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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잡부(天上雜夫)_ 사업관리 시즌 2 (해외영업 시즌 1) )

나를 참 이뻐해준 일본인들, 삶이란 참 묘하다

by Khori(高麗) 2012.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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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외영업이란 직업을 갖게 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본것 같다. 그중에 작은 스쳐간 시간들이지만, 지금 돌아봐도 나에게 애정을 갖고 잘 해준 사람들이 많음에 감사하고, 또 그런 인연이 소중하기도 하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내 욕심에 나의 일에만 관심을 갖은 것이 이유인것도 같다.

나를 참 이뻐해준 일본인들, 일본은 내게 어떤 의미였지?
 
20대후반의 혈기왕성함이랄까, 대충 일이 좀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옆자리 사수가 퇴사를 하게됬다. 본인의 희망에 따라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회사로 돌아온걸 보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나처럼 한때의 방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분이 우리회사에서 유일하게 3개국어(영어, 일어, 한국어)를 하며, 일본시장을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실무업무인수인계는 모든 회사가 비슷하듯 급할땐 논리나 원칙이 중요하지 않은것 같다.

1차적으로 내가 그 양반 옆자리라는 이유, 둘째는 쫄다구라는 이유, 노인네들이 아 귀찮은 일본은 거시기하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황당한 이유는 내 미국거래처의 구매대행사(buying office)가 일본에 있다는 것이다. 추가로 일부 동유럽과 일본을 졸지에 맞고보니..고객들에겐 완전 "스미마셍"이고 나에게 샘솟듯 솓아나는 감정은 일본말로는 모르겠고, 조선말로 심히 "고튜가됬다"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대학교때 156학점 이수해보겠다는 쓸때없는 도전정신속에서도 일본어는 중간고사까지 우수한 성적을 보고, 나머지 시간엔 연애질에 자체폐강으로 최종 F학점을 맞았으니..고난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일본거래처는 이래서 미국계회사, 유통사 그리고 나중에 정말 뜬금없이 진행하게된 ODM(일종의 용역개발, 생산공급계약)이다. 그중에서 미국계회사와 ODM거래를 하면서 나는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것 같다.

미국대행사는 아마 80-90년대에 있는 분들에게는 꽤 유명한 회사였다. IMF직전까지는 한국에서도 구매회사가 존재했었느나, 홍콩으로 통합하고, 한국업체들의 제품공급은 일본회사가 관리하게 되었다. 국내 모업체가 일년에 한모델로 2천만불정도 수출이 가능했으니, 나도 당시 기대는 하늘꼭대기까지 치솟이지만, 일은 엄청나게 피곤한 업무의 연속이다. 제품승인절차, label하나 점하나만 틀려도 출고검사 대행사에서 오신 사장님은 그자리에서 재검판정을 내리고 유유히 가신다. 이러니 나중에는 충고와 방법등을 알려주셨지만, 어찌나 꼼꼼한지 품질관리부는 이분만 나타나면 일단 두통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것 같다. 그런데 이런 회사에서 직접 공장방문을 한다는 통보가 도착했다.

담당자에게 수소문한 결과는 그가 좀 기인이라는 것과 직함이 Marketing Specialist라는 것이다. 이건 직급이 부장인지 임원인지 도통가늠하기 힘들다. 지금은 나도 이런 직책에 익숙하고 또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여튼 그렇게 H씨를 만났다. 내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미국시장을 chain-store에 공급할 기회를 갖을 것인가의 문제와 현재 다품종 소량공급의 기회가 핵심제품화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었다. 핵심제품이 되면 한달에 40ft 컨테이녀 6개정도씩 매달 나가니 이건 요즘말로 대박, 초대박이라고 할수 있었다. 하여튼 시간이 되고 그 분이 오셨다.

약간 머리가 벗겨진 백발에 문서를 볼때 안경을 종종쓰는 백발의 호남형 인물..파이프만 물었으면 말론브론도가 부럽지 않는 풍모가 있었다. 다르게 보면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웃음도 있고..하여튼 그 분과의 미팅은 정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황당함이었다.

보통의 바이어는 가격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맘에 들지 않으면 방문도 거의 안하는게 보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회사 제품을 쭉 돌아보고 나서, 현재 업무에 불편이 없는지를 물어보시더니, 자기가 최근 전시회에 가보니, 이런 이런 제품들이 있더라, 이런건 왜 안하느냐같은 교장선생님과 같은 말씀을 계속하신다. 뭐 가격을 조정이런 말은 듣지도 못했다.  미팅이 끝나고 담배를 피시며, 나도 한국말을 아신다면 "어머니"라는 말을 하는데 아주 신기했다. 저녁식사때에는 꼭 한번 일본에 오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던것 같다.

방문때문인지, 어째던 조금이나 매출도 증대되고, 다음 해에는 미주본사 부사장, 일본구매대사 임원진들앞에서 프리젠테이션 기회가 생겼다. 단 한번의 만남에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건 행운이고, 여러사람들이 좋아했지만, 잘 이해가되지 않았다.

