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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친일파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
프레시안 :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는데도 친일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 교학사 교과서. ⓒ교학사 |
서중석 : 해방 후 68년이 지났다. 그 이전의 행위를 지금도 문제 삼으며 단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대표적인 경우는 나치 협력자나 친일파다.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다. 친일파가 계속 문제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현재의 문제로 부각되기 때문 아니겠나. 뉴라이트나 수구 언론에서 친일파를 계속 옹호하는 걸 보더라도, 그만큼 그 사람들에겐 중요한 문제, 현재의 문제란 생각이 든다. 이번 (교학사) 교과서 파동에서도 그런 면이 다분히 보인다. 이렇게 계속 살아 있는 문제가 되는 건 친일파 문제가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란 생각이 많이 든다.
반민족 행위를 해방 후 속죄하고 반성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양심껏 살아가려는 노력을 했다면 (지금 같은) 친일파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와 그 후예)가 수십 년간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나. 그 후 한국이 개방적인 사회로 가면서, (저들이) 권력에서 소외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면서 (저들이) '이 권력을 어떻게든 놓아서는 안 된다' 하게 됐고, 그런 것이 친일파 문제가 계속 생기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이승만 정권, 유신 체제 때도 잘 드러난 건데, 친일파의 중요한 특징은 권력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계속 움켜쥐려면 상대방을 '종북' 같은 걸로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뿌리와 연관된 것을 미화할 수밖에 없다. 그게 결국 친일파 옹호로 나타나고, 이번 교과서 문제로도 드러난 것 아닌가 한다.
프레시안 : 친일파라는 용어가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다. 엄밀한 개념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표현 아니냐는 의문이다.
서중석 : 사실 그 문제는 학계에서 수십 년간 얘기됐다. (친일파란 말이) 감정적이고 비학문적인 용어 아니냐, 다른 용어를 쓰는 게 적절하지 않냐는 얘기였다. 그런데 친일파 대신 다른 말을 쓸 경우 부적절하다란 생각이 더 든다. 다른 말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한말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친일파의 행위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인가 할 때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친일파란 단어 속엔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고 할까, 한국인의 역사의식 같은 것들을 잘 보여주는 면이 있다. 한마디로 친일파(란 말)처럼 그들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용어는 없지 않나 (하는 거다). (정리하면) 친일파라는 단어에 문제를 느낄 수는 있지만 친일파를 일반적으로 분석하고 얘기할 때는 적절한 것 같다.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하는 뉴라이트와 수구 언론
프레시안 : 해방 직후엔 어땠나.
서중석 : 해방 직후에도 친일파란 말을 썼다. 일제 때도 많이 썼고. 다만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처단법을 만들 때 '부일(附日) 협력자'란 말을 썼다. 부일 협력자란 표현도 어느 정도 사용됐다.
왜 이 친일파란 단어가 그렇게 한국인한테 주는 의미가 분명하냐. 예컨대 유럽의 경우 프랑스에 친독파, 독일에 친영파가 있을 수 있다. 그 말엔 '문제가 심각하다'는 인식이나 죄의식 같은 게 들어 있지 않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를 겪은 인도에서 친영파, 필리핀에서 친미파란 딱지를 붙여 영국 혹은 미국과 관계가 있었던 자국인을 매도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다른 동남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에서 친일파라고 할 때는 인도차이나의 친불파, 인도의 친영파, 필리핀의 친미파와 그 뜻이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친일파 하면 우선 대한제국 말기 매국노가 연상된다. 을사오적이 제일 많이 알려져 있지 않나. 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섰던 이완용, 송병준 같은 악질 친일파를 많이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이 활발해지자 그걸 탄압하는 데 앞장서고 민중을 감시한 자들을 친일파로 많이 본다.
