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음회를 신청해서 읍내에 나가보기로 한 날이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을 마무리하고 4시에 발을 떼는 것을 목표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오늘 무슨 날인가? RFQ가 계속 날아온다. 좋은 일이지만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어쭈 금요일 오후에 복잡하고 두꺼운 RFQ를 날리며 당장 정리해 달라는 고객을 보면... 예전에 동료가 '고객 놈이에요 고객 놈! 왜 이런 거야!'라고 말하던 소리가 왜 생생하게 떠오르지? Busy의 명사형이 Business라고 해도 이건 뭐. 할 말이 없지.
그럼에도 정각 4시에 발을 뗐다는게 중요하다. 지하철로 가는 동안 계속 메일과 메신저들이 난리다. 아이고 내 팔자야..
간만에 읍내에 도착하니 생소하다. 술을 한 잔 마실 생각이라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갑자기 잔치국수가 먹고 싶어서 주문을 했는데 물 올리고 국수를 삶는 아주머니를 보니 또 미안하다. "아휴 제가 손 많이 가는 음식을 주문했나 봐요 하하~'라고 했더니 "그래도 먹고 싶은 걸 먹어야지"라고 말씀을 주신다. 이 동네 예전에 와본 적이 기억도 안 난다. 영화 보러 한 번 온 것도 7년이 넘는 것 같다.
어둠이 내리고 목재에 반사된 노란 불빛이 참 따뜻하고 기분 좋게 보인다. 입구를 한참 찾다 1층 커피점빵에서 주문을 했다. 술마시러 왔다고 400원을 깎아준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들고 다니는 책을 펴고 2 챕터 정도를 읽었다. 저자만 보고 샀는데 이게 또 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니. 내용이라도 보고 살걸.
눈도 아프고 자리에 짐을 두고 박으로 나와봤다. 소복히 내린 눈이 그대로 있다. 태극기 문양처럼 빨강 파랑이 하얀빛으로 만난듯한 등이 소나무, 눈과 어울려 참 보기 좋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냐?? 지도를 찾아보니 국립국악원이네. 동네 가로등도 저렇게 만들면 안 되나?
시간이 다 돼서 시음회 장소로 이동했다. 사실 위스키.. 그거 많이 마셔봐겠지만 다양한 종류를 마셔본 것 같진 한다. 읽어 본 책을 보면서 참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생각과 몇 가지 한번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난 싱글몰트 한 잔이 훨씬 좋다. 블렌드를 칵테일이라고 하듯, 섞으면 감미로울 수 있으나, 감미로운 것은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다. 순혈주의라고 해야 할까? 사실 순혈주의가 말이 되나??
'요런 잔 나도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자리르 잡았다. 책을 발간한 작가, 편집장부터 준비에 바쁘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향을 맛봤다. 왼쪽부터 1, 2번은 향이 비슷하고, 3과 4번은 톡 쏘는 병원맛 향이 같다.
블라인드 테스트인 줄 알았더니 잔 밑에 각각의 술 이름과 도수가 표기되어 있다.
새삼 신기로운 건 시음회에 남자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이 여성이다. 위스키를 마신다는 것이 가격으로 보면 삶의 패턴이 조금 변했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증류 마스터,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설명한다. 뒷자리에서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들어보며 한 잔씩 음미하며 맛을 봤다. 그래도 술은 싱글몰트란 생각이 역시 강하다. ㅎㅎ 하나 더.. 어떤 놈이 싱글몰트 책을 갖고 튀었는지 오리무중이지. 책을 제외하고 시음만 보면 과거 맥켈란 시음회가 가장 좋았던 것 같다. 다른 시음회라면 역시 LA공항에서 맥켈란 3종 더불샷 새벽 6시 시음회와 말레이시아 공항 시음회가 최교였지.
자리를 마치면 술에 대한 이야기를 썼으니, 나중에 수주 변영로 선생의 명정 30년 같은 술을 마신 이야기를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물론 그렇게 다이내믹하고 익사이팅한 어드벤처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술을 왜 마실까? 술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술주정은 제외해야지.
길을 나서면 지하철 역까지 최단거리인 국립국악원 야경을 구경하며 걸었다. 술도 한 잔 마시고, 이쁜 가로등과 멋드러지 한옥이 어울리니 참 좋다. 블렌드처럼 섞으면 유불선을 통합한 풍류가 될까? 읍내의 높은 건물이 스카이라인을 만들지는 않지만 나무, 가로등, 조명과 어울려 참 보기 좋다.
게다가 전화기를 최근에 바꿨는데 사진 괜찮네. 해상도가 너무 올라가서 메모리가 걱정이었는데 이런 저조도에서 하늘빛이 나오다니 다들 만드느라 고생이 많겠다.
서울 남산 국악당이란 글씨가 보인다. 옛날 귀신 나오는 영화에서 깊은 산속에서 만나는 화려한 집처럼 선뜻 더 다가서기가 그렇다. 나중에 맨 정신으로 한 번 와봐야겠다.
전화기 사진빨도 그렇지만 조명이 아주 잘 배치된 것 같다. 밤이긴 러시아를 보면 높은 건물들에 치장한 조명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드디어 대문을 나섰다. 정상적이라면 대문부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ㅎㅎ
기분은 좋은 내일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 또 뭔가 정리할 것도 있고.. 이번주말도 Business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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