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문학에 관심이 없는 내가 아Q정전을 읽을 것이라 생각하고 살지 안았다. 그저 매일 읽는 습관을 들이던 중, 서화숙 기자가 트윗에 남긴말 "요즘 청소년들에게 아Q정전은 꼭 읽혀야한다"를 보고 고르게됬다. 소설 10편이 가지런히 들어있다. 책을 보고나서 그가쓴 32편의 전집을 사는게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 말미에 역자의 루쉰에 대한 설명, 작품설명이 곁들어 있어, 내가 읽고 느낀것과 설명해 주는것의 차이를 볼수 있는 점도 좋은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을때의 기준은 낯뜨거운 말일수도 있지만, 무식하면 용감함으로 단순하게 보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첫 광인일기를 읽고 마감한 날짜 1918.4월을 상상하면서 직관적으로 보기로 했다. 물론 역자의 문학적 설명, 국어시간의 주인공의 시점, 상징효과등도 중요할 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그저 90여년전쯤에 작가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한 것을 상상력에 기초하여 쓰기로 한 이유랄까 뭐 그런걸 조금 알고 싶었을뿐이다.
또 1918이면 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이고, 정미칠조약, 을사늑약이 체결된지 10여년지난 시점이다 동북아시아가 봉건제도의 붕괴, 서구제국열강의 개방압력, 군국주의에 기반한 일본제국주의의 침탈, 상업화의 시작,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확장등 격변과 혼돈의 세계사 흐름속에 피해자로써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 않나한다. 그러다 보니 소설의 전체적으로 어둡고, 웃음에도 절제가 있는듯하다.
다 읽고 돌아보면, 광인일기, 쿵이지는 충격적이고, 아Q정전은 순수함, 시대의 평범한 백성의 모습과 갑자기 조정래의 태백산백이 생각나는데 그 이유가 알듯 모를듯하다. 또 홍수를 다스리다와 관문 밖으로를 보면 사기 본기에서 내용을 가차하고, 관문 밖으로는 열전에서 본 내용인듯도 하고...신선하다고 할까, 고전의 재해석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다.
광인일기와 쿵이지를 보면, 미친사람이 공자왈을 말하고, 나를 멸시하는 사람보다 높은 유교적 정신을 말한다. 작가가 고전에 조예가 깊은가하는 생각도 들고, 약력을 보면 일본유학도 간것으로 보면 박학다식하지 안았을까한다. 어째던 광인일기를 보면 미친사람은 미치지 않고, 범부는 미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미쳐돌아간다고 말할때 문든 내가 미쳤는지 생각해 봐야하는 것처럼..
쿵이지도 비슷하다. 물론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과 누구나 치명적 결점이 있지만 쿵이지는 매우 규칙적고, 그를 비난하는 자들보다 높은 이상도 같고 있는것 같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또한 패배자이고 또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져 가고, 그를 가끔이라도 기억하는 건 작은 점원일 뿐이다. 문득 희망이 있는 듯 없는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Q정전에서 주인공은 아주 단순하다, 무지하다, 순수하다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가 생활속에 부딪치는 벽과 이를 극복하는 방법의 선택이 정신적 승리(사실 이점은 매우 본받을만 하다. 자기만족의 지나침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쉽게 털어내는 아주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도둑질, 혁명...그의 이런 선택의 기초는, 물론 도박도 하긴하지만 근본적인 기초생활의 영위다. 큰 욕심을 내겠다는 모습을 느끼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그 이유도 모르고 따라서 슬픔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세상의 잉여로 제거된다. 역자의 해석을 보면 좀더 좋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나는 그가 1920년대 헐벗고 굶주리고 또 계급사회가 붕괴되가고, 가치기준이 변화하며, 사회의 변화속에 단순한 삶의 욕망에 따라 살던 평범한 범부가 아닐까한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무지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삶의 방식데로 선택한것 뿐이지 않을까한다. 그저 그가 죄지었다고 벌을 줄 뿐이아닌가..
마지막 두편은 실로 재미있다. 홍수를 다스리다는 사기의 일화를 순임금, 아들 단, 우임금으로 하나의 시대를 상징하는 듯하다. 사실 사기의 내용이 내겐 더 재미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노자와 공자의 대담, 노자의 여행이 시작되는 모습은 정말 신선하다. 최근 고전을 아주 조금 읽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기에서도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언급하고, 공자가 노자를 아주 높이 존경한듯하다. 하지만 글에서 노자는 사막으로 가는 신발이라 말하고, 공자를 조정으로 가는 신발이라 말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무협만화에서 사파고수와 정파고수가 높은 경지를 서로 이해한다. 궁극에 이를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은, 궁극의 핵심을 똑같이 보아도 해석이 다를 뿐이지, 궁극자체가 다른건 아닌게 한다. 또 문학에 무슨무슨 주의, 이즘, 철학, 사상을 논하는것은 무엇인가 분석하는 자의 몫이다. 나는 그저 책한권 사서 읽고 책장에 꼽아놓는 평범한 독자일 뿐이고..하지만 작가는 철학자와 같이 세상을 관찰하고, 사색하여 발견을 기록하는게 아니라 상상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철학자는 스스로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못보던 것을 찾아내지만,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니, 시대를 읽을 때의 문학이 철학에 결코 뒤지는게 아니라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아주 괜찮은 소설이라 생각하지만, 청소년이 읽을때 고전의 문구와 한자를 잘 이해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