내게 일본이란 우리에게 치욕과 암울한 제노사이드의 시대를 강요했던 가해자집단이란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축구를 비롯해서 한일전에 스포츠란 없다란 말이 충분히 대변이 되지 않을까하네요. 하여튼 이렇게 동경 신주쿠근처의 사무실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이란 나라에 가서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가장 강렬한 인상은 선진국이란 느낌이었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국민과 사회의 의식수준이 높아서 선진국이란 생각을 많이 했고, 한국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이 아닌 자국민 이민국을 통과하는 모습이 역사속에서만 보던 재외동포를 조금이나 목격할 수 있었다.

프리젠테이션은 전날은 Marketing specialist가 직접 챙겨주었다. 저녁동안 나는 다양한 일본을 경험하였다. 담당자 녀석이 H씨는 동경시내에 집이 3채나 갖고 있고, 기인이라고 재차알려주던데 저녁에는 굳이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나중에 미국본사에 가서 일했는데, 지금보면 담당자는 범생이 대기업 직원같은 느낌이랄까? 하여튼 특별한 대우였던것임은 지금봐도 틀림없다.. 동경시내를 조금 구경시켜주고, 저녁식사를 하러가게됬는데 허름하지만 아주 격식있고, 푸짐한 음식이 나왔다. 소고기를 얼려서 얇게 썰어 그데로 먹을수 있는 음식, 조금 지나면 샤브샤브를 해서 먹었고, 지금도 새우튀킴이 내 손보다 긴 녀석은 그때 먹은게 처음이었던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가자"라고 한국말로 한마디 하시더니 자기집에 가자고 해서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문제는 이양반이 음식값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린것이다. ㅡㅡ;;;; 대략 수만엔이 나왔는데 지금 hit and run을 하자는 말인가?? 출장비는 지급받았지만, 법인카드를 수령하지 않아 내카드라도 정리를 해야하나 하고 머뭇거리는데 그 영감이 오셔서 빨리 안나오고 뭐 하냐고 채근을 하여, 어찌 음식을 먹고 그냥가느냐?고 물어봤더니 답이 가관이다. "우리 형네 집이다" ㅡㅡ;;;;;;;;; (진작 이런걸 이야기 해줘야지). 주인장이 나오셔서 90도로 인사를 하셔서 코가 땅바닥에 닫도록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째던 물건을 파는 입장에서는 큰 빚이라 생각했다. 집에 가는 차안에서 어려서 자기는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형은 노느라 직업이 변변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가게를 사주고 형이 운영을 하니 괜찮다는 말을 듣고, 참 다정다감하고 자신의 상황을 이것저것 이야기 해주는 영감님에게 좀더 정감이 생기게 되었다. 

집에 도착하니 역시 일본집은 방이 조그만 하다. 한 5개쯤 되는데, 보통 한국집들이 크니 별 감흥은 없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눈낄을 끌었다. 사모님이 나오셔서 정중하게 인사하고 그분 방에 갔더니, DHL에서 도착한 wooden packing box가 하나 있었다. 그분도 오늘 이걸 꼭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2차세계 대전에 사용하던 무전장비였다. HAM장비였던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옆집 할아버지가 오셨다. 그 할아버지도 내겐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HAM장비를 서로 둘러보며, 이걸 어떻게 구했냐...자기가 인터넷으로 겨우 찾아서 기적과 같이 구했다같은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시더니, 내년에 요트타고 해변을 따라 북쪽까지 가고자고 하시는 영감님들을 보면서..어렸을때 좀 노셨나봐요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이 주신 녹차를 다 마시고 나니, 이 영감님이 동경에 왔는데 술한잔 하면 어떻게 하냐고 제안을 하셨다. 뭐 이왕 버린몸 anything but alchole이 아니라 anything whatever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달리 집안 초대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한다. 연구소장이 "너 그양반과 대체 무슨 관계냐"라고 물어보시던데 점쟁이가 아닌이상 난들 이유를 알 턱이없지 않은가? 그렇게 술마시러가면서, 일본은 도로공사를 12시가 넘어서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때나 보도블럭 까재끼고, 수년째 하는 지하철공사(반포쪽)의 불편함을 느끼는 한국과 많은 차이를 잠시 느꼈다. 왜냐하면 집에서 끌고 나오신 차가, 낮에 회사출근할때랑 전혀 다른 차였거든..뒷자리에 달리 7인치 모니터..안락한 의자..대체 이 영감님의 정체는 매우 궁금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도착한 술집은 일명 가라오케..게다가 주인은 한국분이시다. 자주 다녔음을 마담의 환대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는 조금 이상한 느낌도 많았지만, 내가 물건을 사는입장인지 파는 입장인지, 보통의 접대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자리를 빛내주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노래도 한곡하고..매우 흡족해 하시는 H영감님을 배웅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머리속에 "H영감님 = 한량" 공식을 성립하면서...

