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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서 교수 인터뷰 앞부분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대선 후 어느새 반년이 흘렀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도 100일이 넘었다.
서중석 :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크게 우리 사회에 드리웠다. 박정희 신드롬은 정치인 박근혜가 인기를 누리는 데도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큰 힘으로 작용했다.
박정희 신드롬이 지워지고 약화되는 것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중요하다. 민주주의로, 인권으로, 남북 평화와 교류 협력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데, 박정희 시대는 너무나 그것과 대척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커다란 장애물이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이 된 건 어떤 점에선 박정희 신드롬을 지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5년을 거치는 동안 그 신드롬을 적극 활용한 세력의 국정 운영 능력이 명확하게 드러나면, 박정희 신화에 대한 지지자들의 믿음이 줄어들 것이라는 뜻인가.
서중석 : 그거다. 그 이야기 그대로다. 박근혜 대통령은 주로 유신 시대의 정치를 보고 경험한 사람이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인 20대의 대부분을 유신 체제의 중심에서 보냈다. (유신 체제의 멘털리티를 떨치지 않는 한) 성공적인 정치를 하기 매우 어렵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 박정희 신드롬 지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도"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출범 후 보인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우선 윤창중 같은 사람을 대변인으로 쓴 일 같은 것이 정상적인 게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보기에 정말 옳은 판단을 한다고 생각하는, 정말 신뢰하는 어떤 그룹 혹은 개인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쪽에서 (윤창중을) 천거한 것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정상적인 정치인이면 윤창중을 천거를 안 했을 거다. 또 (대변인 임명 후) 여론이 좋지 않았다. <조선일보>조차 뭐라고 하지 않았나. 여론이 그렇게 나쁘면 '윤창중을 걷어찹시다', 이럴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끝내 박 대통령이 (윤창중을) 지킨 것 아닌가. 그러다 미국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고. 박 대통령이 (사안을) 판단하는 데 있어 참 큰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와 비슷한 걸 여러 번 느꼈다. 그중 하나가 '별' 4개짜리(4성 장군 출신)를 국정원장, 안보실장, 경호실장에 앉힌 것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각지를 다니며 사상·안보 교육을 한 사람이다. '4.3은 북한에서 사주해서 일어난 폭동'이라는 논리를 편 사람 아닌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 대통령이 국정원장 자리에 그런 사람을 앉혀놨다는 건 상당한 우려를 하게 만든다.
(참고로) 역대 국정원장 중엔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굉장히 부정적인 작용을 한 사람이 많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조차 그랬다. 물론 임동원·김만복 전 원장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안보실장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리를 설정한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그건 결국 대통령이 직접 꿰차고 뭔가를 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거다. 그 자리에 그런 사람을 앉혀놨다는 것은 상당히 군인 중심의 사고를 가진 데서 나온 발상으로 보인다. 경호실장에 별 4개짜리가 앉은 것도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옛날에는 대개 별 2개나 3개짜리를 앉혔던 자리다. 관례라는 게 있는 건데….
하여튼 이런 식으로 군인들을 (요직에) 앉힌 건 유신 시대와 관련 있는 발상이라고 본다. 유신 시대가 군인 정치(시대)는 아니지만, 박정희는 여차하면 군을 동원해 모든 걸 처리한 사람이다. (이번 정부가 군인들을 요직에 앉힌 건) 자유로운 공간, 정치 발전 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고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거다. 퇴행적인 성격마저 지니고 있다.
그다음에 각료와 관련해서도 문제가 있다. 물론 이번 각료들 가운데 과거 이력이 괜찮은 사람도 있다. 한데 그런 사람까지 포함해서 국회 청문회 같은 데서 5.16 등에 대해 물어보면 거의 대답을 제대로 못 했다. (5.16쿠데타는)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다가) 후보 시절 정정 발표하고 사과도 했던 사안 아닌가. 그런 것에 대해서조차 (대통령의) 노여움을 살까봐 (대답을) 제대로 못한 거다.
이건 뭐냐 하면 박 대통령 앞에서 많은 사람이 떤다는 거다. 유신 시대적인 발상이다. 대통령 앞에서 떨면 아무 일도 못 한다. 다시 말해 난 유신 체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런 게 이해가 안 될 거라고 본다. 좋은 사람들조차 자기 식으로 사고하고 정책을 집행하지 못하고, 유일한 분 눈치만 봐가면서 일하는 방식 아닌가. 유신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게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거다.
또 (대통령이) 너무 쉽게 선거 공약을 변경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진 면이 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젠 끝난 것처럼 이야기되는 부분이 있다. 앞으로 그런 게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치에서) 과거에도 그랬다. 지금은 공약을 하면 지켜야 한다고 언론등에서 추궁하지만, 1980년대 무렵까진 '국민들한테 인심을 얻기 위해 공약을 일시적으로 할 수도 있는 거다', 이런 발상이 만연했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모습에서) 그런 발상도 엿보인다.
유신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 역사를 너무나도 모른다.
유신을 이해해야 오늘의 박근혜 대통령이 제대로 보인다
프레시안 : 유신을 이해해야 오늘의 박근혜 대통령이 제대로 보인다는 뜻인가?
서중석 : 그렇다. 유신 체제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박근혜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게 정확한 표현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대선 과정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5.16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유신 체제에 대해서는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식으로 나왔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두 개의 대법원 판결' 발언을 하며 대법원 판결 자체를 무시했다. 유신 시대의 잘못된 죽음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팎에서 추궁이 심해지고 '이런 식으로는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때 가서야 바뀐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나.
그런데 진보적인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사실상) 그걸로 끝내버리더라. 그게 아니라 유신 시대와 박근혜 후보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굉장히 다각도로 추궁했어야 한다고 본다. 난 박 대통령이 유신 시대를 제외하고는 권력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건 아니라고 본다. 또한 박 대통령은 1970년대에 영부인 역할을 하면서 상당히 많은 유신 지지 세력을 규합했다. 그 과정에서 고 최태민 목사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 등의 활동도 했다. 이런 걸 어째서 소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깊이 있게 추궁하지 않은 건가.
이건 참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최태민 목사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보인태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때 중앙정보부가 '최태민 문제가 심각하다'고 박정희에게 진언을 여러 번 했다. 민정수석실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의 보고를 올렸고 법무부, 검찰 등에서도 조사해서 올렸다. 그런데 그 시기는 박정희가 더 경직되고 상황을 흐리멍덩하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대처하려는 모습을 보이던 유신 말기다. 그때 박정희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전횡) 문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러니 차지철 문제보다 훨씬 아래 문제인 최태민 문제에 단호한 태도를 취할 자세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최태민 문제에 대해 보인 태도는 너무나 소아적인 것이었다. 설령 '최태민은 억울하다'고 보더라도, 그렇게 여러 기관에서 보고가 올라오면 '그러면 최태민과 관계를 끊겠다'고 아버지(박정희)에게 이야기하는 게 정상인 거다.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건 국가를 운영하는 데 커다란 장애(요소)와 연계된다고 봐야 하는 거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추궁을 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유신 체제적인 발상이라든가 멘털리티를 못 갖게끔 하고 새로운 정신 상태를 갖도록, 언론이 적어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될 때까지 계속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 체제적인 멘털리티를 못 갖게끔 채찍질해야"
프레시안 : 새 정부 인사 등에서 드러난 판단력 문제가 유신 때 최태민 문제에서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뜻인가?
서중석 : 그런 게 있고, 또 대통령 앞에서 설설 기게 하는 것, 이게 어떤 메커니즘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건 상당히 위험한 데로 흘러갈 수가 있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이 1990년대 후반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 후 유신 때와는 다른 많은 경험을 했다. 유신만 갖고 판단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도 그간 적잖이 나왔다. 그와 달리 박 대통령 정치의 근본에는 여전히 유신의 경험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는 말인가?
