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학살이 벌어진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취한 태도도 논란이다.
서중석 : (1951년 2월) 거창사건이 일어났다.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세 군데에서 (민간인) 700여 명을 죽이지 않았나. (이때 719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된다. 희생자의 다수는 어린이, 여성, 노인이었다. 10세 이하 희생자가 전체의 40퍼센트가 넘는 313명인 데서도 이 점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편집자>) 거창은 부산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다.
몇 가지 이유로 이게 국회에 알려졌다. 국회에서 크게 문제 삼고 그랬다. 국민방위군 사건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면서 국회가 아주 시끌시끌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인명 경시를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 이건 안 된다고 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만 17∼40세 남성들을 국민방위군으로 모아 경상도로 보냈다. 혹한기인데도 제대로 입히지도, 먹이지도 않고 끌고 간 탓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은 사람이 속출했다. 60여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내려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5만 명이 넘는다는 증언도 있다. 이 때문에 국민방위군은 '해골의 대열'로 불렸다. 이에 더해, 장정들의 식비 등으로 뒤늦게 편성된 예산마저 간부들이 빼돌려 유흥에 탕진하고 일부는 정치권에 상납한 사실도 드러나 논란이 더 커졌다. <편집자>)
그때도 이 대통령은 '이게 외국인에게 나쁜 인상을 준다, 왜 이런 걸 가지고 문제를 삼느냐'(는 태도를 보인다). 그 당시 내무부 장관(조병옥), 법무부 장관(김준연)도 '거창사건은 잘못된 겁니다', 이런 얘기를 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총애하던)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때 "거창사건으로 인하여 내무·법무·국방 3장관이 서로 협력하지 않은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국제적으로 손상됐다"고 말했다. 내무·법무부 장관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뒤이어 공보처장을 통해 "거창사건의 희생자는 대부분이 통비자(通匪者)"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학살 책임 문제를 피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이 시기 학살 책임 문제에서 정권 고위층이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서중석 :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나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일정한 시간을 두고 계기적으로 일어난다. 둘 다 규모가 큰 집단 학살 사건인데, 일사불란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고 '이건 상당한 고위층에서 한 지시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 1950년 7월 첫 주에 사흘에 걸쳐 일어났다고 미국 문서에 쓰여 있다. 그때 주한 미국 대사관 육군 무관이던 에드워드 중령이 작성한 글에 '총살 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렸다'고 돼 있다. 법무부 장관 지시가 내려왔고 '국방부, 내무부와 협력해서 하라'고 돼 있는 문서를 봤다고 증언한 형무소 관련자도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정부 수립 이후, 그리고 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주민 집단 학살과 관련해 방대한 보고서를 내지 않았나. 군 고급 지휘관을 포함해 아주 많은 관계자들이 '이러한 학살이 일어난 것은 이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고, 보도연맹원 학살과 관련해서 '군경이 전국 각지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이 대통령의 승인이나 지시 없이 가능했겠느냐'는 증언들이 수록돼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의 전개 과정이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서 보면, 최소한 내무부 장관이나 국방부 장관, 법무부 장관의 선에서 결정이 있었던 것 같고 이러한 결정은 대통령의 의중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집단 학살의 경우를 봐도 이 대통령의 극단적이고 가혹한 엄벌주의가 없었다면 과연 이러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자료를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많이 들더라.
그런 엄벌주의는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와 결합된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연결돼 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양 100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그 양이 잘못되지 않도록 찾아다닌다'는 말을 많이 듣지 않나. 마찬가지다. 잘못되는 사람이 없도록 그렇게 찾아서 구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같은 걸 보면, 불순분자가 한 명이라도 있을 가능성이 있으면 나머지까지 다 죽여도 좋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불법적으로 죽여도 좋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학살자들은 '북한군이 내려오면 보도연맹원들이 거기에 호응할 것이기에 죽였다'는 식으로 변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어땠나.
서중석 : 정희택 검사란 사람이 있다. 오제도, 선우종원과 함께 사상 검사로서 보도연맹 창설과 운용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다. 9.28 수복 후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으로서 부역자를 심사했다. 이런 사람이 '전쟁 후 보도연맹원들이 보인 태도를 볼 때, 이들이 사달을 일으킬 거라는 건 지나친 우려가 아니었느냐'는 기록을 남겼다. 전쟁 발발 직후 1만6800명에 이르는 서울의 보도연맹원들은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북한군 점령기에)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좌익범' 중 부역을 한 사람이 적었다고 증언했다. (전쟁이 터진 직후) 이승만 정권의 책임자들은 피신하느라고 ('좌익범'들을) 서대문형무소에 그대로 놔두고 가지 않았나. 그런데도 그랬다는 거다.
▲ 1950년 7월 공주 학살 현장. <픽처포스트>라는 영국 매체에 실린 사진으로 박선주 충북대 교수가 공개했다. 당시 공주에서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수백 명이 학살됐다. ⓒ연합뉴스 |
일사불란한 학살…최고위층 관련성 가리키는 자료와 증언 다수
프레시안 : 상황이 그러했는데도 엄벌주의로 일관한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런데 학살 책임자들에 대한 조처 부분을 보면, 엄벌주의 못지않게 이것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단적으로 거창 학살 사건, 그것만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진실을 은폐하려 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크게 두둔하며 '국가 체면을 손상하는 짓을 해선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럼에도)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관련자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신성모의 후임인) 이기붕 국방부 장관의 명에 의해 회부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이 총애한 또 다른 인물인) 김종원이 문제를 일으켰다. 거창사건을 조사하러 가던 국회의원들 앞에 공산 게릴라가 나타난 탓에 국회의원들이 (학살 현장에) 못 가고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매복해 있다가 총격을 가한 이 게릴라가 당시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김종원 쪽에서 조작한 가짜 게릴라라는 게 나중에 드러났다. 그래서 김종원은 (제11사단) 9연대장 오익경 대령, 그리고 거창사건에 직접 책임이 있는 9연대 3대대장 한동석 소령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됐다.