1930년대 이후 특히 전시 체제로 갈수록, 한국인들은 친일파에 대한 반발심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억압의 강도도 월등히 심해질 뿐만 아니라 공출이나 강제 동원 같은 것들에 앞장선 자들이 한국인 가운데 많았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침략 전쟁에 나가라며 학병과 징병에 응하도록 권하거나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쓰는 등의 방식으로 전쟁 협력 행위를 한 자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일제 말에 민족의식을 완전히 말살하고 일본인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황국 신민화 운동도 벌어지지 않았나.
친일파 하면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이 연상된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친일파는 용서받지 못할 자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친일파는 유럽의 나치 협력자와 거의 같은 뜻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그런 주장은 친일파가 해방된 그날부터 참 줄기차게 펼친 거다. (예컨대) 한국인 중 (일제에) 세금 안 낸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주장이다). 세금 중엔 농사짓는 데 꼭 필요한 수리세 같은 게 있다. 또 담배를 피우면 연초세를 물어야 한다. (일제 치하라고) 담배 안 피울 수 있나. 수리세 내고 연초세 냈다고 해서 일제에 협력한 건가? 그리고 강제 동원돼서 끌려가고 강제 공출된 것, 이런 것도 일제에 협력한 건가? 그 당시 한국인 중 어느 누구도 이런 걸 일제에 협력한 거라고는 안 봤다. 당시엔 왜정 치하라고 했는데, 왜정 치하에서 악독하게 당한 거라고 봤다. 해방된 그날부터 문제 삼은 건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악질 친일파다.
독일의 경우를 봐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지시로 전쟁에 나간 군인이나 공무원들을 다 협력자라고 몰아세우지도, 재판에 붙이지도 않았다. 모두 반성해야 하는 행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중 문제가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전부 단죄 대상으로까지 얘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견해가 많았다.
프레시안 : '그땐 다 협력했다'는 식의 공범론은 부적절하다는 뜻인가.
서중석 : 그렇다. 그런 식으로 (친일파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수렁에 같이 빠져 같이 죽자는 참 파렴치한 논리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해방 후 반성은 없고 원성만 키운 악질 친일파
프레시안 : 해방 직후 사람들은 친일파 문제를 어떻게 봤나.
서중석 : 대다수의 한국인은 해방을 정말 감격스럽게, 꿈같이 맞이했다. 그와 달리 공포 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맞이한 사람들도 있었다. 악질 친일파다. 해방 직후 친일파 중 악질들은 다 도망쳤다. 당시 기록을 보면, 경찰의 경우 80% 넘게 뺑소니쳤다. 미군이 들어와서 '현직에 복무하라'고 지시할 때까지 무서워하며 도망 다니는 데 바빴다. 해방 직후 대중이 악질 친일파에 대해 얼마만큼 분노에 떨고 있었는가 하는 걸 단적으로 얘기해준다.
대부분의 정치 세력도 이구동성으로 친일파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친일파 문제는 차차 (처리)해도 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래서 한민당은 친일파 옹호파란 얘기도 많이 들었다. 또 이승만이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를 조직하는데, 여기서도 '친일파 처단을 지금 꼭 해야 하느냐'는 식의 얘기가 나왔다. 한민당도 그렇지만 독촉중협에도 친일파가 많이 들어가 있었다.
안재홍 같은 중도 우파는 해방 직후 친일파 처단에 적극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해방 직후 우익이 좌익보다 약했던 분위기 등을 반영해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휴회한 1946년 5월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면서 안재홍 등 중도 우파가 친일파 처단 주장을 상당히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렇게 된 건 해방 후 친일파가 한 짓이 (이들에게) '이거 큰일 났다. (친일파가) 우리 사회를 망치는 존재 아니냐'는 위기의식을 갖게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방 후 부정부패가 무지하게 심했는데, 이걸 척결하려면 친일파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거다.
사실 일제 때 친일파가 부정부패를 정말 잘했느냐고 하면 그렇진 않다. 조선총독부가 그런 것에 상당히 엄격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가) 부분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긴 했지만 노골적인 부정부패 행위를 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해방 직후엔 친일파가 어디서나 부정부패와 관련돼 나타난다.
