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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 친일파, 두 번째 마당

by Khori(高麗) 201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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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친일파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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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힘으로 눌렀다. 그렇게 수면 아래에 묻히는 듯했던 친일 청산 문제를 되살린 인물이 임종국이다. 임종국이 쓴 <친일문학론>은 친일 문제 연구에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서중석 : (그 책이) 1966년에 나왔다. 1967년에 내가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무렵 그 책을 우연히 샀다. 그 시기에 친일파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쨌건) 이 책이 집에서 없어졌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이 책을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신 체제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친일문학론>에서 봤던 일제 말 친일파의 논리와 유신 체제의 논리에 흡사한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구해야겠다' 해서 청계천을 두 번 이상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 책을 구하러 다닐 때 얘기를 들었다. '처음에 <친일문학론>이 나왔을 때 그것(친일 행위)과 관련된 자들이 순식간에 책을 사버렸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또 이 책이 그다음에 못 나오게 돼 있다.' 사실 1980년대에도 이 책은 금서 목록에 들어 있었다. 그만큼 친일파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건 뭘 얘기하느냐면, (1949년) 반민법 파동 이후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 친일파 문제가 지워지도록, 친일파 문제를 다시는 거론하지 않도록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극히 일부 학계를 제외하고는, 극단적인 반공 체제가 그렇게 가도록 한 것이었다.

하여튼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6월항쟁 이전에 <친일문학론>을 다시 구했다. 다시 한 번 세밀하게 정독하고 노트에 주요 내용을 옮겨놨던 게 기억난다.

프레시안 : 앞에서, 6월항쟁 때까지 친일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중석 : 친일파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친일문학론> 이외에도) 김대상이라는 분이 친일파 문제에 대해 상당히 좋은 글을 썼다. 반민법 파동에 대한 연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몇몇 비판적인 학자들 사이에서 '이렇게까지 잘못된 독재 체제가 들어선 건 해방 후 친일파 처단이 안 됐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1979년에 (1권이) 나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도 친일파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이것들 말고는, 친일파에 관한 연구가 6월항쟁 이전엔 별반 없었다. <친일문학론>이 나오기 전엔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다고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친일파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많은 국민에게 이 문제가 알려진 건 6월항쟁 이후다.

▲ 고 임종국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친일 청산 문제 되살린 임종국의 역작 <친일문학론>

프레시안 : 극우 반공 체제가 사실상 입을 틀어막은 셈이다.

서중석 : 그러다 보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일어나고 그랬다. 예컨대 18년, 그것도 우리 현대사에서 제일 가운데 토막이라고 볼 수 있는 시기를 지배한 박정희 같은 분(과 관련해서)도 그랬다. (생전에) 박정희의 전력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 때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의) 사상의 전력이 의심스럽다'고 한 거다. '박정희 후보가 (1948년에 발생한) 여순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사실 그때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왜냐면 <동아일보>가 (박정희와) 여순사건 관련 기사를 호외로 냈는데, 그 호외가 거의 돌지 못했다. 특수 기관에서 (대부분) 압수했다고 그런다.

박정희는 해방 후 군 내부의 남로당 프락치였고 그중에서도 핵심 위치에 있었다. 그 점이 중요했던 건데, 내가 여기서 문제 삼는 건 윤보선 후보 쪽에서 그 중요한 대선에서조차 그런 정보를 몰랐다는 것이다. 다만 (박정희가) 여순사건 직후에 재판을 받았다고 하니까 여순사건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여순사건에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여순사건 후 진행된 숙군 과정에서 남로당 프락치라는 사실이 드러나 예편을 당했다. <편집자>)

작년 대선 때 '박정희가 일본 군인이던 시절 쓴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였다'는 얘기가 TV 토론에서 나왔다. (박정희의 친일 전력이 거론된 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때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고 놀랐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하더라. 친일파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쉬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박정희처럼 중요한 인물이 일제 때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사람이 어떻게 창씨개명을 했는지 잘 모른다는 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프레시안 : 친일 행적을 입증할 자료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서중석 : 그렇다. 친일파 관련 자료 문제가 얼마나 풀기 어려운가 하는 건, 1950∼1970년대 연구와 관련해 얘기할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하나 들면) <친일인명사전>이 나올 무렵이었다. 그때 박정희 문제와 관련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 시기에 특별한 문서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 재판이 어떻게 됐을까'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얘기냐면, 그 재판이 진행되던 중 박정희가 만주국 군관으로 받아달라며 혈서를 썼다는 '혈서 군관 지원'이란 제목의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자) 기사가 공개됐다. 박정희가 '천황한테 진충보국하겠다'며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허락해달라고 하지만, 처음엔 허가가 안 났다. 그래서 다시 지원하면서 혈서를 쓴 것이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하겠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자료가 공개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에 유리해졌다. <친일인명사전>이 (무사히) 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는 <친일인명사전>에 부친의 이름을 싣는 것과 사전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해달라며 가처분신청을 냈다. 그 후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만주신문> 자료가 공개됐다. 법원은 그해 11월 박 씨의 신청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편집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5.5.31.∼2009.11.30.)가 (활발히) 활동하던 때에도 박정희 관련 문서를 찾으려고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연변을 포함한 만주 쪽으로 많이 수소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시엔 이 <만주신문> 자료를 끝내 못 찾았었다.

