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두껍게 하고, 속마음을 까맣게 한다. 북한이 트럼프에게 한 표현으로는 낯가죽이 두껍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저자의 말처럼 "뻔뻔함'과 '음흉함'으로만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청조 말기 이종오란 사람이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바가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이를 위해서 후흑이 달인이 되어야 한다고 내린 결론이 단지 뻔뻔함과 음흉함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면후심후의 3단계를 보면 마치 무협지에서 심득을 얻어 초절정 고수로 올라가는 알쏭달쏭한 비법 같다. 1 단계 "후여성장, 흑여매탄(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까맣다), 2단계 "후이경, 흑이량"(낯가죽이 두꺼우면서 딱딱하고 속마음이 검으면서도 맑다), 3단계 "후이무형, 흑이무색"(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꺼먼데도 색채가 없다)을 보면 나만 무협지 생각이 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도를 닦는 방법이 한 가지일이 없다. 아쉬운 것은 책에 이 후흑을 극성까지 이룬 사람은 없다고 쓰여있는 점이다.
저자가 정관정요를 빛의 상징으로 이 책을 그림자로 표현한 부분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해봤다. 이런 연상에는 자신의 특정한 경험과 영화가 나에겐 도움이 많이 된다. 설국열차의 머리칸, 꼬리칸, 내부자들이란 영화 속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속마음, 무협지의 사파, 정파, 일상에서 만나는 그냥 뻔뻔한 못된 놈들...
각 3단계가 내 마음이 어떤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내 마음이 올바르다면 그 마음을 하얀색으로 포장하거나, 검은색으로 포장하거나 문제 될 것이 없다. 검정 마음을 검정으로 포장하면 그냥 못된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하얀 마음을 검정으로 포장하면 관심이 적던가, 오해가 있던가 잘 모르던가 할 것이다. 2단계 정도가 되면 검정 마음을 담아도.. 쉽게 도둑놈 사기꾼도 급이 있다고 해야 할까? 하얀 마음을 담으면 비범함이 보이는 정도가 아닐까? 3단계가 되면 어리숙해 보이는데 껍데기를 홀랑 벗겨가는 수준의 나쁜 놈이거나 별 볼 일 없는 줄 알았는데 나랄를 구할 실력이 있는 수준 정도면 될 것 같다.
나는 후흑이 타인을 속이는 목적보다는 타인의 내 의도를 알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 비대칭성이 갖고 오는 이익을 설명하는 100년 전쯤의 방법은 아닐까?
내가 경험한 것 중에 미팅을 하다 보면 폴란드 사람, 이태리 사람들이 미팅에서 기가 차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똘똘한데 자신의 유리한 입장을 최대한 활용한다. 미국 놈들은 자신의 실력보다 시장을 등에 업고 강짜를 잘 부린다. 네덜란드는 계산이 말과 다르게 참 박하다. 독일은 언행일치가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 왜놈은 자신들의 많은 문서와 논리가 뛰어나지만 종종 너무 많은 논리와 문서가 자충수가 될 때가 있다. 후흑의 면에서 한국사람들은 막무가내, 고무신 거꾸로 신기, 뒤통수치기라고만 하면 참 볼품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미팅에서 중요한 것은 공동의 목표에 함께 한다는 것이고 후흑이란 마지막 비장의 무기를 항상 준비하고 만들어 두는 것이다. 기생충에서 "너도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말이 유행한 것이 그런 의미 아닐까?
내 경험에서 그리 좋지 않지만 후흑의 모습은 중국 꼬마다. 가족여행에서 수영장에서 아이가 굴린 공을 중국 꼬마가 들고 나서 "이건 내 거야? 이게 왜 네꺼라는거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다. 처음엔 우리 애가 쫒아와서 다른 집 아이가 떼를 쓰는가 했다. 그 아이는 우리 애한테 논리를 통해서 갖고 가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애랑 논쟁을 할 수도 없고, 쪼그만 녀석이 비범해 보였다. 물론 그 집 아빠가 와서 백배 사과하고 공은 돌려받았지만 내가 그때 한 생각은 "중국에 저런 녀석이 얼마나 많을까?"였다. 지금은 그 애가 검정 마음을 담았다면 재앙이고, 하얀 마음을 담았다면 누군가에겐 흥이고 누군가에게 곤란함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후흑학 #이종오 #독서 #khori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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