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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잡부(天上雜夫)_ 사업관리 시즌 2 (해외영업 시즌 1) )

회의 중간 자유로운 상상

by Khori(高麗) 2017.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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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에서 회의문화는 기업의 질적 수준을 확인하는 대표적인 척도다. 나는 그 수준이 기업 수준과 반드시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회의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전 숙지, 주제 대한 집중, 목표와 신속한 의사결정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는 넘쳐난다. 


 그런데 왜 내가 들어가는 회의는 다들 좋다는 방식과 이리도 다른가? 최전방 부산에서 바라보는 왜놈 나라만큼 심리적 거리감이 멀다. 내 능력 부족이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편하다. 세상의 무한한 인간들을 정규분포에 포진시키면 절반이 중간점 이하다. 왼쪽 끝 편에는 개또라이도 있고, 오른쪽 끝 편에 상또라이도 있다. 교육의 효과인 편견을 벗어나면 왼쪽 오른쪽은 반대일 수도 있다. 이렇게 스스로 마음의 자위행위를 한다는 고상한 표현은 쉽게 말해 화를 참고, 에너지를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써보자는 노력에 불과하다. 직책과 직급이란 역할, 의무, 권한, 서열을 고려하면 참는 것이 이익이 될 때가 많다. 그렇다고 그것이 만능 해결책은 아니다. 정신건강에 해롭다. 건강을 잃으면 말짱 꽝이다. 뭣이 중한디!


 내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책 제목은 "상사를 갈구는 50가지 방법"이런 것이다. 후배가 베스트셀러가 될만한 제목이라고 하더니 일본에 유사한 책이 나왔다고 하더라. 상사를 본받자는 장유유서의 건설적 방법이 보편적인 정도다. 너무 많은 관련 자료와 도서들이 지겹다. 왜 한 가지 방법만으로 경쟁하는가? 이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적인 방법은 경기의 규칙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책에 지천으로 나와있지 않은가?


 새로운 경기 규칙으로 못된 상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갈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사에게는 지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도 통쾌하지 않는가? 그것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즐겁게 생산적인 일을 이끌어 낸다면 나는 이런 생각과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구성원으로 돌아오도록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해보니까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확률적으로 대단히 낮다. 사람이 나이 들어서 마음이 넓어진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사람은 선호가 있고, 40년 이상 경험으로 체득된 선호를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60년 가까이 선호도가 축적되면 나는 싫어하는 것이 더 명확해진다고 생각한다. 일정 부분 해보니까 그렇다.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삐칠 때를 상상해 보면 짐작이 되려나?


 그 학습된 선호를 참는 것은 체면과 이익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렇게 훈련된 노련한 양반들의 못된 행동이 꼰대화 현상을 이끌고 여기에 통렬한 일침이 전체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책임은 네가, 즐거움은 내가라는 프레밍을 잘 한다. 오늘같이 회의 속에서 이런 일을 지켜보는 관찰자 시점은, 짬을 내서 귀는 열고, 입은 닫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편이 낫다. 이런 생각이라도 하면서 스릴 있게 정신적인 스트레스라도 날려야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신호가 온다. 생존의 미학이다.

  

 직급이 높은 자들이 아랫사람들을 잘 돌본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산이다. 압도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공부하며 성품을 가다듬는 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가끔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속좁고 알량한 능력으로 겨우겨우 직급을 올라가는 중간점 언저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능력 있고 치고 올라오는 미래 세대를 밟는다. 조직의 피라미드 구조상 그가 올라오면 내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세대에 손을 잡고 밀어주는 경우는 일시적이다. 미래 세대가 나와 타협을 하고, 미래세대가 이익과 도움, 협조를 약속할 때이다. 나는 이것이 line이 만들어지는 핵심이고, 이후에 관계 속에서 정도 들고 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2차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line이라는 묵시적 카르텔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강자를 위한 합종연횡이 되는 것이다. 이 방향이 옳지 않을 때에는 권력과 지위에 대한 탐욕, 이익에 대한 탐욕이 넘쳐날 때이다. 탐욕이 목표가 된 자들은 기가막힐 정도로 성실하다. 예전에 경마장에 놀러 갈 때 뛰어가는 아저씨가 하는 말이 기억난다. '내가 학교 지각할 때도 뛴 적이 없는 놈이야'


 회의에 끌려가 갑자기 만들어 내라는 자료를 만들고 2시간쯤 보고를 했다. 복덕방 좌담회의 지루한 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종교단체에 나가서 예배를 봐도 헌금을 내는데 나는 복덕방 좌담을 하면서 돈을 받으니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우리 회사가 좋은 회사인지 이상한 회사인지 판단기준이 서질 않는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그냥 시간강사를 한 것이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돈을 받은 것이다. 그냥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덕후에게는 목표가 상실되면, 재미라도 찾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아마도 나란 존재는 일반적인 조직에 잘 맞지 않는 성향일 수 있다. 대부분 그렇지 않으니까. 사실 2시간의 보고는 언제라도 눈감고도 할 수 있다. 매일매일 하는 일과 매일 확인하는 상황을 읊는 것이 무엇이 어려운가? 거기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어렵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태함이 어렵게 만든 것일 뿐이다. 매일매일 하는 일을 제대로 안 하고, 상황 파악을 안 하고 월급은 따박따박 받는 것이 익숙해진 나태함 일지 모른다. 그러다 훅 한방에 가다. 그럴 때 대부분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나는 억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차피 보고라는 것이 모르는 내용을 적을 수 없는 일이다. 현업에서 숙지하고, 정리하는 일상 속의 결과다. 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하고 회의 참석자들을 통해서 내가 보지 못하는 다양한 시각을 얻기 위함이다. 그래야 좀 더 좋은 의사결정, 즉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노련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과의 궤리를 만드는 몇 가지는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한다.


