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몰입하여 깨닫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 특정한 결과를 만든다.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반드시 그 선택의 가치가 삶의 주제로 등극할 개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현재도 누군가는 부의 성공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선택한 방향을 득실을 떠나 정진해 나간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결과를 그리며 나아가고 있는가? 지금까지 어떻게 뭘 그리며 왔는가? 에 관한 생각이 많아진다. 노래 가사도 아닌데 한숨이 나오는 건 왜일까?
내 관점에서 공자는 따뜻한 휴머니스트고 낙관론자다. 또 대단한 인내력의 소유자라 생각한다. 딱히 편하고 즐거운 시대 환경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환경이 공자가 인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인간의 본성 중 장점 발견하고, 교육을 통해 육성할 수 있는 자신의 생각을 잘 그려낸 것이라고 믿는다. 당대에 세상에 실현하지 못했지만 그가 걸어온 발자취와 기록을 통해서 천 년이 넘는 시간 속에 그의 정신이 빛난다.
맹자를 처음 읽을 때 느낌은 유교라는 전제와 편견을 갖고 있어서인지 이질감을 많이 갖었었다. 공자와 꽤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나에게 들어오기 전 한문 수업시간에 열정적으로 수업을 해주시던 중고등학교 선생님 덕에 양혜왕과 맹자 패키지는 기억이 잘 난다.. 처음 읽었던 맹자 책이 서재에서 안 보인다. 누굴 주었나 어디에 박혀있는지 안 보인다.
지금 읽고 있는 맹자를 보며 나는 인(仁), 의(義)라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뜻과 느낌을 어렴풋하게 생각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공자가 사람의 내면에 흐르는 인의에 대한 자연스러움을 설명하고 찾아낸다면, 맹자는 확실하게 복수의 사람들 내면에 흐르는 인의의 원리를 통해서 인위적으로 세상을 설계하려는 의도를 비춘다. 스케일이 커졌을 수도 있고, 설계자 또는 컨설턴트와 유사하고, 이상주의자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의를 바탕으로 세상을 디자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의 사나이라는 확증은 곳곳에 남아있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살아온 시대를 알 수 없으나 인의의 대척점에 이익(利)으로 대변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이익으로 대변되는 욕망의 전성시대가 아닌가! 맹자를 공부하는 것이 사마천의 말처럼 네모난 나무를 동그란 구멍에 넣으려고 용을 쓰는 일인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또 맹자에 나오는 지혜의 시대와 힘의 시대에 대한 상황인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상황이 제시하는 조건에 순응해야 하는가? 괴로운 것은 시대의 흐름과 때를 벗어나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면 내가 펼쳐낼 인의도 없다. 어떤 전제조건에서라도 인의(仁義)라는 가치를 품고 살아내야만 하는 것인가? 이거 쉽지 않은 명제다. 인의를 통해서 자신의 역량에 맞게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어 가라는 말이 쉬우면 쉽고, 어려우면 대단히 어려운 현질적 문제가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한다.
맹자는 스스로를 변론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붙여놔도 전혀 꿇리지 않는 말빨의 소유자라고 믿는다.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주도권을 갖고 가는 모습이 그렇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상황인식(눈치라고 하면 욕먹겠죠?)과 상황을 장악하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다. 속물적으로 표현해서 왕과의 대화가 그렇다. 내가 살아온 시대에 대통령이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직설화법이 존재했다.
맹자는 3단 비유를 통해서 예의 바르게 "네가 다스리는 나라 꼬라지는 왜 이래?"라고 왕에게 묻는다. 기록에 왕이 답을 안 하고 어물쩡거렸다는 표현을 통해서 말의 옳고 그름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조롱을 포함하고 있다. 유세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도발이 유효하려면 맹자가 아니라 양혜왕의 마음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내가 결정하는 듯하지만 상대방을 통해서 결정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에 인(仁)과 의(義)만 한 것이 없지만 어떨 때엔 인(仁)과 의(義)만큼 효과가 없는 것도 없다는 현실의 문제가 존재한다.
사람은 기분이 나쁘면 뭐든 갖다 붙여 이유를 대고 약이 바짝 오르면 공격적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인(仁)과 의(義)가 대상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그 상대방이 그것이 주는 이익이 절실하거나 그에 대한 마음이 생겨야 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당면하는 지극히 당연한 문제다.
만약 맹자와 같이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사상가가 왕이 되어 그 뜻을 펼치려 했다면 맹자의 정신은 사장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도전해서 실패하면, 적대적 대치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씨를 말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을 비겁하다고도 하지만 현실의 구조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한 정신을 낳는다. 어쩌면 세상과 이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걸어가는 좁고 높은 영역이기 때문에 천 년을 넘어서도 빛나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나는 내 마음속의 속물적 욕망, 이익, 그 외 잡화상처럼 온갖 잡다한 쓸만한 것과 쓰레기를 품고 산다. 저 양반들도 쓰레기 조금씩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 다 그런 거 아닌가? 나만 쓰레기?) 그러나 맹자가 말하는 인(仁)과 의(義)가 없는 삶은 굉장히 초라하고 비굴하고 전국적으로 욕먹는 삶이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세상과 이상의 경계에서 인(仁)과 의(義)를 소통할 것인가? 그 경계에 갇힌 덕후가 될 것인가? 그 경계의 여집합에서 또 다른 속물적 천태만상을 택할 것인가? 항상 뭐하나 잘하는 것 없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만 확실이다. 다시 보면 맹자가 공자가보다 자신의 색을 훨씬 잘 드러내고, 그런 신념이 있기 때문에 용기 있게 자신의 뜻을 말하는 호연지기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나의 재난친밀형 호연지기는 나이를 먹어도 잘 변하지 않아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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