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가는 날 아침, 남들 다 출근하는 모습을 즐기면 조조영화를 종종 보러 간다. 나만 쉬며 즐긴다는 생각이 마음을 즐겁게 한다. 타인이 알지 못하는 작은 즐거움이다. 못됐다고? 이 정도는 넘어가자고.
영화는 높은 곳에서 화면을 내려다보는 가운데 자리가 최상이다. 조조영화에 두 명의 남자가 더 있다. 가방을 멘 회사원 같은 젊은 아저씨, 후드티를 쓴 젊은 청년이 있다. 이질감이 느껴지듯 서로 끝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화면의 구도에서 계속 선이 보인다. 도시를 양쪽으로 나눈 기찻길, 도로, 마치 달동네를 연상케 하는 엄청난 계단 그러나 그 계단의 끝에 있는 하늘까지 다다른 보이지 않는 선이 양쪽을 나누고 있다. 아서 플렉이 그 길을 넘나들 때 항상 사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서는 자신이 삶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게 된다. 어머니와 출생의 비밀, 그리고 내 내면에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과 동물의 세계처럼 타인을 조롱하고, 속이고, 위협하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깨닫는다. 영화가 어둡다. 하지만 강렬한 보색처럼 슬픔과 행복, 살인과 가식, 진실과 바람의 엇갈림이 계속 교차한다. 어두운 배경의 도시 속에 강렬한 붉은 양복과 오렌지 색의 조끼, 피로 물든 섬뜩한 웃음, 하얀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무엇을 보라고 강요하는 듯..
사람의 슬픔은 오래간다. 웃음과 행복은 힘든 시간을 거쳐 순식간에 지나간다. 슬픔은 위선으로 포장하기 힘들다. 하지만 웃음은 위장이 가능하다. 사람이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자유자재로 하고, 거짓 웃음을 보일 수 있다. 채플린의 자서전에서 본 그의 불우한 삶이 웃음으로 아이러니하게 표현된 것이 그렇다. 하지만 그의 흑백영화를 보면 그게 아주 환하게 웃는다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무표정하다. 웃음은 만들어진다. 상상으로만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슬픔의 반전이란 생각이 든다.
아서의 모습도 그렇다. 머레이 플랭클린에게 한 발을 날린 후 눈물을 흘리는 그의 표정이 아주 선명하다. 인상적이다. 인생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처럼 너무 가까이 선명하게 보여진 비극은 슬프기보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슬픔과 행복을 마음에 담고 산다. 그 표정을 발산하지 못하면 시들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변신을 한다. 가면을 쓴다. 너무 많은 가면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 가면이 너무 없어도 세상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이 장점만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결국 가면이란 나의 본질과 세상의 경계선에 존재한다. 그것을 넘나들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조커 #호아킨피닉스 #로버트드니로 #영화 #조조영화 #kh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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