서중석 :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도 (유신 때의) 그 인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바깥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박 대통령이) 진짜 믿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주요 공직자로 임명된 사람 중에 유신 시기를 비롯한 박정희 정권 때 그 아버지가 요직을 맡았던 사람이 여러 명 있다. (이런 인사는) 유신 시대와 아버지(박정희)에 대한 생각을 안 하면 안 나오는 것이다. 당장은 '아버지의 것을 약간 떨치고 나아가는 게 정책적으로 필요하다', 이럴 수도 있지만, 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내 말의 핵심은 언론에서 채찍질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도록 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쪽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더라. 그건 우리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유신 체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판결이 이어졌다.
서중석 :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의 상당수가 이미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고 민사상 보상 판례도 나왔다. 유신 시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바로잡는 작업)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법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법정 투쟁 등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정리하면) 중요한 사건의 많은 부분이,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이 문제에 관해 새로운 공약을 제시하기 전에 상당한 단계로 가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유신 시대의 잘못을 치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책을 강구한다고 하면 그건 좋은 일인데, 아직 뚜렷한 건 없다.
"<백년전쟁>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일제 군국주의와 유신 연상시킨다"
프레시안 : 이승만·박정희를 다룬 <백년전쟁>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가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만나 대응을 주문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서중석 : 이걸 국가 안보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일제 군국주의 시기 특히 1930년대의 쇼와 통치, 그리고 1970년대 유신 체제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발상이다. 역사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는 건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 상식이다. 그런데 그걸 완전히 뒤집어버리고 그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음직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한 것이다. 그런 때는 우리 역사에서 두 시기가 있었다. 일제 군국주의 시기와 박정희 유신 체제다. 이승만 시대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그래도 제한된 속에서 언론 자유가 있었다.
어쨌건, (<백년전쟁>에 대한 그런 식의 반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가 거기 끼어들 것까지는 없는 거다. (<백년전쟁>이 그렇게 맘에 안 들면) 이승만 지지 세력이나 수구 세력에서 그에 대항하는 언론 활동을 하든가 그런 작품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느 쪽이 더 올바른 주장을 하고 있는가를 시민들이 판단하게 하면 되는 거다. 그게 민주 사회다.
하여튼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바라보는 역사 인식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상당히 풍자적으로 또는 새로운 문화적 양식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해 반감을 가졌으면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권력을 이용하려는 건 참 나쁜 자세다.
프레시안 : 청와대 개입 의혹을 접하며, 뭔가 일이 생기면 권력 기관에서 불러 대응을 주문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서중석 :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태도가 퍼진다면, 참 큰 문제다. 내가 계속 이야기하는 건, 꼭 권력을 쥔 자들만 나무랄 게 아니라 그런 걸 보고도 방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가 그에 못지않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코 방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발언이 권력에 의해 검색되고 통제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에 대해 당연히 분노해야 한다.
(하나 더 이야기하면) 이승만 살리기, 박정희 유신 체제를 옹호하는 분위기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건 1995년부터다. 그런데 왜 그때부터 그런 게 심해졌을까? 이게 요 근래 내 화두다. 그 이유를 난 이렇게 해석한다.
(1987년) 6월항쟁 때까지는 독재 정부가 이데올로기를 관리했다. 현대사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국가에서 홍보하고 선전하고 교육했다. 그것에 따라서만 사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야말로 수구 냉전 이데올로기,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민들한테 강요했다. 그래서 일부 수구적·극우적인 언론들은 절대 권력에 맹종하거나 야합하는 정도로만 있어도 괜찮았다.
그러다 6월항쟁 이후 개방된 분위기를 만나버린 것이다. 그런데다 그 전후에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혁명적인 현대사 해석이 나와 버렸다. 그건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현대사 해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컨대) 그때 내가 주장한 좌우합작 논리에 대해 '저건 낡아빠진 거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혁명적인 논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장이다',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흐름이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계에서 그랬다.
그러니까 극우 세력이 놀라버린 거다. 자신들이 과거에 기생하고 유착하면서 온존시킨 이데올로기를 권력이 옹호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뉴라이트라고 하는 세력을 앞세운 거다. 그러면서 이승만을 살려내고 키워야만, 또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그렇게까지 잘못은 아니었고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식의 논리를 펴야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속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1990년대에 <조선일보>한테 된통 당한 적이 있다.
역사는 권력의 소유물이 아니다
프레시안 : 1994년 국사 교과서 논란을 말하는 건가?
서중석 : 그렇다. <조선일보>에서 나를 이른바 좌경 용공 분자 비슷하게 몰아세웠다.(1994년 3월, 제6차 교육 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의 편찬 준거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서 교수는 당시 현대사 분야 준거안을 만들면서, 학계의 연구 성과를 폭넓게 반영하고자 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서 교수에게 색깔론을 바탕으로 거센 공세를 퍼부었다. <편집자>) 그때 내가 놀란 것 중 하나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교과서 문제에 대해 일부 학자가 성급한 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문제 삼았다.
대통령이 학자들의 역사 해석에 일일이 끼어들려고 한 것이다. '대통령은 모든 걸 명령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건 학문이나 역사 이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사고를 그때 난 봤다. (이게 YS만 그런 게 아니라)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까지는 (역사 해석을) 너무나 당연하게 국가 권력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한 게 사실이었다.
다시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이 모 교수가 청와대에서 신임 대통령에게 했다는 얘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학문적인 것에 대해서도 참견해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체질(이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걸 너무 오랫동안, 사실은 6월항쟁 이후에까지 가졌던 거다. 그게 (한동안 사그라진 듯하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살아났다. 그리고 (<백년전쟁>과 관련해 "국가 안보 차원" 운운한 건) 이번에 새 정권이 등장하니까 다시 권력에 기대서, '2008년 이후 역사를 권력이 농단했듯이 또 농단을 해봐라'는 식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과 관련 있는 발언이라고 본다.
심각한 문제다. 이걸 단절시키지 못하면, 이런 식의 논리가 힘을 못 쓰게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고가 가능하겠는가. 참 당혹스럽고 경악할 만한 이야기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서 교수 인터뷰 앞부분이다. <편집자>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안병욱 ①] "일베-뉴라이트-<조선>은 이어져 있다" [안병욱 ②] "남로당식 사관? <조선>, 흉기 들고 난동" |
프레시안 : 대선 후 어느새 반년이 흘렀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도 100일이 넘었다.
서중석 :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크게 우리 사회에 드리웠다. 박정희 신드롬은 정치인 박근혜가 인기를 누리는 데도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큰 힘으로 작용했다.
박정희 신드롬이 지워지고 약화되는 것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중요하다. 민주주의로, 인권으로, 남북 평화와 교류 협력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데, 박정희 시대는 너무나 그것과 대척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커다란 장애물이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이 된 건 어떤 점에선 박정희 신드롬을 지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5년을 거치는 동안 그 신드롬을 적극 활용한 세력의 국정 운영 능력이 명확하게 드러나면, 박정희 신화에 대한 지지자들의 믿음이 줄어들 것이라는 뜻인가.
서중석 : 그거다. 그 이야기 그대로다. 박근혜 대통령은 주로 유신 시대의 정치를 보고 경험한 사람이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인 20대의 대부분을 유신 체제의 중심에서 보냈다. (유신 체제의 멘털리티를 떨치지 않는 한) 성공적인 정치를 하기 매우 어렵다고 본다.
