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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안 교수 인터뷰 앞부분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올해, 역사 문제와 관련해 많은 일이 있었다. 이승만·박정희를 다룬 <백년전쟁> 논란, 한국현대사학회와 역사 교과서 논란, 종합편성채널(종편)들의 5.18 왜곡 방송,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논란, 전두환 추징금 문제까지 굵직한 사안들이 이어졌다.
안병욱 : 그 문제들이 한 축으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초기에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을 때 이승만·박정희 등이 나와서 독재를 했다. 권력자들이 법을 벗어나서 사적으로 폭력을 행했고, 그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공권력의 행태처럼 됐다.
그래서 과거에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화 운동과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해 (윤리적으로) 딴죽을 걸 수 없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있었다고 한다면 반공, 국가보안법, 북한 문제와 관련해 자기들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이데올로기적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노동권을 내놓고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인정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반독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1987년엔 독재가 없어지면 서구의 선진 민주주의 사회처럼 갈 것 같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6월항쟁을 기점으로 형식적·제도적 측면에선 분명히 과거처럼 무자비한, 일종의 조폭 같은 국가의 폭력은 상당 부분 없어졌다. 형식적인 법과 제도에 사회가 점차 적응하고 권력을 쥔 사람도 그 틀 내에서 행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제도 밖의 폭력이 아니라 제도 자체에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힘을 가진 사람과 힘없는 사람들의 대립이 구조화된 측면이 있다.
예컨대 1987년 이전엔 독재 정권이 없어지면 언론 자유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다수가 상식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가? 지금은 언론 자유가 형식적으로는 있는 것 같지만 아주 교묘하게, 아래로부터 철저히 걸러내는 환경이지 않나. 경제적 측면에서도 1 대 99 사회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제도화돼 있는 구조적인 틀 내에서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요소가 확립돼 있다는 말이다. 지난번 대선을 보면,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 틀에 반발하지 않았다. 여러 통계로 볼 때, 국민의 3분의 1 이상은 그렇게 차별화된 구조를 신념으로, 전적으로 지지하고 그게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사상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이 아주 무섭게 우리 사회를 대립과 갈등 구조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
옛날엔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것에 대해 박정희 추종자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 이야기, 틀렸다'고 하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변했다. 가령 1990년대에 한창 인간 복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한 여론 조사에서 박정희가 '복제하고 싶은 사람' 1위로 꼽혔다. 이에 많은 사람이 요즘 일베에서 5.18 가지고 헛소리하는 것 이상의 반응을 보였다. 충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특별한 거부감 없이, 과거에 대한 오도된 환상 속에서 박정희나 이승만을 지지할 수 있게 됐다.
(1960년) 4.19항쟁의 정점은 군중이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파괴한 것이다. 그건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동상을 끌어내린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역사에서도 독재 종식의 정점은 군중이 독재자가 세운 자기 동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건 역사에서 굉장히 큰 상징성과 의미를 갖고 있다. 이미 당시 국민에 의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분명한 역사적 심판이 내려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걸 몇몇 사람이 너무나 뻔뻔스럽게 뒤집으려 하고 있다. 헌법에 4.19 계승이 명시돼 있음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차원을 넘어 교과서에서 그 모든 것을 반전시켜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건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이런데도 큰 저항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흘러가면서 사람들 의식 속에서 그런 것들이 맹목적으로 상식처럼 확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올바른 상식이란 측면, 합리적 판단, 역사에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가치관의 측면을 놓고 본다면 1987년 이전보다 후퇴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구조화·제도화된 비민주라는 토양이 점점 굳어지고, 명확하게 역사적 심판이 내려졌던 것들을 되돌리려는 일각의 흐름이 그와 결합해 바람직하지 않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일베 같은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
안병욱 : 그(런 퇴행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일베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하도록 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런 사회의 흐름에 일부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편승한 측면이 있다.
가령 10년 전에 5.18과 관련해 그와 같은(종편의 왜곡 방송과 같은) 망발이 가능했겠는가?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엄청난 사회적 반발을 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한 것이다. 사회가 그런 걸 걸러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 사회의 일정한 상식과 평가 기준에 맞춰 행동하며 약간 일탈을 하더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상식이 다른 방향에 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편승해 그런 이야기도 쉽게 할 수 있다. 또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회가 좀 덤덤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역사 정의에 대해 무뎌진 것이다.
"구조화된 비민주, 그 속에서 역사에 대한 반역이 진행되고 있다"
프레시안 : 지난 20년을 놓고 보면, 전두환 일가가 제대로 반성하지도 않고 여전히 잘살고 있다. 또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이승만·박정희 띄우기가 계속됐고, 뉴라이트 성향 단체들이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신자유주의가 퍼지면서 격차 문제도 심각해졌다. 이런 흐름들이 사회의 지형을 바꾸면서 일베가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 것 같다.
안병욱 : 그렇다. 조직적인 연계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어떤 분위기, 생각 같은 것들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관련됐다고 봐야 한다.
