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날이 무척 덥다. 도서관 가다가 지치다. 지난번 출장 다녀와서 사라진 만년필이 아쉽다. 잃어버린 일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각인을 해두었는데. 같은 녀석으로 사서 정을 붙이는 중이다. 여전히 종이와 만년필 감촉이 따뜻하게 열기가 올라오는 태블릿보다는 낫다.
서울은 교통비가 25% 오르고, 전기세는 작년부터 5번 오르고, 가스비도 오르고, 환율은 작년 초와 비교하면 12% 이상 올랐다. 지하철과 마을버스도 오른다고 한다. 도서관 옆에 들른 커피가게에 입간판에 스무디 4천 원이라더니 키오스크에서 주문하려니 5천 원이다. 여기도 25%다. 기름값은 1700원을 넘어가고 있다. 매일 쓰는 비용이 늘어나는 것이 먹기 좋게 털 뽑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는 시절이다. 수개월째 교역적자와 재정적자, 운영하는 꼴을 보면 가관이란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법치를 운운하는 자들의 말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비자를 이런 땡여름에 읽고 있다. 경제가 이익을 중심으로만 돌아간다는 편향된 전제가 사람의 행동원칙과 오차가 존재하듯, 나는 법치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만해야 경제도 법과 제도도 불만이 없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11편 고분(孤憤) 홀로 분격해하다
한비자 중 11편 고분과 12편 세난(說難)은 유명하다. 고분은 세상에 분노하고 세속을 질책하는 법가의 울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한비자는 적나라하게 법술에 정통한 자들은 정의론만 강조하다 등용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마치 1 급수가 5 급수의 세상에서 1 급수로 존재하려는 노력처럼 느껴진다. 바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기분이 나쁘니 그럴 수밖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올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대상은 타인에 대한 기준일 때가 많다. 동일한 원칙을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성인군자다. 공자님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스스로에겐 관대하고 또 관대하려고 하고 그것이 문제의 단초가 될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특성 아닌가?
이 고분 편에서는 법술가와 중신(권력을 쥔 신하)의 차이를 분석한다. 사회에서 들어 본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네가 내 자리에 올라와서 하고 싶은 걸 해라", "하고 싶은 것은 나 떠나면 해라" 이런 표현을 듣다 보면 김영수의 '간신론'이 떠오른다. 이 편을 읽으면 내 관심사는 '법술가가 권신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생각이다. 법술가도 인간인데 법과 제도를 세우고 군주를 모시는 충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비판하던 권신의 세계로 달려갈 것인가? 전자는 법술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기대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역사의 흥망성쇠 속에 나라가 망하는 과정에는 사람들의 전횡의 반복이다. 인간의 역사에 그치지 않고 반복되는 속성을 보면 돌아볼 부분이 많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법술이란 영원한 진리처럼 확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 개념과 원칙이 세상의 상황에 부합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원칙의 근간을 세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확인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통한 성취가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한비자는 권신과 현명하지 못한 군주를 마주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살당했다. 자신의 관찰과 분석을 스스로 입증했다는 말이고, 또 그의 원칙과 개념이 진시황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면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셈이다.
한비자는 군주와 측근도 지혜롭고 현명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법술가는 모두 현명한가? 어떻게 법술가, 중신, 군주 사이의 간극을 극복할 것인가? 친함이 문란의 근거가 되는 관점이 맞는 부분이 있고, 친함이 존재함으로 협력해서 더 나은 성취를 이끌어 냄이 존재하는데 균형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현대사회에서 시스템과 프로세스, 프로세스를 규정하는 제도와 법률을 만든 것은 봉건제도에서 일어나는 "현명한 군주"와 "지혜로운 신하"라는 로또의 희박한 확률을 위한 보완제도가 아닐 수 없다.
12편 세난(說難) 설득의 어려움
베스트셀러인 '설득의 심리학'이란 책이 있다. 세난을 읽어보면 몇 장 되지 않지만 충분히 좋은 뜻을 획득할 수 있다.