▲ 서중석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박근혜 정부, 박정희 신드롬 지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도"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출범 후 보인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우선 윤창중 같은 사람을 대변인으로 쓴 일 같은 것이 정상적인 게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보기에 정말 옳은 판단을 한다고 생각하는, 정말 신뢰하는 어떤 그룹 혹은 개인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쪽에서 (윤창중을) 천거한 것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정상적인 정치인이면 윤창중을 천거를 안 했을 거다. 또 (대변인 임명 후) 여론이 좋지 않았다. <조선일보>조차 뭐라고 하지 않았나. 여론이 그렇게 나쁘면 '윤창중을 걷어찹시다', 이럴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끝내 박 대통령이 (윤창중을) 지킨 것 아닌가. 그러다 미국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고. 박 대통령이 (사안을) 판단하는 데 있어 참 큰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와 비슷한 걸 여러 번 느꼈다. 그중 하나가 '별' 4개짜리(4성 장군 출신)를 국정원장, 안보실장, 경호실장에 앉힌 것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각지를 다니며 사상·안보 교육을 한 사람이다. '4.3은 북한에서 사주해서 일어난 폭동'이라는 논리를 편 사람 아닌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 대통령이 국정원장 자리에 그런 사람을 앉혀놨다는 건 상당한 우려를 하게 만든다.
(참고로) 역대 국정원장 중엔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굉장히 부정적인 작용을 한 사람이 많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조차 그랬다. 물론 임동원·김만복 전 원장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안보실장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리를 설정한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그건 결국 대통령이 직접 꿰차고 뭔가를 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거다. 그 자리에 그런 사람을 앉혀놨다는 것은 상당히 군인 중심의 사고를 가진 데서 나온 발상으로 보인다. 경호실장에 별 4개짜리가 앉은 것도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옛날에는 대개 별 2개나 3개짜리를 앉혔던 자리다. 관례라는 게 있는 건데….
하여튼 이런 식으로 군인들을 (요직에) 앉힌 건 유신 시대와 관련 있는 발상이라고 본다. 유신 시대가 군인 정치(시대)는 아니지만, 박정희는 여차하면 군을 동원해 모든 걸 처리한 사람이다. (이번 정부가 군인들을 요직에 앉힌 건) 자유로운 공간, 정치 발전 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고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거다. 퇴행적인 성격마저 지니고 있다.
그다음에 각료와 관련해서도 문제가 있다. 물론 이번 각료들 가운데 과거 이력이 괜찮은 사람도 있다. 한데 그런 사람까지 포함해서 국회 청문회 같은 데서 5.16 등에 대해 물어보면 거의 대답을 제대로 못 했다. (5.16쿠데타는)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다가) 후보 시절 정정 발표하고 사과도 했던 사안 아닌가. 그런 것에 대해서조차 (대통령의) 노여움을 살까봐 (대답을) 제대로 못한 거다.
이건 뭐냐 하면 박 대통령 앞에서 많은 사람이 떤다는 거다. 유신 시대적인 발상이다. 대통령 앞에서 떨면 아무 일도 못 한다. 다시 말해 난 유신 체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런 게 이해가 안 될 거라고 본다. 좋은 사람들조차 자기 식으로 사고하고 정책을 집행하지 못하고, 유일한 분 눈치만 봐가면서 일하는 방식 아닌가. 유신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게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거다.
또 (대통령이) 너무 쉽게 선거 공약을 변경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진 면이 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젠 끝난 것처럼 이야기되는 부분이 있다. 앞으로 그런 게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치에서) 과거에도 그랬다. 지금은 공약을 하면 지켜야 한다고 언론등에서 추궁하지만, 1980년대 무렵까진 '국민들한테 인심을 얻기 위해 공약을 일시적으로 할 수도 있는 거다', 이런 발상이 만연했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모습에서) 그런 발상도 엿보인다.
유신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 역사를 너무나도 모른다.
유신을 이해해야 오늘의 박근혜 대통령이 제대로 보인다
프레시안 : 유신을 이해해야 오늘의 박근혜 대통령이 제대로 보인다는 뜻인가?
서중석 : 그렇다. 유신 체제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박근혜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게 정확한 표현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대선 과정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5.16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유신 체제에 대해서는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식으로 나왔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두 개의 대법원 판결' 발언을 하며 대법원 판결 자체를 무시했다. 유신 시대의 잘못된 죽음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팎에서 추궁이 심해지고 '이런 식으로는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때 가서야 바뀐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나.
그런데 진보적인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사실상) 그걸로 끝내버리더라. 그게 아니라 유신 시대와 박근혜 후보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굉장히 다각도로 추궁했어야 한다고 본다. 난 박 대통령이 유신 시대를 제외하고는 권력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건 아니라고 본다. 또한 박 대통령은 1970년대에 영부인 역할을 하면서 상당히 많은 유신 지지 세력을 규합했다. 그 과정에서 고 최태민 목사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 등의 활동도 했다. 이런 걸 어째서 소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깊이 있게 추궁하지 않은 건가.
이건 참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최태민 목사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보인태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때 중앙정보부가 '최태민 문제가 심각하다'고 박정희에게 진언을 여러 번 했다. 민정수석실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의 보고를 올렸고 법무부, 검찰 등에서도 조사해서 올렸다. 그런데 그 시기는 박정희가 더 경직되고 상황을 흐리멍덩하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대처하려는 모습을 보이던 유신 말기다. 그때 박정희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전횡) 문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러니 차지철 문제보다 훨씬 아래 문제인 최태민 문제에 단호한 태도를 취할 자세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최태민 문제에 대해 보인 태도는 너무나 소아적인 것이었다. 설령 '최태민은 억울하다'고 보더라도, 그렇게 여러 기관에서 보고가 올라오면 '그러면 최태민과 관계를 끊겠다'고 아버지(박정희)에게 이야기하는 게 정상인 거다.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건 국가를 운영하는 데 커다란 장애(요소)와 연계된다고 봐야 하는 거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추궁을 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유신 체제적인 발상이라든가 멘털리티를 못 갖게끔 하고 새로운 정신 상태를 갖도록, 언론이 적어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될 때까지 계속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 체제적인 멘털리티를 못 갖게끔 채찍질해야"
프레시안 : 새 정부 인사 등에서 드러난 판단력 문제가 유신 때 최태민 문제에서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뜻인가?
서중석 : 그런 게 있고, 또 대통령 앞에서 설설 기게 하는 것, 이게 어떤 메커니즘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건 상당히 위험한 데로 흘러갈 수가 있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이 1990년대 후반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 후 유신 때와는 다른 많은 경험을 했다. 유신만 갖고 판단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도 그간 적잖이 나왔다. 그와 달리 박 대통령 정치의 근본에는 여전히 유신의 경험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는 말인가?
서중석 :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도 (유신 때의) 그 인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바깥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박 대통령이) 진짜 믿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주요 공직자로 임명된 사람 중에 유신 시기를 비롯한 박정희 정권 때 그 아버지가 요직을 맡았던 사람이 여러 명 있다. (이런 인사는) 유신 시대와 아버지(박정희)에 대한 생각을 안 하면 안 나오는 것이다. 당장은 '아버지의 것을 약간 떨치고 나아가는 게 정책적으로 필요하다', 이럴 수도 있지만, 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내 말의 핵심은 언론에서 채찍질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도록 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쪽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더라. 그건 우리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유신 체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판결이 이어졌다.
서중석 :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의 상당수가 이미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고 민사상 보상 판례도 나왔다. 유신 시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바로잡는 작업)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법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법정 투쟁 등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정리하면) 중요한 사건의 많은 부분이,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이 문제에 관해 새로운 공약을 제시하기 전에 상당한 단계로 가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유신 시대의 잘못을 치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책을 강구한다고 하면 그건 좋은 일인데, 아직 뚜렷한 건 없다.
▲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
"<백년전쟁>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일제 군국주의와 유신 연상시킨다"
프레시안 : 이승만·박정희를 다룬 <백년전쟁>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가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만나 대응을 주문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서중석 : 이걸 국가 안보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일제 군국주의 시기 특히 1930년대의 쇼와 통치, 그리고 1970년대 유신 체제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발상이다. 역사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는 건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 상식이다. 그런데 그걸 완전히 뒤집어버리고 그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음직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한 것이다. 그런 때는 우리 역사에서 두 시기가 있었다. 일제 군국주의 시기와 박정희 유신 체제다. 이승만 시대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그래도 제한된 속에서 언론 자유가 있었다.