그런 분위기와 지형은 단번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반공 체제도 그랬다. 반공이 극단화되는 때는 공산군하고 직접 총 들고 싸울 때 아니겠나. 그런데 놀랍게도 1950년대에 나온 역사책을 보면 분단과 반공에 대한 것이 아직 확고하게 틀을 잡지 못했다. 적어도 역사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서 반공 체제가 확립된 때는 1960년대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돌아보면, 6월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이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이 열렸다. 그걸 첫 번째로 뒤집은 것이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이었다. 1960-1980년대에 군사 정권에 편승했던 사람들이 3당 합당을 통해 (기득권을) 연장하면서 기반을 다시 튼튼하게 확보했다. 해방 공간에서 친일파가 이승만의 분단 체제에 편승해 기득권을 온존시킨 것처럼, 그렇게 했다. 그 과정에서 차별과 배제의 지역 갈등도 교묘하게 활용했다. 독재에 기댔던 기득권 세력은 그렇게 3당 합당을 거치면서 중심적인 지배 세력으로서 틀을 다시 형성하고 그에 맞게 모든 부문을 야금야금 정비해갔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 변화의 축, 역동적인 핵은 학생 운동이었다. 학생 운동은 군사 정권과 싸우는 데는 상당 부분 효율성이 있었지만, 반독재 투쟁이라는 그 틀만으로는 복잡하고 다양한 1990년대 이후의 사회를 이끌어갈 역량을 갖출 수 없었다. 그래서 투쟁력, 폭력성만 부각되고 역동적 변화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결정적으로 1996년 '연세대 사태'를 거치면서 학생 운동의 역사적 기능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그 후 사회를 (진보적으로) 선도하는 구심점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기득권 세력은 단단한 핵으로 뭉치면서 힘을 더 키우고 특히 언론까지 연대·연합하면서 그야말로 굉장히 튼튼한 성채와 같은 지배 틀을 형성했다. 보수 언론이나 대기업은 옛날보다 훨씬 더 튼튼하다. 예전엔 박정희나 전두환에게 많이 의존했는데, 지금은 재벌이나 언론이 한국 사회를 조종하고 있지 않나.
그런 구조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 이 사람들은 몇 십 년의 대계를 기획했다고 생각한다. (X파일 사건 등에서 드러난 것처럼)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은 학계, 관계, 정계, 언론계를 눈에 보이지 않게 조종한다. 지배층이 된 보수 언론은 혹시라도 사회 어딘가에서 누수가 일어날까 우려해 사전에 단속한다. 걸핏하면 종북이다, 좌파다, 사회 혼란 세력이다 하면서 그 싹을 철저하게 도려내는 데 누구보다 눈치 빠르게,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에 비해 민주 언론의 경우 목소리는 높을지 모르지만 영향력이 매우 떨어진다. 옛날엔 옳은 이야기를 하면 양과 상관없이 질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때에 따라선 유언비어성이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면 상당한 영향을 줬다. 지하의 유인물 하나가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진실한 이야기이고 거대한 음모를 폭로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메이저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중심축의 가치관 문제가 중요"
프레시안 : 얼마 전 한 아이돌이 '민주화'라는 말을 일베 식으로 썼다가 논란이 됐다. 적잖은 10대, 20대가 크게 의식하지 않고 일베 식 용어를 쓰고 있다는 말도 곳곳에서 들린다. 그렇게 젖어 들어가는 게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안병욱 : 지난해 선거 과정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세대 등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서로 잘 소통되지 않고 있다. 가령 일부 민주 언론들의 이야기가 윗세대로도 전달이 잘 안되고 청소년들한테도 접근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우리가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장벽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떠들어도 그 이야기가 장벽 저편으로 가지 못하는 것 같다.
장벽 저편에선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그것이 거기서 상식처럼 된다. 때에 따라선 또래 문화, 동료 문화에 편승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작용한다. 이걸 우리 사회의 중심이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만의 담론, 의견, 가치관이 형성되는데 (중심과 그것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가 이런 부분을 올바로 이끌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억압자들이 과거에 중우 정치를 펴거나, 혹세무민하면서 자신이 초월적인 자연 현상과 소통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사람들을 무지 속에 가둬 맘대로 조종했던 것과 닮은꼴이다. 그것들의 현대판이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은 사람들이 결코 올바른 생각, 정의로운 생각을 하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일베의 역사 인식이 논란이 되고 종편들의 5.18 왜곡 방송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역사 교육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안이 역사 교육만으로 풀릴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두환 추징금, <조선일보>와 뉴라이트의 퇴행적인 '역사 전쟁', 점점 심해지는 격차 같은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일베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붙들고 '5.18의 진실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의문이다.
안병욱 : 근본적인 부분은 놔두고,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정한 증상에만 매달리며 우왕좌왕하는 측면이 있는 건 분명 맞다. 지난번 인터뷰("박근혜 기준은 박정희 명예 회복…역사 전쟁 벌일 것") 때도 현대사 교육에 대해 물었었는데. 5.18을 예로 들면 30년 넘게 지났다. 40대 미만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 직접 겪거나 목격하지 않은 건 시간차가 없다. 다 마찬가지다. 젊은 친구들한테 왜 1980년의광주학살을 잘 모르냐고 이야기하는 건 왜 (1919년) 3.1운동을,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잘 모르냐고 하는 것과 똑같다. 엊그제 일어난 일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면 '신문도 안 보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이 문제를 역사 교육(차원)으로만 이야기한다고 하면 적절한 문제 제기라고 볼 수 없다.
전체적으로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 하는 중심축의 가치관 문제가 중요하다. 냉전이 끝나고 이념적인 대립 축으로 갈등하는 사회는 20세기의 유물로 이미 지나갔는데, 우리는 20세기 최악의 부정적인 요소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그런 모순 구조에 자본주의의 불평등 구조까지 접목돼 있다. 한국은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를 확대해, 그걸 마치 자랑스러운 것처럼 여기는 사회다. 그런 틀 속에서 정치권 등은 개인적 이해관계에 공동체적인 것을 종속시켜 뻔뻔하게 견강부회하는 일이 많고, 그게 또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언어의 소통 구조가 기형적으로 왜곡돼 있다. 심각한 문제다.
프레시안 : 가치관 문제를 이야기했다.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과 더불어,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고 역사 정의를 하나씩 세워가야 일베 같은 극단적인 현상이 줄어들 것이라는 지적으로 들린다.
안병욱 : 그렇다. (선진 사회라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도 스킨헤드, 네오나치 같은 극단적인 친구들이 있다. 엽기적인 살인범도 있다. 어느 사회든 성인처럼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력적인 사람도 있다. 인간 사회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럴 거다.
