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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②]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by Khori(高麗) 2012.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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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박정희 딸' 아니라면 출마 이유 없어"
[인터뷰②]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12.02.22 13:23 ㅣ최종 업데이트 12.02.22 17:58  최경준 (235jun)
  
▲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대가 브루스 커밍스(68) 미국 시카고대 교수
ⓒ 최경준
 브루스 커밍스

"산업화시기에 그녀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지도자적 자격과 정치인으로서 자격으로 평가받아야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 일(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에 의해 평가돼서는 안 된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한국학의 대가인 브루스 커밍스(68)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말이다. 커밍스 교수는 지난 17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박근혜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아니었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1981년(한글번역판 1986년)과 1990년에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 1, 2권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 미국과 한국 등에서 한국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최근 1, 2권을 단일본으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 그는 "한국전쟁이 내전이었으며, 사실상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상당한 잉태기가 있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단일본에 추가되는 새로운 자료들이 일부 새로운 해석을 낳을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인 틀거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미군이 노획한 북한 자료를 2년간 검토했는데, 한국전 분석에 대한 나의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이 한반도 분단에 심대한 책임이 있고, 남북통일을 돕지 않음으로써 그 책임은 계속되고 있다"며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반대한다는 맥락에서 나도 반미주의자였다"고 말했다. 다음은 커밍스 교수와의 일문일답 중 일부이다.

 

"한국전 분석에 대한 나의 해석,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아" 

 

-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과 관련해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던데.

"20여 년 전 두 권으로 나온 <한국전쟁의 기원>을 단일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책이 출간된 이후,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연구와 자료가 나왔다. 우선 이러한 연구 업적들을 고려하고, 두 권을 정리해서 250페이지 정도의 단일본을 만들려고 한다. 두 권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너무나 방대했다. 짧은 신간이 독자들과 학교에서 광범위하게 읽힐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목표이다."

 

- 새로 추가되거나, 수정되는 내용이 있나?

"아직 미완성이라서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한국전쟁이 내전이었으며, 사실상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상당한 잉태기가 있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 이 책은 전쟁의 기원에 대한 포괄적인 역사서이다. 짧지만 자료에 있어서는 업데이트된 책일 것이다. 새로운 자료들이 일부 새로운 해석을 낳게 할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인 틀거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미군이 노획한 북한 자료를 2년간 검토했는데, 한국전 분석에 대한 나의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 

 

- 1968년 평화봉사단으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간 뒤 미국에서 반전운동을 했다고 하던데?

"한국의 평화봉사단 경험은 나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미국의 대외 정책과 군사 정책이 어떻게 수행되고, 미국의 외교관이나 군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한국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험이 베트남전에 대한 나의 비판적 시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한국에 있는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고, 일부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다. 미국은 오래전에 한국을 점령했고, 여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두 개의 이길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서 끝났고, 한반도는 분단됐다. 미국은 승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있었다. 1968년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 컬럼비아 대학원을 갔을 때, 난 이미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캠퍼스는 (반전운동) 활동가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대가 브루스 커밍스(68) 미국 시카고대 교수
ⓒ 최경준
 브루스 커밍스

- 왜 한국학을 공부했나? 원래 관심은 중국이지 않았나?

"아직도 중국에 관심이 있다. 중국에 대해 저술하고 있고, 어제 예일대학교에서 한 강연도 중국에 대해서였다. 내가 중국현대사의 전문가라기보다는 중국의 대외정책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한국에 관심이 깊어진 까닭은 미국의 영향이 외교, 군사, 그리고 선교 사업을 통해 한국에 너무도 지대하기 때문이다. 1967~1968년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한미관계가 매우 잘못되어 있다고 느꼈다. 이 문제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학위논문을 1945~1948년 미군점령기의 군정에 대해 썼다. 연구하면 할수록 한국전쟁의 기원은 바로 이 시기에 있었다." 