어쨌건, (<백년전쟁>에 대한 그런 식의 반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가 거기 끼어들 것까지는 없는 거다. (<백년전쟁>이 그렇게 맘에 안 들면) 이승만 지지 세력이나 수구 세력에서 그에 대항하는 언론 활동을 하든가 그런 작품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느 쪽이 더 올바른 주장을 하고 있는가를 시민들이 판단하게 하면 되는 거다. 그게 민주 사회다.
하여튼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바라보는 역사 인식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상당히 풍자적으로 또는 새로운 문화적 양식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해 반감을 가졌으면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권력을 이용하려는 건 참 나쁜 자세다.
프레시안 : 청와대 개입 의혹을 접하며, 뭔가 일이 생기면 권력 기관에서 불러 대응을 주문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서중석 :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태도가 퍼진다면, 참 큰 문제다. 내가 계속 이야기하는 건, 꼭 권력을 쥔 자들만 나무랄 게 아니라 그런 걸 보고도 방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가 그에 못지않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코 방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발언이 권력에 의해 검색되고 통제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에 대해 당연히 분노해야 한다.
(하나 더 이야기하면) 이승만 살리기, 박정희 유신 체제를 옹호하는 분위기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건 1995년부터다. 그런데 왜 그때부터 그런 게 심해졌을까? 이게 요 근래 내 화두다. 그 이유를 난 이렇게 해석한다.
(1987년) 6월항쟁 때까지는 독재 정부가 이데올로기를 관리했다. 현대사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국가에서 홍보하고 선전하고 교육했다. 그것에 따라서만 사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야말로 수구 냉전 이데올로기,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민들한테 강요했다. 그래서 일부 수구적·극우적인 언론들은 절대 권력에 맹종하거나 야합하는 정도로만 있어도 괜찮았다.
그러다 6월항쟁 이후 개방된 분위기를 만나버린 것이다. 그런데다 그 전후에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혁명적인 현대사 해석이 나와 버렸다. 그건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현대사 해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컨대) 그때 내가 주장한 좌우합작 논리에 대해 '저건 낡아빠진 거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혁명적인 논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장이다',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흐름이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계에서 그랬다.
그러니까 극우 세력이 놀라버린 거다. 자신들이 과거에 기생하고 유착하면서 온존시킨 이데올로기를 권력이 옹호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뉴라이트라고 하는 세력을 앞세운 거다. 그러면서 이승만을 살려내고 키워야만, 또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그렇게까지 잘못은 아니었고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식의 논리를 펴야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속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1990년대에 <조선일보>한테 된통 당한 적이 있다.
▲ 댜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민족문제연구소 |
역사는 권력의 소유물이 아니다
프레시안 : 1994년 국사 교과서 논란을 말하는 건가?
서중석 : 그렇다. <조선일보>에서 나를 이른바 좌경 용공 분자 비슷하게 몰아세웠다.(1994년 3월, 제6차 교육 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의 편찬 준거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서 교수는 당시 현대사 분야 준거안을 만들면서, 학계의 연구 성과를 폭넓게 반영하고자 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서 교수에게 색깔론을 바탕으로 거센 공세를 퍼부었다. <편집자>) 그때 내가 놀란 것 중 하나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교과서 문제에 대해 일부 학자가 성급한 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문제 삼았다.
대통령이 학자들의 역사 해석에 일일이 끼어들려고 한 것이다. '대통령은 모든 걸 명령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건 학문이나 역사 이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사고를 그때 난 봤다. (이게 YS만 그런 게 아니라)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까지는 (역사 해석을) 너무나 당연하게 국가 권력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한 게 사실이었다.
다시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이 모 교수가 청와대에서 신임 대통령에게 했다는 얘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학문적인 것에 대해서도 참견해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체질(이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걸 너무 오랫동안, 사실은 6월항쟁 이후에까지 가졌던 거다. 그게 (한동안 사그라진 듯하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살아났다. 그리고 (<백년전쟁>과 관련해 "국가 안보 차원" 운운한 건) 이번에 새 정권이 등장하니까 다시 권력에 기대서, '2008년 이후 역사를 권력이 농단했듯이 또 농단을 해봐라'는 식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과 관련 있는 발언이라고 본다.
심각한 문제다. 이걸 단절시키지 못하면, 이런 식의 논리가 힘을 못 쓰게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고가 가능하겠는가. 참 당혹스럽고 경악할 만한 이야기다.
기사입력 2013-06-23 오전 10:29:25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서 교수 인터뷰 뒷부분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인사가 참여한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자신들이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서중석 : 뉴라이트가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다. 한국현대사학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뉴라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공자만 교과서를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학회의 구성원들 중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가 거의 안 보이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좀 이상한 게, 한국현대사학회 쪽에서 뭘 한다고 하면 어느 한 신문(<조선일보>)이 참 많이 다뤄주는 거다. 그러면서 지금 통용되는 교과서가 좌파적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더라. <조선일보>는 그걸(한국현대사학회 쪽 주장) 상당히 비중 있게 보도하더니만, '남로당식 사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다니'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어가면서 (채택된) 교과서의 90퍼센트를 좌파가 만들었다는 식으로 몰아세웠다.
이건 (1980년) 5.18 때 북한에서 특공대 600명이 내려와 전남도청을 점령했다는 것에 못지않은 엉터리 주장이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가 남로당식 사관으로 돼 있고 집필자 대부분이 좌파라면, 그런 역사 교과서가 어떻게 이 정부에서 통용될 수 있겠나. 더군다나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정한 건) 이명박 정부이고, 지금은 박근혜 정부 아닌가. 너무나도 모순된 이야기가 아닌가. 간단히 얘기해서, <조선일보> 논리대로라면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정부라는 비난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걸 가르치는 교사들은 뭐가 되며 그걸 배운 학생들도 색깔론으로 뒤집어씌울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불성설도 아니고 황당무계도 아니고 지록위마도 아니고 참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백주대낮에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상상하기 어려운 폭거다. 테러 행위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험악하게 됐는가. 이렇게까지 막말로, 정략적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무슨 소리든 쏟아부으면서 몰아쳐도 되는 건가.
정말 이건 분노 정도가 아니더라. 남로당이라는 게 우리 역사에서 한 번 있었지만 1953년 이후엔 조직적으로 활동한 적이 거의 없다. (반공 체제가 느슨해지는) 4.19 이후에도 그 사람들 안 나온다. 1953년 이후 사라진 걸로 봐야 한다. 그런 건데, 상대방을 정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다니 참…. 그것도 '한국현대사학회 발표에 의하면' 같은 식으로 표현하던데, 책임을 모면하려는 <조선일보>의 얕은 수작이다.
한국현대사학회 쪽에서 만든 교과서가 검정 심의를 통과했다. 최종 통과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고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에서) 이 교과서를 옹호하기 위해 그런 (사설을 내보낸) 것으로 보인다. 1차 목표는 그것이고, 2차적으로는 극우 반공 시대의 퇴행적 이데올로기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1995년 이후 그걸 살리는 작업을 그 신문에서 계속 해오지 않았나.
"<조선>의 폭거…그들 논리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정부"
프레시안 : 일등 신문을 자처하는 곳에서 그러는 걸 계속 봐야 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서중석 : 그런 표현을 쓰는 게 난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이건 냉전 시대에도 없었던 거다. 그런데 요 근래 곳곳에서 굉장히 험악한 말들을 쓰고 있다. 일베도 그렇고.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운동과 6월항쟁을 통해 개방과 민주화 시대로, 기본권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시대로 왔는데 그렇게 험악한 식으로 가는 건 그걸 무위로 돌아가게 하는 것인 듯해 걱정이 된다. 정신적인 사막성, 황량함이 만연하면 사회의 좌표,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야말로 냉소밖에 남지 않게 된다. <황야의 무법자> 같은 영화에 나오는 식의 인간 세계인 거다.