또 한국이 민주주의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게 해방 후 대세였다. 그런데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어 친일파가 암적 존재라는 생각을 많이 갖게 했다. 안재홍 같은 사람도 그걸 우려했다. '미소공위가 휴회하면서 분단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는데, 친일파가 그야말로 분단 세력 아닌가. 분단만이 살길이라며 단정 운동에 앞장서지 않았나. 새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 친일파처럼 심각한 문제가 없다.' 이런 생각을 많이 갖게 했다.
프레시안 : 그렇잖아도 어려웠던 해방 직후 상황에서 부정부패는 경제에 치명타였을 것 같다.
서중석 : 해방 직후 '친일파를 빨리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온 건 민중을 억압하고 고문한 악질 친일 경찰 때문이다. 친일 경찰은 (1946년) 10월항쟁, (1948년) 4.3사건과 여순사건이 일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실 해방 직후 서민들이 친일파에 대해 악감정을 많이 품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친일파가 모리배 짓을 많이 해서다. 이게 신문 자료에 참 많이 나온다. 일제 말에도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지만, 해방되고 또 얼마나 어려웠나. 모두 허리띠 졸라매고 같이 고통을 참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 경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친일파는 오히려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미군정 등 권력과 결탁해 쌀 같은 걸 매점매석했다.
해방된 해 남쪽은 풍년이고 북쪽은 흉년이었는데, 나중에 남쪽에서 품귀해서 쌀 소동이 일어난다. 10월항쟁이 일어난 것도 쌀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일제 말에 고무신을 비롯한 생필품을 배급했고, 해방 후에도 그중 일부는 배급했다. 그런 생필품을 마구잡이로 사재기했다가 값이 뛰면 팔고 그러니까 모리배에 대한 원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일파가) 우리 생활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흉 아니냐. 따지고 보면 모리배가 다 일제 때 악질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이다. 경제가 잘 풀리기 위해서라도 친일파를 빨리 처단해야 한다'는 논리가 많이 나타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
친일파 되살린 미군정과 이승만
프레시안 : 그런 친일파가 살아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서중석 : 잘못 유포된 주장 가운데 하나가 해방을 무조건 혼란기로 보려는 견해다. 해방 직후엔 그렇게까지 심한 혼란은 없었다. 살상 행위라든가 치안을 크게 어지럽히는 행위 같은 건 없었다. 역설적인 현상이지만 미군정이 설치되면서 오히려 혼란이 많이 일어났다. 미군이 친일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친일파 처단의 필요성을 강조한 데는 한국인들의 정의감, 해방 직후에 특히 느낄 수 있던 강한 정의감이 많이 작용했다. 그런데 당시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던 이승만 같은 사람은 친일파를 옹호했다. 친일파 문제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 수준이 아니다. '친일파를 옹호하는 가장 주된 세력이 아니냐', '친일파가 발호하는 온상이다',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이승만은 주요 지도자 가운데 '친일파를 지금 처단해선 안 된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분은 상당히 교묘하다고 할까, 그런 면이 있었다. 뭐냐 하면 '독립 국가를 수립한 다음에, 우리 정부를 가진 다음에 우리 손으로 처단해야지, 어떻게 남의 손에 처단되길 바라느냐. 외세에 의존해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런 아주 재미난 논리랄까 특이한 논리를 폈다. 이승만은 권력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친일) 경찰 간부들을 감싸거나 치하하는 일들을 많이 했다. 그런 식으로 경찰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적극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이미 여러 경찰서나 지서에선 '이승만이 우리 최고 지도자'라며 그 사진을 걸어둔 데도 있었다고 얘기한다.
프레시안 : 이승만 등이 친일파를 비호하는 속에서도 친일파 청산 노력은 계속됐다. 대표적인 것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다.
