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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연 (劇)

1987 - 야만의 시대를 넘어 촛불의 시대

by Khori(高麗) 2018.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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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1일, 30여 년이 지난 새해 첫 시작부터 영화를 보러 집을 나섰다. 시대의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려는 목적은 아니다. 야만의 시대를 넘었다는 감흥은 부모님과 삼촌세대의 몫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대다. 이 영화를 통해서 시대와 세대를 바라보고 현재를 다시 돌아 보고 싶기 때문이다.



 87년 민주 항쟁 시대라 부른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만들어 낸 시대의 변화와 이한열이란 청년의 죽음이 폭발시킨 변화의 욕망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선명한 기준이 된다. 그 시대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었다. 항상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 시대의 키워드를 상당히 꼼꼼하고 긴장감있게 그리고 있다. 국제시장이란 영화와 이어서 본다면 참 우리 나라의 시대란 참 변화무쌍하다. 


 영화는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과 그 시대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생각을 상당히 공정하게 그리고 있다. 어떤 통쾌함보다는 우리 시대에 남아 있는 상처를 다시 한번 들춰보는 일이지만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만들어 온 사람들에게 미래를 살아갈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고 느낀다.


 반공과 멸공의 시대가 저물고 정의사회 구현이란 슬로건을 들고 전두환이 나타났다. 슬로건은 사람들 생각에 틀을 덮어 씌우는 동시에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만드는 과정이다. 슬로건의 실체란 스스로가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그것을 멋지게 포장한 것과 다름 없다.


 사람이나 조직이나 슬로건은 곧 그들의 약점을 명확하게 들어내는 것이다. 그 시대를 야만의 시대라고 부르 것과 정의사회 구현이란 틀을 제시한 독재자 전두환의 프레이밍은 그래서 다르지 않다. 지금을 돌아봐도 공정사회를 외치던 사람은 이젠 법의 올가미를 두려하고, 법치와 적폐를 말하던 사람은 지금은 법의 보호 아래 있다. 문민정부를 외친 사람도 야합을 통해서 과거의 시대와 다시 손을 잡았고, 보통 사람을 강조하던 사람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참여를 강조한 정부에서도 다양한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국민의 정부라 칭한 정부에서는 국민들이 나라 빚을 갚느라 허리가 부러질 뻔 했다. 국민의 것이서 그랬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을 부인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시대의 외침은 분명 사람들의 그 시대에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과 흐름이다. 정의사회 구현은 1987년 민주항쟁으로 시작되었고, 보통사람의 시대는 민간정권의 이양을 시작했으며, 문민정부를 넘어서며 다양한 분야에서 군인들이 모습이 사라졌다. 공정사회를 통해서 세상에 공정함이 왜 중요한지 지금 깨닫고 있으며, 법치를 통해서 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지금 다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사회다. 그 과정에서 참여하지 않으면 변화란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씨앗을 뿌리는 세대은 농부처럼 가을걷이까지 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역사다. 


 내가 씨앗을 뿌리면 자식, 손자들이 거둬들이고 또 먼저 뿌려진 씨앗의 혜택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받고 있다. 인간의 역사와 변화는 단절적으로 특정 시대를 떼어내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흐름속에 맥락이 있고, 그 시대는 그 시대의 배경과 사고를 갖고 이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는 시대를 잘 그렸다고 생각한다.


 86년부터 세상은 소란했다. 어느 여대에서 다른 학교에 고추 한 가마니와 가위를 대량으로 선물했다. 시대의 소리에 동참을 요구한 것이다. 평일이나 주말이나 매쾌한 최루탄과 일명 지랄탄으로 매쾌했고, 보도블럭은 자주 들려서 투석전의 무기가 되었다. 도시에서도 시골 논두렁에서도 데모가 끊이지 않는 시대였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고,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어른들의 전쟁놀이가 신기했다. 그 매쾌한 향이 수업을 방향하면 어린 학생에서 즐거운 휴식이기 되기도 했다. 공설 운동장에서 엄청난 숫자의 전경들이 한 여름에도 단체 훈련을 하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익숙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 기억의 저편에 또 다른 상처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보며 참여하기도 했고, 목표를 위해서 관료화되어가는 학생들이 또 다른 실망이 되기도 했다. 민주화를 말하지만 시대의 의식 수준을 넘는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전 시대를 뛰어넘은 것일 뿐이다. 생활속의 발전과 진보 활동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던 대학 시절 이었다.


 박처장으로 대변되는 반공, 멸공 세대의 상처도 아주 크다. 지금 시대의 칠순 중반을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세대일 것이다. 그들의 상처는 다시 그 이전 시대의 혼돈에 기인한다. 교도관에게 자신의 아픈 기억을 말하는 박처장의 분노는 다시 다음 세대, 지금이 부모님 세대에게 다시 상처와 분노를 만들어 낸 것이다.



 민주화 세대, 386세대가 퇴장하는 지금 다시 세상을 돌아보자. 민주화의 시작은 그들의 세대에서 기폭시켰다.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살아온 기간에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은 이렇게 아주 더디게 욕망의 방향으로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모두가 한 방향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지금 청춘 세대에게 어떤 사회를 물려줄 것인지는 지금의 사회를 주도하는 장년 세대에게 달렸다. 386세대는 촛불을 통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촛불이란 이름의 세대는 또 한 축을 만들어 갈 것이고 동시에 부작용들도 존재 할 것이다. 시대의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국가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대의 욕망이 다르다는 것은 다른 종(種)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80년대가 이념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공안부장 최검사, 남영동 박처장, 교도관 한병용,순수한 청춘 연희 모두 어떤 관점에서 이념과 상관이 없다.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 장세동이란 역할을 하다니 아이러니다. 영화속 어느 누구도 논리적 이념을 말하지 않는 것도 아이러니다. 권력을 유지하는 한 수단이었고, 그 권력에 상처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할 뿐이다.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만하게 된다. 얼토당토 않는 '탁하니 억하고' 죽었다는 자신들의 바램을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이유다. 야만의 시대에 야만인이 보여 주는 오만함의 극치다. 차면 비우고, 비우면 채우는 것이 인간 역사와 시대의 흐름이다.


 그들 모두 인간의 존엄을 안고 사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이며 이웃이다. 무고한 죽음앞에 애도와 분노를 품는 사람이다. 그 분노는 다시 선택을 강요하고, 부모 자식을 잃은 선량한 이들이 열열한 투사로 거듭나게 만든는 동력이 된다. 이념의 문제가 다른 문제로 변화하는 이유다.


 나는 지금의 세상이 촛불로 변화를 이루어 냈다면, 변화 이전에 시대를 지배하던 공정과 법치가 더욱 잘 지켜져셔 그들이 기조로 내세웠던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구축이이 만들어질 것이란 바램을 갖고 있다. 그것이 그 시대의 바램이었기 때문에 그 실현과 가을걷이는 다음의 주자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대한 민국의 근현대사는 그렇게 움직여왔다. 어떤 이야기 속의 혁명처럼 세상 모든 것이 바뀌는 사태는 인간 세상에서 불가능하다. 그 후 채워진 것을 버리고 다른 빈 곳을 찾아서 채우는 시작이 되고 그것을 다음세대가 다시 완성하는 반복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이 바라는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나는 공정과 자유가 좀더 풍부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예전 집회를 하다가 잡혀가면 난지도에 사람들을 갖다가 버리곤 했다. 돈도 다 뺏어서 버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봉고에서 버려진 연희의 헝크러진 모습이 마치 한 시대의 힘든 모습처럼 인상적이다. 스틸 사진이 없어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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