다시 말하건대, 사회의 중심축이 중요하다. 21세기 문명에 맞게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합의할 수 있는 사회 정의, 그것을 향해 의견을 모아간다면 극단적인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다. (그 경우) 그것(극단적인 일부 세력) 때문에 사회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잘 들여다보면, 극단적인 생각이나 흐름들이 묘하게 중심권과 연결돼 있다. 조직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통하는 사고방식 속에서 사회를 뒤흔든다는 게 문제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안 교수 인터뷰 앞부분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올해, 역사 문제와 관련해 많은 일이 있었다. 이승만·박정희를 다룬 <백년전쟁> 논란, 한국현대사학회와 역사 교과서 논란, 종합편성채널(종편)들의 5.18 왜곡 방송,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논란, 전두환 추징금 문제까지 굵직한 사안들이 이어졌다.
안병욱 : 그 문제들이 한 축으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초기에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을 때 이승만·박정희 등이 나와서 독재를 했다. 권력자들이 법을 벗어나서 사적으로 폭력을 행했고, 그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공권력의 행태처럼 됐다.
그래서 과거에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화 운동과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해 (윤리적으로) 딴죽을 걸 수 없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있었다고 한다면 반공, 국가보안법, 북한 문제와 관련해 자기들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이데올로기적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노동권을 내놓고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인정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반독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1987년엔 독재가 없어지면 서구의 선진 민주주의 사회처럼 갈 것 같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6월항쟁을 기점으로 형식적·제도적 측면에선 분명히 과거처럼 무자비한, 일종의 조폭 같은 국가의 폭력은 상당 부분 없어졌다. 형식적인 법과 제도에 사회가 점차 적응하고 권력을 쥔 사람도 그 틀 내에서 행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제도 밖의 폭력이 아니라 제도 자체에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힘을 가진 사람과 힘없는 사람들의 대립이 구조화된 측면이 있다.
예컨대 1987년 이전엔 독재 정권이 없어지면 언론 자유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다수가 상식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가? 지금은 언론 자유가 형식적으로는 있는 것 같지만 아주 교묘하게, 아래로부터 철저히 걸러내는 환경이지 않나. 경제적 측면에서도 1 대 99 사회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제도화돼 있는 구조적인 틀 내에서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요소가 확립돼 있다는 말이다. 지난번 대선을 보면,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 틀에 반발하지 않았다. 여러 통계로 볼 때, 국민의 3분의 1 이상은 그렇게 차별화된 구조를 신념으로, 전적으로 지지하고 그게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사상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이 아주 무섭게 우리 사회를 대립과 갈등 구조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
옛날엔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것에 대해 박정희 추종자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 이야기, 틀렸다'고 하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변했다. 가령 1990년대에 한창 인간 복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한 여론 조사에서 박정희가 '복제하고 싶은 사람' 1위로 꼽혔다. 이에 많은 사람이 요즘 일베에서 5.18 가지고 헛소리하는 것 이상의 반응을 보였다. 충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특별한 거부감 없이, 과거에 대한 오도된 환상 속에서 박정희나 이승만을 지지할 수 있게 됐다.
(1960년) 4.19항쟁의 정점은 군중이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파괴한 것이다. 그건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동상을 끌어내린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역사에서도 독재 종식의 정점은 군중이 독재자가 세운 자기 동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건 역사에서 굉장히 큰 상징성과 의미를 갖고 있다. 이미 당시 국민에 의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분명한 역사적 심판이 내려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걸 몇몇 사람이 너무나 뻔뻔스럽게 뒤집으려 하고 있다. 헌법에 4.19 계승이 명시돼 있음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차원을 넘어 교과서에서 그 모든 것을 반전시켜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건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이런데도 큰 저항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흘러가면서 사람들 의식 속에서 그런 것들이 맹목적으로 상식처럼 확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올바른 상식이란 측면, 합리적 판단, 역사에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가치관의 측면을 놓고 본다면 1987년 이전보다 후퇴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구조화·제도화된 비민주라는 토양이 점점 굳어지고, 명확하게 역사적 심판이 내려졌던 것들을 되돌리려는 일각의 흐름이 그와 결합해 바람직하지 않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일베 같은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
안병욱 : 그(런 퇴행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일베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하도록 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런 사회의 흐름에 일부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편승한 측면이 있다.
가령 10년 전에 5.18과 관련해 그와 같은(종편의 왜곡 방송과 같은) 망발이 가능했겠는가?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엄청난 사회적 반발을 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한 것이다. 사회가 그런 걸 걸러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 사회의 일정한 상식과 평가 기준에 맞춰 행동하며 약간 일탈을 하더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상식이 다른 방향에 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편승해 그런 이야기도 쉽게 할 수 있다. 또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회가 좀 덤덤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역사 정의에 대해 무뎌진 것이다.
▲ 안병욱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구조화된 비민주, 그 속에서 역사에 대한 반역이 진행되고 있다"
프레시안 : 지난 20년을 놓고 보면, 전두환 일가가 제대로 반성하지도 않고 여전히 잘살고 있다. 또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이승만·박정희 띄우기가 계속됐고, 뉴라이트 성향 단체들이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신자유주의가 퍼지면서 격차 문제도 심각해졌다. 이런 흐름들이 사회의 지형을 바꾸면서 일베가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 것 같다.
안병욱 : 그렇다. 조직적인 연계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어떤 분위기, 생각 같은 것들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관련됐다고 봐야 한다.
