 자본도 많이 들어오게 된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결합해 나가느냐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뭐든 열심히 해보려 했던 (우수한) 산업예비군(의 존재) 못지않게 국가 권력의 특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국가 권력은 어떤 면에서는 일제가 행사한 권력보다 더 강화된 측면이 있다. 부정부패하고 친일파도 많았던 이승만 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쁜 정부로 보이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굉장히 힘이 셌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주 계급은 힘을 잃었고, 지가증권(농지 개혁 과정에서 정부가 지주에게 농지 대금으로 준 증권. <편집자>)은 똥값이 됐다. 대지주는 은행 융자를 받거나 귀속 재산을 불하받는 데 지가증권을 쓰면서 그나마 많이 살아났지만, 중소지주는 사실상 쫄딱 망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한국에서 큰 재산, (그러니까) 큰 기업을 일구는 데 쓸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제의 귀속 재산이었다. 큰 기업이나 공장은 대부분 일제가 남긴 것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불하받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건 정치 권력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 정치 권력이 아주 힘이 셀 수밖에 없었다.

그거 못지않게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게 미국의 원조 물자를 어떻게 배정받느냐 하는 것이었다. 원조 물자를 잘 배정받으면 경제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원조는 재벌을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재벌이라든가 경제인은 한편으로는 자유당 간부 못지않게 굉장히 큰 부자이고 특권층임은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앞에서 힘을 못 쓰는 존재였다. 경제가 국가 권력에 예속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이후에 이런 현상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면에선 국가 권력이 일제 때보다도 더 셌고, 그런 면을 (훗날) 박정희 정부가 더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계에서도 국가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 진보적인 문화 활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굉장히 위축당했다. 저항적 문인들이 (일부) 활약하긴 했지만, 대개는 관과 결탁한 문인들이 힘을 발휘했다. 문화계라든가 교육계를 좌지우지한 건 친일파거나 관 결탁 세력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국가 권력이 구축됐다. 그런 속에서 주로 미국으로 유학이나 연수를 가서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는 사람들이 1950년대 중후반 이후 계속 들어왔다. 새로운 테크노크라트가 국가 권력을 조정하고 이끌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는 거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학살로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프레시안 : 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부의 힘이 강해졌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이는 극우 반공 체제 강화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서중석 : 한국전쟁으로 한국 사회가 많은 어려움을 안게 됐다. 특히 사회를 극도로 단순화한 극우 반공 체제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내면화됐다.

물론 전쟁이 나기 전에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역설했다. 빨갱이를 엄벌에 처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감옥소가 그야말로 '좌익수'로 넘쳐났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80퍼센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힌 좌익수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 사람들을 조그만 감방에 잔뜩 집어넣어가지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시켰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탄생했다. 그 이듬해인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투옥된 사람이 무려 11만8621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교도소가 꽉 차, 1949년 10월 형무소 두 곳을 새로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 '좌익수'의 상당수는 이른바 빨갱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편집자>) 또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을 거치며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반공주의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 전까지는 반공주의가 그렇게 먹혀들지 못했다. 이 점은 1950년 5.30 선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승만 세력은 참패하고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됐다. (전체 210석 중) 무소속 국회의원이 126명이나 탄생했는데, 이 중엔 합리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2대 국회는 민권을 위한 국회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그렇게 강권으로 주입하려도 해도 잘되지 않던 극우 반공주의가 전쟁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됐다. 왜 그렇게 됐나? 제일 큰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집단 학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공포란 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학살은)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정부 비판, 이승만 반대 같은 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게 돼버렸다. 선거 때도 조심해야 했다.

부역자로 몰린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부역자로 몰려 죽은 사람도 그렇고 감옥소에서 고생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 거다. 연좌제도 심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선) 이승만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 순응주의가 공포감과 결합하면서 강력한 극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거다.

프레시안 : 학살 등을 통해 강력하게 기틀을 마련한 극우 반공 체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중석 : 그렇다. 독재 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분단을 최대한 활용해 독재를 강화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한국전쟁으로 귀착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 시기에 수많은 살상과 집단 학살, 동족상잔 같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한국의 전 역사를 돌아봐도 (한국전쟁 때 같은) 그만한 규모의 학살과 동족상잔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새로운 사회로 발전시키자고 하는 길목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을 극우 반공주의로 가게끔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이런 전쟁은 (다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 이승만 전 대통령. ⓒ연합뉴스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만이 아니라 국제전의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주변국들에도 한국전쟁은 대사건이었다.

서중석 : 한국전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에도 똑같이 큰 교훈을 줬다. 그리고 귀일하는 지점이 있다. 뭐냐 하면,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같은 전쟁이 한반도에서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뼈저리게 느꼈고, 중국은 중국대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나. 승리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러시아(한국전쟁 당시 소련)도 자기들이 일단 뒤에 물러서 있긴 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의 내막)을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관계돼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난 주변국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전쟁 경험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강대국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 북한이 파멸할 경우 보트 피플을 비롯한 엄청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국에 완전히 뺏겼다. 1950년 7월 초순에 이미 넘어갔다. 7월 중순이 되면 북쪽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힘을 못 쓴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 상공을 장악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휴전 회담이 진행되던 2년 동안 북한에 엄청난 폭탄이 쏟아졌다.

얼마 전 출간된 책 <폭격 : 미 공군의 공중 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 이 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당시 출격했던 미국 공군의 기록을 분석한 이 책에는 미국 공군이 북한의 여러 도시를 폭격하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폭격 후 그 도시들은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이런 걸 보면) 북한이 (미군의 폭격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됐는지, 그 때문에 북한이 얼마나 전쟁을 무서워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반도를) 사회주의로 통일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국지전을 생각해본 적은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에 그러지 않았나. 그러나 전면전 문제는 다르다. 난 한국전쟁의 공포가, 북한이 전면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계속 막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피해가 컸다.

▲ 한국전쟁 당시 폭탄을 투하하는 유엔군 폭격기들. ⓒ연합뉴스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한국 사회가 잘 보인다

프레시안 :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긴장 상태다.

서중석 : 한국전쟁의 큰 교훈은, 한편으로는 학살이라든가 부역자 문제 등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새겨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처럼 소중한 건 없다. 그게 한국전쟁의 최대 교훈이다.

그런데도 '확 싸지르자', 말하자면 '까불면 응징해야 한다'는 식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도 좋다'는 극단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지금 남한과 북한에 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하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무서운 파괴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전쟁광적인 사람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잘못 처리되면 어떻게 되겠나.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평화의 기틀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금까지도 많이 했지만, 앞으로도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프레시안 : 올해 들어서도 남북 관계는 격랑에 부닥쳤다.

서중석 : 지난봄에도 큰일 날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한때 있지 않았나. 남쪽이나 북쪽이나 무섭게 나왔다. 그러면서 정말 최악의 상태까지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많은 사람에게 줬다. 그런 걸 생각하더라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지혜를 다각도로 짜내고 활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사회적인 큰 변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소중하다. 경제 발전을 어느 한 사람과 연결해 생각하는 건 굉장히 단순한 사고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누구나 얘기하면서 우리 경우에 대해선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한국전쟁이 문화, 경제, 사고, 습관, 생활 등 여러 면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폭넓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이라고 할까 깊은 믿음을 갖게 하고, 평화를 구축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와 인권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현재 한국 사회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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