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도 많은 생각을 하며 촛불집회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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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이수역에 내려 천천히 걸어가며 세상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듯한 식당에서 우동도 한 그릇 먹었다. 터널부터 통제하는 경찰들, 그들의 표정이 담담해 보인다. 주말 피곤한 업무일 텐데 그렇다. 긴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에 삼삼오오 아주머니들이 배낭을 메고 걸어간다. 거리를 통제하고, 대형 디스플레이와 스피커가 쩌렁쩌렁하다.
친구를 만났다. 가방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꺼내서 준다. 나도 에너지바를 나눠줬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 동선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집회와 거리가 먼 녀석인데 "열 받잖아", "예전에 안 한걸 나이 먹어서 하네"라는 대답을 들었다. 거래처 사장님은 온 가족을 모시고 나왔다고 한다. 본인한테 사업적으로는 피해를 준 사람을 그곳에 만나 격려한다. 카톡에 지인이 사진을 보냈다.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너무 쉽게 지인을 만나 인사를 했다.
반대 의견을 갖은 분들도 많다.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다 차단선을 부시며 넘어서는 아주머니가 아주 도발적이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들의 소리도 들어보려고 한다. 말이 되던 안되던. 멀리서 들리는 소리는 굿이나 샤머니즘적인 샤우팅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오디오가 겹치지 않게 박자를 바꾸는 노력이 처절해 보인다. 그러면 더 비효율적일 텐데. 기획, 스토리 구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하는 말에 '왜?'라는 질문을 통한 궁금증을 돌아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다름의 부재, 다름=피아구분처럼 느껴진다. 피하가 구분되면 조선시대 사화와 같이 격멸의 과정을 위해서 맹목적이고 단선적인 사고로 채운다. 야생의 동물과 같은 향기가 난다. 힘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이렇게 사화가 반복되면 모두 망한다. 아니면 시간이 정화할 때까지 이외수 선생의 말처럼 존버 정신이 필요하다. 백성들은 의도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존버 정신의 상징이다. 우리의 역사가 그렇다.
다른 하나는 세대 간의 차이다. 그들이 가끔 소외된 그룹이거나 그룹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적응해 온 결과일 수 있다. 아니 사람들이 그렇게 적응하도록 길들인 것도 존재한다. 후자가 훨씬 나쁜다. 그들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작은 필요를 이용해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 런 일을 한 책임을 요구받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지는 방향으로 일을 설계해야 한다. 미국에 가본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성조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정작 해외에 살던 어르신은 그들과 다른 장소에서 다른 뜻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아이러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일이라는 것이다.
홍콩도 난리, 한국과 일본도 난리, 일본도 후쿠시마 이후의 날들이 그려낸 난리, 유럽도 브렉스트로 난리, 미국도 트선생에 대한 소란, 중국도 미국과 난타전으로 난리, 중동의 불난리와 긴장 고조 세상 어느 곳 조용한 날이 없다. 사람 탓이다.
이번 촛불집회에 태극기를 나눠준다. 그 취지를 듣고 기획자의 생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연사들이 지금의 현상에 대한 의견, 주장을 말한다. 인상적인 의견이 두 가지다. 지난주 내 생각처럼 근대 의식의 종말을 실현하자는 주장을 들었다. 공감은 즐거움을 준다. 두 번째 부산에서 온 교수님의 말이다. 요약하면 지식인의 혁명은 갑신정변처럼 성공한 예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 낸 혁명은 성공한 역사를 갖고 있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차 없는 서초대로의 길을 밟아보는 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8 조 금법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있었다. 중국도, 다른 세상에도 같은 법이 존재해왔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법의 실행은 법조문이 오락가락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판결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 그 과정에 많은 상황이 있다. 사기에 혹리 열전, 순리 열전이 있는가? 왜 이런 구분이 사람의 의식 속에 자리 잡힐까?
사회적 제도 운영에 대한 저항의 감정 표현이다. 부당함의 인지, 불법적인 사항을 용인하는 것에 이해,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위의 발견에서 사회적 분노는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이 나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되면 사람들은 대책을 세우게 된다. 조정래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 있다. 국가가 백성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정부가 정책을 세우고 나면 그 후에 백성은 대책을 세우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백성이란 물은 배를 나아가게도, 뒤집기도 한다는 말도 그렇다.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며, 나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전한 세상'을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안전과 보호받는 체감은 공동체 구성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 시작은 법과 제도로 골격을 잡고, 적용은 이 제도 안에 도덕, 윤리, 예절과 같은 상식으로 풍성해진다. 사람들이 법의 테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안에서 보호받고, 법안에서 공정하게 운영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법만 남으면 사회는 스켈리톤처럼 아주 건조해진다. 법가들이 다 끝이 안 좋은 이유는 살을 발라내 생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법원을 지나가면 자유, 평등, 정의라는 각인된 글씨를 봤다. 이 세 가지는 대한민국의 최저점을 유지하는 기둥이며, 이 최저점을 얼마나 올릴 수 있는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어달리기처럼 한 세대만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양한 주장이 나오는 광장을 통해서 자유를 확인한다. 평등에 대한 만족이 사회적 현상에서 조금 어긋난 있다고 인식한다. 이익과 권력이 세상과 격돌할 때 평등이 깨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유와 평등의 균형이 틀어지면 정의는 지나가던 개가 물고 간다. 많은 개선의 과정에 있지만 지금의 시대도 사람들의 기대보다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를 물고 달리는 개를 잡아다 정의를 바로 세워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구성원이 괜찮다고 인식하는 수준, 그 수준을 체험하는 현실이 필요하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화두를 던진 정치인은 전설의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 선호의 문제도 아니며 피아구분을 통한 적대적 의사결정의 문제가 아니다. 광화문의 촛불집회를 통한 무능한 집권에 대한 국민의 대책, 아베의 황당한 정책에 대한 국민의 대책, 현재의 현상에 대한 국민의 대책을 보면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닐까?
바다에 물 한 방울 떨궈도 표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도둑질을 수도 없이 했는데 한 번 더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말한다. 세상은 그 작은 한 방물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나쁜 일은 작은 한 방울이라도 세상의 지탄을 피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가능 방향을 잘 가늠한다는 생각을 한다.
#촛불집회 #대책 #시대의소리 #kh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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