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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_경제_IT(冊)

존 메이너드 케인스(4) - 역사의 반복과 교훈

by Khori(高麗) 2022.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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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연휴에 무리해서 책을 마무리했다. 금융위기의 내용 부분은 건너뛴 부분이 있다. 책의 마무리 과정을 보면 케인스를 중심으로 그가 새로운 경제, 정치의 관점을 내는 배경과 결과, 이후 케인스의 사항이 세상에 미친 영향, 케인스의 사고를 이어받은 다양한 케인스주의자들이 펼쳐가는 다양한 세상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 최고 기업의 정책을 보면 미국 기업들과 비교해서 약 한 세대 안쪽(30년)의 격차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기술적으로 과거 GE, SIEMENS가 전자에서 금융과 헬스케어로 이전하는 과정을 봐도 대략적인 격차는 보인다. 발전단계에 따른 산업 변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업가들의 말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는 경영 철학은 25년~30년 격차라고 생각한다. 기술적 성장 단계는 이 보다 짧은 격차가 존재한다. 이 책을 읽으면 경제사상과 철학, 이것이 현실에 구현되는 경제 정책과 반응을 보면 더 큰 시간적 차이가 있다. 대략 6-70년의 차이가 있다고 느낀다. 70년 전의 책 속 이야기가 왜 지금 내가 사는 동네 이야기하고 묘하게 동기화되는지 생각해 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책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하이에크와 케인즈 사상적 대립은 현실에서는 정치적 해석, 프로파간다, 마타도어를 양산한다. 이 또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재정적자를 통한 불황의 극복은 많은 대중의 소비를 이끈다. 소비의 승수 효과를 내고 파멸에서 세상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부를 크게 구축한 입장에서는 내가 내는 막대한 세금은 자유로운 경쟁의 성취라는 생각, 이 세금이 경쟁이 아닌 분배(거의 불로소득이라고 보는 듯함)에 의한 상대적 착취라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의 경쟁우위의 승자들은 많은 일개미들의 소비에 의존한다. 그것이 정부 정책에 대한 비난과 비협조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와 케인즈 주의에 대한 비판의 사고도 인간이란 존재의 본능적 개연성을 보면 실존하는 현상이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고도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예외로 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선전의 도구거나 아니면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념은 존중해야 한다.

 

 경제 문제를 편향된 정치로 해석할 때 생기는 문제다. 사실 공산주의가 되었던 자본주의가 되었던 궁극적으로 "모두 잘 먹고 잘 살자"로 수렴한다. 단지 그 과정이 N빵을 먼저 할까 아니면 각자 알아서 하고 나중에 세금으로 N빵 할까라는 단순한 이론적 차이에 불과하다. 너무 과격하게 비교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삼모사도 아닌데 순서의 차이로 인해 심각하고 지대한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하는 부분은 이론적 차이처럼 이성적으로만 볼 수 없다. 본성 안에 이성이 존재하지, 이성안에 본성이 전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게으르고, 욕심이 생기고, 내 것이란 소유욕, 적대감, 경쟁심 등 다양한 생각이 나타나면 태도는 예측불허다. 미래가 불확실한 원인 중 인간의 기여도는 확실하게 높다. 연애할 때만 봐도 신뢰하는 상대방이 기대를 갖게 하고 다음날 깊은 빡침을 올리는 상반되는 행동을 종종 만들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생산성과 효과성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본능적이고 동기부여적으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홀로 살아갈 수 없고, 사회, 공동체에 대한 협력과 결속이 필요한 인간에겐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일정한 공동의 부담과 약속이 필요할 뿐이다. 대개 약속을 안 지키거나 지킨다고 주장할 뿐인 녀석들 때문에 세상의 불확실성은 더 커진다. 좋은 제도와 법을 양산하기 위해서 정치적 유연성과 리더십은 필요하다. 적확한 상황의 인식과 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다. 그 행동에 따라 판단할 수 있고, 가끔 더러운 술수들이 다른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 발생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런 실제의 이야기를 몇 편에 걸쳐서 미국을 배경으로 책이 설명하고 있다. 

 

