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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冊)

광해군-그 위험한 사관

by Khori(高麗) 201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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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광해군

오항녕 저
너머북스 | 2012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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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 해석은 사람마다 주관적이다. 그 바탕엔 이성적이고 논리적 이해에 대한 동의 또는 감성적 공감이 읽는 이에게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사실의 기록이 중요하고, 오래된 역사는 다양한 동시대 사료의 복합적 배열과 분석을 통하여 논리적 개연성을 이끌어낸 해석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저자도 책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164p)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의 나열은 매우 잘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일반독자로서, 저자의 역사인식이 매우 지엽적이고, 침소봉대의 정도, 사실에서 필요한 부분에만 방점을 찍는 기술등은 객관성이 잘 유지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어떤이는 원인에 방점을 찍고, 어떤이는 결과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그 논리성과 사료의 상관성이 얼마나 합리적인가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책의 다른 논조가 궁금하기도 해서 CBS라디오 인터뷰, 한겨레신문기사, 포털검색등 다양하게 어떤 학문적 방향을 갖고 왔는지 궁금했다. 노론사관에 아주 비판적인 이덕일 소장과 십만양병설 기사가 많기는 하다. 색다른 사관,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학계의 작은 의견이란 겸손한 표현은 맘에 들지만 책의 기술은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마치 전주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홈페이지는 역사문화콘텐츠학과)교수진에서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만큼 당황스럽다. 물론 시간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등의 직책을 떠나 모두 강단에 서는 교수다. 만약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이를 침소봉대해서 그의 사관에 토를 단다면 분명 객관성이 배제된 난설로 취급될 것이고 옳은 일도 아니라 생각한다. 누구나 자유롭운 생각을 할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로서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주장과 기술사이에서 많은 간극을 느낀것 같다. 특히 26페이지에서 언급한 역사기록의 왜곡가능성에 대한 시각은 우리가 광주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볼때 조금 위험한 발상이라 생각된다. 또 유일하게 중초본과 정초본이 있는데 이의 비교가 더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지만, 선조, 광해군, 인조로 이어지는 시대가 왜나라의 통합, 명말청초, 임진왜란, 정유재란, 후금의 발호등으로 이루어지는 동아시아 역학관계에 대한 복합적인 큰 틀이 없는 것은 시대의 맥락을 갖고 접근한다기 보단 매우 단절적인 역사인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다른 저자의 인용부분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문득 다분히 묵시적이며 의도적인란 생각이 들어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란 생각도 감쇄된다.


나도 광해군이 성군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재평가가 조선사편수회의 만선사관의 흐름속에 일본인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고, 무조건 배격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객과적으로 그 사관이 역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광해에 대한 최근의 재평가가 만선사과과의 동의가 아니라 식민사관과 분별하여 객관적으로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쁜지 모르겠다. 만약 정부기록물에 의존만 해야한다면 역사학자는 별 필요가 없는것이 아닌가?


조선이 비록 봉건왕조이지만 조선은 중세 유럽의 왕처럼 절대권력자들은 아닌것 같다. 43페이지에서도 언급되듯 복역으로 감히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사실 이성계도 결혼을 통해 공신들을 포섭했고, 태종정도가 피의 숙청으로 세종에게 새롭게 해나갈 토대를 주었던것 같다. 그외 신권의 나라 조선은 사대부, 후기 사림들의 의도와 왕권의 균형과 경쟁이 많지 않았나한다. 위에서 말한 태종을 살인자로 평가하지 않듯, 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이 많으면 방점이 공에, 연산과 같이 과가 많으면 과에 방점이 찍힌다. 그래서 도올선생이 조선의 왕은 참 불쌍한 왕이다라고 말한 부분에 책을 보며 공감이 많이 간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부분에서 조금 이율배반적이다. 대동법의 시행은 이원익과 황신의 공으로 평가한다. 뛰어난 사대부나 사림의 공이란 뜻이고, 그것을 재가한 왕은 허수아비라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인목대비 폐위를 시작한것은 물론 정치적 기반이된 대북파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결제를 한 왕의 과오처럼 느끼게 기술되고 있다. 특히 방납의 폐단에 있어 왕실과 대북파의 폐단을 지적한다. 그럼 왕실이 광해군때에만 방납의 폐단이 극성을 부렸다는 말인가? 이건 그가 말하는 시스템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왕실은 권력을 잡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사대부와 사림중 대북파만 방납으로 권력을 취했었나? 되짚어볼일이다. 왕실의 제한적 입장을 제외하고 사대부들의 전반적인 부폐, 사대부의 나라라는 이념하에 이들이 세금내면 해결될 문제를 착취를 통해 유지한 미진한(기득권을 유지) 사회제도에 기인한 바가 더 크지 않을까한다. 


임해군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광해(세자)에 대한 시각과 이후 시각의 변화, 그 원인등에 대한 인식없이 전란후 사실만 기재한다. 그리고 임해군이 임진왜란 피난시에 왜 구설이 있었는지, 그의 집이 왜 불타올랐는지에 대한 언급없이 형제를 보낸 잔인한 왕으로 기재된다. 그것이 붕당들의 의도인지 왕의 절대적 의지인지 불분명하게 기술된다는 점이며, 이는 다분히 주관적 견해를 위한 자료의 선택적 취사선택이란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의도적 기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하여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교지에 보면 선조를 광해를 칭찬하는 것과 영창대군의 목숨에 대한 애뜻함을 보인다. 그런데 앞부분을 자르고 그럼에도 이복동생을 죽였다로만 몰고가기 전에 왜 라는 의문과 개연성을 좀더 확보해야하지 않을까한다.


 과도한 궁궐증축은 분명 전란 및 연속된 기근으로 백성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고 바른 지적이며 궁의 확장을 위해 민가를 철거한 것도 분명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정궁이 불탄 기사를 보면, 선조시절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는 선조에 대한 민심의 결과이다. 효의 입장에서 아비의 집이 불탔는데 다시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과도한 부분은 왕권강화로 치세우기엔 과한 부분이 존재하고, 스스로 심약한 부분이나 조금은 질환이 있는듯한 우유부단함이 원인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광해는 우여곡절끝에 정당하게 왕위계승을 받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도 그 권한이 보장되었다. 3살의 영창대군이 왕노릇은 할수 없다. 하지만 인조의 등극은 분명 정당성이 없다. 누가 그에게 왕위를 보장하였는가?? 사건의 원인은 결과를 통해서 유추될수 있다. 인조반정의 인물들이 뛰어난 왕을 세워 혁신과 개혁의 길을 걸었는지, 사림의 권익을 위해서인지는 어느정도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한다. 그래서 나는 광해를 보며 나약한 권력자의 말로를 보고, 인조를 통해서 부정한 권력의 말로를 보는듯 하다. 책의 저자도 순순한 학문의도였길 바랄뿐이다. 조선이 부폐하고 부정되어야할 역사가 아니라 다른 문화예술의 발전과 대비하여 주자학과 소중화사상에 파묻혀, 동쪽 오랑캐의 입장을 너무 완고히한 아쉬움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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