서중석 : 1947년, 미군정 산하 기관이라고 볼 수 있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를 단죄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한민당, 독립촉성국민회(독촉중협의 후신) 등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의 반대를 딛고 통과됐다. 그런데 미군정은 친일파 청산에 워낙 소극적이어서 이 법을 공포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그렇다면 입법의원 의장을 사임하겠다'고 강경하게 배수진을 쳤다. (미군정은) 처음엔 김규식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끝내 이 법을 공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계기를 만나면서, 친일파 처단 문제는 급물살을 탄다. 헌법을 (1948년) 7월 17일 공포하는데, 제101조에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집어넣었다. 정부 수립 전인 8월 5일엔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 처단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 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긴급동의안을 냈다. 그래서 그 날짜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정부 수립 공포 다음 날(8월 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바로 국회에 상정된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면, 제헌 국회가 헌법 다음으로 중요시한 게 친일파 처단이었다는 거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좋은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활동하게 된 건 무엇보다 친일파 처단이 긴급하고 절대적인 과제이자 우리 정부가 들어서는 마당에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총체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헌 국회 의원들이 그걸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친일파는 미군정 시기에 이미 클 대로 컸고 이승만 주위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제헌 국회에 아주 강하게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시내에서는 물론이고 국회 안에서까지 삐라를 뿌리면서 그런 활동을 했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 순응하라",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등이 적힌 삐라였다. 지금 여기저기 '종북' 딱지를 막 붙이듯이, 그때도 친일파가 자기들을 욕하는 사람들을 공산당 내지 그 주구로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반민법을 공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민법을 공포하지 않으면 양곡 관리 법안 같은 걸 국회가 통과시키지 않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양곡 관리 법안은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에 관한 법이었는데, 당시 긴급한 문제였다. 그래서 9월 22일, 할 수 없이 공포한 거다. 공포 다음 날(9월 23일), 친일파는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반공구국궐기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걸 눈에 띄게 지원했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
힘으로 반민특위 짓밟은 이승만과 친일 경찰
프레시안 :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반민특위는 당시 큰 기대를 모았다.
서중석 :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23일 구성돼 이듬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949년 1월 8일 친일파 거두로 원성이 높던 박흥식, 김연수, 최린, 최남선, 이종형, 이광수 등을 구속했다. 이번 (교학사) 교과서에서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여기 많이 포함돼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이 아주 강하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그해 1월 24일, 이 사람들 못지않게 악명이 높던 친일 경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이 대통령은) "치안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친일 경찰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국회는 그것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특위를 약화시키는 내용의) 반민법 개정안을 냈다. 그런데 국회는 그 개정안이 국회로 오자마자 표결에 붙여 부결시키고 정부로 그대로 이송한다. 그야말로 속사포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어째서 국회가 이렇게까지 나오느냐. 제헌 국회 의원들은 (1948년) 5.10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이고 그중 상당수는 이승만 지지 세력, 한민당 계열, 단정 세력으로 볼 수 있다. 그 세력들이 동조하지 않았으면 이런 국회가 성립될 수 없었던 것 아니냐고 얘기할 수 있다. 이건 당시 (친일파 처단에 대한) 국민의 뜻이 얼마나 강렬했느냐를 단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부는 결국 힘으로 친일 청산 노력을 짓밟지 않나.
서중석 : 이 대통령은 반민법을 무력화하려 한다. 그러면서 유명한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1949년 6월 6일)이 일어난다. 이걸 단순히 반민특위 습격 하나로만 보면 안 된다. 그 시기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 그러니까 국회 프락치 사건, 6.26 김구 암살 사건과 함께 봐야 한다. 이게 학계 일부에서 얘기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6월 공세다. (이승만의 행위를 학계에서) 역사를 과거로 퇴행시키려는 노력으로 보는 거다.
제헌 국회에서 반민법을 시행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걸려드는 노일환 의원을 비롯한 소장파다. 또 국회 밖에서 김구, 김규식 같은 독립 운동 세력이 강하게 버텨주니까 국회가 그런 활동을 했던 건데, 버팀목이던 김구가 암살되면서 친일파 처단은 결국 유야무야되고 만다.
친일파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하는 건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친일파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못한 데서 잘 드러난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 그랬다. 극단적인 극우 반공 체제를 유지하던 시기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친일파 문제는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화가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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