그런 분위기와 지형은 단번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반공 체제도 그랬다. 반공이 극단화되는 때는 공산군하고 직접 총 들고 싸울 때 아니겠나. 그런데 놀랍게도 1950년대에 나온 역사책을 보면 분단과 반공에 대한 것이 아직 확고하게 틀을 잡지 못했다. 적어도 역사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서 반공 체제가 확립된 때는 1960년대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돌아보면, 6월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이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이 열렸다. 그걸 첫 번째로 뒤집은 것이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이었다. 1960-1980년대에 군사 정권에 편승했던 사람들이 3당 합당을 통해 (기득권을) 연장하면서 기반을 다시 튼튼하게 확보했다. 해방 공간에서 친일파가 이승만의 분단 체제에 편승해 기득권을 온존시킨 것처럼, 그렇게 했다. 그 과정에서 차별과 배제의 지역 갈등도 교묘하게 활용했다. 독재에 기댔던 기득권 세력은 그렇게 3당 합당을 거치면서 중심적인 지배 세력으로서 틀을 다시 형성하고 그에 맞게 모든 부문을 야금야금 정비해갔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 변화의 축, 역동적인 핵은 학생 운동이었다. 학생 운동은 군사 정권과 싸우는 데는 상당 부분 효율성이 있었지만, 반독재 투쟁이라는 그 틀만으로는 복잡하고 다양한 1990년대 이후의 사회를 이끌어갈 역량을 갖출 수 없었다. 그래서 투쟁력, 폭력성만 부각되고 역동적 변화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결정적으로 1996년 '연세대 사태'를 거치면서 학생 운동의 역사적 기능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그 후 사회를 (진보적으로) 선도하는 구심점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기득권 세력은 단단한 핵으로 뭉치면서 힘을 더 키우고 특히 언론까지 연대·연합하면서 그야말로 굉장히 튼튼한 성채와 같은 지배 틀을 형성했다. 보수 언론이나 대기업은 옛날보다 훨씬 더 튼튼하다. 예전엔 박정희나 전두환에게 많이 의존했는데, 지금은 재벌이나 언론이 한국 사회를 조종하고 있지 않나.
그런 구조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 이 사람들은 몇 십 년의 대계를 기획했다고 생각한다. (X파일 사건 등에서 드러난 것처럼)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은 학계, 관계, 정계, 언론계를 눈에 보이지 않게 조종한다. 지배층이 된 보수 언론은 혹시라도 사회 어딘가에서 누수가 일어날까 우려해 사전에 단속한다. 걸핏하면 종북이다, 좌파다, 사회 혼란 세력이다 하면서 그 싹을 철저하게 도려내는 데 누구보다 눈치 빠르게,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에 비해 민주 언론의 경우 목소리는 높을지 모르지만 영향력이 매우 떨어진다. 옛날엔 옳은 이야기를 하면 양과 상관없이 질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때에 따라선 유언비어성이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면 상당한 영향을 줬다. 지하의 유인물 하나가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진실한 이야기이고 거대한 음모를 폭로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메이저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 일베 홈페이지. |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중심축의 가치관 문제가 중요"
프레시안 : 얼마 전 한 아이돌이 '민주화'라는 말을 일베 식으로 썼다가 논란이 됐다. 적잖은 10대, 20대가 크게 의식하지 않고 일베 식 용어를 쓰고 있다는 말도 곳곳에서 들린다. 그렇게 젖어 들어가는 게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안병욱 : 지난해 선거 과정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세대 등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서로 잘 소통되지 않고 있다. 가령 일부 민주 언론들의 이야기가 윗세대로도 전달이 잘 안되고 청소년들한테도 접근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우리가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장벽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떠들어도 그 이야기가 장벽 저편으로 가지 못하는 것 같다.
장벽 저편에선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그것이 거기서 상식처럼 된다. 때에 따라선 또래 문화, 동료 문화에 편승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작용한다. 이걸 우리 사회의 중심이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만의 담론, 의견, 가치관이 형성되는데 (중심과 그것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가 이런 부분을 올바로 이끌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억압자들이 과거에 중우 정치를 펴거나, 혹세무민하면서 자신이 초월적인 자연 현상과 소통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사람들을 무지 속에 가둬 맘대로 조종했던 것과 닮은꼴이다. 그것들의 현대판이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은 사람들이 결코 올바른 생각, 정의로운 생각을 하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일베의 역사 인식이 논란이 되고 종편들의 5.18 왜곡 방송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역사 교육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안이 역사 교육만으로 풀릴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두환 추징금, <조선일보>와 뉴라이트의 퇴행적인 '역사 전쟁', 점점 심해지는 격차 같은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일베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붙들고 '5.18의 진실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의문이다.
안병욱 : 근본적인 부분은 놔두고,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정한 증상에만 매달리며 우왕좌왕하는 측면이 있는 건 분명 맞다. 지난번 인터뷰("박근혜 기준은 박정희 명예 회복…역사 전쟁 벌일 것") 때도 현대사 교육에 대해 물었었는데. 5.18을 예로 들면 30년 넘게 지났다. 40대 미만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 직접 겪거나 목격하지 않은 건 시간차가 없다. 다 마찬가지다. 젊은 친구들한테 왜 1980년의광주학살을 잘 모르냐고 이야기하는 건 왜 (1919년) 3.1운동을,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잘 모르냐고 하는 것과 똑같다. 엊그제 일어난 일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면 '신문도 안 보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이 문제를 역사 교육(차원)으로만 이야기한다고 하면 적절한 문제 제기라고 볼 수 없다.
전체적으로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 하는 중심축의 가치관 문제가 중요하다. 냉전이 끝나고 이념적인 대립 축으로 갈등하는 사회는 20세기의 유물로 이미 지나갔는데, 우리는 20세기 최악의 부정적인 요소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그런 모순 구조에 자본주의의 불평등 구조까지 접목돼 있다. 한국은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를 확대해, 그걸 마치 자랑스러운 것처럼 여기는 사회다. 그런 틀 속에서 정치권 등은 개인적 이해관계에 공동체적인 것을 종속시켜 뻔뻔하게 견강부회하는 일이 많고, 그게 또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언어의 소통 구조가 기형적으로 왜곡돼 있다. 심각한 문제다.
프레시안 : 가치관 문제를 이야기했다.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과 더불어,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고 역사 정의를 하나씩 세워가야 일베 같은 극단적인 현상이 줄어들 것이라는 지적으로 들린다.
안병욱 : 그렇다. (선진 사회라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도 스킨헤드, 네오나치 같은 극단적인 친구들이 있다. 엽기적인 살인범도 있다. 어느 사회든 성인처럼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력적인 사람도 있다. 인간 사회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럴 거다.
다시 말하건대, 사회의 중심축이 중요하다. 21세기 문명에 맞게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합의할 수 있는 사회 정의, 그것을 향해 의견을 모아간다면 극단적인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다. (그 경우) 그것(극단적인 일부 세력) 때문에 사회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잘 들여다보면, 극단적인 생각이나 흐름들이 묘하게 중심권과 연결돼 있다. 조직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통하는 사고방식 속에서 사회를 뒤흔든다는 게 문제다.