  1. 연장자가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선험자의 경험과 경험을 통한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렇다는 행동과 결과를 확인했는가? 그 사람이 그렇다고 하던가? 확인했는가? 나이는 그에 맞는 지혜, 경험, 성품이 어울려질 때 의미가 있다. 결과가 실망스럽다면 나의 안목이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고, 나이의 완숙함도 실망으로 인해 빈정거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는 내가 소견머리 없이 그렇게 늙어갈까 두렵다.


 2. 화려한 경력이 신뢰를 확보한다는 근거를 확인했는가? 회사를 창업하고 이끌고 온 세대의 과거 노고는 중요하다. 그들이 현재까지 오는 근간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그들이 과거를 현재에 재현한다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실무는 청춘 세대의 몫이며, 이들을 경험에 근거한 지혜로 이끄는 것이 연장자의 몫이다. 이렇게 역할이 바뀌어가고 그것에 순응해야 한 세대를 넘어서 이어달리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0점대 방어율의 선동렬이 감독하다 등판하라는 것이 농담이지 진짜 등판을 한다면 모든 매체의 top 기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조직에서는 일상다반사다. 아무리 플레잉코치나 플레잉 감독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미래 인력과 청춘을 키우지 않는 조직은 결국 망한다. 청춘이 외면하는 조직은 더 빨리 망한다. 


 이건희가 50넘은 아저씨들 보고 스마트폰 만든다고 나대지 말라는 소리는 매우 정확한 이야기다. 잘해야 통화, 메시지, 인터넷 검색, 내비게이션 쓰는 양반들이 다양한 app을 만들고 사용하며 문화를 만들어가는 미래세대를 만족시키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비즈니스가 종교활동인가? 무지가 용감함을 초래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 늙어가면 청춘 세대에게 얼마나 욕을 먹을까 겁난다.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데 이게 셔틀 되면 만수무강하는 것 아닌가? 경력과 실력의 궤리가 불러온 조롱명인이 될어 만수무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3. 컨디션이 나빴다고 생각한다. 과거하던 데로 해오다 보면 결과물이 기대와 달리 떨어질 때가 있다. 세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내가 발전하는 세상에 따라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적나라하고 불편하다. 전자의 생각을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해서 잘 안됐는데,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 대신 컨디션이 나빴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리고 그 구닥다리 방법을 더욱 열심히 해서 주변 사람을 경천동지하게 만드는 신공을 펼친다. 시전 된 신공에 나는 그저 넋을 잃을 뿐. 세상에 할 일이 많지만 이렇게 만들어지는 허무한 결과물이 나를 쓸데없이 빨리 늙게 한다. 나는 내가 나이 들어 노망난 것도 아닌데 이런 불쌍한 지경에 다다를까 가끔 걱정을 한다. 나의 무지가 종종 나를 사지로 몰기 때문이다.


 4.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경쟁은 반드시 후자가 이긴다. 옳고 그름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리적으로도 사람은 시간을 통제할 수 없기에 생존하는 자가 이긴다고 보면 당연히 확률적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청춘들의 세대에 베팅을 하는 것이 좋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과거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사람이 나왔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현재가 만들어진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시간의 연속성을 건너뛰는 이런 사람에게 미래가 있을 리 없다. 단지 현재를 모면하는 얄팍하고 비겁한 수다. 현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현재가 만족이 아닌 상태라는 판단이 있을 때 변화를 추진하여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과거도 없는데, 어찌 현재와 미래가 있는가? 나는 젊은 세대가 만족한다는 판단을 많이 하는 상사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런 좋은 배려와 공헌이 세상을 좀 더 좋아지고 우리 아이들이 커서 더 좋은 사람들 밑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만족하는 방식만을 고집하는 스쿠르지가 될까 스스로가 무서울 때가 있다.


 5. 함께 일을 하기 모였다면 목표는 그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의 목표와 그 일의 전문가를 제쳐두고, 장유유서와 목소리 큰 사람들을 배려하기 시작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회의할 때엔 완장을 떼야한다고 생각한다. 알량한 목소리가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일을 먼저 하고, 장유유서를 따지라. 나는 내가 사익을 위해서 삽만한 숟가락을 여기저기 퍽퍽 담그는 파렴치한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상또라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근거 없는 아니 근본 없는 상상력 때문이다. 


 나도 윗사람보다는 아랫사람들이 더 많은 위치에 있다. 나이로보던 직급과 직책으로 보던 말이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갖고 산다는 것이 세상의 중간에서 조금 멀어지는 이유가 된다. 이럴 때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것도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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