다음날 프리젠테이션을 위해서 사무실에 도착하였더니, 일본회사 사장님, 전무가 들어오고, 미국 부사장도 있고...이건 완전 긴장 만땅이다. 미리 발송한 승인용 제품을 만지작 거리며 준비를 하는데 영감님 아니 special list가 들어오셨다. 제품을 설치하고 있는데, "누가 미팅을 준비했느냐?"라고 말씀하시더니 담당자를 임원들이 있는데 5분정도 얼굴이 빨개질때까지 닥달하고, 갑자기 엔지니어들이 부산해지고 후다닥 준비가 끝났다. 한편 고맙고, 그래도 본사 부사장이랑 사장도 있는데 아무도 말을 안하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회사의 위계가 미국과 일하다보니 개판인가라는 의무, 또 이 양반이 주인인가?라는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 미팅은 그럭저럭 잘 끝나고, 미국 부사장은 우리가 출품하는 전시회에 다시 한번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미팅이 끝났다.

다른팀 미팅시간에 담당에게 미안해서 같이 차한잔 마시며 궁금한걸 물어보니, 머뭇거리다 속시원히 그 이유를 들을 수있었다. H영감님은 원래 일본상사내에서 연공서열이 제일 높다고 한다. 현재의 사장자리도 1순위는 영감님이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과 본사와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 꼼꼼한 후배에게 대표이사를 추천하고, 진정한 marketing specialist란 임원급 직급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일본의 연공서열의 존중문화때문이겠지만 본사의 누구도 감히 영감님을 건들지 않는 괴짜임원이라는 것이다. 

미팅을 마무리하고 또 정중하게 영감님께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영감님이 언제든지 물어볼말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시며 다음에 또 보자고 하신다. 그 뒤에 두어번 한국방문을 더 해주셨던것 같다. 일도 핵심제품에 선정되지는 않았지만, 공급제품도 늘어나고 판매도 2배정도까지 성장했지만 그 이상은 나나 회사나 무리가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제품 확장에는 어째던 보이지 않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지금까지 살아계신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뵌것은 그해 년말에 한국에서 구입한 제품들이 아주 잘 판매되어 모든 공급업자를 초청해서 호텔에서 있었던 파티가 마지막이었다. 연세도 많으시고 그 해가 지나고 퇴직하신 이후로 볼수가 없었지만 왜 그렇게 나에게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해주고, 뭘 해보라고도 하고 그랬는지 그 연유를 알수가 없다. 직접적인 업무혜택보단 언제나 따뜻한 마음, 허허허 웃으시던 모습, 배려 이런게 많이 남아있다. 이런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내가 영업을 하면서도 속좁게 나가다가도 한더 생각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분이 어찌보면 한국에 대한 관대한 성향이 개인적인 연유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매번 어린 자식처럼 볼때마다, 메일로 일깨워줬던 점은 지금 말하는 멘토링과 비슷했던것도 같다. 

또 다른 면에서는 나의 역사의식속의 일본이란 국가와 내가 만나는 일본사람 개개인과 다르고, 구분될 필요가 있다. 도올선생이 일본의 scholarship이 매우 높고, 우리와 일본의 문화가 유사한 부분이 많이 학문적 성취를 쉽게 다다를 수 있다고 했던 말도 떠오른다. 일반 삶에서 우린 일본인의 자세와 사회의식을 보면 배울점이 많았던것 같다. 다만 실천궁행의 문제일뿐..이젠 나도 살살 받는게 아니라 주는 입장이 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것엔 부담이 따르지만 데카르트의 말처럼 낯선것을 마주함으로 우리 사고와 성찰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감성적인 부분은 통제하기 어렵겠지만 좀더 객관적으로 사람을 보고 사람에게서 희망을 갖어야 한다. 사실 잘 안되는게 문제다.

아! 한가지 내가 꼭 지키는 것이 있다. 원래는 이 영감님을 뵐때마다 정중하게 허리숙여 인사를 하게되었다. 사실 보면 할아버지 느낌이니까..ㅎㅎ 십년도 지난 일이지만 가끔 지나가다 길에서 뵙는 KFC영감님을 보면 비슷하지도 않은데 나는 가끔 그 H영감님이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서양 고객을 만나 즐겁게 이야기해도 항상 정중하게 인사하는 습관이 굳어졌다. 자기들만의 방식이 해외영업하다보면 생기겠지만, 외국사람들도 한국에 禮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시건방진 인사태도는 안이나 밖이나 빵점이란걸 들은 적도 있으니..우리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 남을 배려, 존경하는 의사표현은 어디서나 환영이다. Thank you는 남말하며 감사합니다에 인색한 우리문화 조금만 고치면된다. 게다가 환하게 웃는 미소는 금상첨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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