기사입력 2013-06-20 오전 7:59:49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안 교수 인터뷰 뒷부분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인사들이 참여한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 있었다. 5월 31일엔 한국현대사학회와 아산정책연구원이 공동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토론회도 열렸다.
안병욱 : 인터넷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이들이 일베에 모이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지식인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옛날에 극우 세력이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를 찬양하고 심지어 전두환을 찬양하며 일대기까지 썼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왕에 대해 민족 반역적인 찬양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과) 내용은 다르지만 이처럼 지식인 사회에서도 상식을 벗어나는 게 있을 수 있다. 뭔가 돌출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과 한국 사회를 3당 합당 구조와 신자유주의 체제로 (계속)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연결돼 있는 측면이 있다. 그중 일부엔 친일파 청산처럼 지난 민주화 정부에서 이뤄진 과거사 정리 작업으로 불명예를 받은 사람들의 보복적인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2004년부터 목소리를 높인 뉴라이트 성향 단체들까지 포괄해 이야기하는 건가.
안병욱 : 그렇다.
"뉴라이트와 한국현대사학회, 그 가치관과 지향은 같다"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자신들은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안병욱 : 계파는 뉴라이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부터 1987년까지의 역사에 대해,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위정자들이 반민주적이란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민주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다른 공로가 있다'며 (독재를) 용인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합리화한다. 그런 것에 자기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중 뉴라이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통해 형성된, 나름대로 유형화할 수 있는 학자들이다. 한국현대사학회에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 일제 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초기 뉴라이트적인 것과 의견을 약간 달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자기들은 뉴라이트의 후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뉴라이트가 일본 문제와 관련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현대사학회 쪽은 자기들이 뉴라이트하고는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해) 주장하는 바는 큰 차이가 없다. 무엇을 내세우고 배척하려 하는가, 어떤 것에 이해관계를 두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옛날 우익이나 뉴라이트나 한국현대사학회를 중심으로 교과서를 편찬하려 하는 사람들이나 가치관과 지향은 같다.
덧붙이면, 2011년 한국현대사학회가 만들어질 때 한국 현대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역사 전공자도 몇 명 안 됐다. 학문에 영역이 있어서 그걸 침범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 전공자 대다수가 그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한 지점이다). 인접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것도 한국 사회학계와 정치학계 등에서 대체로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게 한국현대사학회다.
프레시안 : 반공, 반북, 자본주의 산업화 중심의 역사관으로 보인다.
안병욱 : 그 사람들의 핵심은 분단에 대한 평가다.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으로 분단을 꼽는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것도 있지만 그건 일본의 침략과 조선 사회의 붕괴가 초래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자신과 관련된 구체적인 책임 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현재는 없다.
그런데 해방 공간이 분단으로 귀결된 데에는 여러 대외적 요인이 있지만, 국내적으로도 분단에 일정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분단은 살아 있는 문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핵심은 '이승만 등이 분단 정부를 세운 선택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평가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단정 수립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것이다'라는 거다. 뉴라이트든 한국현대사학회든 출발점은 바로 거기다.
4.19항쟁 이래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 주된 축은 민족 통일이다. 민주 세력은 분단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고 장기적으로는 민족을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극우 세력은 분단 정부 수립(에 대한 찬양)을 통해 그 담론을 밑바닥부터 해체하려는 것이다. 그걸 뒤집어엎는 데 이승만의 단정 수립, 그리고 최악의 부시(Bush)식 표현에 따르면 '악의 축' 북쪽에 대한 공격을 활용한다. 이게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역사의식이고 그 틀 내에서, 그것에 맞춰 모든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망발도 그런 망발이 없다"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는 창립 때부터 일부 우파 성향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언론사들은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을 크게 보도해줬다. 한국현대사학회의 '교과서 문제' 토론회를 <조선일보>에서 후원한 것도 눈에 들어온다.
안병욱 : 시쳇말로 짜고 치는 노름 같은 모양새다. 한국현대사학회 창립이라는 게 언론에서 그렇게 큰 지면을 할애해 보도할 만한 사항인가? 언론의 횡포다. 그리고 학문하는 사람들은 학자적 양심과 학문적 소양에 기초해서 연구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수구 언론의 일꾼, 수구 언론의 전위부대, 그런 것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프레시안 : 문제의 토론회가 열린 날, <조선일보>는 '남로당식 사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다니'라는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좌파가 엮고 쓴 역사 교과서 채택률이 중·고교에서 90%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안병욱 : (남로당식 사관이라니) 망발도 그런 망발이 없다. 백 보를 양보하더라도, 90퍼센트 이상의 교과서가 그렇게 돼 있다고 한다면 그건 학계의 폭넓은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역사 인식이라는 걸 겸허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전문 역사 연구자도 아니면서 신문에 글 몇 줄로, 한마디로 재단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 아닌가. 무식하고 뻔뻔스럽고 목전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행태, 술 취한 사람이 뒷골목에서 흉기를 들고 난동 부리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글을 보고 연구했는지, 참으로 납득할 수 없다. 극우적 논설을 펴는 사람들이 뒷날 자신들이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됐을 때 어떠하리라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의문이다. 역사에서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역사를 철저하게 평가하는 데서 미래 사회가 그만큼 더 열린다.
"저들은 장기적이고 집요하게 역사적 반전을 꾀하고 있다"
프레시안 : 이승만·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다룬 <백년전쟁>을 둘러싼 논란도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인호 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백년전쟁>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하겠다"고 이야기한 게 눈에 들어왔다. 이에 더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만나 <백년전쟁>에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안병욱 : 대체로 통치자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의중에 맞게 주위 사람들이 행동하기 마련이다. '박근혜'로 표상되는, 지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다 하는 걸 그 주위에 줄을 선 사람들이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다.
