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초견진(初見秦)
한비자가 진시황을 만나기 위한 글이다. 군주의 입장을 피력하는 한비자를 보면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군주를 바라보는 마음, 신하를 바라보는 마음, 정작 본인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그냥 3인칭 관찰자 시점인가?
신하들이 군주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형식의 글이 나온다. 어떤 면에서 군주가 밟아야 할 때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군주는 열심히 하는데 신하가 그렇지 않아 더디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 글을 읽고 나면, 한비자에게 군주는 무엇이며? 군주의 자격요건은 무엇으로 보는지 궁금해진다.
또한 패업의 더딤이 모사와 책사, 장군과 병사와 같은 신하의 책임이라면 군주는 완벽한가? 그렇지 않다면 한비자는 진시황에게 너무 과도한 아부를 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에 한비자는 진시황을 어떤 의미와 가치를 두고 이야기했을까? 진시황의 뜻을 쫓아 패업을 완성하는 것일까? 본국의 한나라의 성장을 위한 것일까? 진시황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입신을 위한 선동일까? 다양한 생각이 들게 하는 1편이다.
2편 존한(存韓)
앞의 세 꼭지는 한비자가 한나라를 위한 제안이 들어있고, 뒤의 두 꼭지는 동문수학한 이사가 한나라에 보내는 제안이 함께 담겨있다. 1편의 입장에서 한나라가 존재해야 합종을 방지한다는 한비자의 말보다, 이사가 한번 함곡관에 진을 치코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한나라를 핍박하는 상황을 보면 이사의 의견이 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한 번 배신은 많은 고민과 용기를 갖고 결단하게 한다. 하지만 두 번째는 쉽다. 딥러닝처럼 학습효과가 생기고, 유사하고 유리한 상황이 되면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나름이다.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한비자가 한나라를 살리려고 했다면 한나라를 존속시키는 제안과 이을 뒷받침한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 우리가 보증, 담보라고 하는 것은 그 약속을 돈독히 할 목적임과 동시에 말로 기망하거나 사기를 칠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사전에 합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3편 난언(難言)
말이 부족한 수단이란 것을 마흔이 다되어 알게 되었다. 난언 편에서 한비자가 말하는 상황을 보면 얼마나 다채롭게 사람의 태도와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의도를 면밀히 관찰했는지 알 수 있다. 대화란 반쪽의 거울을 들고 서로를 마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말을 통해서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말을 통해서 타인의 생각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동시에 타인의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도 하고, 왜 이 말을 하는지 의도를 해석하기도 한다. 잘 써진 명문이란 여러 번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한편 내 생각엔 군주를 시대적으로 리더, 신하를 시대적으로 팔로워라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꺼리는 것이다라는 책의 소제목처럼,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며, 뜻을 함께 도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욕이 더 강한 것이다. 물론 내가 옳을 수도, 타인이 옳을 수 있지만 말이다.
문제는 군주는 완벽한가? 완벽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런 문제제기가 생긴다. 결국 신하란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군주가 바보 천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듯, 말을 금하고 자리를 떠나야 하나? 아니면 고사의 충신들처럼 목숨을 바쳐 간언을 해야 하는 일일까? 현명한 군주와 지혜로운 신하 사이의 이상적 관계에서 한비자의 말은 좋은 말이다. 멍청한 군주와 사리사욕이 가득 찬 신하 사이에 난언의 깨달음이 의미가 있을까? 군주는 법에 지배를 받지 않고, 신하는 법을 통해서 매진하는 주장에서 보면 바보와 바보의 조합은 어쩌란 말인가? 서로 몽둥이를 들고 교체를 해야 하는가?
현명한 군주는 올바르게 판단하고 분별 있게 정리한다고 보면 그 대상을 진시황으로 볼 때 멕이는 말인지, 아부하는 말인지, 도발적이거나 전략적으로 유세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생긴다. 진정 그 대상에 대한 선한 마음일까 아니면 이해관계를 계산해 본 것일까?
그래도 사례를 통해 옳고 그름의 이성적 의미를 떠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 수준이 시이적절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중요하다. 내게 말은 어찌 되었던 부족한 수단일 뿐이다. 人이 言을 하면 신뢰가 시작되는 것이고, 信과 行이 하나가 될 때에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4편 애신(愛臣)
지위는 역할이란 책무가 있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이 권한이다. 절대군주의 지위는 신하가 넘보지 말아야 한 선이란 것이 있다. 현대 조직으로 보면 지위에 따른 역할과 책임(Role & Responsibility)이 있다는 말이며, 그 선을 넘으면 규칙과 제도로 제재를 한다. 춘추전국시대 군주란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고, 신하는 법으로 구속되는 존재라는 점이 현대에는 민주주의 제도에 따라 개선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선을 넘으면 무례해진다. 책에서는 사악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5편 주도(主道)
군주의 의도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정과 같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다다라 그것을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취지다. 그런데 군주도 인간으로 이런 도를 강요한다고 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귀곡자란 책을 보면 어찌 보면 신하들을 위한 대책서와 같은 느낌을 들게 하지만, 한비자는 군주를 위한 정책서를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신하가 군주의 정보를 차단하고, 군주가 권한을 넘어서는 재정권, 통제권, 상벌규정을 위임하거나 신하가 사조직을 형성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군주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고 말한다. 현대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의 정보를 차단하고, 권한 밖의 재정을 사용하고, 조직의 인사를 통제하고, 상과 벌을 주는 규정을 넘어서며, 자신의 친하고 따르는 조직을 별도로 구성한다면 조직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비자가 법가의 법, 술, 세를 아우르는 사고를 이끌어 낸 것도 어찌 보면 통합적 성찰에 의한 것이다. 새겨들은 말이다.
이 말을 곱씹어 보면 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보고 이를 분주하게 시행하도록 해야 하고, 군주는 더 좋은 의도를 통해서 신하들이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다만 그 의도를 신하들이 미리 알고 쫒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군주는 법과 제도로부터 자유롭고, 신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며 이런 고유권한은 나눌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편에서 지혜를 버려 총명함을, 현명함을 버려 공을 쌓고, 용기를 버려 강함을 얻는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군주가 일일이 다 해결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고, 손수 다 한다는 말이 아니다. SNS에서 나오는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가 그러겠지만 똑부는 결국 지쳐 번아웃되거나 엔간히 하라고 구성원들과 싸우기 쉽다. 군주와 리더는 타인들의 노력과 결과를 수확하는 역할이다. 그렇다고 노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주와 리더는 조직의 플랫폼을 유기적으로 구정하고 이를 제도와 규칙으로 만든다. 신하와 팔로워는 조직 기능으로써 그 역할의 성과를 내는 일이다. 과거에 한 번 신하는 영원한 신하인 경우가 많고, 현대 사회도 한 번 직원은 왠만하면 직원이다. 대표이사도 전문직이면 소유과 경영이 분리되는 시대다. 이런 해석이 의미 없어 보이지만 내가 살아가는 경기장의 규칙이라고 생각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좋지 않을까?
한비자를 이렇게 저렇게 본 적은 많은데 완역본을 보는 재미가 또 색다르다. 법치를 주장하는 시대에 법가의 글을 보며 현실과 이상의 궤리를 본다. 희한할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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