그것(정신적인 황량함을 부추기는 보도)을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종편들에서 광주항쟁을 음해하고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수십 년간 무슨 문제만 있으면 북한 소행으로 떠넘기려는 알레르기 반응을 노린 것이다. '남로당식 사관' 이것도 그런 걸 노린 면이 한편으로 있다. 어느 사회에나 해서는 안 될 발언이라는 게 있는 건데….
프레시안 : 개인적으로 놀란 적이 있다. 학생 운동을 하고 진보적 언론에서 일하는 한 후배가 '5.18 때 북한군 600명은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몇 명은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해 놀랐다. 이 정도 친구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걸 보며, 정말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중석 : 우리 사회에서 길들여진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권력이 노동 운동, 사회 운동 세력 등을 두들겨 팰 때 즐겨 쓴 것이 '여기에 좌경 용공 세력이 들어와 있다', '북한과 관련이 있다' 같은 것들이었다.
(1960년) 4월혁명 때도 그랬다. 3.15의거가 마산에서 나자마자 경찰은 총에 맞아 죽어 병원에 안치된 시신의 호주머니에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이런 일을 일으킨 것처럼 하는 내용의 쪽지를 써넣었다.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른 것을 계기로) 제2차 마산 항쟁이 4월 11일부터 발생하니까 내무부 장관 홍진기는 "마산 소요에 5열(간첩) 개재(介在)의 혐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다, 공산당 선전에 속아서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특별 담화를 연속 발표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염색이 된 사람은 '대통령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면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바로 그걸 노린 거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4월혁명의 배후라는 주장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당시 북한은 남한에서 그런 게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아연하기만 했다. 미 제국주의의 속국으로만 한국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누린다는 식으로만 가르쳤는데, 아 그렇게 큰 시위를 하니까 깜짝 놀라고 아연하기만 한 것이었다. 처음엔 대응을 못했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공산당이 뒤에 있다'고 조작하려 했다. 그 이후에도 권력은 그런 식으로 많이 대응했다. 그게 수십 년간 쌓이다 보니까, '뭔가 있으면 공산당만 대면 된다'는 일종의 자동 반응 같은 게 생긴 거다.
1980년 광주에서 그런 큰 시위가 일어나는데 공산당 간첩이 올 리도 만무하고 있을 수도 없는 거다. 그렇게까지 허술한 대한민국이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반공과 방첩 갖고 산 나라 아닌가. 나도 (등산하러) 산에 올라가다가 2번인가 끌려가고 그랬다. 간첩일지도 모른다며. (웃음) 한국은 그런 사회였다. 그러니까 (5.18 때 북한군 600명 투입 같은 건) 눈곱만큼도 있을 가능성이 없다.
그렇거니와 수만 명, 수십 만 명이 궐기해 사납기 짝이 없는 공수 부대까지 몰아낸 것 아닌가. 그런 일이 간첩 몇 명 있다고 될 일인가. 간첩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왜 광주에서 그런 큰 분노가 일어나서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여단 두 개하고 특별 사단인 20사단을 도시에서 나가게 했느냐,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다. 모종의 사주가 있었음을 밝혀냈다'는 식으로 발표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걸 구체화할 자료를 내놓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이 광주학살 때문에 나중에 얼마나 크게 추궁을 당하나. 그런 상황에서 간첩 하나라도 광주항쟁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에게) 얼마나 좋은 재료가 됐겠나. '우리가 걱정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군대를 투입한 거다. 진압 우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그런데도 끝내 못 잡았다. 자신들이 발표한 게 허위임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완전히 물 건너간 거였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기 전에 이미 그랬다. 그러면서 광주의 진실이 밝혀진 것 아닌가.
프레시안 : 사실이 그러한데도 이제 와서 북한군 600명을 운운하고 있다.
서중석 : 10주년 때도, 20주년 때도 안 나왔는데 33주년인 올해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타난 것이다. 특수한 정치적 목적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민주화에 대한 이중적 태도…한 손으로는 폄훼하고 다른 손으로는 편승하고
프레시안 : 저들은 민주화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하나는 5.18 왜곡처럼 어떻게든 폄훼하려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처럼 "6.10항쟁 못지않게 6.29선언도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일부 여당 인사들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이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중심 세력이었다",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한나라당에 있다"고 강변하는 흐름이다.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것, 민주화도 알고 보면 우리 것'이라는 식이다. (관련 기사 : 새누리당과 뉴라이트의 '6월항쟁 탈취' 사건)
서중석 : 양 박자다. 조화를 이루며 같이 음을 내는 건데, 어느 것이나 터무니없는 거다. (6월항쟁을 살펴보면 1987년) 6월 10일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넥타이 부대의 시위, 그리고 15일부터 대규모 시위, 18일에 최루탄 추방 대회가 이어지며 점점 (규모가) 커지고 26일에 대규모 평화 행진의 날을 맞이해 그렇게 큰 시위가 안 일어났으면 6월항쟁이 있을 수가 없었다. 6.29가 일어나는 과정도 기록을 통해 검토해보면, 25일에서야 박철언이 초안을 한 번 잡아본 거고 27일 저녁 무렵 노태우와 박철언이 5시간 걸려 6.29선언 발표 내용을 만들어낸 거다. 6.26이 아니었으면 6.29는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굴복이었다. '이젠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순한 굴복은 아니었다. (5공 세력이) 민주화 쪽으로 선회한 것처럼 위장하는 양면 구사 작전으로 6.29를 했던 거다. 사실 6.29 자체는 1972년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들여다보면 직선제 하나 빼놓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1972년 이전에 있던 정도의 언론 자유를 있게 하겠다는 정도였다. 그런 건데, 워낙 극악한 통치를 유신 체제와 전두환 신군부가 했기 때문에 6.29가 돋보인 거다. 그런데 그것처럼 난센스가 없다. 순전히 투쟁에 의해 그런 것 아니었나.
문제는 6월항쟁을 6월항쟁 세대조차 잘 모른다는 것이다. 6월항쟁을 잘 알수록 힘이 나고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이 생기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강한 전망과 믿음이 생길 수가 있는 건데, 그런 공부를 안 하려고 한다.
1995년부터 낡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이야기하는 건데, 진보 세력이 제대로 공부를 안 한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음해와 중상모략은 쉽게 공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유신 체제와 전두환 정권의 후신인) 우리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느니 6.29선언은 참 대담한 민주화 구상이었다느니 하는 것들에 대해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고 궁색한 변명인가를 공박하는 지적인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을 띄우는 쪽에서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인데 그렇게 폄하해서 쓰냐. 어쨌든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이니 그걸 인정해주자',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다. 한 친구는 그러더라. 그런 말도 일리는 있다고 느껴진다고.
"건국 대통령 이승만? 비약이다"
프레시안 : 지난 10여 년 사이에 주변에서 그런 반응이 늘어난 게 사실이다.
서중석 : 엄청난 문제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 협상 세력이라고 불린 이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이 단정 운동 세력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그들을 어떻게 비판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분단이었나. 단정 운동이라는 게 친일파가 중심이 됐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1948년) 5.10선거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난 인정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한다. 북한에 가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분들, 평생을 독립 운동에 바친 김구·김규식 같은 이들의 노력은 또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해서 5.10선거에 참여해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해야 하는 거다. 그런 자리에 친일파 등이 등장해 나쁜 짓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5.10선거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5.10선거를 통해 훌륭한 제헌 국회가 만들어졌다. 소장파 전성시대가 있었고, 좋은 헌법을 만들었고,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법을 바로 통과시켰고, 농지개혁법도 처음엔 꽤 좋게 만들었다.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게 이승만 세력, 단정 세력을 놀라게 한 것이고 그래서 반동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고,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일어나고, 김구 암살까지 (1949년) 6월 공세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한 건가? 1919년에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만들었나? 임시정부에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뽑은 걸로만 돼 있지 않나. 5.10선거도 이승만이 실시한 게 결코 아니다. 유엔 소총회 결의에 따라 미군정에서 한 것이다. 이승만은 동대문갑에 입후보한 것 빼놓고는 직접적으로 한 게 없다. 독립 운동을 해서 건국한 것과는 전혀 다른 거다.
