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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잡부(天上雜夫)_ 사업관리 시즌 2 (해외영업 시즌 1) )

리더, 경계인의 의무와 역할

by Khori(高麗) 2018.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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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사업본부를 어깨에 얹고 나니 어색하다. 누군가는 완장을 차는 것이 삶에 있어서 큰 목표이자 동기 부여 요인이다. 하지만 나에게 완장은 인간 문명과 조직이란 구성이 만든 매우 번거로운 장치다. 완장을 차야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완장을 차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람은, 완장을 차면 또 다른 수많은 이유를 찾는 전문성을 더욱 발전시킨다.  시간이 없다고 에둘러하는 말이 사실은 마음이 없다는 말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목표와 성과를 실현하고 부족함에서 배움을 일상화하면 완장이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 마음의 재촉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압도적인 실력과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말인 인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압도적인 실력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부족함을 이해하고 협력을 통해서도 실현하는 사람도 있고, 일정 수준까지 손금 없는 자로 살아서 비굴하게 올라갈 수도 있다. 인간의 머리는 실력을 쌓는 것에는 더디지만 그걸 피하려는데 사용하는 에너지는 엄청나다.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갑자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동사무소 공문원의 업무 프로세스가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 모든 사람은 넘치던, 부족하던 자신만의 생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견뎌내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조직의 입장에서 하나의 상징이고, 조직이 지향하는 다양한 상징 중의 하나를 그 리더를 통해서 현실로 구체화하려는 것이다. 그 영향이 누군가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익숙해진 것을 버리지 않는 게으름으로 꽉 차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부분을 실천하는가가 인생이란 시간에 차곡차곡 쌓여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런 이유로 리더는 다양한 부분에서 조직에 바람직한 태도, 타인이 인정할 만큼의 압도적 실력, 인품을 갖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속한 조직이 가고자 하는 것의 조율을 위해서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완장, 명찰이 나에게 부여된다는 것은 요구되는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알고 행동하는 것은 매뉴얼을 들고 일을 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충신이란 부여받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달성하기 위해서 무조건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 가깝다. 실패는 결국 일을 부여한 사람의 것이고, 역사의 충신들은 대부분 군주의 등신력을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다. 양신은 부여받은 일과 현실을 조율해서 부여한 사람의 기대에도 부응하고, 리더로서의 역량도 증대하는 사람이다. 양신들은 세상을 냉철하게 보는 철학자적인 자질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이런 리더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갖는다. 이런 양신의 자질에 타고난 성품을 갈고닦아 좋은 인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간신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간신은 실력이 있다. 실력을 쌓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힘쓰는 자들이다. 그 이익을 위해서 대단히 성실한 자들이다. 이는 역사가 입증한다.


 조직이 바라보는 기대에 대해 나도 많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류해 본다. 갖고 없는 것은 내부에 갖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리더는 누구보다도 갈등을 많이 한다. 내부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동시에 이타적인 생각과 삶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 조직을 대표하고 이를 다시 내부에 입력하는 이중적인 입장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영업이란 직무는 후자의 부분을 더 잘 이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영업직군들이 조직의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타오르는 촛불처럼 리더는 타인의 기대를 뒤통수에 달고 산다. 리더를 믿는 사람들은 리더라는 완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대상은 자신들의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모든 문제와 원인에서 나를 제외하기 경향이 높다. 이들이 잘 되게 도와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많겠지만 능력상 내가 이해하는 것은 이렇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목표가 본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질책은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 목표 방향으로 이루어진 행동과 좋은 결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목표에 대한 설명과 상황에 대한 판단을 교류하는 것이다. 리더의 태도가 상황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어렵다. 손이 많이 가고 더딜 뿐만 아니라 인내의 한계를 가장 많이 접하게 된다. 이런 효과도 없다면 그들이 잘하는 부분에 집중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때에 내가 고민하는 것은 그들의 장점과 직무가 그들의 성장과 발전에 선을 긋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고충을 받아들여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리더가 될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리더가 될 자질을 갖은 사람은 리더가 되도록 도와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역량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여기서 욕심이란 문제가 끊임없이 악마의 유혹을 보낸다.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관계가 파탄 난다. 리더는 누군가의 불 꺼진 어두운 마음에 불을 다시 붙여주고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더는 상징의 역할로써 조직에 불을 댕기는 발화점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압도적인 실력과 성품이 리더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누군가에게 줄 것이 있는 사람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유한 사람이다. 본(本)이 된다는 말은 누군가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말과 글보다 보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리더라는 완장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기 때문에 리더가 되는 것이다. 누구나 힘들고, 어렵고, 위험하고, 더럽고, 굴욕적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타인도 하기 싫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힘든 일을 지시와 질책으로만 해결하는 사람은 비겁한 자일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 거짓된 리더일 수 있다.


 주어진 상황과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 리더가 해결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다면 그 역량을 갖은 사람과 함께라고 하며 응원을 해야 한다. 삼국지의 유비는 능력이 뛰어나기보다 이런 공감 능력을 통해서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잘 보여준 것이다. 나도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 잘 하는 분야라면 그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설명해 줌으로 이를 도전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더 해서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람은 같은 것을 배워서 다르게 쓰는 각자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런 부분은 사람에 대한 신뢰와 공감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信)이란 타인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있고, 행동으로 묻어나는 것이다.


 많은 리더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에 인색하다. 사람은 태성적으로 생존이란 문제에서 보듯 이기적이다. 작은 이타심이 큰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하지만 압도적 실력과 좋은 성품이란 타인의 평가에 의해서 결정되고, 타인에게 공헌을 할 때에 빛을 발한다. 자신 스스로만 인정하는 실력과 좋은 성품이란 우물 안 개구리와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소외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세상을 따돌리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 생각을 깨고 나온 사람들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학습, 도전을 통해서 새로움으로 거듭나야 할 당위성을 인식하고 또 새롭게 되는 것이다.


 리더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한심해질 때가 있다. 나도 타인처럼 이런저런 고민 없이 편하게 지내고 싶어 진다. 문제는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계속 맴돈다는 것이다. 몰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를 번아웃 하는 것 같아 쓸쓸하다. 많은 앞서간 세대의 현인들이나 주변에서 나에게 기대를 갖는 사람들은 이것을 끓어 안으라는 말이 대부분이다. 야속할 때가 많다. 귀한 집 남의 집 자식한테 왜 그럴까?  가끔 사업본부 직원들의 어려움을 듣다 나도 이런 넋두리를 한다. 


"그래도 너는 내가 들어주니 한결 낫지 않니?"


 나는 진심이다. 나는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누가 들어만 주는 것으로도 사람은 큰 위안을 받는다. 나도 잘 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이런 기회가 적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대나무 숲에 가서 소리칠 수도 없고 답답할 때가 있다. 이럴 땐 그냥 무심하게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보려고 노력한다.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스스로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은 더욱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냥 고독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삶을 불태워 만든 것이 또 다음 세대에 자신의 삶을 불태워 무엇인가를 헌신적으로 할 사람에게 불을 붙여 줄 때까지 리더에게 주어진 의무와 역할이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리더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여유가 생길 때 주변을 바라본다. 나를 빼고 주변을 볼 수록 내가 주변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객과적으로 바라보려고 할수록 좀 더 거리감이 생긴다. 그것이 좋은 점도 있고, 또 조금 공허함을 갖고 오기도 한다. 성품이 좋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높은 정신력과 활활 타오르는 듯한 혼을 깃들이는 방법에 있어 좋은 원료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독특한 성품이 도움이 되는지는 항상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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