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The Shock Doctrine"이란 제목과 의미를 해석한 제목이 눈에 띈다. 누군가 보려고 했던 것 같으나, 책이 깨끗한 것을 보면 재미가 없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 이 책을 대출까지 받아와서 읽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요즘처럼 환율이 중력을 거스르고 오르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98년 초 아끼던 백 달러 한 장을 천정까지 오른 시점에 팔며 들었던 생각 때문일까? 아끼던 것을 팔아야만 하는 감정과 상황의 추억인지 트라우마인지가 있다.
오랫동안 서점 카트에 '프리드먼과 하이에크'에 관한 책을 보관해 오다 지웠다. 잊고 지내다 이 책의 목차와 내용을 보면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충분히 프리드먼의 맹신자가 아니라 비판적 관점에서 프리드먼을 본다는 것이 현재 세상을 더욱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라는 포장된 개념을 열심히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WTO, Globalization(세계화), 자유무역(FTA), 다자협정(Round), 초국적 기업, 다국적 기업등과 같은 세계의 자유로운 협력의 무드가 만발하던 시대였다. 지금 중국과 미국의 분쟁으로 global value chain이 틀어져 많은 기업이 난리다. 그런데 불과 30년 전에는 전 세계적인 분업과 역할 분담으로 자유로운 교역을 추진하는 분위기를 통해 성장을 했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왜 바뀌었을까? 규제철패, 민영화, 합법적 사익 추구의 무한한 자유를 꿈꾸던 시대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좋을 때나 하는 것이지 내가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패권이라 해석하는 압도적 우위가 유지된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다. 그것이 이해관계를 갖은 국가의 입장에서 이익이 줄거나 늘어날 개연성이 없다면 판을 없는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충격을 통해 나의 자유로운 의지를 바탕으로 나에게 이익이 되는 판을 짜는 노력이다. 내 이해는 그렇다. 책을 읽으며 충격요법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의 다양한 예를 들고, 그 이론의 핵심에 있는 프리드먼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라크, 칠레, 97년에 벌어진 아시아의 금융위기와 그 결과로 강력한 구조조정, 환율, 정부지출과 복지의 삭감과정을 통해 자유로운 기업활동의 분위기를 만든다고 했지만 해당 국가들은 어떤 이익이 있었는가? 약탈적 금융으로 국부가 유출되거나, 효율이란 이름하에 과도한 민영화가 비용의 증가대비 서비스의 증대가 미비한 상태가 많이 벌어진 것도 사실이다.
자연의 흐르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경제에 완전한 자유를 외치는 순수함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 자연은 그냥 그저 그런 상태일 뿐이다. 인위적인 댐을 만들고 수력발전을 하는 것도 잘못인가? 개인적으로 공산주의란 자본주의의 약점을 파헤치며, 노동자 중심의 이론은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소지가 존재한다. 인간의 성품이 자신의 역량만큼 일하고 똑같이 나누는 방식은 가끔 이성적인 인간이 그 완성도를 달성할 수 없다.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인간 세상에 품앗이, 두레와 같은 유사한 형식이 존재하지만 모든 것을 이렇게 하기엔 인간의 게으름과 욕심은 충분히 방해할만하다.
그러나 프리드먼이 말하는 방식은 어쩌면 순수한 자유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기업이란 존재 또는 사업가 중심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 제각각이다. 능력도 다르고 신체조건도 다르다. 그런데 특정한 한 가지 방식으로 재단하면 소수를 제외한 많은 사람이 열위에 존재한다. 이 방식을 권장한다면 동물의 세계 아닌가? 또 한 가지는 나의 소득은 그런 열위에 있는 사람들이 소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경제의 순환구조를 이해한다면 그렇다. 프리드먼의 자유를 그렇게 내가 유리한 입장에서 그런 틀을 변화가 없도록 유지할 노력과 자유라고 비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정책을 잘 이해하고, 그 결과를 짚어보면 정체를 알 수 있는 이유다.
어쩌면 공산주의나 프리드먼의 경제적 자유는 양극단에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극단은 다른 극단을 이해하기 쉽다. 나의 여집합, 내가 아닌 것이 반대편이니 이해하기가 쉽다. 그런 둘 다 결과가 썩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동양에 균형과 중용이란 말을 중시하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우리가 전 세계의 globalization의 조류 속에서 성장한 것은 맞지만 동시에 localization이란 말도 동시대에 균형이란 이름으로 떠올랐었다. 책에서 언급된 대로 IMF직전까지 한국에서 외국인이 토지를 살 수도 없고, 투자 제약도 많고, 관세장벽, 비관세 장벽등이 존재했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산업이 저임금국가로 사라지고 또 다른 사업들이 대체되긴 했지만. 무엇보다 국가 내 재산의 소유권이 상당 부분 외국인들이 차지한다는 점이 차이랄까? 동시에 빈부의 격차가 커졌다고 생각한다. 98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나 보던 홈리스란 이름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사회가 된 것만 봐도 그렇다. 국가가 모두를 보호할 수는 없다. 임금도 가난 구제를 못한다는 상식은 과학적 통계가 없어도 인간들을 깨달았다. 다만 인간 개체들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유의 비중과 절제란 이름의 규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1930년의 대공항을 왜 케인스의 방식이 효과적이었고, 경제가 성장하는 시기에 왜 불황과 파산의 그림자가 생기는 돌아볼 일이다. 이것을 경제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시대의 경제는 시대의 철학을 품고 실행된다. 30-40년 신자유주의란 달콤한 극단을 맛보았다. 그리고 단맛이 다 빠진 새로운 시대가 오기 전 또 한 번 고난의 시간이 오고 있다. 이 시대를 넘어가는 지혜와 현명함은 결국 균형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그 균형은 시대의 철학을 담아 제도와 법률로 보완될 것이고 그 이전에 그 철학의 필요를 느끼는 시대의 인문정신에 바탕을 두지 않을까?
너무 자유로와 화려하게 치장한 동물의 세계를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사람답게 살기 위한 도덕과 양심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 만큼 파렴치해진 것은 아닐까? 요즘은 다시 쏙 들어간 ESG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요즘 세상이 거의 총질 수준에 가까운 우격다짐이 만연하고, 패거리들끼리 자리를 지키겠다는 아우성에 가깝다 보니 협력과 상생은 개나 줘 버린 듯하다. 그런 시대에 일조했다는 생각도 들어 스스로 반성하며 조금 우울해진다.
과한 것은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공자님이 훨씬 위대하다. 또한 과한 것은 비우고 새로 채워야 하니 노자님도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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