또 5.10선거에서 부정 선거 이야기가 제일 많이 들린 게 동대문갑 아닌가. 최능진(경무부 수사국장이었으나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다가 파면됐다. 이승만에게 맞서다 한국전쟁 때 총살됐다. <편집자>)과 싸웠는데, 얼마나 비겁하게 했나. 5.10선거를 제일 추하게 만든 지역구 중 하나가 동대문갑이었다. 그런 걸 따지더라도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비약이다.
그리고 4월혁명 51주년(2011년)에 보수 언론에서 '4월혁명 정신과 이승만 건국 정신은 같다'는 이야기를 내보냈다. 그해에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에서 4.19 묘지를 참배한다고 하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나.
4월혁명 정신은 이승만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선 것이 4월혁명 정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단정 운동에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었나? 해방의 정신, 민주주의와 인권의 정신 같은 게 들어 있었나? 권력을 잡겠다는 욕심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모른다. 진보 세력은 또 공부를 안 한다. 이러니 수구 세력이 맘 놓고 공격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남로당식 사관"이라는 사설 제목을 뽑아도 그렇게 큰 공격을 안 당할 거다, 이렇게까지 생각해도 될 만큼 진보 세력이 대응을 제대로 못한다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프레시안 : 패턴인 것 같다. 한국현대사학회나 뉴라이트 단체 같은 데서 주장하면 <조선일보> 등에서 크게 실어주고, 그 과정을 몇 년 거치면 상식처럼 퍼지는 식이다. 몇 년 전, 뉴라이트 시각을 담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나왔을 때도 진보 세력은 정면 대응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무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더 확산된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그때 <조선일보>가 <재인식> 나오기 몇 달 전부터 엄청나게 보도하더니만, <재인식>이 나오자 여러 면을 털어 아주 크게 다뤘다. 세상에, <한성순보>(1883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이래 신문이 한 책을 그런 식으로 소개하는 건 처음 봤다. 어지간한 신문은 대충이라도 다 훑어봤는데, 그렇게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학술면 한 페이지 할애해주면 좋은 거고, 정치면 같은 데서 박스 기사 하나 더 내주면 최고 대접 해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진보 언론 등에서) 제대로 대응을 못 했다.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수구 세력에 제대로 대응해야"
프레시안 : 그런 게 쌓이면서 20년 가까이 오다 보니 지형이 이상한 방향으로 바뀐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 잘 안 보이지 않나. 그러니까 (사람들이) 험악한 분위기와 언사에 익숙해지고 그것에 마비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호흡이 너무 짧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추고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너무 표피적이고 단견이다.
(예컨대) 1970-1980년대에 나와 한때 가까웠던 김지하나 황석영은 참 재주꾼이고 시나 소설에서 훌륭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인데, 나중에 많이 바뀌더라. 그걸 보며 내가 제일 크게 느낀 건 지적 엘리트조차 자기 자신의 역사, 문화, 민중에 뿌리를 깊이 못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시적인 재주만 발휘가 된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분위기를 타는 면이 강하지,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일을 해나가는 면은 약한 것 같다. NL이 인기다 하면 그쪽으로 몰렸다가 그다음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인기다 하면 다시 저쪽으로 쫙 몰리는 쏠림 현상이 강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이 보인 강한 정의감 같은 것도 (여전히) 많이 있다. '우리 사회는 희망만 보이면 바로 정의, 진보, 민주주의, 인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랄까 기대도 많이 갖게 된다.
난 현대사를 하면서 절망과 희망의 희비쌍곡선이 교차하는 식으로 살아왔는데, 6월항쟁 이후 희망이 훨씬 커졌다. 물론 6월항쟁 이후에도 절망적인 게 많았고 요 근래 와서는 너무 표피적인 게 많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이만큼 대견한 역사를 만들어온 힘에 상당히 큰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있다. 난 그걸 역사의 힘, 민중의 힘, 우리 전체의 역량으로 표현한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속에서도 대견한 역사를 만든 민중, 그 힘을 믿는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정년 퇴임을 맞는 소회와 퇴임 후 계획이 궁금하다.
서중석 : 담담하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적극적으로 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수구 냉전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만연하지 않도록 분발해야 한다. 조금 전 이야기한 그런 믿음을 갖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 하나를 물색해 놨다. 책의 상당 부분은 연변대학에 기증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남은 책은 새 사무실로 옮긴다. 생활엔 거의 변화가 없을 거다. 출근해서 연구하고 점심 후 뒷산을 산보하다가 다시 연구하는 생활일 거다.
학술적으로 기여하는 작업을 제외하면 가급적 사회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활동은 계속할 계획이다. 일본교과서와 10여 년간 싸워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젠 한국 내의 극우 성향 교과서와도 싸우게 됐으니 (지형이) 훨씬 더 복잡하게 돼버렸다. 할 일이 더 많아졌다. 부담이 된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위원장도 맡고 있다. 하필 내가 맡았을 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고, 그 정권이 (우리가) 할 일이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남북 간에 너무 심한 역사 인식의 차이를 어떻게든 좁히고 교류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통일을 전망하는 데 학술적으로 기여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작년에 유신 40주년을 맞아 유신 관련 발표를 2번 했(고 앞으로도 계속 연구할 생각이)다. 4월혁명은 내가 꼬맹이 때부터 관심이 큰 주제이고, 발표를 많이 해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방대한 4월혁명 사료집을 내는 작업을 편집위원장으로서 주도해왔는데, 그 일도 해야 한다.
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서 교수 인터뷰 뒷부분이다. <편집자>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안병욱 ①] "일베-뉴라이트-<조선>은 이어져 있다" [안병욱 ②] "남로당식 사관? <조선>, 흉기 들고 난동" [서중석 ①]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인사가 참여한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자신들이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서중석 : 뉴라이트가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다. 한국현대사학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뉴라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공자만 교과서를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학회의 구성원들 중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가 거의 안 보이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좀 이상한 게, 한국현대사학회 쪽에서 뭘 한다고 하면 어느 한 신문(<조선일보>)이 참 많이 다뤄주는 거다. 그러면서 지금 통용되는 교과서가 좌파적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더라. <조선일보>는 그걸(한국현대사학회 쪽 주장) 상당히 비중 있게 보도하더니만, '남로당식 사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다니'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어가면서 (채택된) 교과서의 90퍼센트를 좌파가 만들었다는 식으로 몰아세웠다.
이건 (1980년) 5.18 때 북한에서 특공대 600명이 내려와 전남도청을 점령했다는 것에 못지않은 엉터리 주장이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가 남로당식 사관으로 돼 있고 집필자 대부분이 좌파라면, 그런 역사 교과서가 어떻게 이 정부에서 통용될 수 있겠나. 더군다나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정한 건) 이명박 정부이고, 지금은 박근혜 정부 아닌가. 너무나도 모순된 이야기가 아닌가. 간단히 얘기해서, <조선일보> 논리대로라면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정부라는 비난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걸 가르치는 교사들은 뭐가 되며 그걸 배운 학생들도 색깔론으로 뒤집어씌울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불성설도 아니고 황당무계도 아니고 지록위마도 아니고 참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백주대낮에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상상하기 어려운 폭거다. 테러 행위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험악하게 됐는가. 이렇게까지 막말로, 정략적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무슨 소리든 쏟아부으면서 몰아쳐도 되는 건가.
