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민간인을 학살한 건 군경과 우익만이 아니다.
서중석 : 한국전쟁 시기, 좌익에 의한 학살도 상당히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조사와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 학살과 같은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선 어느 누가 저질렀건 그 책임을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그렇게 해야 한다.
어릴 때도 좌익에 의한 학살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특히 많이 들은 건 1970년대 들어서였다. (전에) 좌익이 얼마나 학살을 많이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료들을 찾아봤었다. 극우 반공 세력이 '상기하자 6.25' 할 때 제일 큰 게 좌익의 학살 만행 아니겠나. 그러니 좌익이 저지른 학살 만행에 대해 극우 반공 세력이 상당히 조사해놨을 거다, (자료로) 쓸 것이 참 많을 거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가 않더라.
프레시안 : 실제로 어떠한가.
서중석 : 자료가 나오더라도 아주 간단하게만 돼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데이터를 냈는지를 알 수 없게 해놨다. (그 당시) 국사책엔 많이 안 나오더라. (그래서) 1960∼1970년대에 반공 교육이 강화됐다고 많이들 이야기하니 '당시 반공 관련 책에는 (좌익의 학살 만행을) 많이 써놨을 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걸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예컨대) <반공도의 교본>이라는 책이 있다. '북괴'의 만행을 강하게 지적한 책이다. 구체적인 것이 있는가 하고 봤지만, 정작 그런 건 별로 없었다. 써놓은 것도 뭐라고 써놨는고 하니, "6.25사변이 일어난 이후 처음으로 양민이 학살된 것은 강화도 지구에서 군인·경찰 가족 약 500명이 희생된 것이다", 그렇게 돼 있다. 그 뒤엔 이렇게 돼 있다. "광주와 전주 지구에 있는 각계 저명인사와 경찰 가족 약 2000명이 학살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는 무죄한 시민과 군경 유가족 약 1000명이 학살(…) 인천에서도 1500여 명의 우리 형제들이 (…) 죽어갔다." 이렇게만 돼 있다.
이걸 그대로 인용할 수 있겠나. 어떤 식으로 학살됐는지를 밝혀놔야 그걸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데, 이건 분석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그리고 숫자도 500, 2000, 1000, 1500 이렇게 돼 있다. 추정치라고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참 인용하기가 힘들다. 구체성이 약하다. 놀랐다.
또 대검찰청 수사국에서 낸 <좌익 사건 실록>에 좌익이 저지른 수많은 사건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한국전쟁기 학살을 많이 다뤘을 거라 봤는데 (그렇지 않았다). 몇 건 있긴 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더라. '반공 세력이 이 부분(좌익에 의한 학살)만은 잘해놨을 거다. 우익이 좌익을 죽인 것 또는 군경이 집단 학살을 한 건 안 써놨을지 몰라도 이건 써놓지 않았겠나' 했는데 잘 안 나온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좌익에 의한 학살을 이승만 때보다 유신 시대에 더 강조한 이유
프레시안 : 예상 밖이다.
서중석 : 그런데 더 놀라운 걸 발견했다. 6.25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이 6.25 담화를 꼭 하지 않았겠나. '여기엔 학살 얘기가 나올 거다.' 그래서 찾아봤는데, 담화가 길고 반공 얘기가 무척 많이 나오는 건 틀림없다. 그런데 학살 만행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렇게 돼 있을까.
우리가 반공 교육 받을 때 6.25 하면 '괴집' 또는 '북괴'에 의한 학살 만행이었다. '괴집'은 1950년대에 많이 쓴 단어다. 북한 괴뢰 집단(의 준말이다). '북괴'란 말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많이 썼던 단어다. 그 단어 하면 바로 집단 학살, 이런 식으로 연상되는 교육을 많이들 받지 않았나. 그러니 틀림없이 이승만 담화에 그게 얼마나 많이 강조됐겠는가 했는데, 그렇지 않더라.
놀랍게도 이게 많이 언급되는 것은 유신 시대다. 사실 1968년에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틀 후엔 푸에블로호 사건도 벌어졌고, 가을엔 울진·삼척 게릴라 침투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나. 그러니까 (강조되려면 그렇게 전쟁 위기가 고조된 1968년) 그때 강조됐어야 하는데, 그때보다도 오히려 유신 시대에 많이 강조되더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는 어린애 동상이 도처에 세워지는 것도 유신 시대다. 가만히 보니 1975년 이후에 많이 세워지는 것 같다. 1975년은 인도차이나 사태(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공산화. <편집자>)로 보수층에 상당히 위기감이 감돌면서 반공 구국 대회가 많이 열린 때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거였다. 그 시기에 '북괴' 만행이 아주 강조되면서 초·중·고 교재 같은 데에서 이 부분을 특별히 많이 교육시키도록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내가 여러 자료를 읽어봤는데, 구체성은 없다. 다만 '무지무지 나쁘다. 아주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것이 누차에 걸쳐 강조돼 있다.