 

"남한의 우익에 미안하지만, 난 아주 오래 살 것"

 

- 당신의 한국 현대사 탐험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아직은 (내 연구를) 정리할 나이는 아니다. 내가 올해 68세인데, 기자가 보기에는 내 나이가 지긋해 보이겠지만, 나는 아직 젊으며, 건강하고, 잔병도 없다. 내 어머니는 96세이고, 외삼촌은 95세까지 살았다. 남한의 우익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난 아주 오래 살 것이다.(웃음) 향후 5~6년 안에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마무리할 것이다. 북한, 남한, 러시아, 중국 그리고 미국 등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내가 CIA와 NSA 등 미국의 전자감청 등의 정보자료가 공개될 때까지 오래 살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자료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사가들이 2차 대전 당시의 감청자료들을 볼 수 있게 되자, 2차 대전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바뀌었다. <한국전쟁의 기원>의 신판은 매우 결정적인 것이고, 이러한 정보가 공개된다면 계속 그 정보에 관해 논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일생 중에 보고 싶은 것은 남북통일이다. 내 나라 미국은 남북분단 초래에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딘 러스크(Dean Rusk)와 몇몇이 38선을 긋지 않았나. 남북통일을 정말로 보고 싶고, 통일은 개인적으로는 최상의 기쁨일 것이다. 학자로서 말하자면, 내 두뇌가 작동하는 한 계속 연구하고 싶다." 

 

- 남북분단이 미국만의 책임은 아니지 않나?

"물론 미국에게 분단의 단독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련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다음 날인 8월10일 저녁, 딘 러스크와 존 본스틸(John Bonsteel)이 세계지도에서 한국을 찾아 38선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인들과 의논하지 않은 것은 물론, 러시아, 영국, 중국과도 협의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미국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정치적으로 아시아를 분할하여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중국, 그리고 베트남을 장악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이들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반식민지투쟁의 전사였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이를 간과했다. 미국에게는 이들이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에 불과했다.

 

반면, 소련은 한국을 분할하려는 어떠한 문서나 조약에 서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1948년 말까지 소련군을 (북한에서) 철수시켰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1989년에야 소련군이 철군했다. 이것은 결국 미국이 소련보다 한국에 더 신경을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남한에) 군정을 설립했고, 깊숙하게 한국현대사를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 분단에 심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북통일을 돕지 않음으로써, 그 책임은 계속되고 있다." 

 

-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적지 않은데.

"미국은 한국 경제 개발에 지대한 도움을 줬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미국은 1962~1963년까지도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했다. 미국은 장면을 매우 좋아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장면을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하고 있었다. 장면이 수상이 된 1960~1961년에도 그를 지지했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한 초기에는 그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 이후부터 박정희를 지지했는데, 1969년 즈음 미국 대통령이 된 닉슨은 친미반공이라면 어떠한 독재자도 지지했다. 따라서 닉슨은 박정희가 유신을 단행했을 때 모른 척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지지했던 것은 미국의 참혹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반미적으로 변한 것을 나는 완전히 이해한다.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반대한다는 맥락에서 나도 반미주의자였으니까." 

 

- 한반도 문제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으로 인해 한국 내 극우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은 적은 없나?

"가끔 한국에 한국전 기념 컨퍼런스나 학술발표회를 가보면, 언제나 청중 중에 누군가 일어서서, 나나 혹은 다른 발제자를 '공산주의자, 친북세력' 운운하면서 과도하게 비난하곤 한다. 그들이 너무 분노해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지만, 직접 위해를 느낀 적은 없다.

 

1980년대 중반에 황당한 경험이 있긴 하다. 내가 한국에 가면 전두환 정권은 7~8명 정도의 정보기관 요원을 시켜 나를 미행하게 했는데, 한마디로 시간 낭비, 돈 낭비였다. 나는 이렇다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직공원 옆에 있는 사직여관에서 머물렀는데, 하루는 오전 5시에 여관을 나섰는데, 정보기관 요원들이 오전 7시에 와서 나를 찾기 시작했다. 검은 점퍼를 입은 10여 명의 요원들이었는데, 물론 위협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전두환이) 바보스럽다고 생각했다.