하여튼 친일파에 관한 자료가 1980년대까지도 참 적었다. 친일파에 대해 연구하거나 친일파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 요소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친일파 연구의 어려움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친일문학론>의 우여곡절이다.

▲ 2011년 11월 14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친일 문제 틀어막은 사회, 비밀 아닌 비밀이 된 박정희의 은밀한 과거

프레시안 :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은밀한 과거'는 오랫동안 비밀 아닌 비밀로 유지됐다. 다른 문제를 짚어봤으면 한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 좌절을 나치 협력자를 단호히 처단한 프랑스와 대조하는 경우가 적잖다.

서중석 : 나치 협력으로 단죄나 비판의 대상이 된 프랑스 사람이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나치 협력자 숙정 조치에 관련된 프랑스인은 150만∼200만 명에 달한다.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대숙청, <역사비평> 1995년 봄호. <편집자>) 15만 명 이상이 정식 재판소에서 사형이나 각종 징역형을 받았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도 나치 협력 문제로 각각 5만 건 이상의 징역형 판결이 내려졌다. 덴마크에서도 징역형을 받은 사람이 1만 명이 넘는다.

이처럼 유럽에선 나치 협력자에 대한 처단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중요한 역사적 과제였다. 거기에 비해 한국은 제대로 안된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잘못된 방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게 큰 문제다.

프레시안 : 이와 관련, 35년간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에선 독일에 점령된 기간이 4년밖에 안 되는 프랑스처럼 하기 어려웠다는 주장도 있다.

서중석 : 그렇지 않다. 두 가지를 얘기할 수 있다. 일제 지배 기간이 길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친일파가 언제 대거 생겨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말 매국 행위자들은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1930대 전반기까지 독립 운동을 탄압하고 민중을 감시하는 악질적 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는 자들도 그렇게 많지 않다. 친일파가 언제 대량으로 생겨나는가 하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 체제가 강화되고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이 아주 거세지면서다.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친일파 문제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이 문제가) 특히 심각했던 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이 나치에게 당했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다. 이 점을 우선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친일파, 전범 뒤에 숨어 책임 회피할 처지 아니다

프레시안 :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 협력자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일본 전범들은 도쿄 재판을 받게 된다. 그에 더해 유럽 각국과 중국 등에서 전쟁 협력자에 대한 재판과 처형이 이뤄진다.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도쿄 재판 같은 건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그전엔 전쟁에 진 나라가 배상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전범 재판에서) 인도(人道)에 반하는 죄를 처단해야 한다고 한 건 새로운 개념이었다. 그만큼 인류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처럼 비인도적 행위를 저지른 세력이 다시는 발호하지 않도록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인류사의 방향이었다.

일제 말 친일파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 공출, 징용, 학병 같은 것에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야 한다고 (친일파가) 한 것 자체가 전쟁에 적극 협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적극 옹호하는 글을 쓴 것 등도 나치 전범이나 일본 군국주의 전범과 마찬가지(로 인도에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전범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할 처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서중석 : 그렇다. 그에 더해 일제 말 친일파는 도저히 씻으려야 씻을 수 없는 악질적인 행위를 했다. '민족의식을 말살해야 한다. 한국인은 영원히 일본인이 돼야 한다'며 황국 신민화 운동을 여러 형태로 펼치지 않았나. 한국인 상당수가 거기에 가세했다. 이건 그 이전 친일 행위하고도 다르다. 예컨대 1910~1920년에는 '민족의식을 완전히 말살해 일본인이 돼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안 했다. 그런데 일제 말엔 그렇지 않았다. 이걸 중시해야 한다.

그래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일제 말 황국 신민화 운동을 한 자, 군국주의 침략 전쟁 찬양 활동에 가담한 자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던 거다. 그 수가 굉장히 많다. 중일전쟁 이전 시기의 것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숫자에 못지않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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