정말 이건 분노 정도가 아니더라. 남로당이라는 게 우리 역사에서 한 번 있었지만 1953년 이후엔 조직적으로 활동한 적이 거의 없다. (반공 체제가 느슨해지는) 4.19 이후에도 그 사람들 안 나온다. 1953년 이후 사라진 걸로 봐야 한다. 그런 건데, 상대방을 정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다니 참…. 그것도 '한국현대사학회 발표에 의하면' 같은 식으로 표현하던데, 책임을 모면하려는 <조선일보>의 얕은 수작이다.
한국현대사학회 쪽에서 만든 교과서가 검정 심의를 통과했다. 최종 통과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고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에서) 이 교과서를 옹호하기 위해 그런 (사설을 내보낸) 것으로 보인다. 1차 목표는 그것이고, 2차적으로는 극우 반공 시대의 퇴행적 이데올로기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1995년 이후 그걸 살리는 작업을 그 신문에서 계속 해오지 않았나.
▲ 서중석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조선>의 폭거…그들 논리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정부"
프레시안 : 일등 신문을 자처하는 곳에서 그러는 걸 계속 봐야 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서중석 : 그런 표현을 쓰는 게 난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이건 냉전 시대에도 없었던 거다. 그런데 요 근래 곳곳에서 굉장히 험악한 말들을 쓰고 있다. 일베도 그렇고.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운동과 6월항쟁을 통해 개방과 민주화 시대로, 기본권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시대로 왔는데 그렇게 험악한 식으로 가는 건 그걸 무위로 돌아가게 하는 것인 듯해 걱정이 된다. 정신적인 사막성, 황량함이 만연하면 사회의 좌표,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야말로 냉소밖에 남지 않게 된다. <황야의 무법자> 같은 영화에 나오는 식의 인간 세계인 거다.
그것(정신적인 황량함을 부추기는 보도)을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종편들에서 광주항쟁을 음해하고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수십 년간 무슨 문제만 있으면 북한 소행으로 떠넘기려는 알레르기 반응을 노린 것이다. '남로당식 사관' 이것도 그런 걸 노린 면이 한편으로 있다. 어느 사회에나 해서는 안 될 발언이라는 게 있는 건데….
프레시안 : 개인적으로 놀란 적이 있다. 학생 운동을 하고 진보적 언론에서 일하는 한 후배가 '5.18 때 북한군 600명은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몇 명은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해 놀랐다. 이 정도 친구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걸 보며, 정말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중석 : 우리 사회에서 길들여진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권력이 노동 운동, 사회 운동 세력 등을 두들겨 팰 때 즐겨 쓴 것이 '여기에 좌경 용공 세력이 들어와 있다', '북한과 관련이 있다' 같은 것들이었다.
(1960년) 4월혁명 때도 그랬다. 3.15의거가 마산에서 나자마자 경찰은 총에 맞아 죽어 병원에 안치된 시신의 호주머니에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이런 일을 일으킨 것처럼 하는 내용의 쪽지를 써넣었다.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른 것을 계기로) 제2차 마산 항쟁이 4월 11일부터 발생하니까 내무부 장관 홍진기는 "마산 소요에 5열(간첩) 개재(介在)의 혐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다, 공산당 선전에 속아서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특별 담화를 연속 발표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염색이 된 사람은 '대통령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면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바로 그걸 노린 거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4월혁명의 배후라는 주장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당시 북한은 남한에서 그런 게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아연하기만 했다. 미 제국주의의 속국으로만 한국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누린다는 식으로만 가르쳤는데, 아 그렇게 큰 시위를 하니까 깜짝 놀라고 아연하기만 한 것이었다. 처음엔 대응을 못했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공산당이 뒤에 있다'고 조작하려 했다. 그 이후에도 권력은 그런 식으로 많이 대응했다. 그게 수십 년간 쌓이다 보니까, '뭔가 있으면 공산당만 대면 된다'는 일종의 자동 반응 같은 게 생긴 거다.
1980년 광주에서 그런 큰 시위가 일어나는데 공산당 간첩이 올 리도 만무하고 있을 수도 없는 거다. 그렇게까지 허술한 대한민국이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반공과 방첩 갖고 산 나라 아닌가. 나도 (등산하러) 산에 올라가다가 2번인가 끌려가고 그랬다. 간첩일지도 모른다며. (웃음) 한국은 그런 사회였다. 그러니까 (5.18 때 북한군 600명 투입 같은 건) 눈곱만큼도 있을 가능성이 없다.
그렇거니와 수만 명, 수십 만 명이 궐기해 사납기 짝이 없는 공수 부대까지 몰아낸 것 아닌가. 그런 일이 간첩 몇 명 있다고 될 일인가. 간첩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왜 광주에서 그런 큰 분노가 일어나서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여단 두 개하고 특별 사단인 20사단을 도시에서 나가게 했느냐,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다. 모종의 사주가 있었음을 밝혀냈다'는 식으로 발표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걸 구체화할 자료를 내놓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이 광주학살 때문에 나중에 얼마나 크게 추궁을 당하나. 그런 상황에서 간첩 하나라도 광주항쟁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에게) 얼마나 좋은 재료가 됐겠나. '우리가 걱정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군대를 투입한 거다. 진압 우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그런데도 끝내 못 잡았다. 자신들이 발표한 게 허위임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완전히 물 건너간 거였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기 전에 이미 그랬다. 그러면서 광주의 진실이 밝혀진 것 아닌가.
프레시안 : 사실이 그러한데도 이제 와서 북한군 600명을 운운하고 있다.
서중석 : 10주년 때도, 20주년 때도 안 나왔는데 33주년인 올해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타난 것이다. 특수한 정치적 목적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민주화에 대한 이중적 태도…한 손으로는 폄훼하고 다른 손으로는 편승하고
프레시안 : 저들은 민주화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하나는 5.18 왜곡처럼 어떻게든 폄훼하려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처럼 "6.10항쟁 못지않게 6.29선언도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일부 여당 인사들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이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중심 세력이었다",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한나라당에 있다"고 강변하는 흐름이다.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것, 민주화도 알고 보면 우리 것'이라는 식이다. (관련 기사 : 새누리당과 뉴라이트의 '6월항쟁 탈취' 사건)
서중석 : 양 박자다. 조화를 이루며 같이 음을 내는 건데, 어느 것이나 터무니없는 거다. (6월항쟁을 살펴보면 1987년) 6월 10일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넥타이 부대의 시위, 그리고 15일부터 대규모 시위, 18일에 최루탄 추방 대회가 이어지며 점점 (규모가) 커지고 26일에 대규모 평화 행진의 날을 맞이해 그렇게 큰 시위가 안 일어났으면 6월항쟁이 있을 수가 없었다. 6.29가 일어나는 과정도 기록을 통해 검토해보면, 25일에서야 박철언이 초안을 한 번 잡아본 거고 27일 저녁 무렵 노태우와 박철언이 5시간 걸려 6.29선언 발표 내용을 만들어낸 거다. 6.26이 아니었으면 6.29는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굴복이었다. '이젠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순한 굴복은 아니었다. (5공 세력이) 민주화 쪽으로 선회한 것처럼 위장하는 양면 구사 작전으로 6.29를 했던 거다. 사실 6.29 자체는 1972년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들여다보면 직선제 하나 빼놓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1972년 이전에 있던 정도의 언론 자유를 있게 하겠다는 정도였다. 그런 건데, 워낙 극악한 통치를 유신 체제와 전두환 신군부가 했기 때문에 6.29가 돋보인 거다. 그런데 그것처럼 난센스가 없다. 순전히 투쟁에 의해 그런 것 아니었나.