 

1979년 책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 가려고 했는데, 도쿄에서 입국이 금지됐다. 아직 <한국전쟁의 기원>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 글을 많이 쓰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도쿄의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나에게 비자를 발행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가지고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문화담당 참사와 면담했는데, 그는 정보부장 김재규의 처남이었다. 그가 '정보부 쪽 사람들은 어리석다. 네게 입국금지를 내린 것은 지미 카터가 방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책방이나 가보려고 입국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3일간 머물 수 있는 비자를 발행해주더라. 그 처남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자마자 사임하고, 미국으로 갔다. 10~15년 후에 그 처남이 내 강연에 나타나서 자기를 알아보겠냐고 물어보더라.(웃음)"

 

"아버지 아니었으면 텍사스쯤에서 복덕방이나 하고 있을..."

 

  
▲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21일 오전 서울 상암동 '박정희 기념·도서관'에서 열리는 개관식에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박근혜

- 군정을 한국에서 몸으로 체험한 한국학 학자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는 독재자이자 산업화의 지도자였다. 중국의 등소평을 보자면, 그가 매우 신속한 산업화를 지휘했지만, 천안문 시위가 벌어지자, 젊은 시위자들에게 발포를 처음으로 지지한 자들 중 하나였다. 박정희나 등소평이나 강력한 산업화 경제 발전의 지도자이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들을 투옥시키거나, 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박정희의 경제적 유산은 상당히 좋다. 한국인들이 박정희를 칭송하는 것을 이해한다. 한국은 그가 집권하기 전에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집권 20년 만에 신속히 산업화가 이뤄졌고, 특히 1970년대의 중공업 육성은 한국을 산업국가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산업화가 독재를 전제로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말하자면 일본식으로도 할 수 있다. 의원내각제 속에서 정부가 경제에 강력한 역할을 한 경우처럼 말이다. 여하튼 박정희가 칭송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박정희의 딸에 대해 얘기하자면, 박근혜는 그녀 자신의 능력에 의해 판단받아야 한다. 산업화시기에 그녀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지도자적 자격과 정치인으로서 자격으로 평가받아야지, 박정희가 한 일(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에 의해 평가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아들 조지 부시와 박근혜 새누리당(구 한나라당) 의원을 비교해보자면, 보수적인 한국정치에서 박근혜 의원의 부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에 힘입었고, 또한 부시도 부시가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부상하지 않았나?

"맞는 말이다. 아들 부시는 아버지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텍사스쯤에서 복덕방이나 운영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할아버지 덕이 아니었다면, 예일대학교도 못 갔을 것이다. 아들 부시 집안은 미국에서 가장 부자 집안이다. 그 탓에 남보다 매우 유리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 아니었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이나 미국의 정계를 보면, 항상 누군가의 아들, 딸이기 때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화당 선두주자인 미트 롬니를 보더라도, 그의 아버지는 미시건 주지사에 대통령 후보에다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다. 케네디도 그랬다. 민주주의 원칙이라는 게 이렇게 부모덕에 유리하게 출발하는 사람들을 가끔씩 배제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들 부시는 부모덕이 아니었다면 대통령은 물론 아무 것도 될 것이 없는 유별난 경우이다. 예일대에서도 좋은 학생이 아니었고, 사업가로서도 실패를 계속했다. 나는 미국유권자들이 아들 부시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을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박근혜 의원이 올해 치러질 한국 대선에서 유력한 후보라는 사실에 대해 한국학을 연구한 역사가로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에겐 나름대로 강한 원칙이 하나 있다. 독재 체제 당시, 독재를 비판하고 한국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내 나라가 그 독재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좀 다른 얘기이다. 나는 한국의 작금의 정치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더라도, 민주주의하에서 그것은 한국인 다수의 의견인 것이다.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내가 독재종식 이후 (한국) 정치에 관여했던 때는 김대중 정권 때였다. 김대중이 나와 친구이기도 했고, 그가 대통령이 되어 기뻤다. 또한 그의 대북정책을 지지했다. 내가 정치에 관여했던 이유는 김대중이 오랫동안 정치적 반대자로부터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관여가 내게 불편한 생각을 들게 하곤 한다. 왜냐하면 난 우선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학자이지 활동가가 아니다.

 

물론 미국에서는 활동가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내 나라가 아니라, 한국인의 나라이다. 나는 이명박을 좋아하지 않는다(웃음). 그러나 그는 선거에 의해 선출됐고, 그런 의미에서 정통성 있는 지도자이다. 나 같은 사람이 한국 정치인들에 대해 이런저런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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