<백년전쟁>의 내용이 그 사람들의 역사 인식과 배치된다는 건 분명하다. 과거 독재 정권 같았으면 검찰의 손을 빌려 하루아침에 통제하고 탄압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달리 고도의 수법을 쓴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 동원 의혹이 나오는 것이다. 그에 더해 한국현대사학회와 보수 언론이 나서서 역사적인 반전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것들에 따라 장기적이고 집요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박 대통령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과거사에 대한 모든 부분이 (저들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청와대를 찾은 원로가 <백년전쟁>을 국가 안보와 연결해 이야기했다는 건 학문 세계를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가져가는 것 아닌가. 그것도 학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언어가 절제되지 않고 거칠게 마구 나가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본다.
프레시안 : 대통령 측근들의 역사 인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남재준 국정원장, 김장수 안보실장 등은 4.3을 "좌파의 무장 폭동"으로 서슴없이 규정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중용한 대통령은 4.3 위령제에 불참했다.
안병욱 :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또 얼마 전, 보훈처장은 (5.18과 관련해) 시쳇말로 알아서 기는 행태를 보였다. 국회 청문회에서 5.16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일국의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소신 있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답변하는 건 부적절하겠다'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보신주의다. 그런 보신의 달인들만을 장관으로 뽑는 것 같은 행태를 보였다.
프레시안 : 역사를 성찰하는 능력은 장관이 되는데 전혀 필요치 않다는 걸 입증한 셈이다.
안병욱 : 그렇게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역사에서 의미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많은 관료들이 임금 앞에서 자기 소신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사약을 받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양심에 따라 주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엔 명령과 지시를 기능인으로서 수행해내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하나 더 이야기하면) 난 일부 진보적 학자들조차 '권위주의 정권은 문제가 있지만 그 덕분에 산업화했다'고 주장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그런 허구적 논리를 빨리 깨야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바꿔야"
프레시안 : 허구적 논리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안병욱 : 차관, 대일 청구권 자금, 월남(베트남) 파병 대가 등으로 1960년대에 자금이 흘러들어왔다. 이 중 월남 파병만 빼놓고 (대통령이 박정희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그런 자금은 가져올 수 있었다. 1960년대 경제 규모에서 그 정도의 자금은 엄청난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부정부패와 부실 차관으로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걸 박정희가 독재로 통제했다고 하는데, (반대로) 그런 부정부패를 독재로 키워준 것이다. 근대사를 살펴보면, 국민들이 각자 자율 의지에 따라 경제 활동을 할 때 그 사회가 발전한다. 박정희 체제에선 부정부패한 권력자들 및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만 개인의 자율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특권을 가지고 만든 건 부실 기업, 부실 차관, 부동산 투기, 부패 구조였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우려한 건 감당하기 어려운 차관 그리고 20퍼센트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이었다. 그게 박정희가 죽을 때 결산이었다. 이 두 가지는 1980년대 중후반에 해결됐다. 전두환이 독재를 했기 때문에 외채 문제를 해결하고 물가를 잡았나? 핵심은 1986년부터 지속된 3저(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이다. 이런 요인이 작용하면서 우리 경제가 그 두 가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다.
3저 호황 전, 외채가 4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대로 갔으면, 한국 경제가 그야말로 와해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걸 누가 불러왔나. 독재자들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산업화의 공로는 독재자들에게 있다'고 하는 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계량적 지표에 입각해 천박하기 짝이 없게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철학이 빈곤한 데서 나오는 역사 인식이다.
결과가 이렇게 분명한데, 그걸 뒤엎고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환상을) 공인된 상식처럼 이해하고 있는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상식 아닌 상식이 상식화돼 있는 구조를 올바른 인식 체계로 바꾸는 게 쉽진 않겠지만, 역사 연구자들이 꾸준히 작업해서 오도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아쉬운 건, 그런(3저 호황 같은) 절호의 기회를 맞았을 때 정치가 제대로 돼 있었다면 경제가 지금과 같은 불안한 상태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아마도 완성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사이에 잠시 호황을 누리다 말았고, 그 결말이 1997년 외환 위기였다.
"과거사위 작업을 역사서로 만드는 일, 그게 내게 남은 하나의 소임"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정년 퇴임으로 강단을 떠나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퇴임 후 계획도 궁금하다.
안병욱 : 약간 모순되지만 아쉬움과, 행운을 누렸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지난 40여 년을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였다. 어려운 시대였기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정치 현실이 무난한 때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랬다면 고고학이나, 역사를 했더라도 (근현대사가 아니라) 고대사를 했을 것 같다.
다른 면에서 보면 내 또래는 후배들에 비하면 굉장한 행운을 누렸다.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요즘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학문적 업적을 쌓았는데도 취직을 못하는 걸 안타깝게도 주위에서 너무나 많이 본다.
(첫 번째 부분에 관해 덧붙이면)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사회적 발언을 비교적 많이 했고, 비판적인 논문과 현실에 문제 제기하는 글도 많이 썼다. 현실 참여 기회가 주어졌다는 측면에서 당장 내 역할이 있었고 그것에 부응했다. 내가 나를 평가하긴 그렇지만, 지난 40여 년간 지식인으로서 임무에 어느 정도 부응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있었다.
현실적인 요구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현실과 무관하게 공부했으면 학문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성과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러나 지식인의 자기 책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정체성과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시간은 10년 남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10년 동안, 미진한 걸 처리해야 한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걸 갑자기 하겠다는 건 과도한 욕망이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단편적으로 써온 논문들과 사회적 발언들을 모아서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것, 이걸 하는데도 10년은 짧다. 새로운 연구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늙어서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거나 추해지는 일을 피하는 게 현재 내 최고의 관심사다.
프레시안 : 과거사 진상 규명과 관련된 저술도 준비하나.
