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자주 탄다. 그러다 마주하는 중고서점에 자주 들러 시간을 보낸다. 6월에 다녀온 Banksy 책이 보였다. 그러나 손에는 7월에 개봉하는 영화 '한산'을 생각하며 '이순신의 바다'란 책을 들었다. 목차와 순서를 보면 마치 해전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책을 놓았다 잡았다를 반복하며 생각하다 들고 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다. 일상용어로 말하면 '싫으면 관두던가'에 가깝다. 세상에 나와서 이렇게 염치 있게 물러나는 사람을 보기 드물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 실력이 있다. 현실은 대부분은 정반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지 않고 미쳐 돌아가고, 중이 미쳐 돌아가면 절이 미쳐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다 사달이 난다. 역사를 돌아보면 백성이 미쳐 돌아가면 왕과 국가 시스템이 대부분 잡아 족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바로 잡는다'라고 대부분 말한다. 그러나 백성이 미쳐 돌아가는 이유는 대부분 외부적 요인이 많다. 특히 왕이 미쳐 돌아가면 떠날 때가 없는 백성들이 미쳐 돌아가고, 백성들이 미쳐 돌아가면 왕은 목숨과 자리를 부지하기 힘들다. 왜 백성이 배를 띄우기도 하고, 엎기도 하는지 정관정요를 읽지 않아도 너무 잘 알 수 있다. 한반도의 역사, 얼마 전 역사의 현장과 시대를 우리가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운인가, 재앙인가? 관점에 따라 참...)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읽고,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고, 광해군에 대한 책을 보고, 시간 되시는 분은 선조실록을 찾아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순신과 상관없이 미쳐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책들을 보면 내가 왜 미쳐 돌아간다고 하는지 공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제갈량은 유비란 어리숙한 인물에 낚여(자치통감에는 유비가 음흉하다고 여러 번 나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고생을 하며 쓰러져간다. 자치통감이란 실제 역사에서도 정치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면 뛰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듯 고난의 행군 코스를 잘못 선택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선택을 했는데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이런 생각도 한다. 어쨌든 이 관점에서 이순신을 보면 제갈량처럼 나를 알아주는 주군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고난의 행군과 가족들의 죽음을 떠않은 대재앙 코스를 묵묵히 걸어간다.
원균처럼 배를 버리고 살아야겠다는 본능에 섬을 오르는 당연함에도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외치며 걸어가는 이 사람도 방향만 다르지 미쳐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원균(원래 세균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음)도 삼도수군통제사를 했다는 것은 실력은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한다. 손금이 없어질 때까지 비벼서 올라갔다면 그것도 재주다. 세상의 문제는 가치를 축적하는 사람이 있고, 문고리 열쇠 받을 때까지 열심히 하다가 받자마자 말아먹는 파렴치한 부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칠천량에 수장한 백성과 함선이 역사의 올바른 방향성을 크게 뒤틀어놓았다. 이 소식을 듣고 이순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재기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참으로 미칠 노릇이다.
깨달음이 현묘해지면 예측력(실제로는 이것이 실력)의 혜안이 생기고, 이에 따라 준비를 하게 된다. 제갈량과 이순신의 공통점이고 원균인지 세균인지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좋지 못한 결과가 기다림을 알며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은 자신의 원칙과 신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성웅 이순신이 대단한 것은 전쟁의 승리를 넘어 한 인간이 걸어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길이고, 그 만한 가치를 위해서 가야 하는 길이다.
반면 선조는 왕이긴 하나 야비하고 비열한 놈이다. 아들인 광해에게 "야!~~ 나가봐"하고 신의주까지 냅다 튀는 아비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동물도 이렇지는 않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인간만이 욕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가? 적 백만 대군이 쳐들어와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지금부터 네가 왕 노릇을 하도록 하여라"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게다가 징비록을 보면 틈만 나면 "나 중국으로 이민 갈 거야!"를 외치는 나약하고 파렴치한 왕이다. 아무리 궁궐이란 감옥에서 갖혀 살아 미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종자다. 세종처럼 곱게 미치는 것을 바라진 않더라도, 해도 너무 한다는 분노가 생기는 이유다. 광해가 그나마 미치지 않고 그 정도인 것이 어쩌면 천운이다.
왕은 불안을 가득 품고 도망가며 미쳐 돌아가고, 백성은 쳐들어오는 적까지 마주하며 미치기도 힘든 시대가 되었다. 역사에서 상상은 의미가 없지만 이 시대에 이완용 같은 놈까지 나왔다면 수 백 년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어쩌면 강제병탄이 아니라 위대한 왜나라를 외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완용 평전을 보면 똑똑하고, 미래의 결과를 예상하며 확실하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것에 자신의 신념을 빈틈없이 담았다. 그래서 뼛속까지 왜놈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일상을 난중일기로 보면, 출근, 업무, 활쏘기, 순찰과 점검, 준비, 나사 빠지고 미쳐 돌아가기 일보직전의 애들 잡아 족치기, 가끔 술 마시기, 아파서 눕기가 대부분인데 그 일관성과 반복성을 보면 소름 끼칠 만큼 무섭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집요함, 치밀함, 준비성, 실행력이 백성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방향으로 움직여 전 세계 해전사에 넘사벽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개인으로는 너무나 불행한 삶이 아닐까? 그런 마음이 더 든다.
이런 잘못된 역사의 운행은 후세에도 나쁜 선례를 남긴다. 재조지은이란 말이 그렇다. 전후 관료들이 재조지은이 정말 목숨과도 바꿀 신의라고 생각했을까? 멸문지화를 당해도 재조지은을 해야 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위, 이익을 위한 정쟁의 수단과 말싸움에 불과한 논리다. 충무공처럼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으로 길을 걸어가는 수준과는 비교하는 것이 모욕이다. 그래서 위대한 것이고, 말로만 떠들어 대는 것들이 일상에서 익숙한 일이다. 재조지은의 결과도 이번에 튀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에 갇혀 머리를 콩콩 찍으며 look at me once를 외쳐댔으니 참으로 아쉽다. 왕만 탓할 일도 아니다. 그 밑에서 아웅다웅 자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하던 관료들도 별반 차이가 없는 일이다.
이 책을 통해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백의종군을 하고, 옥포해전부터 노량해전까지 해전을 중심으로 읽기 쉽게 되어있다. 내레이션 같기도 하고, 영화 대사처럼 가미된 글들이 추가되어 읽기 쉽다.
곧 '한산'을 보러 갈 생각이다. 어려서 주말 낮에 '성웅 이순신'이란 영화를 텔레비전으로 본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찾아보면 이순신이란 영화가 다시 만들어진 것이 '명량'이다. 선조가 돌아와 왜적을 무찌른 장수들을 죄다 골로 보내고, 충무공 집안만 제외하고 부르지 않았던 기록이 있다. 지금 이 시대 또한 성웅 이순신을 거북선, 통쾌한 해전 승리, 안타까운 노량의 죽음 정도로만 기억한다면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다. 그가 존재했기에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세종이 만들어 준 한글을 쓰며 아웅다웅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순신의바다 #충무공 #역사 #인문학 #한산 #명량 #노량 #독서 #khori #선조나쁜놈
황현필 저
역바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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