한비자는 설득의 어려움, 설득의 방법, 설득이 실패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언급하고 있다. 이 설명과 달리 한비자가 걸은 길은 상이하다. 자신의 뜻을 펼치고, 이를 진시황이 보고, 그를 만나 설득을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고, 친구의 모함에 빠져 주살된다. 그의 뜻이 전해진 것으로 절반의 성공일 뿐이다. 그가 분석을 통해 탁월한 견해를 제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려운 상황을 자초해 목숨을 잃었다면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가 말한 설득에 대한 설명은 탁견임에 틀림없다. "설득의 핵심은 지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응용하는 데 있다"라는 명확한 설명이다. 최근의 추세에서 문제해결 능력(Problem Solving)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 책대로 되는 일이 드물다(책은 과거의 사실을 정리하고 잘해야 이를 바탕으로 예측할 뿐이다) 그러나 책도 안 보면 형편없는 일이 생긴다. 세상에 이로운 문명을 학자들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거드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전문가라 불리는 태반이 "안 되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란 비아냥이 존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는 드문 이유다.
"설득의 어려움이란 설득하려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려 내가 설득하려는 것을 그에게 맞출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있다"라는 한비자의 말은 '설득의 심리학'이란 책을 한 줄로 설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실패는 진시황의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만들어지는 상황의 이해에 대한 오판, 실수 때문일까? 협상과 미팅에서 누울 자리가 아니면 아예 가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 낫지 않나?
"설득의 기초는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하고, 부끄러워하는 부분을 감싸주는 것이다. 상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은 후에 자신의 지혜와 말재주를 보여야 한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이리 잘 아는데 왜 목숨을 잃었을까? 의문이 들다가도, 역사와 세상을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둘과의 관계가 아니라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달라붙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화가 왜 발생하고, 송강 정철이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일로 호남 선비를 천 명 가까이 물고를 낸 것을 보면 그렇다.
올바른 것이 반드시 채택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지 않은 일에 상대를 칭찬하고 감싸주고 나서 하는 지혜와 말재주가 과연 옳을까? 뜻을 같이 할 사람이 올바르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시대적으로 군주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일이라 그랬을까? 진승, 만적의 난에 나오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말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유다. 자유와 평등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켜낼 힘이 있을 때 가치가 발휘된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부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세상은 언제나 히어로를 기대한다. 그 말은 빌런이 차고 넘친다는 말이라고 해석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 한비자는 그 도구로 법술을 논의했다고 이해한다.
13편 화씨(和氏) 화씨 이야기
화씨지벽의 고사가 나온다. 옥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능한 군주덕에 두 발의 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은 후에 그 옥을 알아보는 군주가 나타난다. 오기의 고사를 보면 법을 세워 나라를 융성하게 하지만 동시에 법을 세우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도 함께 생긴다. 군주와 신하를 이익의 관계로 보았다면 한비자는 이런 대비책도 더 포괄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어제 영화를 보면서 느끼듯 적과 문제는 항상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기의 사지가 떨어져 나간다. 상앙도 마찬가지다.
법술세의 원칙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실행할 힘이 스스로에게 없다면 의미가 없다. 당시에는 전적으로 군주에 선택 문제다. 현명한 군주를 만나는 행운은 큰 복록이나 확률이 낮다. 그러면 과거에는 역성혁명의 대역죄인이나 현대사회에서는 현명한 리더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자신의 그릇과 분수를 알아야 하니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의 문제는 분수를 몰라서 발생하는 일이 지천이다.
그나마 2천 년이 지난 지금 민주주의 공화제가 훨씬 높은 가능성을 주고 있으니 감읍해야 하는지, Stil Hungry!라고 해야 할지 참.
