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부터 인간들은 서로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지지고 볶으며 살아오고 있다. 나는 종교도 인간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낼 수단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만들었는지, 신이 만들었는지 누구도 확인할 수 없고, '그렇다 카더라'통신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통념으로 종교에 이런 말을 하면 혼이 난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논리가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고,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진실이 사실 더 많이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믿는 것보다는 확인하는 길을 선택하고 사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연히 사이비 종교를 파고들다 더 깊숙히 존재하는 거대한 음모를 발견한다. 진실은 아주 어둡고 불편하게 덮여있다. 스릴러물에서 세련되고 멋진 외형의 주인공보다 음습한 곳에 유배된 듯한 사람들을 통해서 반전과 진실이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구성이 잘 되어 있다. 퇴마록처럼 더 박진감이 있거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시간적인 치밀함이 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불교 계통의 밀교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성불의 단계에 가는지보다, 그 단계에서 어떻게 욕망이란 마음의 고난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너지는가를 잘 보게 된다.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종교의 필요만큼 그에 대한 영원한 욕망을 안고 산다. 그렇게 보면 드러커가 미래는 창조하는 것이라는 작은 욕심과 욕망이 보다 삶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셈이다.
항마록의 말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유지태는 불교적인 성불은 아니겠지만 호로록 불타 죽는다. 얼마 전 옆집 블로그에서 "야 조용히 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해. 여기가 저 아래 애들이 그렇게 올라오고 싶어 하던 곳이라고!"하던(이런 의미였음) 글귀와 퇴마록에서 사탄이 수 천년을 사는 고뇌를 이야기하는 생각이 난다. 뭐든 오래 하면 지겨울 것 같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 시작과 끝은 하나의 뗄 수 없는 연결고리다. 매일 힘들다고 하면서 뭐 그렇게 천 년, 만 년 살려고 하는지 어떨때는 잘 이해하기 힘들다.
누구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들 이름만으로도 어느 정도 기대치가 있다. 네충텐파(티텟승) 역의 타나카 민, 그리고 첫 장면의 무당으로 강렬하게 등장하는 김금순이 돋보인다. 감독이 보조 사제, 검은 사제들, 사바하와 같이 엑소시스트, 사이비 종교에 대한 영화를 꾸준히 만드는 것이 신기하다. 덕후인가? 포스터도 참 잘 만들었는데..
사바하 [娑婆訶]
원만한 성취라는 뜻으로, 진언의 끝에 붙여 그 내용이 이루어지기를바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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