학살 책임 문제에 성역은 없다
프레시안 :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중석 : 한국전쟁 때 (각 지방의) 좌익, 북한의 정치보위국 등과 관련된 학살이 여러 군데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50년) 9.28 수복을 전후해 대전형무소나 광주형무소 같은 데서도 학살이 일어났고, 전라도 지방에서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 예컨대 (전북) 임실이나 순창 등에서 수백 명이 좌익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6월항쟁 이후 전라북도 도의회에서 조사해 만든 보고서에 나와 있다.
<좌익 사건 실록>에 제일 큰 사건으로 나오는 것은 (전북) 옥구군(지금의 군산시 옥구읍) 미면에서 발생한 학살이다. 현지 좌익이 이틀에 걸쳐 600명에 가까운 주민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적혀 있다. 고창군에 있는 여러 면에서는 빨치산이 400여 명을 학살했다. 이런 지역은 9.28 수복을 전후해 정말 '낮에는 경찰, 밤에는 인민군' 식이거나 상당히 오랫동안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런 속에서 여러 학살이 일어나더라.
좌익에 의한 학살이 제일 크게 일어난 곳은 (전남) 영광이 아닌가 싶다. 한 지역만 놓고 얘기하라고 하라면 그렇다. 변진갑 의원이 국회에서 1951년 2월에 얘기한 것을 보면, 5만6000여 명이 학살당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1951년 4월 국회 속기록(의 변진갑 의원 발언)을 보면 3만8000여 명으로 줄었다. (변 의원이 말한 희생자 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엄청난 학살이다. 그래서 난 항상 이 부분이 궁금하고 관심이 많이 갔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정말 이 숫자가 맞을까, 궁금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좌익에 의한 학살만 담당하는 부서를 따로 두고 연구했다. 당연히 영광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쪽 연구 관계자 말로는, 1만 명 이상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좌익이 이 지역에서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 그건 사실이다.
프레시안 : 좌익과 우익 모두 학살 만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많은 민간인에게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든다.
서중석 : 그렇다. 아까도 강조했지만 어떤 학살이건 진상을 조사하고 연구해야 함과 동시에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고 잘못에 대해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비율 얘기를 안 할 수는 없다. 비율이 문제다.
이것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자료는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에서 낸 진상 조사 보고서다. 고건 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이 위원회에서 2003년에 통과시킨 공식 문서다. 거기에서 1만3564명이 희생자로 규정됐다. 실제 죽은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다.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더) 많은데, 신고가 이뤄진 사람 중에서 소수를 제외하고 위원회에서 군경까지 포함해 희생자로 결정했다. 이 가운데 토벌대에 의해 1만1450명이 죽었다. 84.4퍼센트다. 무장대, (그러니까) '산사람'에 의해서는 12.3퍼센트에 해당하는 1673명이 죽었다. 나머지는 불명 등이다. 바로 이 84.4퍼센트와 12.3퍼센트, 이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겠느냐.
또 하나의 예로 내가 많이 드는 건 경기도 고양군(지금의 고양시) 금정굴에서 이뤄진 학살이다. (1950년 9월) '곧 유엔군하고 국군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태극단동지회라는 우익 청년 단체에서 내무서를 공격하려다 발각돼 38명이 학살당했다. (유엔군과 국군이 들어온 후) 그것에 대한 보복이 일어났다. 그 보복으로 학살된 사람들의 뼈와 유해가 (1995년) 금정굴에서 대량 발견됐다. 그 인원이 400~500명이라는 설이 있고 1000명 정도 된다는 설이 있다. 38명과 금정굴에 있던 유해 숫자, 이것이 또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느냐.
