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C의 유전자'를 보고 스스로를 생각해 보게 됐다. 자본주의의 꽃은 기업이고, 기업의 꽃은 임원이라고 한다. 내가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며 궁금했던 것은 "저 아저씨들은 방에 앉아서 뭐하지?"라는 호기심이다. 이 궁금증은 대부분 의심으로 의심받아 "니 일이나 똑바로 해"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내가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 이유는 교수들도 자기 방에서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보기보다 신기한 분들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큐비클을 낮추거나 투명하게 하는 이유도 그중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보드 대신 벽을 활용하는 공간 외에도 투명성을 물리적으로 보여주고, 솔선수범을 먼저 보여주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으로는 동물원 같아서 보기 그렇다.
직무적으로 마주할 때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어려움은 의견을 막는 것이다. "시킨 건 다 했어 안 했어?", "그걸 니가 왜 걱정해?", "그건 니가 저 자리에 가서 해라"라는 말을 많이 만났다. 그 속에서 내가 갖은 짧은 견해를 수정하고 더 깊이 있게 공부하는 이유가 생겼다. 욕먹은 만큼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교육적 차원의 의도는 낮은 경향을 보이고, 나에게 위협적인 실력이 있으면 대상을 제거하는 중장기 프로젝트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스스로 상사 복이 더럽게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이중적 사고를 갖게 된 이유다. 이런 사고가 내가 좋은 상사가 돼보자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글쎄.. 유일하게 꾸준히 듣는 소리는 또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직무, 문제를 만나면 top priority는 직무와 문제지 직급, 연차가 아니다. 해당 문제에 대한 지식, 경험,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댁이 해보세요"하는 태도는 인간 세상을 살아갈 기본이 안 된 것이다.
임원들을 볼 때 아이러니 한건 본인이 해야 할 일을 교묘하게 밑에다가 던지고,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보를 물어보면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내가 본 임원들 중 상당 부분은 현장을 장악한 실무진의 상황을 현장에서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책은 "문제도 현장에, 해결책도 현장에"라는 주장을 하지만 말처럼 손발을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도 머리가 아픈데 이런저런 잘 안 되는 걸 하자는 나 같은 위험한 녀석이 골치 아팠을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공연하게 나를 짜르겠다고 떠들고 다니다가 제풀에 지쳐 먼저 집에 가신 분도 계신다. 내 입장에서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가 그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명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렇다. 그 일을 잘하면 어려움은 있어서 큰 탈은 없다.
팀장이 되고 임원들이 불러서 갔는데 보아하니 뭔가 숙제를 받은 것 같다. 그 결정을 못하고 그 숙제를 나보고 교묘하게 지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거 대표이사님이 너보고 해갖고 오란다"
"이건 제 권한 밖의 일이라 제가 직접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대표이사님께 본부장님 통해서 지시하셨지만 직접 가서 할 수 없는 이유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야! 앉아"
아마 또라이가 용감하게 대표이사에게 가서 직접 물어본다는 예상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그런 생각들은 안 하셨을 것으로 예상하고 한 대답이다. 내가 요구한 것은 복잡한 현상에서 방향에 대한 결정을 하시면 나머지는 A, B, C 방향에 맞게 하겠다고 하는 선에서 타협을 요구했지만 결국 최소한의 결정도 하지 않았다. 회의를 통해 돌아 돌아온 일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분석자료를 내면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움직여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아주 불쾌했다. 잘되면 내 거, 안되면 네 거.. 이런 노골적인 소리를 들으며 또라이의 생각은 과격해진다. (집에서도 그러니??)
어째던 자료를 냈다. 대표이사님이 열 받아서 대답도 잘 못하는 임원을 박살 낸 소리를 들었다. 사실대로만 기록했다. 실무진이 정리하는 기본 방식이다. 최소한 자료를 받은 임원이 가능성 A, B, C는 정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해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그 보고는 보고를 위한 보고지 본인의 의지와 도전이 담겨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일시적으로 떠들다 없어지는 일이다. 슬슬 오기가 생겨서 돌아온 보고서에서 차트와 도표만 남기고 글씨는 싹 다 지웠다. 그대로 인쇄해서 볼펜이 아닌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세상의 사물을 어떤 관점에서 볼 수 있는가? 몇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과 마주할 때 아주 중요한 경쟁력이다. 처음 낸 자료를 인쇄해서 다시 내 의도를 기억하고, 글을 통해서 같은 도표와 차트,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얼핏 보면 똑같은 보고서처럼 보였다. 주변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보고서 칭찬받고 끝났다. 그 후로 회사에서 직급, 자리에 대해 없는 관심은 더 없어졌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그것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지 내 직급이 뭐가 중요한가? 직급이 COO/CSO/CMO/CTO/CFO인데 창문 닦고 걸레질만 한다면 직책과 직급은 조롱거리일 뿐이다. 아! 딱 하루정도 연봉 결정할 때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요즘은 직급과 연봉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권한이 없다'라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을 낮게 보는 이유는 권한이 있어도 제대로 하는 경향이 낮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일을 그 회사에서 가장 잘하면 그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하게 된다.. 그게 사실이다. 이때 직급과 직책이 중요한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해보시던가!
일이 중요한 이유는, 일이 완성되어 더 젊은 사람들이 미래에도 그 업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은 모두 사람이 한다는 것, 일의 결과도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절대 명제를 잊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원이 되고 상위 임원은 "임원은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참을 떠들었다. 맞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임원은 올바른 의사결정을 적확한 시간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양반도 의사결정 참 안 하더니 집에 가셨다. 그래서 임원은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내가 팀장 전부터 생각하던 임원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2)와 3)에 집중하고 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는 임원이란 것을 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또라이라 부르던 나에게 왜 시켰는지는 시킨 사람이 알 수 있는 일이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직무 원칙은 일관성을 갖고 있다. 지금은 그 생각을 확장해서 현업을 바라볼 뿐이다.
1) 투자를 하거나 받아 올 수 있는가?
2) 사업을 만들어 내거나 사업기회를 갖고 올 수 있는가?
3) 사람을 육성하거나 필요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는가?
직업도 하고 싶은 일을, 같이 하고 싶은 사람과 돈 많이 벌면서 하는 것이 최선이다. 세 개가 다 맞기는 어렵고, 내가 그런 실력을 갖은 사람도 드물다. 2개가 맞으면 훌륭한 회사고, 1개가 맞으면 다닐만하다. 하나도 안 맞으면 회사를 해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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