14편 간겁시신(姦劫弑臣) 간사한 계략으로 군주를 겁박하고 시해하는 신하
역사 속에 수많은 왕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 정사라 보기 어렵지만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이란 책을 봐도 그렇고, 이런 소재로 이루어진 영화를 봐도 그렇다. 간신이란 실력 있는 신하고 조정에 들어 일취월장하면 승진을 하고, 일정한 시점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일이다. 누적된 신뢰를 자신의 이익과 바꾸는 일이다. 모든 조직은 인사권(임용과 상벌규정)과 재정권으로 통제된다. 세상을 돌리는 두 바퀴가 권력과 금권이라고 하는 이유를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편을 읽으면 몇 가지 한계점이 느껴진다. '현명한 군주가 아니면 법술로 아는 신하의 의견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구절이다. 결국 군주가 현명하냐 안 하냐가 결론을 내는 핵심요소다. 당시 백성은 가축처럼 기르는 (목민심서란 제목만 봐도) 대상이라 할 때, 백성에게 군주는 그냥 로또인가? 그렇다. 현재는 조금 나아졌지만 역시 로또처럼 낮은 확률이 병아리 눈물만큼 올라갔을 뿐이다.
한비자에겐 현명한 군주의 보증수표는 없다. 대충 멍청한 군주라도 법술을 받아들이면 세상이 좋아지고, 군주도 좋다는 의견의 틀을 넘지 못한다. 갑자기 등신이 개과천선한 초장왕의 사례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오히려 좌절감을 준다.
정치의 제도가 변화하고 법과 제도란 근간 속에 범위를 규정하여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현대사회에 이루어진 하나의 진보다. 대의제도란 불가피한 수단이 구멍 숭숭 난 그물에 비유할 수 있지만 그나마 이런 제도가 존재하기에 세상의 기틀이 유지되는 것이다. 살을 잘 붙이냐는 군주 탓이라고 해야 할까? 그 시대의 수준 탓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기업경영에 애자일 프로세스(agile process)를 도입하는 것은 더 진보적이다. 기획, 계획, 실행, 조정, 재실행을 통해 발전하고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다시 기획, 계획, 실행, 조정, 재실행을 반복하니 말이다. 정부도 기획, 계획, 실행, 조정을 하지만 민간보다 처절하다고 할 수 없다. 하는 일의 특성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익과 더 밀접한 기업이 재빠르다고 할 수 있고, 통치자와 관료를 이익관계로 본다면 이 분야는 조직의 이익의 개념과 개인들의 이익 개념차이가 더 큰 것이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군주에 대한 한비자의 의견을 지금 시대에 적용한다면 아마 독재자에 대한 아부 섞인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이 될 수 있다. 이걸 응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도 많겠지.
15편 망징(亡徵) 멸망하는 징조
한비자도 망할 징조가 있다고 반듯이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적고 있다. 전제군주라는 절대자에게 혓바닥과 손가락 잘못 놀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47가지의 사례를 적고 있으니, 대단한 용기는 틀림없다.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언급된 47가지를 두루 살펴보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맞춰보게 된다. 점검해 본 사견으로는 26가지의 망징이 지금 시대에 존재한다. 아무리 낮춰도 20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시쳇말로 망삘이 솟아오르는 시대인가? 자식들이 살아갈 시대가 지금 만들어지고, 후세가 살아갈 문명의 시발점이 지금이라고 보면 미안하기 그지없다.
16편 삼수(三守) 군주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
1) 중요한 신하의 잘못을 간언 할 때 군주는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2) 신하의 선호가 측근에 의해 좌지우지돼서는 안 된다.
3) 군주의 고유한 일을 신하가 해서는 안된다.
이 세 가지 지켜야 할 원칙을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3)은 확실하다. 2)은 원칙이라고 하기 애매하다.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것을 보면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 반대의 예는 우리나라 역사와 현대 사회의 역사에도 수없이 존재한다. 1)도 마찬가지다. 그 잘못의 범주가 어떠냐 하는 것이다. 기업에서 회사를 말아먹고, 나라를 말아먹는 말을 누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칙은 예외적인 사항이 최소화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수 편에서는 형겁(形劫)을 말하고 있다. 지금 시대는 검찰이란 조직이 권력을 중심부터 들어가 정의(Justice)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헌법 1조는 재민주권의 원칙이란 법치를 근간으로 정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치정자들의 말이 아니라, 말과 행위의 일치함, 그 성취로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한비자의 형겁은 군주의 시해를 말하지만, 우리의 역사에는 주권자들의 형겁이 존재하고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 시대의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후대는 그 역사의 시대로 이해하고, 지금 시대에 그 배움을 응용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뭘 하러 배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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