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만큼 야속한 일이 없다. 살아내는 것이란 이런 일을 참아내고, 극복하는 과정이다. 분야에 상관없이 삶이란 그런 일이라 생각한다.
라마누잔이라는 수학자의 삶은 "원숭이 나라에 홀로 사람"의 이야기 아닐까? 보이는 것이 믿는 것이라 모두들 믿지만, 볼 수 없는 사람에겐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확인을 하고자 한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럼에도 확인과 증명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반면 볼 수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처절한 고통이다. 그렇지 않은가?
본질을 아는 사람은 분야를 넘어설 수 있다. 변화하는 기술적 깊이만을 알게되면 분야를 넘나들 수 없다. 그것이 수준의 차이다. 이런 벽에 다다를때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운명을 걸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운명을 거스르는 고난한 스스로의 개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연이란 아무일 없이 스스로에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동양고전에서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진정한 벗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라마누잔이 하디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쓴다. 나이를 넘어 소중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디와 리틀우드와 같은 인연,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그를 그들에게 소개할 수 있도록 응원한 이웃이란 라마누잔이 알고 있는 무한대의 본질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생각한다.
특별한 재주없이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비록 작은 삶의 수준이라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나는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먼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마누잔의 짧은 32세의 삶이 안타깝다. 그는 누군가 더 길고 긴 삶을 토해내서 해야할 일을 열정과 혼을 실어 짧은 삶을 소진해 결과를 만들어 낸 까닭은 아닐까한다. 어떻게 살아갈것인가라는 삶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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