거듭 강조하지만, 어떤 경우의 학살이건 조사와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한다.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하며, 다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역사의 오점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학살이 새긴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사진은 2011년 12월 8일, 서울시 교통문화교육원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전국 합동 추모제'에서 한 유족이 추모사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연합뉴스 |
반공 투쟁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 궤변 난무하는 한국
프레시안 : 군경 등의 학살을 지적하면 일각에서는 '북한의 전쟁 책임을 희석하는 것 아니냐', '진보 성향 학자들이 좌익의 학살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격동기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북한은 전쟁을 일으켜 한국인들에게 너무나도 큰 피해를 줬다. 그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 주민 집단 학살과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아주 성격이 다른 범주에 속하는 거다. 이런 걸 뒤섞어놓으면 안 된다. 양자 다 책임을 물어야 하고, 양자는 다른 범죄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는 건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가 굉장히 힘들다. 전근대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이 이런 정도의 학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난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는 (으레) 이런 학살이 일어났나? 그렇지 않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문명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또 하나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때처럼 한국전쟁 전에도 학살이 일어났다는 거다. 4.3 때 너무나도 엄청난 학살이 벌어지지 않았나. (앞에서 이야기한) 진상 조사 보고서에 (당시) 2만5000명에서 3만 명이 희생된 걸로 추정된다고 돼 있다. (제주도) 전 주민의 10퍼센트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학살을 당한 거다. 또 여순 지구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살됐나. 이것들은 다 전쟁 전에 일어난 것이지 않나. 제주 4.3 학살은 보도연맹원 학살과 함께 양대 학살로 꼽히고 둘 다 군경에 의한 거다. 그렇기에 이런 엄청난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 연구, 책임 추궁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뉴라이트나 극우들이 얘기하는 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극우 반공 세력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 아닌가. 뉴라이트는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상당히 있지 않나.
극우 반공 세력은 부정부패가 심했다. 특히 선거 부정이 아주 심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만이 아니다. 그리고 유신 헌법과 전두환 신군부 헌법 같은 건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자유민주주의를 뿌리째 뽑는 행위 아닌가. (이런 게) 자유민주주의의 최대의 적 중 하나다. 그야말로 유럽 역사에서 얘기하는 파시즘 현상과 연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반공 독재의 추종자들 또는 하수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거론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학문을 어떻게 보고 양식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
무덤 위에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프레시안 : 학살은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다.
서중석 : 민간인 대량 학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이 무섭고 철저한 극우 반공 독재가 가능했겠나. 공포에 의한 극우 반공 독재가 아니었나. 예컨대 보도연맹 사건을 생각하면, 어느 지역에서건 학살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죽은 거다. 이랬을 때 (정부가 부당한 일을 해도) 정부를 비판한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나. 바람이 불면 길가의 풀이 눕는 것처럼 국가 권력에 순응하고 묵종하는 인간을 만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정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것 아닌가.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도 이런 걸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 이전에도 이승만 정권은 굉장히 강한 반공 정책을 시행했다. 4.3사건, 여순사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1949년 당시 감옥에 갇힌 사람의 80퍼센트가 사상범이었다. (권승렬) 법무부 장관도 (1950년 2월) 죄수의 8할 정도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라고 증언했다. 당시 <조선일보>도 사설에 '약방의 감초 격으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고 썼다. 반대파나 개인감정이 있는 사람을 너나없이 상대방을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있다고 사설에 쓴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였는데도 1950년 이전까지는 극우 반공 체제가 굳건히 세워졌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반공주의가 그야말로 내면화돼서 공포에 질식된 사회라고 여러 사람이 강조하는 건 이 전쟁을 겪으면서부터다. 전쟁에서 제일 무서운 경험이 무엇이겠나. 학살과 북한에 협조했다는 것, 제일 큰 게 이 두 가지다. 그게 민주주의를 세우는 걸 굉장히 힘들게 했다. 우리 사회를 정상적으로 이끌어가는 걸 참 어렵게 만들었다. 노동 운동을 하건 농민 운동을 하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참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으로 이런 걸 한 거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저들은 국가 건설 과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쨌건) 그건 도무지 말이 아닌 거다. 내가 거듭 강조하지만 대한민국을 정말 훌륭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1948년) 5.10선거 때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와 달리 부정부패로 혼탁하게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히 훼손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걸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본다.
프레시안 :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반공 투쟁을 강조하는 이들에겐 자신들이 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정말 단정 세력, 극우 반공 세력이 새 나라를 세웠는가. 난 이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새 나라로 세우려고 한 사람들은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도 제정하고, 좋은 헌법과 좋은 농지개혁법도 만들었다. 또 제2대 국회에서는 사형(私刑)금지법을 만드는 등 민간인을 지키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이런 것들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와 달리) 극우 반공 세력의 큰 부분은 친일파다. 이자들은 새 나라를 세우려 한 게 아니라 일제 유산을 답습한 거다. 일제 것을 이어받아 구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참 못된 자들이었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다.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가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3.15 부정 선거도 이자들이 저지르는 것 아닌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그런 주장을 보면 정말 놀랍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력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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