 2008년, 2019년 금융위기와 코로나로 예측되는 불황의 시기에 케인스의 말처럼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사용했다. 그리고 실물과 양적완화의 격차라고 할 수 있는 버블의 바람을 빼기 위해서 테이퍼링, 금리인상 조치가 실질적 데이터를 보며 조정되었다. 실질 데이터보다 더 만들어진 인플레이션이 어쩌면 버블이다. 불황의 시기에 실질금리의 인상을 위해서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FRB가 세우고 이에 효과적인 정책을 실행한다. 미국을 보면 이 모든 정책에 달러교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연준 의장이 교주처럼 보이는 이유도 별것이 아니다. 한 가지 차이는 08년의 원인은 극대화된 자유방임적이고 파렴치한 시장 확장으로 만들어진 경쟁의 결과다. 그 실패는 부의 분배 기능을 망가트렸다.(Big short이란 영화를 보시라) 경제와 윤리가 다른 문제 같지만 윤리와 도덕이란 사상이 경제에 어떻게 포함되는가는 시스템의 수준을 결정한다. 그 윤리적 철학적 사상은 시대의 필요에 기반함으로 결국 눈에 보이는 현상은 시대의 정신에서 자유로운 것이 없다. 19년은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모든 인류가 인내를 갖고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 각 나라의 정부도 불황처럼 막대한 재정지출, 통화정책을 시행하고 다시 점진적인 일상으로의 회귀를 검토한다. 이것을 극복하는 경제조치가 불황의 극복과 유사하고 선제적이지만 원인적 측면에서 이 과정의 극복은 새로운 변화를 이끌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불가항력을 인간들의 이성적 노력과 인내로 만들어낸 사례라 인간이 사고 친 대공항, 불황과 같은 것과는 다른 결과를 갖고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호황의 시기에는 무엇이 적절할까? 불황의 시기에 수요를 창출하려는 케인스의 사고는 탁월하다. 호황의 시기에는 금리, 재정정책, 통화정책을 통해서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한 쌍의 정책은 나쁘지 않다. 정치적 불만은 그 혜택과 비용 분담, 이에 따른 권리와 의무의 문제다. 경제적으로 분배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호황의 시기에는 핵심적 경제 주체의 권익을 보호하고 동물적 경쟁만 강조하는 것이 능사인가? 옛 말에 3일 굶으면 담을 넘고, 예(禮)를 알려면 궁끼는 면해야 한다고 했다. 호황이란 먹고사는 문제가 느슨해졌다는 말이다. 케인즈가 예술적 경지를 지향했다면 도덕, 철학, 문학, 예술, 음악, 그림, 예와 같은 문화적 성장이 호황기에 필요한 문제 아닐까? 왜 먹고살만하면 회식하고 노래방에 가겠나? 노래방 먼저 가고 회식은 대개 잘 안 하지. 그 순서가 인간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순서일 가능성이 높다. 정책은 다를까? 

 

 하이에크의 보수주의적 성향과 케인스라고 하는 진보적인 성향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면 대개 회색분자 또는 욕먹기 쉬운 방법일 수 있다. 내 상상은 이렇다. 물과 기름이 함께 담기 비커에서 물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 가지 방법은 물만 잘 떠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기름만 잘 떠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물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방법과 기름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방법은 다르다. 그러나 동일한 결과를 찾을 수 있다. 집합과 여집합처럼 네모난 나무 조각으로 코끼리를 조각할지, 코끼리가 아닌 것만 제거할지의 문제와 같다. 모든 사안이 이렇지 않지만 이렇게 열린 사고가 중요하고 그래서 교육이 더욱 중요한 문제다.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면 논쟁은 치열할 수 있다. 그러나 5-6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과 논쟁,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좌파, 우파 논쟁(사실 대파만도 못한 논쟁)이 별반 차이가 없고 사람들을 호도한다. 무엇이 이 세상이 지향하는 바이고, 현재 상황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이해한다면 왼손이 하던 오른손이 하든 무슨 문제가 되는가? 어려서 덩샤오핑이 검정고양이가 쥐를 잡던, 하얀 고양이가 쥐를 잡던 쥐를 잘 잡으면 된다고 했다. 사회주의적 시스템에 가한 파격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정치적 해석이다. 경제적으로 무엇이 그들이 지향하는 세상으로 이끄는가를 생각하면 실리적인 판단이다. 이런 차이는 인간의 완벽하지 못하기에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더 현명해질 수 있다. 나는 인간이 완벽하다면 꼴통이 만연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누가 다 한쪽 방향으로만 완벽해진다고 장담할 수 있겠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결과를 보면 잘 한 선택 아닌가? 미국은 그 시대와 비교해서 현재 훨씬 좋아졌는가? 글쎄? 정치적 이해관계가 선제적 배분기회에 관한 논쟁이 되면(사실 잘 표가 안 나거나 더럽게 어렵고 못 알아듣게 설명하거나) 쇠퇴하고, 그나마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선의 입장이 고려되면 성공의 길에 가깝게 된다. 그런 점에서 불평등을 개선하고 도덕과 윤리적 올바름 또는 선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케인스가 시대를 넘어 효과적이고, 불황이 되면 온갖 출판사들이 죽었던 마르크스를 자본주의자가 말하는 자본주의에 비판을 위해 매번 소환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문제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조금 진보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100년의 시간을 함께 읽으면 느낀 점이다. 동시에 교육과 교육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배운 학습의 효과(어떤 면에서는 세뇌)가 세대의 사고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얼마 전 때아닌 교과서 논쟁에 온갖 사람들이 사활을 걸고 뛰어든 이유 또한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인 결과에 영향을 주는 아주 정치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애먼 학생과 교사들이 불필요한 실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알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진실의 문제일 수 있다. 그 진실을 알아야 the price of peace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표지의 말처럼 엄청나게 유익한 책이란 폴 크루그먼의 평이 있다. 공감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서 유익하게 사용해야 정말 유익한 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머릿속 저장만으로 유익해질 리가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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