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today for tomorrow, 'doubt' before 'believe' to be wise
이 책을 통해서 종교가 필요하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 생각에 관하여 부정도 긍정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초에 존재했었는지, 인간 세상의 합리화를 위해서 인간이 신을 만들었는지는 더욱 관심대상이 아니다. 나는 종교적 신에 의지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약하다고 인정한 사람이 종교에 열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동기부여와 삶의 줄기를 잡고 일어서는 힘을 주기에 종교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에는 세상에 설명하기 어려운 기연과 우연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통해서 추정할 뿐이다. 신을 대면한 적도, 신의 나의 삶을 좌지우지한 적도 없다. 내가 행한 결과를 수긍할 때도 수긍하지 못할 때가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모아서 신이란 존재에게 덮어 씌우거나, 해결사의 지위를 줄 만큼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7년 전쯤 고등학교 짝꿍이 달라스로 신학박사학위를 받으러 떠나기 전이었다. 내가 최진석의 도덕경을 사서 보냈더니 '야 누가 목사님한테 이런 책을 보내!"라고 한다. 자신이 책을 한 권 보내줄 테니 잘 읽어보고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전제조건은 "목사님의 구제활동에는 동참하지만 절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믿으라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돼"라고 이야기하고 한 달가량 한 챕터를 읽고 이야기하고 목사님은 도덕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신학이란 과정 속에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십여 가지가 되고, 그중에 하나가 인간화된 신, 인간의 존재를 위해서 창조된 신이란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목사님에게 물어본 내 첫 번째 질문은 이러했다. "신이 뭔데 인간에게 화를 내? 그리고 왜~~에 화를 내는 거야? 그런 줄 몰랐어? 전지전능하신 신이 자기가 만들어 놓은 애들이 그럴 줄 몰랐어? 이것에 대해서 설명 좀 해줘봐 봐". 이런 사이비, 이단, 이교도적이며, 비판적이고, 싹수없는 질문을 마구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스로 짓궂기도 하지만, 어차피 인간이 신을 설명하는데 한계는 있다. 결국 믿으라가 아니라 "너희 집에 신방 가자? 제수씨를 소개해라!"로 한 달여간의 메신저 대화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게 된다. 책 속에서 고대 동굴의 손바닥 모양, 그림을 통해서 추정하는 것이 그 그림을 그리고 행위를 한 사람들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해석과 의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충분히 인간 문명의 발전을 볼 때 레자 아슬란의 해석처럼 그런 의도가 다분히 존재할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태초에'로 시작하는 여러 경전을 기록한 사람이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나는 알 수 없고, 알고자 하지 않는다. 신이 만들었다면 꽤 high risk, high return의 통제불능 말썽쟁이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고, 여러 신화처럼 알에서 나와서 조금씩 알 수 없는 진화, 용불용설의 과학적 설명으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기에는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크다.
종교를 갖은 사람에게는 종교의 틀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종교를 이해하는 책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종교는 인간의 심신을 위로하고 새롭게 시작할 동력을 주는 반면, 그것이 과하면 사람을 구분하여 편을 가르고 다른 어떤 도구 보다고 잔인한 인간 종족 간의 살생과 살육을 서슴지 않는 도구다. 그래서 이념, 종교, 사상은 자신의 선호와 경향이 생기겠지만, 경도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사람이 역사라고 하기에는 허무맹랑하고, 종교라고 하기에는 뭔가 허술한 환단고기를 해석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무척 궁금해진다. 인생에서 reza란 이름과 성을 참 여러 번 다양한 이유로 만난다.
#신 #세종서적 #레자아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