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은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날 시간이 있었다. 회사를 해고하고 자립을 위해 1년 동안 일을 만드는 시간이라 업무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몰입해 온 것 같다. 가끔 옛날 생각을 하며 물리적으로 더 움직이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예전처럼 움직이면 더 좋을까? 아니다. 아마 병원에 눕기 딱 십상이다.
지금은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한번 사업적 데이터를 확인하고, 변수를 고려하며 조심조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가면 다시 할 기회가 적다는 현실적 문제가 생긴다. 경험과 지식을 쌓았으면 타율, 확률을 올려야 할 역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입증을 통해 나를 실현하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먼저 지인을 만나서 내 계획을 여쭙고 자문도 들었다. 5-6년 동안 칭찬은 처음 들은 것 같다. '내 밑에 와서 일 좀 해라', '그렇게 하면 나이 먹고 폐지 줍기 딱 십상이지', '계획보다 그 안에 실행 조건부터 확인해야지'등등 직구로 잔소리가 많다. 어젠 어쩐 일인지 '그렇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칭찬을 두 개나 들었네.
그럼에도 종종 사람이 그립고, 사람을 가리고 사시는 분이다. 물질적 풍요와 달리 가끔 이런 걸 사달라, 저걸 구해봐라라는 말도 한다. 꼭 단종돼서 구하기 힘든 품절된 책, 음반과 같은 걸 말씀해서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큰 탈이 없다. 어제는 헌책이 10만 원이나 했던 조지 소로스의 '금융의 연금술'에 대해서 물어봤다. "형님 내가 머리가 나쁜가 이 책은 도무지 이해가 안되던데, 다 읽어 봤어요"라고 물어봤더니 대답이 "응 2페이지 보다가 말았다"란다. 한 참을 웃었다. 내가 머리가 나쁜다는 생각을 버렸다. 항상 본인을 회장님이라고 부르라는데 '훼장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결국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란 말이라고 위안을 삼기로 했다.
사무실에 진열된 귀주 마오타이를 꺼낸다. 자개함을 열어서 금잔을 보여주며, 잔은 없어서 주문 제작을 했다고 한다. 이게 왠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지? "내가 니들 술 한잔씩 따라줄라고 만들었다. 언제 이런데 술을 마셔보냐?"라는 말에 웃음이 절로 난다. 그리고 자기는 이게 사치가 아니라고 여러 번 강조를 하신다. 옛날 왕도 아니고. 박물관에서나 볼만한 금잔에 주문제작 잔 받침이라니. 앙증맞은 숟가락은 용도가 뭔지 알 수가 없다. 가끔 보면 어린아이들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어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후배 보고 농담으로 숟가락 하나 삼켜보라고 했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후배 녀석이 기념사진이라고 찍었다. 뭔가 unbalance 하다. 화려한 장식과 비싼 술보다, 후배 녀석들 일 년 고생했고 더 성장하라고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기인은 기인이다. 각자 하는 일을 물어보시고, 내년엔 사장님도 아니면서 계획을 물어보며 목표 할당도 하신다. 다른 녀석에겐 계획 달성하면 뭘 해주겠다고 하더니, 나를 보면서는 내년엔 뭘 사 달라신다. 가끔 혼자서 끙끙 앓고 만들던 계획들 점검을 위해 물어보면 답도 없다. 오히려 잔소리만 한다. 그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물질적 화려함을 보여주는 것이 '니들도 좀 해봐라'라는 말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올바른 목표 방향은 있지만, 과정은 사람들이 각자 만들어 간다. 그런 생각이 든다.
다음 주에 직원들 회식할 곳이라며, 다 끌고 식당에 갔다. 킹크랩 식당을 예약하셨단다. 나 같은 어린이 입맛은 문제가 많다. 몇 개씩 주는 붙임개를 더 달래서 먹으니 잔소리가 쏟아진다. 예전에 화려한 옷, 맛있는 음식, 으리으리한 집이란 의식주를 보며 생각을 바꾼 지 오래됐다. 사치란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것이고, 그것이 생활의 안정에 영향을 주는 시점이란 생각이다. 잡스보다 내가 먼저 청바지 입고 회사를 다닌 것 같다. 마누라가 후줄근하다고 잔소리를 하지만 뭘 입고 폼을 낼까 하는 생각과 시간이 없어져 편하다. 어차피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걱정하기보다, 내가 어떤 정체성을 담고 있다면 보여지는대로 누군가 봐주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식탐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같은 김밥을 한 달 동안 점심으로 먹으며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만나며 좀 더 멋진 장소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대접하거나 필요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집은 좀 다르다. 작은 꿈이라면 2층짜리 모듈라 하우스를 직접 지어보는 것이 꿈인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식사를 하며 주제가 다양하다. 경제에 관한 이야기, 주식에 관한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를 했다. 듣다 보니 형님도 나한테 개뻥을 친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이없는 에피소드를 듣고 한참을 웃었다. 본인도 창피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나... 말을 말아야지.
갑자기 경제 이야기를 하다, 역사 이야기를 하다 느닷없이 질문을 한다.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다고 했더니 "얘가 책을 건성건성 읽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읽었네"란다. 이게 두 번째 칭찬인 거 같은데 웬일인가? 불안하게. 맛나게 식사하고, 대화가 풍성하고 다들 즐거운 시간이었다.
전에 기획실장, 총괄사업본부장 할 때 폼나게 사인하라며 펜을 하나 사주셨는데 아직 안 쓰고 있다. 익숙한 싸구려 라미 만년필이 좋기도 하고. 볼펜심 얼마 하지도 않는데 왜 안 쓰냐고 잔소리가 또 나온다. 아깝기보단 내가 그럴만한 수준에 다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런데, 또 모르지. 수준에 못 다다르면 쓸 기회가 없으니 마음이 바뀔지도.
아침에 일어나 내년 다이어리를 폈다. 매년 내년 계획을 세우는 나만의 의식이다. 만들고 있는 사업계획을 20% up+@ 해보자는 욕심을 담아 썼다. 가족들의 행복한 생활도 막연하지만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이다. 저축을 열심히 하자는 계획도 몇 년째 계속 쓰고 있다. 갖고 있는 몇 년간의 다이어리를 보니 계획의 개수는 계속 줄어든다. 하는 일 열심히 하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보내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자는 등장한 뒤 계속되고 있다. 꿈이 많아지는 나이에서 이젠 안정적 기반을 만들어가는 나이가 되나 보다. 아차 뭘 사달라고 한 걸 추가해야겠네. 그보다 어제 종일 나한테 빌붙겠다던 녀석은 정리를 해야 하나? ㅎㅎ
바다는 세상 흐르는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 바다 같은 수준과는 거리가 멀지만 바다로 흘러가는 방향은 잘 기억하려고 한다. 바다가 엄청나게 넓고 크지만 그 바다도 땅 위에 존재할 뿐이다. 무엇을 지탱하게 하는 근본은 잊지 말아야겠다. 이런 마음이 초심이 아닐까? 아침부터 이것저것 물어보는 녀석에게 내년엔 조금씩 전진해 보자고 했다. 다시 보기 싫은 해가 있었는데, 2022는 기억하고 싶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2022 #2023 #계획 #금잔 #킹크랩 #모임 #kh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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