안병욱 : 국정원 과거사위, 진실화해위를 거치며 현대사와 관련해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한 문제 제기들이 많이 돼 있다.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보고서 작업이었다. 이걸 기술된 역사서로 만드는 일이 내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노추하지 않겠다는 것과 더불어 내게 남은 하나의 소임이라면 이 부분을 역사화하는 것이다. 그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다. 혼자 할 수는 없다. 후배들, 동료들과 함께 해나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의 동료들과 그 점에 대해 논의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안 교수 인터뷰 뒷부분이다. <편집자>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안병욱 ①] "일베-뉴라이트-<조선>은 이어져 있다" |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인사들이 참여한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 있었다. 5월 31일엔 한국현대사학회와 아산정책연구원이 공동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토론회도 열렸다.
안병욱 : 인터넷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이들이 일베에 모이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지식인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옛날에 극우 세력이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를 찬양하고 심지어 전두환을 찬양하며 일대기까지 썼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왕에 대해 민족 반역적인 찬양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과) 내용은 다르지만 이처럼 지식인 사회에서도 상식을 벗어나는 게 있을 수 있다. 뭔가 돌출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과 한국 사회를 3당 합당 구조와 신자유주의 체제로 (계속)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연결돼 있는 측면이 있다. 그중 일부엔 친일파 청산처럼 지난 민주화 정부에서 이뤄진 과거사 정리 작업으로 불명예를 받은 사람들의 보복적인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2004년부터 목소리를 높인 뉴라이트 성향 단체들까지 포괄해 이야기하는 건가.
안병욱 : 그렇다.
▲ 안병욱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뉴라이트와 한국현대사학회, 그 가치관과 지향은 같다"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자신들은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안병욱 : 계파는 뉴라이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부터 1987년까지의 역사에 대해,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위정자들이 반민주적이란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민주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다른 공로가 있다'며 (독재를) 용인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합리화한다. 그런 것에 자기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중 뉴라이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통해 형성된, 나름대로 유형화할 수 있는 학자들이다. 한국현대사학회에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 일제 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초기 뉴라이트적인 것과 의견을 약간 달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자기들은 뉴라이트의 후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뉴라이트가 일본 문제와 관련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현대사학회 쪽은 자기들이 뉴라이트하고는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해) 주장하는 바는 큰 차이가 없다. 무엇을 내세우고 배척하려 하는가, 어떤 것에 이해관계를 두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옛날 우익이나 뉴라이트나 한국현대사학회를 중심으로 교과서를 편찬하려 하는 사람들이나 가치관과 지향은 같다.
덧붙이면, 2011년 한국현대사학회가 만들어질 때 한국 현대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역사 전공자도 몇 명 안 됐다. 학문에 영역이 있어서 그걸 침범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 전공자 대다수가 그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한 지점이다). 인접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것도 한국 사회학계와 정치학계 등에서 대체로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게 한국현대사학회다.
프레시안 : 반공, 반북, 자본주의 산업화 중심의 역사관으로 보인다.
안병욱 : 그 사람들의 핵심은 분단에 대한 평가다.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으로 분단을 꼽는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것도 있지만 그건 일본의 침략과 조선 사회의 붕괴가 초래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자신과 관련된 구체적인 책임 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현재는 없다.
그런데 해방 공간이 분단으로 귀결된 데에는 여러 대외적 요인이 있지만, 국내적으로도 분단에 일정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분단은 살아 있는 문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핵심은 '이승만 등이 분단 정부를 세운 선택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평가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단정 수립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것이다'라는 거다. 뉴라이트든 한국현대사학회든 출발점은 바로 거기다.
4.19항쟁 이래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 주된 축은 민족 통일이다. 민주 세력은 분단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고 장기적으로는 민족을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극우 세력은 분단 정부 수립(에 대한 찬양)을 통해 그 담론을 밑바닥부터 해체하려는 것이다. 그걸 뒤집어엎는 데 이승만의 단정 수립, 그리고 최악의 부시(Bush)식 표현에 따르면 '악의 축' 북쪽에 대한 공격을 활용한다. 이게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역사의식이고 그 틀 내에서, 그것에 맞춰 모든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 한국현대사학회 홈페이지. |
"<조선일보> 사설, 망발도 그런 망발이 없다"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는 창립 때부터 일부 우파 성향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언론사들은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을 크게 보도해줬다. 한국현대사학회의 '교과서 문제' 토론회를 <조선일보>에서 후원한 것도 눈에 들어온다.
안병욱 : 시쳇말로 짜고 치는 노름 같은 모양새다. 한국현대사학회 창립이라는 게 언론에서 그렇게 큰 지면을 할애해 보도할 만한 사항인가? 언론의 횡포다. 그리고 학문하는 사람들은 학자적 양심과 학문적 소양에 기초해서 연구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수구 언론의 일꾼, 수구 언론의 전위부대, 그런 것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프레시안 : 문제의 토론회가 열린 날, <조선일보>는 '남로당식 사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다니'라는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좌파가 엮고 쓴 역사 교과서 채택률이 중·고교에서 90%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안병욱 : (남로당식 사관이라니) 망발도 그런 망발이 없다. 백 보를 양보하더라도, 90퍼센트 이상의 교과서가 그렇게 돼 있다고 한다면 그건 학계의 폭넓은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역사 인식이라는 걸 겸허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전문 역사 연구자도 아니면서 신문에 글 몇 줄로, 한마디로 재단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 아닌가. 무식하고 뻔뻔스럽고 목전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행태, 술 취한 사람이 뒷골목에서 흉기를 들고 난동 부리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글을 보고 연구했는지, 참으로 납득할 수 없다. 극우적 논설을 펴는 사람들이 뒷날 자신들이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됐을 때 어떠하리라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의문이다. 역사에서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역사를 철저하게 평가하는 데서 미래 사회가 그만큼 더 열린다.
"저들은 장기적이고 집요하게 역사적 반전을 꾀하고 있다"
프레시안 : 이승만·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다룬 <백년전쟁>을 둘러싼 논란도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인호 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백년전쟁>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하겠다"고 이야기한 게 눈에 들어왔다. 이에 더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만나 <백년전쟁>에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안병욱 : 대체로 통치자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의중에 맞게 주위 사람들이 행동하기 마련이다. '박근혜'로 표상되는, 지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다 하는 걸 그 주위에 줄을 선 사람들이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다.
