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도 교육과정에서 한자를 지속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내 나이세대 전후에서는 한자를 건너뛰는 세대가 혼재되어 있다. 그들과 사용하는 문자가 종종 다르고 그 다름이 어떤 편견과 오해를 만들기도 한다. 교육의 일관성이란 이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이 편협성을 띄게되면 보는 시야와 생각의 크게를 제한받게 된다.
어려서 신문상의 한자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고, 지금은 쓰는 글자와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 순한글판 신문의 창간에 환호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자에 대한 매력은 나이가 들어감에 점점 커진다. 그것을 열심히 학습하지 못하는 나의 수준이 탓스럽다. 특히 동아시아, 서남아지아 지역에서는 간체 또는 번체의 한자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간단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좋다. 사전외에 옥편앱을 들고 다니는 이유기도 하다.
이런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 그 문자의 기원을 들여다보고, 그 뜻을 살펴보는 시도는 많이 되어 있다. 많은 인문학과 자기 계발서에서 글자를 분해하여 그 의미를 들여다 보는 과정이 존재한다. 나는 이런 책을 보면서 말을 안다는 의미를 되새기게 되고, 무지를 깨닫게 된다. 왜 세상에서 글자 한자에 목숨을 거는지 이해된다. 조금 과한 감은 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는 한자에 조예가 깊은 분이나 깊은 성찰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내용이 잘 모여있다.
문자학이라고 이름 붙은 학문을 접할 기되는 없었다. 이렇게 알뜰하고 재미있게 모여있는 한 권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귀동냥을 들은 이야기도 있지만, 각 글자의 조합과 다양한 해석을 붙이는 문자학은 그 과정속에 동아시아의 문화, 역사가 함께 한다.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김진명의 '글자전쟁'을 다시금 상상하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문자학만으로 끝난다면 전문성과 딱딱함으로 대중적인 책이 되기는 힘들다. 이 문자의 기원과 해석과 더불어 동서양 고전을 넘나드는 전문성과 깊이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를 통한 사유를 통해서 인류가 문화를 넘어서는 공통성과 사고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의 비유가 더 빛나게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특히 좋았던 부분은 그 의도와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안다고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내 품성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조금더 돌아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무엇인가 지식으로 배우고,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은 좋은 책이다. 어제와 오늘이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지고, 내가 조금 더 만족스럽다면 그 보다 좋은 책은 없다.
이 책에서도 안다는 개념에 대한 논의가 많이 제기된다. 그리고 제기된 질문을 나에게 던짐으로 무지를 확인하는 것이 좌절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이런 긍정의 공부가 내 삶속에 더 안착 되도록 노력할 뿐이다. 아는 것의 반대를 의심한다로 해석하는 구절이 참 인상적이다. 의심하면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무엇인가 마음속에 쏘옥 들어올 때가 잡아야한다. 사랑도 공부도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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