문제는 6월항쟁을 6월항쟁 세대조차 잘 모른다는 것이다. 6월항쟁을 잘 알수록 힘이 나고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이 생기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강한 전망과 믿음이 생길 수가 있는 건데, 그런 공부를 안 하려고 한다.
1995년부터 낡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이야기하는 건데, 진보 세력이 제대로 공부를 안 한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음해와 중상모략은 쉽게 공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유신 체제와 전두환 정권의 후신인) 우리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느니 6.29선언은 참 대담한 민주화 구상이었다느니 하는 것들에 대해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고 궁색한 변명인가를 공박하는 지적인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을 띄우는 쪽에서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인데 그렇게 폄하해서 쓰냐. 어쨌든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이니 그걸 인정해주자',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다. 한 친구는 그러더라. 그런 말도 일리는 있다고 느껴진다고.
▲ 이승만 전 대통령. ⓒ연합뉴스 |
"건국 대통령 이승만? 비약이다"
프레시안 : 지난 10여 년 사이에 주변에서 그런 반응이 늘어난 게 사실이다.
서중석 : 엄청난 문제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 협상 세력이라고 불린 이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이 단정 운동 세력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그들을 어떻게 비판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분단이었나. 단정 운동이라는 게 친일파가 중심이 됐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1948년) 5.10선거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난 인정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한다. 북한에 가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분들, 평생을 독립 운동에 바친 김구·김규식 같은 이들의 노력은 또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해서 5.10선거에 참여해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해야 하는 거다. 그런 자리에 친일파 등이 등장해 나쁜 짓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5.10선거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5.10선거를 통해 훌륭한 제헌 국회가 만들어졌다. 소장파 전성시대가 있었고, 좋은 헌법을 만들었고,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법을 바로 통과시켰고, 농지개혁법도 처음엔 꽤 좋게 만들었다.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게 이승만 세력, 단정 세력을 놀라게 한 것이고 그래서 반동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고,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일어나고, 김구 암살까지 (1949년) 6월 공세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한 건가? 1919년에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만들었나? 임시정부에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뽑은 걸로만 돼 있지 않나. 5.10선거도 이승만이 실시한 게 결코 아니다. 유엔 소총회 결의에 따라 미군정에서 한 것이다. 이승만은 동대문갑에 입후보한 것 빼놓고는 직접적으로 한 게 없다. 독립 운동을 해서 건국한 것과는 전혀 다른 거다.
또 5.10선거에서 부정 선거 이야기가 제일 많이 들린 게 동대문갑 아닌가. 최능진(경무부 수사국장이었으나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다가 파면됐다. 이승만에게 맞서다 한국전쟁 때 총살됐다. <편집자>)과 싸웠는데, 얼마나 비겁하게 했나. 5.10선거를 제일 추하게 만든 지역구 중 하나가 동대문갑이었다. 그런 걸 따지더라도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비약이다.
그리고 4월혁명 51주년(2011년)에 보수 언론에서 '4월혁명 정신과 이승만 건국 정신은 같다'는 이야기를 내보냈다. 그해에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에서 4.19 묘지를 참배한다고 하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나.
4월혁명 정신은 이승만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선 것이 4월혁명 정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단정 운동에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었나? 해방의 정신, 민주주의와 인권의 정신 같은 게 들어 있었나? 권력을 잡겠다는 욕심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모른다. 진보 세력은 또 공부를 안 한다. 이러니 수구 세력이 맘 놓고 공격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남로당식 사관"이라는 사설 제목을 뽑아도 그렇게 큰 공격을 안 당할 거다, 이렇게까지 생각해도 될 만큼 진보 세력이 대응을 제대로 못한다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프레시안 : 패턴인 것 같다. 한국현대사학회나 뉴라이트 단체 같은 데서 주장하면 <조선일보> 등에서 크게 실어주고, 그 과정을 몇 년 거치면 상식처럼 퍼지는 식이다. 몇 년 전, 뉴라이트 시각을 담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나왔을 때도 진보 세력은 정면 대응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무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더 확산된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그때 <조선일보>가 <재인식> 나오기 몇 달 전부터 엄청나게 보도하더니만, <재인식>이 나오자 여러 면을 털어 아주 크게 다뤘다. 세상에, <한성순보>(1883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이래 신문이 한 책을 그런 식으로 소개하는 건 처음 봤다. 어지간한 신문은 대충이라도 다 훑어봤는데, 그렇게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학술면 한 페이지 할애해주면 좋은 거고, 정치면 같은 데서 박스 기사 하나 더 내주면 최고 대접 해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진보 언론 등에서) 제대로 대응을 못 했다.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수구 세력에 제대로 대응해야"
프레시안 : 그런 게 쌓이면서 20년 가까이 오다 보니 지형이 이상한 방향으로 바뀐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 잘 안 보이지 않나. 그러니까 (사람들이) 험악한 분위기와 언사에 익숙해지고 그것에 마비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호흡이 너무 짧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추고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너무 표피적이고 단견이다.
(예컨대) 1970-1980년대에 나와 한때 가까웠던 김지하나 황석영은 참 재주꾼이고 시나 소설에서 훌륭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인데, 나중에 많이 바뀌더라. 그걸 보며 내가 제일 크게 느낀 건 지적 엘리트조차 자기 자신의 역사, 문화, 민중에 뿌리를 깊이 못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시적인 재주만 발휘가 된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분위기를 타는 면이 강하지,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일을 해나가는 면은 약한 것 같다. NL이 인기다 하면 그쪽으로 몰렸다가 그다음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인기다 하면 다시 저쪽으로 쫙 몰리는 쏠림 현상이 강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이 보인 강한 정의감 같은 것도 (여전히) 많이 있다. '우리 사회는 희망만 보이면 바로 정의, 진보, 민주주의, 인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랄까 기대도 많이 갖게 된다.
난 현대사를 하면서 절망과 희망의 희비쌍곡선이 교차하는 식으로 살아왔는데, 6월항쟁 이후 희망이 훨씬 커졌다. 물론 6월항쟁 이후에도 절망적인 게 많았고 요 근래 와서는 너무 표피적인 게 많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이만큼 대견한 역사를 만들어온 힘에 상당히 큰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있다. 난 그걸 역사의 힘, 민중의 힘, 우리 전체의 역량으로 표현한다.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구름처럼 모여든 시민들. 질식당한 민주공화국을 되살린 6월항쟁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었다. ⓒ연합뉴스 |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속에서도 대견한 역사를 만든 민중, 그 힘을 믿는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정년 퇴임을 맞는 소회와 퇴임 후 계획이 궁금하다.
서중석 : 담담하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적극적으로 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수구 냉전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만연하지 않도록 분발해야 한다. 조금 전 이야기한 그런 믿음을 갖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 하나를 물색해 놨다. 책의 상당 부분은 연변대학에 기증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남은 책은 새 사무실로 옮긴다. 생활엔 거의 변화가 없을 거다. 출근해서 연구하고 점심 후 뒷산을 산보하다가 다시 연구하는 생활일 거다.
학술적으로 기여하는 작업을 제외하면 가급적 사회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활동은 계속할 계획이다. 일본교과서와 10여 년간 싸워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젠 한국 내의 극우 성향 교과서와도 싸우게 됐으니 (지형이) 훨씬 더 복잡하게 돼버렸다. 할 일이 더 많아졌다. 부담이 된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위원장도 맡고 있다. 하필 내가 맡았을 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고, 그 정권이 (우리가) 할 일이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남북 간에 너무 심한 역사 인식의 차이를 어떻게든 좁히고 교류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통일을 전망하는 데 학술적으로 기여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작년에 유신 40주년을 맞아 유신 관련 발표를 2번 했(고 앞으로도 계속 연구할 생각이)다. 4월혁명은 내가 꼬맹이 때부터 관심이 큰 주제이고, 발표를 많이 해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방대한 4월혁명 사료집을 내는 작업을 편집위원장으로서 주도해왔는데, 그 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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