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02 ~ BC 188
매일 일정한 분량을 읽는 것이 무리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꾸준히 읽는 것이 쉽지도 않다. 10권을 읽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치통감 권 11과 권 12는 유방이 대륙을 통일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정한 세상을 통합하는 것은 지략과 힘이라는 수단을 요구한다. 그 지략과 힘은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요구를 깔아 뭉게고 군림할 힘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세상의 통일과 통합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한신은 다다익선이란 말을 통해 자신의 핵심역량을 과시하고 동시에 유방에 자극적인 아첨을 한다. 그가 꼭 왕이기 때문에 굽신굽신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차라리 상대방의 역량을 칭찬하는 것만 못하다. 그런 자기 확신과 자신감이 종종 타인의 반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방은 자신의 핵심역량과 부족한 점을 이해하고, 목표를 위한 자기 역할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나라를 세우고, 큰 통합을 한 것은 위대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도 사람들의 협력과 합심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고, 새로운 운영의 토대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창업은 한 번만 하는 일이라 난이도가 높다. 수성은 창업보다 난이도가 낮을 수 있지만, 끊임없이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둘을 비교하는 것이 나는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업의 수행 기간과 다양성을 고려하고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며 후자가 더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왕조 수명이 평균적으로 250년 수준이고, 한반도의 왕조 수명이 대략 4-500년이라고 보면 규모의 차이를 떠나 운영의 이치로 생각할 부분이 있다.
사람은 호불호란 감정으로 이성적 판단에 장애가 생기는 문제가 많은 존재다. 한고조 유방도 그렇다. 그리고 여태후의 전횡을 보면 여자란 존재가 훨씬 집요하고 무섭다고 생각한다. 엄마와 같은 리더십은 누구에게나 응원받는 일이지만 한 가지에 몰두에 그 방향으로만 집중하는 여인은 대개 남자보다 집요하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시댁 씨를 말리는 관점에서 보면 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여인은 권력욕구라고 보기도 힘들고, 생존 본능이라 말하기도 어렵고, 척부인에 대한 잔인함을 보면 사이코패스가 더 적정한 평가가 아닐까? 세상 또라이에 남녀 불문하지만 이 시대에 여인의 편력이 드물어 더 세세하고 과장되게 기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한고조 유방이 제후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불평하고 그의 장자방인 장량이 이를 말한다. 그의 말은 베풀고 품어 함께 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나라를 세우는 성공을 했는데 너는 황제가 되고, 일을 시키는 사람은 먹고 살 거리를 걱정하게 하면 되겠냐는 말처럼 들린다. 노자의 베풀어 받는다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재물과 관련된 세상의 분쟁은 이런 부족함이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일명 삥땅을 치고, 남을 후려쳐서 도둑질을 하고 다시 이를 징벌하며 원한을 키우며 점점 커진다. 장량은 참으로 현명하다.
양웅이 법언에서 유방과 항우에 관해 '한왕은 군신들의 책략을 다 썼고, 군책은 군중들의 역량을 다 썼다. 그러나 초왕은 군책을 꺼려 스스로의 역량을 다 썼다. 다른 사람의 역량을 다 쓰게 하는 사람은 승리하고,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다 쓰는 사람은 패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처럼 세종대왕 밑에서 집현전 학자가 과로사하고, 이순신 밑에서는 과로사나 적병의 칼에 맞아 죽는 선택을 해야 한다. 문제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이며, 어떤 감동을 줄 것인가가 사람들을 그렇게 이끈다. 이익을 주는 것이 모르핀처럼 즉시 효과를 보이지만 약 빨고 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적다고 생각한다.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천추의 한이 되면 색다른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타인의 역량을 받아서 살아가는가? 나의 역량을 소진하며 소멸하는가? 이 두 가지 문제를 고민해야 하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를 만들거나 지키는 것이 근본이다. 먼저 자신의 역량을 소진해 일어나고, 더 큰 목표를 위해서 함께 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 그들의 지혜와 역량을 사용해야 한다. 세상 혼자 해서 되는 일이란 한계가 있을 뿐이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의 평 중에 '무릇 진공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진취와 이뤄 놓은 성공을 지키는 수성은 처한 정세가 다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남겼다. 세상은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항상 지식 우위, 지식기반의 세상을 만들어왔다. 그 정보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정보화 고속도로를 만들고 이젠 그 정보를 분석 가공해서 핵심 정보를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그 정보를 통해서 1차적으로 얻는 것은 정확한 상황 인식이다. 정확하게 인식해야 적확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감정적 편파성을 피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하려는 노력도 이런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존재하고, 신이 인간에게 가한 가장 고된 숙명이라면 영원하지 못하는 죽음이 아니라 사는 내내 궁금증, 호기심, 불확실성, 불확실성에 따른 근심과 걱정, 공포 같은 것이란 생각을 한다.
