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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연 (劇)

남한산성(2017.10)

by Khori(高麗) 2017.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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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기나긴 연휴에 긴 출장을 노독을 왕좌의 게임을 보면서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본능과 이성이 지배한다. 그 사이에 인간의 욕망이 차고 넘치면 그것이 生과 死를 가르는 이유가 된다. 그 경계를 피해나가는 현명함은 때에 맞는 판단을 이끄는 지혜다. 그 지혜란 경험과 끊임없는 지식의 축적, 옛 지혜의 경험이 축적된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아이와 서점에 들러서 읍내 구경을 하면서 새롭게 발행된 남한산성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가 갖고 있는 분홍색의 묵은 문고판 서책과 달리 멋진 삽화가 더해졌다. 저 그림의 여백에 아름다움이 아니라 굴욕의 역사가 있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과 '정묘 · 병자호란과 동아시아'란 책을 보면 왜란과 호란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나와있다. 의정부를 넘어서 들이닥치는 호란에 강화도로 움직일 틈도 없이 남한산성에 숨어들은 참상은 한겨울의 혹한만큼 처참한 상상을 펼쳐주었다.


 느닷없이 명절 연휴에 마나님이 '남한산성'을 보자고 한다. 조조영화는 힘들고 누나가 놀러오면 같이 보자고 한다. 늦은 저녁 영화관 밑의 서점에 들렀다. 다시 한번 빨간색 띠지가 눈에 띄는 책에 손이 간다. 좋아하는 김진명의 예언이란 책도 관심이 간다. 책의 구절구절을 기억하는 마나님이 신기했다. 큰아이 독서반에서 읽기로 해서 눈에 아른거리던 책을 사셨단다. 진작에 이야기나 해주지.. 역식 책속의 삽화는 영화와 달리 보기 좋다.


 김훈의 소설은 묵직하다. 그렇다고 한겨울의 냉험함이라기 보다 늦가을 만추의 느낌같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민낯을 내민 헐벗은 논두렁처럼 적나라하다. 칼의 노래도 그렇고,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에세이도 그렇다. 사람들의 심리를 침울하게 끌어가는 남한산성도 그렇다. 그렇게 핵심을 말하지 않고 드러낸다. 


 영화는 소설을 잘 옮겨놓았다.  최명길(이병헌), 김상헌(김윤석), 서날쇠(고수), 인조(박해일), 이시백(박희순)등 쟁쟁한 연기자들이 소설의 느낌을 그대로 잘 옮겨두었다. 목소리가 기가막힌 홍타이지도 좋았다.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전투보다 잔잔한 분위기를 잘 끌어가는 음악도 꽤 괜찮았다.


 삼전도의 삼배고구두례라는 굴욕, 역사의 치욕을 영화와 소설로 만든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분명 기록하고 치하할 일이 아니지만 실패로 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이 또한 실패한 역사다.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그 실패로부터 배움이 없기 때문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주화파와 주전파의 논쟁은 그래서 돋보인다. 군신유의와 같은 유교를 정치의 기틀로 삼고 있는 봉건국가에서 극단으로 치닫은 나라의 운명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들의 명분을 볼 수 있다. 임금은 굴욕을 참아낸 대가로 생존을 바한다. 김상헌은 재조지은을 말하지는 않지만 유교적 신의를 배경으로 임금에게 죽음이란 신의를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최명길은 미래를 그리며 현재의 탈피를 도모한다. 그것도 임금에 대한 의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영화속의 세 인물에게서는 군신유의의 다양한 각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반면 영의정 김유를 보면서 나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아직도 세상의 많은 무능력하고,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더 정의로움을 주장하고, 상앙과 같은 엄격한 법치를 외친다. 주장하는 바의 대부분은 현재 그들이 소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들이 그 어려움에 직면할때엔 책임전가와 비겁함으로 스스로는 옭매는 우매한 인간의 전형임을 알게 해준다. "영상을 참하라는 상소도 있소", "영상이 해 보겠소"와 같은 인조의 한 마디가 인간이 느끼는 배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어차피 과거의 역사는 정치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와 문화는 그 국가라는 이름하에 하루하루를 살아낸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것이다. 날쇠의 역할은 그것을 상징한다. 말의 여물로 뜯겨진 집과 다시 죽은 말고기를 먹으며 내뱉는 백성의 소리는 매우 옳다. 그런 정확한 현실판단은 앎과 현실의 균형에서 나타난다. 현실을 외면한 앎은 무의미하고 앎이 없는 현실은 고단하다.


 영화를 보고 내려오는데 "치욕적이야!"라는 말은 되뇌이는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탔다.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후지지 않다. 중세의 유럽은 조선과 비교하여 대단히 뒤떨어진다. 마르코폴로가 동양에서 와서 가장 놀란일이란 풍족한 자원이다. 한반도의 역사도 풍족한 역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왕은 하얀 쌀밥을 항상 먹으며, 새해를 맞아 사치스러운 떡을 하사할 정도면 대단히 사치스러울 정도로 풍족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밥의 양과 떡의 양은 같은 양의 쌀이라도 다르다. 또한 도시국가 형태의 유럽과 달리 넓은 국가를 하나로 통일하여 통치하고 관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균형이 깨지고 치우칠 때에 우환이 생길 뿐이다. 세상의 흥망성쇠가 윤회하고, 그 때를 잘 알고 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치우침이 넘쳐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그것이 하늘을 뚫고 큰 변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김상헌이 최명길을 보며 하는 대사는 큰 의미가 있다. 낡은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변화가 시작된다. 그도 아는 것이다. 아무도 현실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죽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결딜 수 없고, 치욕은 결딜 수 있다옵니다"라는 최명길의 한 마디는 그래서 가치가 있다. 


 난세에는 충신(忠臣)이 나온다. 충신이란 권력자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증거다. 이순신이 죽음으로 치닫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기준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위징과 같은 양신(良臣)이 충신보다 덜 극적이지만 현실에서는 더 중요하다. 세상에서 권력이란 것을 얻으면 욕망이란 기차를 타는 간신과 우매하고 충직한 간신이 표면에 선다. 그러나 세상은 이름없이 때를 알고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는 많은 양신과 양민들에 의해서 굴러온 셈이다. 우리도 그 굴레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길을 갈지는 모두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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