<백년전쟁>의 내용이 그 사람들의 역사 인식과 배치된다는 건 분명하다. 과거 독재 정권 같았으면 검찰의 손을 빌려 하루아침에 통제하고 탄압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달리 고도의 수법을 쓴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 동원 의혹이 나오는 것이다. 그에 더해 한국현대사학회와 보수 언론이 나서서 역사적인 반전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것들에 따라 장기적이고 집요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박 대통령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과거사에 대한 모든 부분이 (저들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청와대를 찾은 원로가 <백년전쟁>을 국가 안보와 연결해 이야기했다는 건 학문 세계를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가져가는 것 아닌가. 그것도 학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언어가 절제되지 않고 거칠게 마구 나가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본다.
프레시안 : 대통령 측근들의 역사 인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남재준 국정원장, 김장수 안보실장 등은 4.3을 "좌파의 무장 폭동"으로 서슴없이 규정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중용한 대통령은 4.3 위령제에 불참했다.
안병욱 :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또 얼마 전, 보훈처장은 (5.18과 관련해) 시쳇말로 알아서 기는 행태를 보였다. 국회 청문회에서 5.16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일국의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소신 있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답변하는 건 부적절하겠다'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보신주의다. 그런 보신의 달인들만을 장관으로 뽑는 것 같은 행태를 보였다.
프레시안 : 역사를 성찰하는 능력은 장관이 되는데 전혀 필요치 않다는 걸 입증한 셈이다.
안병욱 : 그렇게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역사에서 의미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많은 관료들이 임금 앞에서 자기 소신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사약을 받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양심에 따라 주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엔 명령과 지시를 기능인으로서 수행해내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하나 더 이야기하면) 난 일부 진보적 학자들조차 '권위주의 정권은 문제가 있지만 그 덕분에 산업화했다'고 주장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그런 허구적 논리를 빨리 깨야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
▲ 댜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바꿔야"
프레시안 : 허구적 논리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안병욱 : 차관, 대일 청구권 자금, 월남(베트남) 파병 대가 등으로 1960년대에 자금이 흘러들어왔다. 이 중 월남 파병만 빼놓고 (대통령이 박정희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그런 자금은 가져올 수 있었다. 1960년대 경제 규모에서 그 정도의 자금은 엄청난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부정부패와 부실 차관으로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걸 박정희가 독재로 통제했다고 하는데, (반대로) 그런 부정부패를 독재로 키워준 것이다. 근대사를 살펴보면, 국민들이 각자 자율 의지에 따라 경제 활동을 할 때 그 사회가 발전한다. 박정희 체제에선 부정부패한 권력자들 및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만 개인의 자율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특권을 가지고 만든 건 부실 기업, 부실 차관, 부동산 투기, 부패 구조였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우려한 건 감당하기 어려운 차관 그리고 20퍼센트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이었다. 그게 박정희가 죽을 때 결산이었다. 이 두 가지는 1980년대 중후반에 해결됐다. 전두환이 독재를 했기 때문에 외채 문제를 해결하고 물가를 잡았나? 핵심은 1986년부터 지속된 3저(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이다. 이런 요인이 작용하면서 우리 경제가 그 두 가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다.
3저 호황 전, 외채가 4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대로 갔으면, 한국 경제가 그야말로 와해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걸 누가 불러왔나. 독재자들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산업화의 공로는 독재자들에게 있다'고 하는 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계량적 지표에 입각해 천박하기 짝이 없게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철학이 빈곤한 데서 나오는 역사 인식이다.
결과가 이렇게 분명한데, 그걸 뒤엎고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환상을) 공인된 상식처럼 이해하고 있는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상식 아닌 상식이 상식화돼 있는 구조를 올바른 인식 체계로 바꾸는 게 쉽진 않겠지만, 역사 연구자들이 꾸준히 작업해서 오도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아쉬운 건, 그런(3저 호황 같은) 절호의 기회를 맞았을 때 정치가 제대로 돼 있었다면 경제가 지금과 같은 불안한 상태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아마도 완성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사이에 잠시 호황을 누리다 말았고, 그 결말이 1997년 외환 위기였다.
"과거사위 작업을 역사서로 만드는 일, 그게 내게 남은 하나의 소임"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정년 퇴임으로 강단을 떠나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퇴임 후 계획도 궁금하다.
안병욱 : 약간 모순되지만 아쉬움과, 행운을 누렸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지난 40여 년을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였다. 어려운 시대였기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정치 현실이 무난한 때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랬다면 고고학이나, 역사를 했더라도 (근현대사가 아니라) 고대사를 했을 것 같다.
다른 면에서 보면 내 또래는 후배들에 비하면 굉장한 행운을 누렸다.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요즘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학문적 업적을 쌓았는데도 취직을 못하는 걸 안타깝게도 주위에서 너무나 많이 본다.
▲ "아쉬움도 들지만 지식인의 자기 책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현실적인 요구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현실과 무관하게 공부했으면 학문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성과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러나 지식인의 자기 책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정체성과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시간은 10년 남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10년 동안, 미진한 걸 처리해야 한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걸 갑자기 하겠다는 건 과도한 욕망이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단편적으로 써온 논문들과 사회적 발언들을 모아서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것, 이걸 하는데도 10년은 짧다. 새로운 연구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늙어서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거나 추해지는 일을 피하는 게 현재 내 최고의 관심사다.
프레시안 : 과거사 진상 규명과 관련된 저술도 준비하나.
안병욱 : 국정원 과거사위, 진실화해위를 거치며 현대사와 관련해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한 문제 제기들이 많이 돼 있다.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보고서 작업이었다. 이걸 기술된 역사서로 만드는 일이 내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노추하지 않겠다는 것과 더불어 내게 남은 하나의 소임이라면 이 부분을 역사화하는 것이다. 그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다. 혼자 할 수는 없다. 후배들, 동료들과 함께 해나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의 동료들과 그 점에 대해 논의할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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