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간다는 사람을 꼬셔서 '일단 잡숴봐'도 아니고 '일단 가서 쉬어라 그렇게 해주겠다'다는 말에 속은 내가 바보다. 갑자기 구성된 단톡 방에 기차로 간다더니 비행기로 일정이 바뀌었다. 중학교 때 가본 부산과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던 생각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숙소를 보아하니 웬걸 부산하고 아주 먼 곳, 바닷가 끝에 숙소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인사팀장에게 연락해서 병원 간다고 한 연차를 돌려달라고 했다.
보내온 일정을 보니 비행기에서 내리면 협력사 대표님이 손수 나오시겠다고 하고,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일 때문에 부산신항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가방을 열어서 짐도 좀 바꾸고, 양복 재킷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전날에도 담당 녀석이 광안리에 숙소를 잡는다고 개뻥을 쳤다는 건데....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는 여행 아니 출장을 급하게 다녀왔다. 첫 번째 떠오른 생각이 와따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오후에는 정신없이 의자에 앉아서 졸았다.
비행기는 많이 타봤어도 김해 공항은 처음 와봤다. 돌아올 때도 김해공항은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방송이 나온다. 내리자마자 점심으로 무엇이 좋냐고 해서 "저는 어린이 입맛입니다"라고 했더니 밀면집이 유명하다며 가자고 하신다. 인심 후덕한 아저씨(대표이사)를 따라 가게 들렀다. 어린이 입맛엔 냉면보다 밀면이 더 매콤 달콤해서 좋다. 계란에 뿌려준 참깨가 인상적이다. 냉면처럼 반으로 주는 것보단 슬라이스를 만들어서 뿌려줬는데 깨소금처럼 고소하고 담백하다. 만두도 피가 얇고 속이 잘 비쳐서 맛나겠다고 생각하는데 예상대로다.
이거 먹자마자 부산신항에 갔다.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리고 이쪽은 교통 체증이 생기면 바다도 아닌데 해양경찰이 온다고 한다. 그리고 취미생활로 갖고 있는 LEGO10152(Maersk Container Ship)과 같은 배도 항만에 들어서며 보니 기분이 좋다. 예전 선배들이 한진, 조양, 현대와 같은 상선회사들에 다녔었는데 중국의 변화가 세상에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HPNT, PSA 이런 문구들이 보인다. 무슨 약자일까 생각하다 혹시 현대, 부산, new ternmial? 이런 단순한? 설마?라고 생각했는데 맞는 것 같다. ㅎㅎ
컨테이너들이 산처럼 쌓인 부두가를 보니 기분이 좋다. 그러나 곧 기분이 다운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한국에서 선적하면 17~20일에 주파하던 운송기간이 요즘은 기본 2 달이다. 산처럼 컨테이너가 적체된 것처럼 운송을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미국도 LA 쪽 부두에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여서 여기도 적체가 심하고, overnight trucking비용은 천정부지로 올라서 기가 막힐 지경이라고 한다. COVID-19로 급격하게 위축된 시대에서 다시 급속도로 생산활동이 시작되는 과유불급의 초입은 인간에겐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갖고 온다.
큰 전광판에도 빈 컨테이너 갖고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가 보인다. 안이 복잡한가 보다. 대형 크레인이 보여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보안 검색대에 가자마자 아까 사진 찍었냐고 묻는다. 얼른 지우라는 해양경찰 아저씨 말을 잘 들어야 한다. 1급 보안건물이기 때문이다. 공항, 항만 등 국경을 넘나드는 일을 관리한다는 것, 국가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직원들도 급할 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잔소리 포스터도 붙어있다. 남의 카드로 출입하다 걸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그런 문구로 이해된다. 그러고 보니 돌아올 때 김해 공항에도 남의 신분증 내고 타면 혼내주겠다는 문구가 있던데, 우리나라도 국제화가 되면서 외국들도 늘고 여러 가지 관리 사항이 생기는 것 같다.
