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들 (★★★★+1/2)
블로그 이웃인 파란하늘님의 글을 보고 선택한 영화다. 문소리는 다양한 영화에 출연한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스파이, 분노의 윤리학에서 다양한 배역과 장르를 오간다. 이젠 감독도 한다.
배심원들에서 엘리트의 상징인 판사로 출현한다. 배역을 맛나게 소화한다. 8번 배심원을 등지고 "저 또라이~~"라는 멘트와 표정이 아주 인상적이다. 실제 상황을 연상케 한다. 그녀의 배역을 통해서 우리가 엘리트,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품고 니케의 동상처럼 엄정한 판정을 해야 한다. 그들은 그런 어려움을 매일 안고 살아간다. 그들이 매일매일 얼마나 몰입하면 사람들에게 다가살 수 있을까? 배심원제도라는 흥행과 동떨어진 주제를 통해서 세상에 주는 메시지가 판결문처럼 잘 정돈된 영화다.
8년 전에 스페인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경찰에 신고를 했다. 갑자기 경찰이 몽타주를 확인해 줄 수 있냐는 말에 '재미있겠다, 식은 죽 먹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명 정도의 사진을 넘기며 잠재적 범죄자를 확인한다. 조금 쉬고 다시 내가 선택한 사진을 추려서 무작위로 조사한다. 그 중간에 못 본 사진도 들어가는 것 같다. 30분 정도 경과하고 그만 하자고 요청했다.
첫째는 내 기억이 생각보다 형편없다는 것이다. 인상적으로 기억했던 내용, 얼굴, 복장은 몽타주와 다르다. 반복을 통한 확신보다 불확실성이 커진다. 대부분의 범죄는 루마니아 집시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불행의 올가미를 씌울 권리가 나에겐 없다.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린 나의 결정이 출장 뒤에 돌아온다고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무책임이기 때문이다. 경찰들이 "이 녀석인 거 같지, 그렇지?"라는 동조를 구하는 말이 확신보단 신중을 택하는 더 큰 이유가 됐다.
이 영화에서 법조인들을 인간적으로 그려냈다. 내가 본 법조인들은 대체로 재수 없다. 합법의 틀에 숨은 사기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장사꾼보다 훨씬 교활하고 정교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대체로 대단한 사람처럼 권위적이다. 친구라도 그렇다. "법도 모르는 일반인"이라고 말하는 법원장(대법관 지망생)의 말속에서 엘리트 의식보단 일반인에 대한 무시, 계층적 차별의 언어란 의식이 존재한다.
그래서 8번 배심원을 택하며 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김준겸(문소리, 이름이 참...ㅎㅎ)의 설명은 울림이 있다.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준이라는 설명, 깊이 공감한다. 얼마 전 내가 법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합의 과정이란 설명에 좌빨, 법치주의를 무시하냐는 댓글에 대댓글을 다는 이유다. 상식은 기준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의 표본을 늘이고, 공감이 높다면 어떤 사안은 상식이 법보다 훨씬 높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max가 아니라 min의 관점에서 문서화, 제도화된 법은 훨씬 중요하다. 상식은 시대의 변화에 적합하게 변해하고, 이 보다 느리게 법은 쫒아갈 뿐이다. 인간은 법이란 사회적 규칙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법이란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충분이 대화를 통해서 타협과 합의를 이끌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법은 처벌이 아니라 경고의 의미가 강하다고도 할 수 있다.
판결을 앞두고 김준겸 본인이 설명한 그대로를 되갚는 8번 배심원의 말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내가 타인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나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문구를 응시하는 김준겸. 2008년의 재판 시간에, 분명 1992년 자신이 판사의 길을 걸으며 다짐한 내용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특정 분야의 일을 줄곧 해 와서 그에 관해 풍부하고 깊이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전문가에 대한 또 다른 재미있는 해석은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안 되는 이유만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전문가라고 판정이 되면 세월이 흘러도 계속 전문가인가? 알 수 없다. 퇴장당한 30년 경력의 6번 배심원이 자격증은 없지만, 전문가에 가깝게 그려졌다. 기계적 판단을 하는 법의학자와 대조적이다.
자격증은 한시적으로 부여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그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 전문성이 더 높게 평가될 검증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배심원제도를 통해서 전문성에 대한 자극은 되겠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나오는 일명 지도층, 엘리트들의 행위를 보면 지도를 받아야 할 계층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지, 제대하면 해병이 아니다. 좋은 대학은 고등학교 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다. 좋은 직장은 대학 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20년 후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될 증거는 되지 못한다.
판사는 어떨까? 검사는 어떨까? 변호사는 어떨까? 매일매일 배정되는 사건에 모든 혼심을 다해 처리할까?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기 쉽지 않다. 재판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이유라고도 생각한다. 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의 문제일 때도 있다. 최소한 사람의 오류를 검증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영화의 배심원들이 그런 오류를 검증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불확실한 사람들의 증언, 전문성과 자격증의 이름하에 허용되는 합법적 부실이 약자가 감당해야 하는 환경으로 그려졌다. 과장된 부분이 존재하고 열심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초반부에 판사들만을 위한 길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판사들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니케의 여신은 여전히 분투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은 영화만큼 세상도 좋아졌으면 좋겠다.
#배심원들 #김준겸 #한국영화 #khori #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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