흉노 묵돌에 대한 정책에 관하여 사마광이 평을 했다. '저들이 복종하며 덕으로 품어주고 배반하면 위엄으로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들과 혼인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 흉노 묵돌이 자신의 아비이자 선우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했으므로 유가의 입장에서는 말을 섞고 교류할 대상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자세로 형세를 판단하며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 자신의 혈족들 씨를 말린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위에 말하듯 상황의 인식, 지켜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의 철학과 신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신념과 철학을 지켜낼 실력, 지혜, 힘이 있는가에 따른다고 믿는다. 우리나라도 87년 민주화로 세상의 시스템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민주화란 생각을 갖은 사람들이 없었는가?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그것을 얻어낼 역량과 힘이 축적될 때까지 지속적인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것은 다른가? 형식과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어떤 것을 얻기까지의 근본적 원리는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87년 이후 정치적인 민주주의 제도의 가속화와 비교해 경제제도인 금권에 대한 공정한 원리를 위해서 격론이 벌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언론이란 그 곁에서 부채질하는 쭉정이에 불과하다. 그 힘이 축적되고 개선할 힘이 부족하다면 그에 맞서는 것도 중요하고, 그에 맞서다 희생이 불가피한 것도 감수해야 한다. 각자 판단할 몫이다.
'공로를 나누며 은혜와 덕에 보답하는 것은 선비와 군자의 마음이다. 한신은 시정잡배의 속셈으로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군자의 마음을 바랐으나 이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자치통감 저자인 사마광의 평을 읽었다. 만약 사마광이 앞에 있다면 "경은 어떠한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자치통감을 읽다 보면 한신은 소심한 욕심도 있었고, 인간적인 관계도 고려하며 계속해서 갈등했다. 선택의 문제에서 갈등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선택을 포기하는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한고조가 죽고 난 뒤를 보면 그가 바라는 것을 얻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마광이 나라의 명을 받아 쓰기 때문에 일정한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한신이 시정잡배의 속셈이라면 이런 계산에 있어 월등하고 압도적인 행위를 보여준 것은 유방 아닌가? (이런 소리하고 무식한 사람이 대충 읽고 아무 말이나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유방이 소하를 풀어주며 '상국은 편히 쉬도록 하시오. 상국이 백성을 위해 상림원을 요구했으나 내가 허락지 않았소. 나는 걸주와 같은 군주에 불과하고, 상국은 현상(현명한 재상)이오. 내가 고의로 상국을 가두어 백성들이 나의 과실을 전해 듣게 하려는 것이었소'라고 말했다. 이 말을 여러 번 읽어보면 유방과 제후들의 신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뚜껑 열리면 잡아다 가두고, 참하고, 기분이 바뀌면 풀어주고 칭찬하고 선물을 준다. 이런 변태적 행위가 사람을 근심과 공포의 수렁으로 몰아간다. 결코 좋은 시절이라 할 수 없다. 단지 세상을 통일했을 뿐이고 신뢰란 거의 없다. 그러나 황제가 자신의 잘못을 수긍한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자신의 잘못을 수긍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 옳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인가? 내가 한신에 대한 사마광의 평에 물음표가 생기는 이유다. 유방은 제후와 신하를 기능적으로만 이해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통일 이전에 사달이 났을 테니까. 그러나 기능적 부분에 더 가중치를 주었다는 의심을 버리긴 힘들다. 게다가 교묘한 변명을 덧붙이는 것이 인의와 더욱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과하면 될 일이다. 요즘 세상에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세 마디를 잘 못해서, 곤역을 치르며 세상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군(어진 임금)은 본래 과실이 없다는 것을 현명하다고 여기지 않고, 허물을 고치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마광이 사려 깊고 인간을 잘 이해하는 현명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완벽함이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수학의 극한이란 가정법처럼 완벽함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이지만 상황이 바뀌면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짜증 나는 일이며, 인간에게 게으르다는 평이 붙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그 상태를 유지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계속 변화한다. 그런 이유로 나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한다. 이것을 노력이라고 말한다. 10년 전 길거리의 나무 등걸을 보면 그것이 매년 바뀌고, 그 바뀌는 이유도 나무가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오늘을 살며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의미 있는 작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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