항만에서 동작하고 있는 장비들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저녁 대표님과도 이야기를 하며 실제로 개판 난 타사 사례까지 보면 그렇다. 장비와 솔루션을 만드는 사람들은 시장이 큰 부분의 요구사항에 집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꼭 그렇게 만들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은 계속 변해야만 한다. 특정한 산업 표준을 따르는 것을 제외하면 원래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 왔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만드는 경향이 높다. 사용자 측면에서 보면 그 제품과 솔루션이 메인시장의 목적만 갖는 것이 아니다. 시장에서 부가가치를 만들고 세상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당연히 사업을 추진한다. 그런데 이런 작은 차이가 새로운 솔루션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망하기 쉬운 가장 간단한 이유다. 지난번에 기획 스케치를 했던 제품 콘셉트를 정말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머리에서만 하는 생각은 깊이와 다양성이 떨어질 수 있다.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use case를 보면 훨씬 더 구체화된다. 원래 실제로 제품을 사용, 운영하시는 분들에게 꼭 묻는 것이 "무엇이 불편해요?"와 "어떤 것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를 자주 물어본다. 사실 같은 말이다. 그런데 혼신용 경봉과 권총까지 착용하고 일본 최전방 부산항을 관리하는 아저씨에게 그런 걸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잘 구경을 하고 해안가를 따라 올라오다 전경을 넓게 한 장 찍었다. 저 건너편에도 부두가 있고, 이 앞에는 축구장 수십 개가 들어갈 공간을 다지고 있다. 완공될 때까지 부산항이 북적북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 아니면 어느 정도 급한 물량들이 소화되면 일상의 속도로 돌아올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프로젝트도 프로젝트지만 요즘은 자재 대란에 수송대란이 겹쳐 혼수상태다.
대표님이 센스장이시다. 해변가에 다양한 프랜차이즈 커피가게들이 모양을 내고 자리 잡았다. 아파트를 제외하면 상가형태의 모듈라 타입 주택들도 많이 보인다. 커피가게 루프탑처럼 생긴 곳에서 앉으니 기분이 좋다. 하루에 한 잔밖에 못 먹는 것이 된 커피를 주문해서 호사를 부렸다. 컨테이선 선박이 부지런이 출항을 하는데 잠수함이 얼굴을 내밀로 움직인다. 움직이는 잠수함을 직접 보니 신기하다. 그런데 야경을 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언감생심이다.
프로젝트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바닷가 끝 유배지인지 숙소인지로 향했다. 가다 보니 꽤 이쁘게 생긴 가게가 보인다. 토요일 올라가기 전에 브런치라도 먹어보자고 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아침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하면 올라왔다.
말이 유배지지 호텔은 아주 깨끗했다. 안마의자가 있어서 앉았다가 정신없이 졸았다. ㅎㅎ 요즘 하늘이 깊고 구름이 풍부해서 그런지 이국적인 느낌이다. 아주 깨끗한 길거리를 보면서 '사람이 얼마 안 사는 동네인가 보다'라는 생각과 구 사회주의 국가만큼 길거리가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색만 파란빛이라면 지중해라고 우겨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 왔는데 회는 한 접시 먹어야 한다면 횟집에 갔다. 원래 술도 한 달간 먹지 말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다. 내가 끌려온 사연을 이야기하다 보니 말은 부산인데 진해랑 가깝다고 한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사업을 이야기하고, 그 사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일이 만들어지길 또 바라고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갖게 된다. 노을이 예쁘게 들어서 프리셋을 좀 써서 여러장 찍어봤다.
숙소로 돌아오자 사기꾼 녀석들 떠드느라 잠도 못 자게 한다. 아침부터 원래 계획에 있던 부산역은 모르겠고 정신없이 공항으로 달려가 집에 와서 한참 존 것 같다. 다음 주도 외부 회의랑 내부 회의랑 시계 머시기처럼 여기저기 왔다리 갔다리를 해야 하는데.. 오늘 푹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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