(1951년 12월) 김종원에게 징역 3년형이 선고됐다. 그런데 이런 김종원에 대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국방부 장관한테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이기붕 장관은 결국 사표를 내는 걸로 대답했다.
군 문제니까 국방부 장관과 함께 육군참모총장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때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이었다. 이종찬은 정치와 거리를 두고 군인의 직무에만 충실하려 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60년 4월혁명 후) 허정 과도 정권 때 국방부 장관도 한 사람이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1952년 5월, 재집권을 위해 헌법을 뜯어고치려던 이승만 대통령의 병력 출동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심복인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며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후, 이종찬을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했다. <편집자>)
이종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종원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지시가 내려온다. 이 대통령이 김종원 석방에 즈음해 발표하려 직접 쓴 성명문 초안을 대통령 비서가 보여줬는데, 거기에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이라며 이순신 장군에 비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증언이다. 이종찬은 '이건 예사로운 사태가 아니다'라고 생각해 김종원을 석방했다고 한다. (김종원은 판결 석 달 후인 1952년 3월, 대통령 특별 명령으로 풀려났다. <편집자>) 많은 글에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석방했다고 돼 있는데, 이종찬의 증언에 의하면 어쨌든 형식은 이종찬이 참모총장으로서 석방한 것이다.
프레시안 : 한마디로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심복이라는 이유로 풀어주게 만든 것이다. 이런 분을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딱한 일이다.
서중석 : 그렇다. 김종원은 바로 그다음부터 네 개의 중요한 도경국장을 한다. 전북경찰국장, 경남경찰국장, 경북경찰국장, 전남경찰국장을 맡는다. 그리고 남원에 있던 '공비' 토벌 부대(서남지구전투경찰대. <편집자>)의 사령관도 하고 그런다. 그야말로 굉장한 승진을 하고 중요한 책임을 맡은 거다.
이 사람은 도경국장 시절에 부정 선거로 또 문제가 됐다. 악명 높은 사람답게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직후 김종원을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에 임명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정말 혼쭐이 나지 않았나. 투·개표 부정이 워낙 심해서 조봉암 후보가 216만 표밖에 못 얻은 걸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월등히 많을 것이라는 주장도 일각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그 직후에 (일본군 지원병 출신인) 김종원을 치안국장으로 발탁한 거다. 또 일제 때 박천경찰서장을 한 이익흥을 내무부 장관에 앉힌다. 그전에도 친일파가 등용되긴 했지만, 일제 때 경찰서장까지 한 사람을 내무부 장관에 앉히는 일은 없었다. 이익흥은 신성모와 함께 아첨의 대명사가 된다.
나중에 김종원이 치안국장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주 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다. 장면 부통령이 '취임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자기 기록에 남겼는데,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조금 지난 (1956년) 9월에 바로 저격 사건이 일어난다. 총알이 손을 스치고 지나가 손만 다쳤지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큰 사건이었다. 김종원은 그 사건에 연루돼 쫓겨났다. 그러고 나서 (1960년) 4.19 이후 (이익흥 등과 함께) 다시 체포되는데, 김종원과 이익흥에게는 중형이 선고된다. (김종원, 이익흥 등 장면 저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6명은 5.16쿠데타 후 모두 석방됐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
국민 학살하고 영전한 이승만의 심복들
프레시안 : 김종원은 민간인 학살도 자행한 인물이다. 여순사건 때는 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치다가 지치면 총으로 처형했고, 그 후 경북 영덕, 경남 거제, 경남 산청 등 곳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중석 : 그렇다. 참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백두산 호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여순 지방에는 김종원 하면 치를 떠는 사람이 많더라.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김종원이 여순사건, 거창사건 때 한 짓은 일반 사람들에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고 그러니 의당 재판을 받은 건데, (이승만 대통령이) 그런 김종원을 풀어주고 요직에 앉혔다는 거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직후 김종원을 치안국장에 앉힌 건 1960년 선거를 대비한 것 아니겠나. 이런 인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다른 학살자들에게도 관대했다.
서중석 : 거창사건 후 9연대장 오익경은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받았는데 바로 풀려나서 군에 복귀한다. 징역 10년형을 받은 3대대장 한동석도 곧 풀려나서 복귀한다. 난 거창사건은 물론 11사단이 저지른 여러 주민 집단 학살과 관련해 최덕신 11사단장이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최고 지휘관 아닌가. 국회에서도 이 사람을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영전한다. 예컨대 정전회담에 국군 대표로 나간다든가, 이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할 때 수행한다든가 하는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들 문제뿐만 아니라) 원용덕이라든가 특무대장 김창룡 같은 사람이 그렇게 출세하는 걸 보더라도, 이 대통령의 인사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특히 학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이 대통령은 (신성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다 국회뿐만 아니라 내무부 장관도, 법무부 장관도 워낙 문제를 삼으니까, 할 수 없이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하긴 한다. 그런데 이때 내무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도 동시에 해임한다. 그러면서 신성모를 (요직인) 주일 대사에 임명했다. 이러니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학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해임된 건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얘기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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