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절반을 넘어가며, 色과 戒의 이분법적 구분과 더불어 욕망을 풀어나가는 저자를 보며, 스스로 戒의 굴레를 넘는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러움을 느끼고 책의 절반을 넘어 시작되는 솔직함과 세상을 보는 그의 창을 조금은 엿볼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지랄총량의 법칙'의 법칙을 조금 정겹게 이해하는 것은 하루의 1/3을 꿈속의 신과 대화하고, 2/3의 제한된 시간을 사는 것이 하루이고 삶의 연속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지랄총량의 법칙=자유+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적으로도 책임이 크기를 늘려 지랄총량을 채우면 각박하고, 자유를 늘리며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초반 정신승리법에 대한 생각에 있어 아Q의 것과 조금 다르게도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것같다.
시대의 조류와 유행은 시대의 결핍을 대변하는 것처럼, 개인에게도 욕망이란 말이 결핍과 불가분의 존재이기 때문에 빈것을 채워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고자 하는 것이 욕망이라 생각한다. 물론 1차적인 자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높은 자유는 책임으로부터 회피될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한다. 따라서 책임에서 회피할 수 있는 건전한 욕망을 통해 자유로와지는건 모두가 바라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가 戒의 상징이라 할수 있는 곳에서 보낸 시간과 그것을 벗어나고자 한 욕망과 戒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을 보면 나는 더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게된다.
그럼에도 내가 하루종일 떠들어대는 말과 행동이 색과 계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지지 않는 것같다. 분명 그 둘이 다 있음에도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건 나만 알 수 있는 자격지심, 자존심, 부러움, 아니꼬움등으로 포장하기 때문이란 생각도 하게되지만, 내 말과 행동과 생각속에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그속에 나의 결핍과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재차하게된다.
젊은 시절 절제의 결과가 사회제도란 戒의 틀을 따라서 얻을 수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돈과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인 생각이다. 세상을 굴리는 돈과 권력 그에 대한 집착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걸 따르지 않는 다고도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戒를 따르는 것이 정공법이고 평균을 보장한다면, 일탈이나 不正이 아닌 나의 마음속에 귀기울여 따라가는 총명함에도 평균이상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이 수도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절실히 바라는것이 성취되듯 결국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바램이 다른사람과 다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듯... 다만 戒의 범주가 minimization이 되야지 목적을 갖고 자꾸 maximization되는 것이 과함의 결핍이 아닐까한다. 그 결과 또 우린 또 다른 부족을 채우기 위한 욕망의 굴레를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하겠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보편적 가치로 戒의 범주가 제한되었으면 좋겠다.
좋고 싫음의 명확한 설명이 어려운것은 색과 계의 구분과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슈퍼컴퓨터가 살아온 세월, 행동, 깨달음 심지어 흐르는 피의 흐름을 통해 순식간에 계산되기 때문이다. 이성적 지식습득이 아닌 이런 부류의 인식은 시각, 청각의 순이지만 나는 이 두가지의 구분은 결국 순식간에 발생하는 感에 있는게 아닌가한다. 머리로 납득하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고, 머리로는 아니라고 판단하지만 기특한 애정을 품고 돌아서는 가슴처럼 색과 계는 욕망과 결핍처럼 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못하듯,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소멸하는것이다. 서로다른 또 둘이아닌 것들의 불균형이 사람을 좌절하고 분노하여 나쁘게 미치게 한다면, 균형을 통한 좋은 미침엔 明과 强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눈은 얼굴을 볼수 없는 웃긴 구조다. 내 웃음과 고뇌하는 표정을 볼 수 없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인간은 철면피가 될수도 있는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또 한편 내가 욕망하고 바라는 것들이 저자가 근거로 든 모방이란 틀에 갖힌것과 같고, 내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좀더 진실할텐데라고 투덜대고 싶기때문이다. 인간에게 거울이란 위대한 발명품이 아주 옛날부터 사용된 이유라고 생각되지만 거울속의 나도 같으며 또 다르다. 저자의 생각과 같이, 똑같이 생긴 녀석이 꼭 반대로 움직이기 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 한편의 색과 계의 만남, 욕망과 결핍의 조우처럼 다르고 같은 대상과의 만남으로 우리는 새로워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가 형을 보는 눈에 부러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리 보고, 듣는다하더라도 체험을 통한 感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 아닐까한다. 동화책에 지천으로 널린 이런 이야기가 어른이 되면 똑똑한 바보가 되어 너무 빨리 잊는것 같다. 그래도 자석이 극성이 달라 잡아당기듯 저자가 형을 보는 눈이 우리집 형제아이들처럼 부럽네요. 그들에겐 싫어하거나 동경하는 것이 하나고, 전 둘이라서 그런것같다.
독특한 키덜트 취미활동인 레고를하면서, 어려서의 마음속에 남았던 욕망을 늦은 지금이라도 취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반면 고급전문직을 하시는 분들도 더러있다. 일부는 자랑질을 위해서, 일부는 스스로의 족함을 위해서 참여하시는 분들이 많다. 가업의 승계때문에 가업을 잇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하고 싶은것들을 하시는 분들을 보며, 저자처럼 틀을 깨고 나가기보다 틀을 넓히시는 분들도 늘어나는 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속의 깨달음으론 안에서 밖으로 미는것보단 밖에서 한번 보고, 듣고 느끼거나 깨닫는것이 관념적 생각만 갖고 미는 것보다 조금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변화는 혁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를 통해서 가정과 사회로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하듯, 꼭 남의 입과 눈을 통해서 나를 볼것이 아니라 나를 찬찬히 꼼꼼하게 봐야하는 이유가 아닐까합니다.
책을 보고나니 욕망해도 괜찮다고하시더니, 정작 글쓴이의 바램은 창을 통해서만 살짝 보여주는 것은 소심함인지 책속의 소설가가 되고픈건지 궁금하지만, 그것보다 내 창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더 궁금해야하는 이유가 중요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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